소설리스트

시작부터 천재 피아니스트-191화 (191/250)

191화

늦은 시간까지 음악실의 불이 꺼지지 않는다.

평소라면 곡의 시상을 떠올리고, 그 떠올린 시상을 바탕으로 채워진 악보를 고스란히 옮기면 끝일 텐데.

이번에는 그 결이 달랐다.

‘듣지 못하는 사람에게 들려주는 곡.’

아무리 유명한 화가가 그린 그림이라도, 이를 볼 수 없다면 그 감동을 느낄 수 없다.

음악 또한 마찬가지였다.

듣는 것만으로 묘한 기색이 떠오르고, 내 음악은 보는 것이라는 평가도 있지만.

그 모든 것은 우선 연주를 들을 수 있어야 말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그러니 작곡 방식도 바꿔야겠지.’

대상이 다른 곡이니까.

그동안 내가 만든 곡들은 사람들이 듣고, 느끼게 만들었다.

하지만, 이번에 내가 들려줄 대상은 듣지 못하는 사람도 대다수.

등 뒤에서 폭죽이 터져도 모를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그들이 들을 수 있는, 더 나아가 느낄 수 있는 곡이 필요했다.

‘그때. 진동은 느끼고 있었어.’

일전에 만났던 청아가 떠올랐다.

청각 장애를 지닌 연아의 동생, 청아.

지진의 진동을 미리 느끼고 불안감을 느끼지 않았던가.

거기서 힌트를 얻을 수 있었다.

내가 느끼고 있는 소리 또한 공기를 통해 진동한 것을 곧바로 느끼는 것일 뿐이라고.

소리의 모토는 진동이라는 것을.

이를 활용하면 청각 장애를 가진 사람에게도 음악을 들려줄 수 있었다.

게다가 내게는 아주 유명한 선례도 있지 않은가.

‘베토벤.’

말년에 청력을 잃었음에도 굵직한 명곡들을 만들어낸 주인공.

자신의 노력과 더불어 자신의 부족한 점을 서슴없이 드러내고, 도움을 요청했던 음악의 대가.

내게는 베토벤에 대한 정보가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청력손실은 베토벤의 작곡 스타일 바꿔놓을 정도였다.

청력을 잃은 후기 음악에서는 소리보다 진동에 집중하기 위한 방식이 많이 활용됐다.

반복된 마디를 활용하는가 하면, 트릴을 활용하여 진동을 형상화하고.

극단적인 음역대를 오가며 세기 자체를 음악으로 가져오려는 시도도 더러 보였다.

청력을 잃은 베토벤에게 잔잔한 곡은 제대로 들리지 않았을 테니까.

보다 큰 울림, 보다 강렬한 진동을 일으킬 수 있는 곡을 찾았던 것이겠지.

<조우> 또한 그러지 않았던가.

초연함과 벅차오름.

그 두 가지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고음과 저음을 활용하는 모습이 크게 돋보였다.

나 또한 그것을 알고 있었기에.

이를 활용하여 미완성곡을 완성할 수 있었다.

‘이번에도 그 기억을 되살려보자.’

내 머릿속에 전생이 기억하는 것들이 스쳐 지나갔다.

베토벤이 편지를 보냈던 것부터, 죽음을 앞둔 베토벤을 벽 너머에서 느꼈던 감각까지.

전생이 가진 베토벤의 행동 양식과 현대에 알려진 베토벤의 작곡 방식이 한 데 섞였다.

한참을 생각했을 즘.

머릿속에서는 베토벤이, 그와 같은 청각 장애인들이 느낄 수 있는 음악이 떠올랐다.

가상의 악보에 고스란히 차오르는 악보들을 손수 체험하기 위해.

나는 손가락을 건반을 향해 내질렀다.

***

“이번 연주회의 테마는 ‘모두를 위한 오케스트라’입니다.”

이안의 선언에 단원들이 집중 어린 시선을 보냈다.

찾아오는 모든 이들이 음악을 감상할 수 있는 화합의 장이 될 것이라고.

그렇기에 리히트 또한 누구든 감상할 수 있는 음악을 만들고, 펼칠 것이라고 표현했다.

하지만, 걱정하는 단원들도 적지 않았다.

“단장님, 청각 장애인들과 어떻게 음악을 공유할 건가요?”

말 그대로 청각(聽覺) 장애.

듣는 데 어려움을 겪는 것 아닌가.

