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시작부터 천재 피아니스트-193화 (193/250)

193화

내게 다가온 덕수궁 관계자가 연신 감탄사를 내뱉었다.

역대 최고 방문객이라며.

지금껏 수많은 이벤트와 홍보를 해봤지만,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며 너스레를 떨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냥 많은 수준이 아니긴 하네.’

덕수궁의 중심, 중화전(中和殿).

눈앞에 모인 사람들만 셀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발디딜 틈이 없다는 표현이 무엇인지 알 수 있게 만들 정도의 인파.

아직 연주회를 30분가량 남기고 있는 시점이었다.

연아를 비롯한 장애인 단체를 통해 앞자리에 포진한 여러 장애인들은 물론, 덕수궁을 방문한 관객들도 연주회를 듣기 위해 삼삼오오 모여들었다.

“외국인 관광객들이 죄다 여기로 모였나 보다.”

큰아버지의 말에 걸맞게 관객들 중에는 외국인도 상당수 보였다.

가벼운 외출복 차림으로 나선 사람은 물론, 한복을 입은 채 제대로 한국 관광을 하러 온 사람도 있었다.

궁궐 야행(夜行) 컨셉에 맞춰 진행된 연주회라 어둑어둑하건만.

되레 사람들은 지금 상황을 즐기듯 무대를 기다리고 있었다.

게다가 무대 한편에 마련된 기자석은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카메라조차 공간이 부족하여 다닥다닥 붙은 채 무대를 비출 정도.

국내 방송사는 물론, 해외 방송사에서도 지대한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하긴.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으니까.’

지금껏 청각 장애인을 위한 음악은 대부분 가사를 수어로 바꾸어 표현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수어를 안무처럼 활용하여 하나의 움직임으로 선보이는 거나, 음악에 대한 설명을 수어로써 설명하는 것이 대부분.

이번처럼 클래식 자체를 청각 장애인을 대상으로 연주를 준비한 경우는 거의 없었다.

심지어 한 외신은 이렇게 밝히기도 했다.

‘이번 무대를 완벽하게 마친다면 세계 최초로 진정한 배리어 프리를 볼 수 있을 겁니다.’

기대감을 가득 안은 반응이었다.

특히 음악에 대해서는 배리어프리가 온전치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니까.

미술은 굴곡이 있는 그림을 통해 시각 장애인이 직접 만질 수 있는 작품이 있었지만, 그동안 음악은 설명에 치중한 면이 강했다.

오죽하면 배리어 프리 뮤지컬에 대해서도 ‘반쪽짜리 예술’이라는 아쉬움을 토로하는 평론이 많을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이번 기회로 청각 장애인들도 음악을 즐길 수 있다면.

그리고 그것을 내가 이룰 것이라는 확신에 찬 의견을 제시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그런 사람들을 향해 내가 할 것은 단 하나.

‘무대를 보여줄 뿐.’

위대한 음악가는 말로 설명하는 대신, 음악으로 보여줘야 한다.

그 생각을 고스란히 펼쳐 보이기 위해.

나를 비롯한 리히트 단원들은 막바지 준비를 끝마쳤다.

***

연주회의 포문을 열기로 한 연아는 연신 심호흡을 했다.

꽤 오랜 시간 피아니스트로 활동하며 여러 무대에 올랐던 그녀였건만.

이번 무대는 평소와 전혀 결이 달랐다.

‘이런 무대에 올랐던 적이 있던가?’

연아는 몇 번이고 객석에 앉은 사람들을 바라봤다.

덕수궁 일대를 가득 메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사람들이 가득 차 있었다.

매번 연주회를 열 때마다 찾아오는 장애인 단체 사람들은 비롯.

아이와 함께 찾아온 여러 학부모들.

한복을 차려입고 관광을 온 외국인들까지.

TV 출연을 했을 때도 이만한 사람들 앞에서 연주를 펼친 적은 없었다.

주최 추산 4천여 명.

덕수궁에 들어오지 못한 사람들은 먼발치서라도 음악을 듣기 위해 덕수궁 주변을 걷고 있다고 덧붙였다.

톡톡.

한창 긴장하고 있던 연아의 팔에 작은 두드림이 느껴졌다.

연아의 동생, 청아가 배시시 미소를 지은 채 손을 움직였다.

-걱정하지 마 언니. 언니는 항상 잘해왔잖아!-

고사리 같은 손을 움직이며 펼치는 수어.

초롱초롱한 눈빛은 어떻게든 연아를 응원하겠다는 의지가 가득 담겨 있었다.

항상 해주는 응원인데도 연아는 가슴 한편이 아렸다.

그 응원이 고마워서.

그 어떤 때보다 눈부셔서.

그리고 이제야 자신의 연주를 보여줄 수 있다는 생각 때문에.

‘그래. 보여주자.’

