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화
무대가 잘 보이는 객석의 한편.
잿빛 정장을 입은 한 남자가 흐뭇한 기색으로 무대를 바라봤다.
서천 그룹의 수장이자, 정재계에서 손에 꼽히는 인물.
서필무가 그동안의 덕수궁 무대를 모두 보고 있었다.
‘참으로 대단한 연주들이다.’
그는 가장 처음 펼친 연아부터 마지막 리히트까지 모든 연주를 지켜봤다.
클래식에 대한 조예가 깊은 것은 물론, 필무는 이전부터 연아의 팬이기도 했다.
몇 차례 그녀의 연주회를 후원한 적도 있었으니까.
여섯 개의 손가락을 가졌음에도 누구보다 빼어난 연주를 선보이는 연아의 모습은 그야말로 ‘인간 승리’가 무엇인지 보여주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 무대를 처음부터 끝까지 바라본 것은 사뭇 다른 이유 때문이었다.
평소 같았으면 집에 마련된 스튜디오에서 이안의 연주를 편히 감상했으리라.
하지만, 오늘처럼 어마어마한 인파가 모인 데서, 환호성으로 귀가 따가울 지경임에도 무대 곁에 남아있었던 이유.
바로 이안이 펼치는 연주를 ‘느끼기’ 위해서였다.
척척-
짧은 발구름과 동시에 장내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리히트 오케스트라 단원들의 발구름 한 번에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평소 같으면 좀처럼 집중하지 못하는 지체 장애인과 자폐 아동들도.
기묘한 기운에 휘말린 듯 가만히 무대만 쳐다봤다.
‘어찌 이런 생각을 해냈을까.’
리히트 오케스트라의 연주.
이미 필무 또한 지켜본 무대였지만, 악기에는 사뭇 다른 것이 있었다.
몇몇은 마이크를, 몇몇은 특수한 장치를 낀 채 연주에 임했다.
그리고 그 장치들을 통해 모인 소리들이 진동을 변환되고, 무대에 설치된 우퍼 스피커로 퍼지고 있었다.
전기 신호로 변환된 선율이 다시금 철판을 울리고, 그 울림이 고스란히 청각 장애인들의 손을 타고 흘러간 것이다.
제대로 된 음악인 것을 증명하듯.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구분되지 않을 정도로 모두가 같은 표정을 한 채, 같은 속도로 고개를 까딱거리며 음악을 감상하고 있었다.
처음 필무가 이안의 요청을 받았을 때.
필무는 사뭇 놀라운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아저씨. 일전에 뮤직시트 제작했을 때 자료가 남아있을까요?”
과거 자동차 홍보를 위해 제작했던 뮤직시트.
좌석의 위치에 따라 고음, 중음, 저음을 맡는 우퍼 스피커로 음악을 느낄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하지만, 실용성이 낮은 탓에 어디까지나 홍보 목적으로만 활용되었던 물건인데.
그것을 활용할 줄은 필무도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게다가 이안은 필무의 생각보다 한 발자국 더 나아갔다.
무대를 철판으로 만드는 것으로 타악기의 진동을 직접 전하고, 그럴 수 없는 현악/관악은 기계의 힘을 빌려 진동을 만드는 것.
거기다 시트의 위치에 따라 음의 높낮이를 달리했던 것처럼, 이안은 각기 다른 위치에 서로 다른 높낮이를 표현했다.
소리가 전달되는 속도는 물론, 서로 다른 진동이 섞이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절대 얕은 지식으로는 만들 수 없는 것.
오죽했으면 이번 무대를 담당한 담당자도 이안의 아이디어에 놀라움을 더했을 정도니까.
“제가 손댈 게 없는데요? 기존 무대에 장비만 비치하면 끝날 것 같습니다.”
“그 정도입니까?”
“예 회장님. 공명 지점도 물론이고, 되레 소리가 어떻게 나면 증폭되는지 잘 알고 있는 사람 같네요.”
만약 필무가 담당자에게 이 또한 이안이 했다고 한다면 깜짝 놀랐으리라.
필무도 처음에 이안이 건넨 시안을 보고 놀랄 정도였으니까.
혼자서 만들었다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정교하고 상세한 무대 구성.
이 모든 것은 이안이 직접 무대에서 소리를 내고, 소리를 느껴서 만들어낸 결과물이었다.
‘사업가로 활동했어도 대성했을 텐데.’
필무는 경외감과 함께 작은 아쉬움을 토해냈다.
빠른 실행력과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 빠른 정보 습득, 천재적인 음감을 활용하는 것까지.