음악의 기본은 듣는 것이고, 들을 수 있어야 연주를 감상할 수 있을 텐데.

이를 할 수 없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음악을 전파한다는 말은 계란으로 바위 치기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질문을 건넨 서령 또한 한편으로 기대감을 지울 수 없었다.

‘단장님은 항상 길을 만들어냈으니까.’

그동안 이안이 방안을 생각하지 않고 무언가를 한 적은 없었으니까.

모든 곡, 모든 연주회 등 이안의 생각을 거친 모든 것은 완벽한 계획과 이를 완성하기 위한 지대한 노력들이 있었다.

그렇기에 서령 또한 이번엔 확신이 있었다.

리히트 오케스트라 전체에게 공표하는 지금.

이미 이안의 머릿속에는 로드맵이 모두 완성되어 있다고.

다른 단원들의 표정도 서령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안의 지도와 코칭에 힘입어 하루가 채 되지 않은 시간에 연주회를 준비한 적도 있지 않은가.

이안이 있다면, 이안의 생각이라면 못할 것이 없다는 생각에.

모든 단원들이 이안이 말하는 바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자세한 설명은 화면을 보면서 하죠.”

이안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현철이 준비해뒀던 빔프로젝트를 켰다.

체임버홀 뒤편에 마련된 스크린에 한 폭의 그림이 떠올랐다.

둥근 원형의 무대를 기획한다는 이안의 말을 시작으로 차근히 설명이 이어졌다.

“이번 무대를 위해 특별한 무대를 제작할 겁니다.”

설명을 이어가는 이안은 마치 전문가 같았다.

음악을 기본 소양으로 갖고 있는 건축가.

잘 모르는 내용을 설명하면 보통 버벅이거나, 여타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안의 설명은 단원들의 고개도 절로 끄덕여질 정도로 명확하고 자세했다.

오죽하면 전직 왓슨 스튜디오의 음악감독이던 조지 또한 이러한 계획은 처음이라고 박수갈채를 보낼 정도였으니까.

처음에는 가능할까에 대해 논하던 단원들도 어느덧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고 있었다.

이론부터 계획까지, 모든 것이 완벽한 설명.

“혹, 질문 있습니까?”

발표를 마친 이안에게 질문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저 자신에게 주어진 연주를 할 뿐.

단원들의 얼굴에는 이미 놀라운 기색보다 방금 본 것을 현실화할 기대감에 젖어있었다.

***

촬영세트장에 바이올린의 보잉이 쉴새 없이 퍼져나간다.

미래화되어 푸른 빛이 감도는 철판이 벽면을 가득 메우고 있는데.

그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평상복 차림의 로미오가 바이올린을 켜고 있었다.

대역이 없음에도 로미오의 바이올린 실력은 지켜보던 스태프들도 감탄할 정도.

화려한 연주를 펼친 로미오가 땀방울을 닦아냈다.

“컷! 잠깐 쉬어가겠습니다.”

에드워드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스태프들이 격려의 박수를 보냈다.

수고했다는 의미와 함께 이러한 곡을 들려줘서 고맙다는 의미.

로미오는 에드워드 감독의 옆에 놓인 의자에 털썩 주저앉듯 몸을 뉘었다.

“지난번보다 실력이 늘었군.”

“연습 시간을 배로 늘렸거든요.”

이미 로미오의 손에는 굳은살이 가득했다.

본래 에드워드 감독이 연주에 대역을 사용하지 않는 탓도 있지만, 로미오의 자존심 탓도 있었다.

로미오가 생각하는 배우는 가상의 인물을 현실로 끌어오는 것이었기에.

대역은 자신의 부족한 점을 채우는 것이지, 진정 무언가를 채우기 위해서는 로미오, 자신이 쇄신해야 한다고 믿었다.

“이안씨가 오지 못해서 아쉬울 따름이죠.”

로미오가 애써 웃어 보였지만, 그의 얼굴에는 아쉬움이 가득했다.

존재만으로도 엄청난 반응을 이끌어내는 것은 물론, 클래식에서는 이례적인 행보를 이어오고 있는 이안 아닌가.

특히 지대한 팬인 로미오는 이안을 보는 것만으로도 환호성을 지를 준비가 되어 있었다.

‘심지어 이번에 특별한 연주회를 담당했다고 했지.’

이안의 연주회 소식은 미국에도 전해진 지 오래였다.