연아는 도우미에게 청아를 맡긴 채 무대로 나섰다.

수많은 스포트라이트가 펼쳐진 무대.

연아가 나와 허리를 숙이자 그녀를 반기듯 청중의 박수가 끊이지 않고 터져 나왔다.

지금껏 들어본 환호성과는 차원이 다른 박수와 환호에.

연아는 떨리는 심장을 겨우 진정시키곤 피아노 앞에 앉았다.

‘배운 대로만 하자.’

눈을 감은 채 심호흡을 한 번 하고.

여섯 개의 손가락이 차례로 건반을 훑었다.

검은 건반들로 반음을 표현하되, 이를 경쾌하게 풀어낸 쇼팽의 <흑건>.

손가락의 개수와 상관없는 유려한 선율이 피아노에서 펼쳐진다.

연아는 이안의 가르침을 잊지 않았다.

처음 이안에게 피드백을 받았던 손가락의 활용법 뿐만 아니라 <흑건>을 제대로 펼치기 위해 필요한 사소한 디테일들까지.

남들은 열 손가락으로도 제대로 펼치지 못하는 선율을 연아는 단 여섯 개의 손가락만으로 화려하게 터뜨렸다.

연주가 끝났을 무렵.

사람들의 환호가 덕수궁 일대에 울려 퍼졌다.

연아가 보기에 가장 놀라운 것은 사람들의 반응이었다.

‘모두가 즐기고 있어.’

자신이 연주를 할 때면 크게 두 가지 반응이 나오곤 했다.

연민과 신기함.

피아니스트로서 뛰어나다는 평가보다는 ‘여섯 개의 손가락으로 어떻게?’라는 반응이 더욱 지배적이었다.

그런데 지금 사람들에게서 느껴지는 감정은 그러한 계산적인 것이 아니었다.

그저 환상에 젖은 듯.

장애가 있든, 장애가 없든, 누구 하나 개의치 않고 음악에 대해 환호를 보내고 있었다.

‘아마도 이 또한 이안씨가 부린 마법이겠지?’

연아의 머릿속엔 아직도 연습 때의 기억이 생생했다.

자신의 연주를 들은 이안이 곧바로 악보를 수정했지.

단순히 음표를 삭제한 것을 넘어 몇몇 음표를 추가하기에, 처음에는 연아도 당황스러웠다.

그러나 연주를 했을 때, 연아는 이안의 실력을 다시 한번 체감했다.

이안의 편곡은 단순히 연아가 치기 쉬워질 뿐만 아니라, 선율을 더욱 풍성하게 만들었으니까.

아마 그 편곡이 없었다면 지금과 같은 열띤 반응은 없었으리라.

사람들의 반응을 모두 살폈을 즘.

연아는 곧바로 청아를 향해 시선을 옮겼다.

평소라면 백스테이지에서 자신을 기다렸을 청아인데.

오늘은 다른 관객들처럼 객석에서 연아의 연주를 바라보고 있었다.

‘정말 느꼈나 보다.’

연아는 가까스로 흘러나오려던 눈물을 삼켰다.

항상 언니인 자신이 가장 잘 보이는 백스테이지에서 연주를 지켜보던 동생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달랐다.

지금껏 한 번도 본 적 없는 무대에서 연주를 했으니까.

청아도 연주를 느낄 수 있도록 이안이 특별히 고안한 무대.

피아노가 있는 무대 바닥을 비롯해서 객석까지 황금빛 철판으로 된 무대가 뻗어 나와 있었다.

마치 거대한 심벌즈 위에서 무대를 하는 것처럼.

그리고 청아는 그 심벌즈 형태의 무대에 손을 올리고 있었다.

청아의 얼굴에는 이상함과 신기함, 여러 감정이 공존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청아의 입가에 지금껏 본 적 없는 미소가 떠올라있다는 점이었다.

***

연아를 필두로 여러 음악가들이 무대에 올라 연주를 선보였다.

오직 손의 감각만으로 첼로를 연주하는 사람부터, 한 손밖에 없음에도 런치패드라는 가상 악기로 비트박스 선율을 선보이는 사람까지.

장애를 가진 사람이 아닌, 그저 한 명의 연주가로서 존중받는 무대가 연이어 펼쳐졌다.

몇몇은 단원들도 놀랄 정도로 빼어난 연주를 펼치는 사람도 있었다.

한참 동안 무대의 뒤에서 연주를 살피던 시간이 흐르고.

어느덧 리히트가 모습을 드러낼 차례였다.

“자, 이제 우리도 준비하죠.”

스태프들이 무대에 의자를 모두 설치했을 즘.

이안이 준비를 위해 단원들을 불러 모았다.

평소처럼 이안이 하는 조언은 딱 하나였다.

연습하던 때 그대로.

