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시작부터 천재 피아니스트-192화 (192/250)

192화

[모두가 함께하는 덕수궁의 아름다움]

[리히트가 덕수궁의 밤을 물들이다!]

[덕수궁 연주회. 리히트를 비롯해 여섯 손가락 피아니스트 등 화려한 라인업을 선보여.]

덕수궁에서 펼쳐지는 연주회.

리히트 오케스트라의 이름을 더한 슬로건이 퍼지자 순식간에 관심이 쏠렸다.

벌써부터 검색어 순위를 올라가는가 하면, 큰아버지를 통해 인터뷰 요청도 쇄도했다.

연아 또한 이만한 관심이 몰리는 것에 감동이라며 연락을 보내왔다.

-지금껏 이런 적은 없었는데. 고마워요 이안씨.-

소수자니까,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고.

매번 장애인을 위한 콘서트나 연주회를 가져보았지만, 관심에는 한계가 있었다고 덧붙였다.

‘여섯 손가락 피아니스트’라는 이름도 사람들 사이에서 조금씩 잊혀져 가는 중이었다고.

연주회가 반복될수록 줄어드는 객석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녀는 연주를 멈출 수 없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내가 참여함으로써 사그라지던 사람들의 관심이 다시금 커졌다고 표현했다.

연아가 말한 대로, 이번 무대는 엄청난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이번에도 곡을 만드는 것이라며.

어떤 무대를 선보일지에 대한 관심이 지대했던 것.

이러한 대중들의 관심에 언론들도 여러 뉴스를 내보냈다.

[리히트 오케스트라, 덕수궁 연주회에서 배리어프리 무대를 선보이기로 하여…]

[리히트 측, ‘청각 장애인도 감상할 수 있는 음악을 만들겠다.’ 밝혀 화제.]

[이번에도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꿀 것인가, 연주곡에 대한 관심이 집중되어…]

특히 사람들의 관심은 청각 장애를 가졌음에도 어떻게 연주를 들려줄 것인지에 대해 쏠렸다.

그러니 보여줘야겠지.

어떤 방식으로 음악을 전달할지.

“이번에는 특히 컨디션 조절에 힘을 쓰도록 해주세요. 높은 체력을 요하는 곡입니다.”

일반적인 곡이라면 곡 사이의 간격을 두어서 미묘한 감정을 이끌어낼 것이다.

하지만, 들리지 않는 상황에서 여운을 두는 것은 곡이 끝났다는 착각을 줄 수 있을 터.

그렇기에 연주에는 멈추는 구간이 없었다.

쉼표를 최대한 배제하고 음표를 가득 채운 악보.

이전에 만들었던 악보들 중 가장 빽빽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번 곡의 이름은 <지진>입니다.”

깊은 뜻이 아닌 제목.

일전에 지진을 통해 청아가 떨림을 느끼고, 이를 모티브로 곡을 만들었던 것을 떠올려 붙인 제목이었다.

게다가 곡 또한 지진에 어울리는 울림들도 가득했으니까.

거기에 에비게일이 뜻을 한 차례 더했다.

“Let’s make an earthquake.”

지진 만큼이나 강력한 파장을 일으켜보자고.

모두를 깜짝 놀라게 만드는 소리를 펼쳐보자며 너스레를 떨었다.

에비게일의 말에 단원들도 동의하는 듯 매서운 눈빛으로 악기를 고쳐 들었다.

첫 연습.

시작은 팀파니의 강렬한 울림이었다.

서장부터 심장 박동을 크게 끌어올릴 정도로 웅장한 떨림.

<지진>이 도약(跳躍)을 준비했다.

***

‘후… 떨린다.’

커다란 체임버홀을 올려다보며 연아는 남몰래 심호흡을 했다.

그녀 또한 무대에 여러 번 올라가 보고, 여러 선생님들에게 배움을 받았건만.

지금처럼 떨리는 기분은 처음이었다.

젊은 거장이라고 불리는 이안과의 피드백을 앞두고 있어서리라.

‘못할 게 뭐 있어!’

연아는 특유의 자신감을 드러내며 콧바람을 내뱉었다.

이미 자책하기만 하면 아무것도 되는 것이 없음을 잘 알고 있던 그녀였으니까.

그녀는 다시금 발돋움을 하며 당당한 기색으로 체임버홀에 들어섰다.

안내를 받아 들어간 체임버홀.

무대에는 이안을 비롯한 리히트 오케스트라가 한차례 연습을 끝마친 듯 땀을 닦아내고 있었다.

얼마의 시간동안 연습을 한 것인지 감이 오지 않을 정도로.

이안을 포함한 단원들의 옷은 대부분 땀에 젖어있었다.