기존 클래식 팬들은 물론, 좀처럼 클래식을 접할 기회나 상황이 여의치 않은 장애인들까지 모두 아우르는 연주회.

게다가 놀라운 점은

‘음악에도 배리어 프리(barrier-free)를 적용할 수 있을까?’

배리어 프리.

장애인이 시설 이용이나 문화생활을 즐기기에 장애가 되는 부분을 없애는 것이었다.

청각 장애인을 위해 TV나 연극 무대에서 자막을 띄우는가 하면, 시각 장애인을 위해 설명을 덧붙이는 나레이션을 추가하는 것이 대표적.

로미오 또한 몇 차례 연극 무대에 올라본 적이 있기에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연기를 보여주고, 들리지 않는 대사는 자막으로 대체한다 하더라도 소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도저히 로미오의 상식선에서는 이안의 의중을 이해할 수 없었다.

영화 촬영만 아니었다면 직접 갔으리라.

로미오는 아쉬운 마음을 삼킨 채 다시금 촬영 준비를 했다.

자리로 돌아가려던 찰나.

로미오의 눈에 에드워드의 손에 들린 것이 들어왔다.

“그건 뭡니까 감독님?”

로미오는 문득 에드워드 감독의 손에 들린 종이에 주목했다.

자신에게 건넨 것보다 배가 넘는 두께의 악보.

협주곡의 형태를 띤 악보에서 일반적인 수록곡과는 다르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었다.

“메인곡으로 생각하고 있는 곡이라네.”

“메인곡이요?”

이미 대본을 모두 숙지한 로미오 또한 메인곡이 뜻하는 의미를 잘 알고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단원들을 모아 협주곡을 연주하게 된 주인공.

제대로 된 악기도, 교육을 받은 음악가도 없는 상황에서 연주를 펼치는 장면이었다.

하지만, 해당 부분은 연출에 어려운 점이 무척 많았다.

포스트 아포칼립스 시대에 악기가 있을 리 만무.

게다가 오랜 시기 악기와 음악이 잊혀진 지 오래라 제대로 된 연주가 나오는 것도 어불성설이었다.

그래서 에드워드 또한 메인곡은 지금껏 느껴보지 못한 색다른 선율임과 동시에, 오히려 미완에 가까운 선율을 만들길 원했다.

에드워드가 주문한 사항을 차근히 듣던 로미오가 눈썹을 들썩였다.

“그게 가능합니까?”

“한 번 보겠나?”

에드워드는 말로 설명하는 대신 악보를 내밀었다.

악보를 받아든 로미오를 차근히 악보를 보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게… 가능합니까?”

음악을 정통한 것은 아니지만, 로미오도 어느 정도의 이론은 숙지하고 있었다.

특히 바이올린을 켜본 경력이 있던 로미오였기에.

적어도 바이올린이 어떻게 연주되어야 하는지, 악보가 어떻게 구성되어야 하는지는 알고 있었다.

그런데, 에드워드가 건넨 악보 속 바이올린 부는 로미오의 상식을 완전히 깨뜨리고 있었다.

일반적인 연주는 물론, 손으로 현을 직접 뜯는 피치카토, 심지어 음표가 X자로 표현된 타악 기호까지.

말 그대로 바이올린으로 만들 수 있는 소리들은 모두 활용한 악보였다.

평소 연주를 했던 로미오라면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악보냐며 윽박을 질렀을 것이다.

하지만, 에드워드의 말에 로미오는 완전히 다른 생각을 했다.

“박이안 단장이 보낸 초안이라네.”

“초안이라고요?!”

로미오는 자신도 모르게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내질렀다.

그가 아는 한, 초안이라는 것은 ‘대강’ 만든 것을 이르는 말이었다.

그러나 지금 그의 손에 들린 악보에는 ‘대강’이라는 표현을 사용할 수 없을 정도로 정교한 음표들의 연속이 펼쳐지고 있었다.

보면서도 믿기지 않는 음표들.

하지만, 이안이기에.

무려 지금껏 불가능을 가능으로 이끌어온 이안이기에, 어떤 음악을 만들어낼지 궁금할 지경이었다.

초안이라고 불리는 악보를 보면서도 감탄을 내려놓지 못하는 중인데.

그런 로미오에게 에드워드가 한 마디를 더했다.

“그리고, 이 장면의 연출은 이안씨가 직접 맡을 걸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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