필무는 이안이 자신과 동년배였다면 자신보다 훨씬 위에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이미 이안은 필무가 수십 년을 걸쳐 완성한 기업의 이미지와 인지도를 단 2년 만에 쌓지 않았던가.
지금도 숱한 음악가들이 이안과 콜라보를 하고 싶다며 연락을 보내오고, 여타 기업체에서도 높은 대우를 대가로 긴밀한 관계를 맺고 싶어 하고 있으니까.
‘하지만, 지금도 충분하지.’
어릴 적부터 이안을 바라봐왔던 필무였지 않은가.
보통이었다면 단연 사업가로서 재능을 보인 이안을 곧바로 스카우트 했으리라.
하지만, 무대 위에서 지휘를 하는 이안은 그 자체만으로도 거대한 무언가를 품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젊은 거장이라고 불리는 이유를 스스로 증명하듯.
철판으로 된 무대에 진동을 넘어, 감동을 전하는 모습은 절로 필무를 감탄하게 만들었다.
그 모습을 해치기 싫었기에.
또 그 모습을 허락하는 한 평생 보고 싶었기에.
필무는 무대를 끝마치고 고개를 숙이는 이안을 향해 열렬한 박수만을 보냈다.
***
[리히트 오케스트라.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든 무대!]
[서천 측, ‘이 모든 계획은 이안의 것. 서천은 그저 도왔을 뿐.’이라고 밝혀…]
[박이안, 그의 한계는 어디까지인가?]
리히트 오케스트라의 연주회는 삽시간에 번져 나갔다.
전 세계의 전문가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입을 모아 리히트에게, 이안에게 찬사를 보냈다.
심지어 세계 농아인 연맹에서는 직접 성명을 발표할 정도였다.
-우선 감사하다는 인사를 먼저 하고 싶습니다. 연주에 힘쓰기에도 바쁜 거장께서 먼저 나서준 것에 대해 감사한 마음을 이루 표현할 수 없습니다. 이는 1951년 처음 협회가 만들어진 이후로 가장 기쁜 날로…-
수어로 성명을 발표하는 회장의 눈은 어느덧 붉게 물들어 있었다.
세계 농아인 연맹.
로마에서 설립된 이후 전 세계 청각 장애인의 인권 신장을 위해 활동한 단체.
120개국의 농아인 단체와 가맹하고 있는 것은 물론, 유엔의 자문기관으로서 인증된 곳이기도 했다.
한국에도 가맹 연맹을 맺고 있었기에.
이안을 초청한 장본인인 연아에 대한 치하도 이어졌다.
하지만, 연아는 그저 겸손하게 상황을 받아들였다.
“감사를 받을 사람은 제가 아니라 이안씨죠.”
이안이 없었더라면 이룰 수 없는 결과였을 테니까.
국내를 넘어 세계에 지대한 관심을 끄는 것은 물론, 청각 장애인도 감상할 수 있는 무대를 만든 것까지.
그저 연주를 부탁한 것에 비해 이안이 펼친 연주가 무척이나 화려해서.
연아도 그저 몸둘 바를 몰랐다.
심지어 이번 기회를 통해 청각 장애인에 대한 국민 의식도 높아졌다고 하지 않은가.
한국인이라면 모를 리 없는 서천 그룹에서 장애인 협회에 기부를 하는가 하면, 뒤이어 숱한 기업들에서도 후원 행렬이 이어졌다.
수년 동안 장애인 협회에서 활동했던 연아였건만.
자신이 수없이 무대를 선보이며 이뤘던 것을 단 한 번의 무대만으로 달성한 이안이 그저 신기할 따름이었다.
하지만, 가장 신기한 것은 무엇보다 리히트가 펼친 연주였다.
‘머리에서 떠나가질 않아.’
청아와 함께 리히트의 무대를 감상했던 연아였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아직도 그 선율이 선명하게 남아있었다.
귓가로 들리는 소리와, 손끝으로 느꼈던 진동.
그 두 가지가 한데 어우러져 새로운 하모니를 만들어냈다.
게다가 신기한 것은 하나 더 있었다.
-언니! 나 피아노 쳐줘!-
“또?”
이전에는 먼저 피아노에 다가간 적도 없었는데.
리히트의 연주를 들은 이후에는 하루가 멀다고 연아에게 연주해달라고 졸랐다.
연아가 연주를 하면 청아는 피아노 옆이나 건반을 누른 채 고개를 저었다.
마치 음악을 감상하기라도 하듯 말이다.
연주를 하면 남들보다 몇 배나 손이 아픈 연아였건만.