애써 무언가를 펼치는 것이 아닌, 평소에 완벽한 연주를 그대로 펼치라며.

이안의 말에 단원들 또한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금 의지를 다졌다.

모두 준비를 마치고 입장을 기다릴 즘.

밖에서 사회자의 멘트가 이어졌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오늘 연주회의 하이라이트. 리히트 오케스트라를 무대 위로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스태프의 신호에 맞춰 단원들이 일렬로 무대로 향했다.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뜨거운 환호성과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실외라서 환호가 울릴 일도 없는데도.

사람들의 열띤 반응은 몇 배나 증폭되어 무대 위로 떨어졌다.

연아는 무척 떨었던 무대였건만.

리히트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그들에게 화답하기 전에 자리에 앉아 악기를 고쳐 들었다.

‘참으로 놀라운 무대란 말이지.’

단원들 중 가장 선두에 서서 피아노에 앉은 요한나는 청중을 스윽 쳐다본 채 미소를 지었다.

사실 요한나는 이번 프로젝트에 대해 무척 걱정을 한 사람 중 하나였다.

오랜 시간 오케스트라 활동을 하며 화려한 이력을 가졌건만.

그녀에게도 이런 무대는 처음이었다.

‘청각 장애인도 들을 수 있는 음악이라.’

일전에 빈 필하모닉에 있을 때도 장애인 협회의 요청으로 몇 차례 연주를 펼친 적은 있었다.

하지만 그때도 수어 통역사가 곡에 대한 설명을 할 뿐, 직접 선율을 들려준 적은 없었다.

언론에서도 리히트의 도전이 사실상 최초라고 하지 않았던가.

소리가 들리지 않는 사람에게 기계를 심어 소리를 듣게 만들고, 잘린 팔다리도 붙이는 세상이 왔건만.

청각 장애인을 위한 연주회가 최초라는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으리라.

하지만, 이제는 다른 자신감이 떠오르고 있었다.

‘여기라면 가능하다.’

연아를 비롯해 앞선 연주들을 지켜봤던 요한나는 이제 확신할 수 있었다.

이번 공연은 이안의 뜻대로 모든 사람에게 선율을 들려줄 수 있다고.

더 나아가 요한나 인생에서 가장 뜻깊은 공연이 될 것이라고.

특별한 공연인 만큼, 무대 또한 특별했다.

마치 솥뚜껑을 엎어둔 듯한 비주얼의 무대.

여타 무대에서는 부채꼴로 섰지만, 이번 무대는 원을 그리듯 단원들이 배치되었다.

게다가 후방에서 선율을 보조해주던 타악기들이 앞으로 나와 있었다.

이번 연주는 타악의 역할이 가장 중요했으니까.

이윽고 모두가 자리를 잡자 이안이 손을 높이 올렸다.

이안의 손이 마치 북채가 된 것처럼.

손이 내려가자 타악기들이 일제히 울림을 전달했다.

동시에 바닥이 철판으로 된 무대가 거대한 공명을 일으키며 울림을 터뜨려냈다.

‘떨림을 이렇게 활용할 줄이야.’

앞자리에 있던 청각 장애인들이 무대의 끝에 손을 올리고 있었다.

철판이 떨리며 전달된 진동이 그들의 손에 전해지자, 사람들은 사뭇 신기한 기색을 했다.

하지만, 입꼬리는 올라가 있었다.

처음으로 소리라는 것을, 진동을 통한 감동을 느꼈다는 듯.

몇몇의 눈은 빨갛게 충혈되어 있었다.

이미 소리를 느낀 것만으로도 감탄을 하고 있는 사람들인데.

그들을 위한 메인 디쉬는 이제 시작이었다.

‘이건 도저히 적응이 안 되네.’

부정적인 생각이 아니었다.

연습을 위해 몇 번이고 느꼈건만, 놀라움과 흥분으로 인해 요한나의 심장이 세차게 울렸다.

요한나의 손가락이 건반을 훑자 미세한 진동이 발에 감돌았다.

피아노 건반에 따라, 바이올린 현악 선율에 따라, 관악기의 울림에 따라.

다양하게 변천하는 울림들이 무대를 이루는 철판을 울리고 있었다.

귓가로 들리는 선율과 같은 박자로.

바닥의 떨림이 선율에 힘을 더하듯 퍼져나간다.

특수 제작한 무대에 악기의 울림들이 하나둘씩 모여 평소 그녀가 알던 음악에선 느끼지 못했던 감동이 몰려오고 있었다.

‘대체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한 걸까?’

요한나는 겨우 흥분을 가라앉히고 연주를 하고 있는데.

지휘를 하는 이안은 일말의 표정 변화 없이 단원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마치 인간이 조절할 수 없는 파도를 자유자재로 다루는 사람처럼.

이안의 손길이 움직일 때마다 바닥에 일렁이는 떨림이 변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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