그럼에도 연주를 상쾌하게 끝낸 것인지, 단원들의 표정들을 대부분 밝았다.

그때, 무대로 향하는 연아를 발견한 이안이 먼저 인사를 건넸다.

“오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 다음엔 제가 가도록 하겠습니다.”

“아니에요. 제가 직접 보고 싶었거든요.”

사지 기형 장애는 손만 오는 경우가 드물다.

연아 또한 장애의 영향으로 손뿐만 아니라 다리도 온전치 못했다.

오래 걷지 못해 먼 거리를 이동할 때는 전동 휠체어의 도움을 받아야 할 정도.

하지만, 그럼에도 연아가 체임버홀에 온 것은 이안을, 더 나아가 리히트 전체를 보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다.

빼어난 연주를 미리 보는 것뿐만 아니라, 단원들 앞에서 연습을 한다면 보다 무대 때의 느낌을 살릴 수 있을 테니까.

“그럼 연습을 시작해보죠.”

이안의 말에 연아가 건반에 손을 올렸다.

그 순간, 연아는 뒷덜미가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뒤를 돌아봤을 때, 연아는 자신에게 꽂힌 시선들을 확인했다.

‘저 눈빛들은 대체.’

방금까지만 해도 밝은 기색으로 웃고 떠들던 단원들이었는데.

연아가 연주를 시작한다는 말이 끝나기 무섭게 단원들의 눈빛이 매섭다 못해 서늘해졌다.

마치 이안의 분신들이 자신을 노려본다는 착각이 일 정도.

그동안 자신을 신기하게만 봤던 시선이 아닌, 한 명의 피아니스트로 바라보는 시선.

조금은 무서우면서도 한편으로는 뭉클해졌다.

자신이 ‘여섯 손가락’이 아닌, ‘피아니스트’로 받아들여지는 것 같았으니까.

연아는 지금 자신에게 주어진 이 상황은 신이 내린 시험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 시험을 통과해야 더욱 유려한 연주를 펼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녀는 눈을 감은 채 심호흡을 하며 떨리는 손을 멈춰 세웠다.

그리고 매번 하던 대로.

평소 연습했던 것을 모두 쏟는 생각으로 손가락을 내질렀다.

Chopin Etude Op.10 No.5

일명, <흑건>.

천재적인 작곡가 쇼팽의 연습곡이자, 영화에 나오면서 한차례 유명해진 곡이었다.

대부분의 곡을 흑건, 즉 검은 건반으로 만들어낸 곡이기에.

익숙지 않은 소리에 자칫 속도를 맞추지 못하면 불쾌한 불협화음을 토해내는 곡이었다.

워낙 유명한 곡이기에 단원들 또한 곡의 어려움을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을 단 여섯 개의 손가락으로 펼치는 광경에.

단원들도 사뭇 놀란 기색으로 연주를 지켜보았다.

연주를 끝나고 돌아봤을 때.

연아는 박수를 치는 단원들과 날카로운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이안을 발견했다.

이보다 더한 연주를 할 순 없을 거라 자신한 연주였는데.

그럼에도 이안은 아주 작은 틈을 찾아냈다.

“32번째 마디. 항상 부드럽게 연주하라는 지시를 하면서 소리가 작아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sempre legatissimo.

이안이 언급한 32번째 마디엔 항상 부드럽게 연주하라는 지시어가 적혀 있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크레센도로 인해 연주에 힘을 박차야 하는 아이러니한 부분이었다.

부드럽지만 강하게.

혼재된 부분에서 디테일을 놓친 것을 이안은 곧바로 알아챈 것이다.

“해당 부분을 이렇게 연주해보죠.”

이안은 짧은 지시를 더하며 손가락을 내밀었다.

연아가 선보였던 32번째 마디.

손가락을 세워 연주를 펼쳤던 연아와 달리, 이안은 해당 부분을 연주할 때 손가락을 최대한 눕혔다.

마치 손으로 곡선을 그려내듯.

유려하게 펼친 연주에 부드러움은 더해지고, 눕힌 손가락에 음색은 짙어졌다.

게다가 이안의 연주에 연아는 물론, 단원들도 놀라움을 더했다.

‘세 손가락으로 연주를 해?’

잠깐의 시연이건만, 이안은 검지와 약지를 든 채 시범을 보였다.

분명 손가락이 재빠르게 바뀌는 아르페지오 파트였다.

다른 사람들이 사용하는 검지를 활용하지 않고, 연아의 손을 고려하여 중지를 활용하는 면모.

연아가 이안이 했던 것을 고스란히 따라하자 방금 이안이 펼쳤던 연주가 고스란히 펼쳐졌다.