청아가 조를 때면 몇 번이고 건반을 쳤다.
***
덕수궁 연주회를 펼친 지 벌써 일주일가량이 흘렀다.
연주회 직후 엄청난 반응이 이어졌는데.
일주일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반응은 뜨거웠다.
일부 언론에서는 나의 무대 준비에 무모하다는 반응도 보였다.
하지만 무대가 끝난 지금.
무모하다고 언급했던 언론사마저도 ‘무모한 것은 이안의 명성에 도전한 우리였다’며 호평을 더했다.
연아는 내게 연락을 해 연신 감사하다는 인사를 했다.
-이걸 어떻게 감사해야 할지… 차마 나열할 수가 없네요.-
유수의 기업들의 후원을 비롯해 사람들의 인식까지.
나로 하여금 수많은 것들이 바뀌었다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러나 내가 연아에게 해줄 말은 하나였다.
“제가 아니라 연아씨와 모두가 만들어낸 것입니다.”
결코 빈말이 아니었다.
이미 필무를 통해 장애인 협회에 대한 후원은 들은 상태였으니까.
필무는 리히트가 선보인 무대는 물론, 앞서 연아를 포함한 사람들의 연주를 들었다.
장애를 가지고 있음에도 음악에 열중하는 사람들이 더욱 음악에 열중하도록 돕고 싶다고.
좋은 음악과 더불어 좋은 인연을 만들어주어 고맙다는 말을 잊지 않았다.
그러니 이 또한 내가 아닌 그들이 직접 만들어낸 기회일 터.
연주회의 마무리는 여기까지.
이제는 다시금 새로운 일에 집중할 때였다.
‘영화 음악에 집중해야겠지.’
덕수궁 연주회 준비로 초안에 그쳤던 영화의 메인곡.
이미 에드워드 감독과 로미오는 촬영을 시작했다고 했다.
기존에 음악감독인 플로가 만들어낸 곡들을 기점으로 촬영을 이어나가고 있는 상태였다.
일전에 건네줬던 초안에 에드워드 감독은 물론, 음악감독 플로 또한 좋다며 호평을 내렸지.
-초안만으로 촬영을 해도 될 정도입니다. 대체 어떤 음악을 만들려고…-
-내 음악감독 인생에 이런 선율은 처음입니다. 어떻게 연주를 할지 감히 유추할 수 없었어요.-
실제 음악이 없어진 상태에서 음악을 다시금 만들면 이런 느낌일 것 같다며.
일부는 전개를 좀처럼 가늠할 수 없는 선율이 들어가 있어 직접 연주하는 것이 걱정될 지경이라도 덧붙였다.
하지만, 이대로 음악이 만들어진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심지어 플로는 내 곡이 97년도에 개봉한 전설적인 영화, [다섯 번째 원소]에 등장하는 OST에 이어 음악계에 엄청난 파란을 일으킬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니 완성을 서둘러야겠지.’
영화 촬영에 걸리는 시간 6개월가량.
에드워드는 CG와 후처리를 감안하면 약 10개월가량이 소모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평소 곡 작업을 비롯해 오케스트라 연습을 생각하면 여유로운 시간.
하지만, 메인곡 하나를 위해 그 시간을 모두 소모할 필요는 없으니까.
가능한 시점에 최대한 빨리 촬영과 녹음을 끝내야 다른 일정을 소화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때문에 오늘도 늦게까지 작업을 하다 잠이 들었지.
물을 마시러 거실에 내려갔을 때.
나는 거실 소파에 앉아있는 큰아버지를 발견할 수 있었다.
새로운 제안이나 연주회에 대한 결과를 이야기하는 일은 빈번했기에.
큰아버지의 방문은 그리 놀라운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큰아버지의 표정은 사뭇 달랐다.
사무적이 아닌, 무언가 다른 이야기를 하려는 표정.
그에 걸맞게 큰아버지가 말문을 열었다.
“이안아, 뉴스 봤냐?”
봤을 리가.
머릿속에서 그려지는 음표를 고스란히 펼치고, 이것이 영화 설정에 맞는지 점검하는데 하루 종일을 소모했는데.
“아뇨. 무슨 일 있어요?”
내 대답에 큰아버지는 다소 심각한 표정을 한 채 태블릿을 두들겼다.
몇 차례 화면을 살피던 큰아버지는 이내 한 기사를 내밀었다.
국내 기사가 아닌, 해외 기사.
영어로 된 기사의 헤드라인은 내가 아는 이름이 들어가 있었다.
[영국 피아노의 대가이자,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의 별.]
[아이번 클라크가 영면(永眠)에 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