“나머지 부분도 이렇게 손가락을 눕혀서 연주하면 포르테의 느낌을 더욱 짙게 낼 수 있을 겁니다. 다시 해보시죠.”

이안의 지도에 연아는 곧바로 연주를 펼쳤다.

이전보다 훨씬 부드럽게, 하지만 힘을 더한 연주가 체임버홀에 울려 퍼졌다.

짧은 순간 위치와 선율을 모두 기억해낸 이안은 물론, 문제점과 해결책까지 단번에 준비하는 면모에.

연아는 속으로 감탄을 내려놓지 못했다.

한편으로 동시에 궁금증이 터져 나왔다.

‘이런 젊은 거장이 과연 어떤 곡을, 어떻게 펼칠까?’

연아도 이제는 궁금할 지경이었다.

이미 이안이 만들어낸 곡, 리히트가 펼치는 연주가 최고인 것은 누구 하나 반대하지 않을 정도로 사실이니까.

하지만, 청각 장애를 가진 사람에게 곡을 들려주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이야기였다.

현대에는 기술이 좋아져서 귀가 들리지 않아도 음악을 전달하는 장비가 있다.

하지만, 사람이 몇 명이나 올지 모르는 연주회에 하나당 수백에 달하는 장비를 구비해두는 것도 어불성설이었다.

걱정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는 연아에 비해 이안의 표정은 담담하기만 했다.

이미 모든 그림을 그려 두었다는 듯.

초연하기까지만 한 이안은 짧게 한 마디를 내뱉었다.

“무대를 잘 활용해야죠.”

***

‘청각 장애를 가진 사람도 음악을 듣게 만든다.’

주변에서 소식을 접한 사람들이 불가능한 것 아니냐고 말했지만, 나는 개의치 않았다.

설리번 선생 또한 헬렌 켈러를 가르치지 않았던가.

시각과 청각을 잃고, 말조차 하지 못했던 헬렌 켈러를 끊임없는 지도로 위인의 자리로 끌어올린 사례.

설리번 또한 손을 통해 목의 떨림을 느끼고, 그 떨림을 재현하는 방식으로 말을 가르쳤다.

떨림을 활용하여 소리를 가르친 대표적인 사례였기에.

나도 소리를 전달하기 위해 떨림에 집중했다.

“팀파니는 스틱을 곧바로 드세요. 기존의 떨림음은 소리에는 좋지만, 울림을 멈추게 하는 단점이 있습니다. 다른 타악기도 마찬가지. 떨림을 최대로 하도록 하세요.”

내 언급을 더해 타악기들이 매서운 소리를 더한다.

땅을 타고 전해지는 진동이 발끝으로 느껴질 정도로.

하지만, 과한 울림이 계속되면 그저 소음이기에, 소리와 울림이 적당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 중간 지점을 찾기 위해 수일이 걸렸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해.’

무대가 펼쳐지는 곳은 야외였으니까.

실내인 체임버홀에서는 장소가 좁은 탓에 울림이 전해지기 쉽지만, 바깥은 아니었다.

분명 연주를 진동으로 치환하는 데 한계가 있을 터.

그렇기에 내가 생각한 것이 무대였다.

‘울림을 전달할 수 있는 무대를 설계해야 해.’

나는 한창 무언가 설치되고 있는 체임버홀을 바라보았다.

마치 거대한 심벌즈를 둔 것과 같은 형상의 무대.

금속판을 더한 색다른 무대는 타악기의 진동을 고스란히 펼치는 데 사용되었다.

밟고 있는 것만으로도 그 울림이 전해지고, 울림은 소리처럼 더해져 발끝을 넘어 머리 위까지 올라온다.

귀가 들리지 않아도 선율을 느낄 수 있는 면모에.

연아도 사뭇 놀란 기색을 보이지 않았던가.

그러나, 문제는 하나 더 있었다.

‘지금 상태로는 울림을 전할 수는 있지만, 음 자체를 전달하지 못해.’

타악기는 선율의 높낮이 상관없이 진동과 울림을 전하는 악기니까.

연주를 하는 것만으로도 바닥으로 진동을 더할 수 있었다.

하지만, 땅에서 떨어진 플루트와 바이올린과 같은 여타 악기는 아니었다.

음을 더하기 위해선 다른 것이 필요했다.

그 다른 것을 더하기 위해.

나는 한 명의 우군을 더 불렀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바쁜데 직접 오신 거 아니에요?”

“괜찮아. 그리고 이런 뜻깊은 일에는 기꺼이 도와야지.”

잿빛 정장을 입은 사내가 빙긋 웃으며 내게 다가왔다.

지긋이 나이가 들었음에도 품격을 잃지 않은 남자.

서천 그룹의 수장, 서필무가 체임버홀에 들어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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