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화
소독약 냄새가 진동하는 병원.
자가 호흡도 어려운 나머지 코에 호흡기를 단 노인이 옅은 눈빛을 한 채 TV를 바라봤다.
TV에서는 일전에 이안이 청각 장애인을 위해 펼쳤던 덕수궁 연주회 모습이 나오고 있었다.
마음 같았으면 당장 벌떡 일어나 최대한 가까운 거리에서 이안의 지휘와 리히트의 선율을 감상했으리라.
하지만, 노인은 더 이상 그럴 수 없었다.
나이에 따른 질병은 그를 병원 침대에서 나오지 못하게 만들었으니까.
노인의 이름은 아이번 클라크.
전직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의 부단장을 맡았던 사람이었다.
“그렇게도 좋아요?”
“좋지 그럼.”
아이번의 옆에 있던 여인이 장난스레 물었다.
그녀는 클로이 클라크.
아이번의 반쪽이자, 평생을 함께하다시피 한 아내였다.
조금이라도 남편이 편하게 쉬었으면 좋으련만.
아이번은 TV에서 이안의 연주가 나온다고 하면 알람을 맞춰서라도 일어나서 챙겨보곤 했다.
때론 피곤함에 절어 졸면서 TV를 바라볼 때도 많건만.
그럼에도 아이번을 저지하지 못했던 것은 단 하나.
이안의 영상을 볼 때마다 아이번의 표정이 세상 편해졌기 때문이었다.
“저걸 보지 않았다면 숨이 막혔을 것 같아.”
최근 아이번의 낙은 이안과 리히트의 연주를 보는 것이었다.
뉴욕에서 펼친 재익과 콜라보를 비롯해 파이널 쇼에서 펼쳤던 <개화>, UN자선 콘서트까지.
직접 가질 못했을 뿐 온라인에서 펼쳐진 그들의 행보를 끝까지 지켜봐 왔다.
‘참으로 아름다운 걸음이다.’
아쉬움이 없다면 거짓이리라.
자신의 잘못을 보았음에도 이를 타박하지 않고 받아들이고.
순식간에 깊숙한 생각으로 들어와 자신을 위로해준 젊은 거장, 박이안.
그와 함께하는 날만 손꼽았던 것이 엊그제 같았다.
전성기 때 했듯, 매일 피아노를 연주하고, 때론 잠까지 줄여가며 연주를 했었거늘.
하지만, 그 기회를 통해 아이번은 자신의 한계를 더욱 느낄 수 있었다.
‘조금 더 일찍 그를 만났으면 좋으련만.’
오랜 연주로 닳아버린 손목은 시시때때로 고통을 일으켰고, 체력 또한 허락하지 않았다.
기껏해야 2~3번 연주를 했을 뿐인데.
손목에서는 고통이 밀려오고, 어깨는 빠질 듯 덜렁거렸다.
컨디션 조절에 힘을 쓴다고 힘을 썼건만.
이안의 앞에서 연주를 보일 때, 부끄럽게도 아픈 티를 내버렸다.
적어도 그러지 않길 원했는데.
다시 시간을 되돌릴 수 없다면 조금이라도 더 아픈 티를 내지 않겠다고 다짐한 아이번이었다.
그의 머릿속에, 한국을 가지 않는다는 선택지는 없었다.
그러나 아이번에게는 시간을 돌리기는커녕…
“쿨럭!!”
“서… 선생님!”
갑작스런 각혈에 클로이는 급히 의사를 호출했다.
클로이가 나가려던 찰나.
어디서 나온 힘인지 아이번이 클로이의 손목을 붙잡았다.
이미 몇 번이고 경련과 각혈을 봐왔고, 그때마다 의사를 불러 조치를 취했건만.
클로이도 이번에는 이전과 결이 다르다는 것을 눈치챘다.
어쩌면 마지막이리라.
클로이는 조심스레 아이번의 옆에 앉아 손을 잡아주었다.
“다음 생이 있다면 꼭 이안씨의 오케스트라에 들어가고 싶소.”
“그렇게 해요. 그렇게 해서 나를 찾으러 와요.”
호흡기를 낀 채, 아이번은 빙긋 미소를 지어 보였다.
기꺼이 그러겠다고.
끄덕거리는 아이번의 고갯짓에는 많은 의미가 담겨 있었다.
“만약 그를 마주하지 못했다면 이리 맘 놓고 갈 수 있었나 모르겠소.”
아이번의 눈앞에 주마등이 흐르듯.
이안과 마주했던 순간들이 차례대로 떠올랐다.
처음 이안의 전화를 받은 것을 비롯해 직접 이안을 마주했을 때.
자신의 과오로 어그러진 헌정곡을 새롭게 태어나게 한 이안의 천재성.
리히트에 들어가고자 오디션을 보러 한국까지 갔던 것까지.
지금도 리히트 오케스트라의 선율을 떠올리면 전율이 이는 듯했다.
“보여주고 싶었지…”
덕분에 이렇게 연주할 수 있게 되었다고.
다 망가진 손과 팔로 겨우 하는 연주이지만, 그 속에 의미를 넣고, 그 의미를 스스로 되새길 수 있게 되었다고.
이안과 잠깐 나눴던 대화가 지난 수십 년간 배운 것보다 가치 있었다는 것을 손수 증명하고 싶었다.
그러니까 되었다.
보여주고 싶은 것을 보여주고, 듣고 싶은 것을 들었으니까.
차분한 기색으로.
08시 32분.
아이번 클라크는 향년 87세의 나이에 눈을 감았다.
***
“며칠 자리를 비우겠습니다.”
이안의 선언에 대부분 단원들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평소 같으면 이유를 소상히 얘기해주고 자리를 비우던 이안이었으니까.
하지만, 이번에는 자세한 설명 대신 비우겠다는 말만 덧붙였다.
그 이유를 가장 먼저 알아챈 것은 요한나였다.
“단장님. 혹시 아이번 선생님의 사망 소식 때문인가요?”
요한나 또한 아이번의 소식을 알고 있었다.
오케스트라와 관련된 인맥이라면 전 세계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그녀였으니까.
여왕의 헌정곡 소식에 빠삭할 정도로 필하모니아에 대해서도 모르는 게 없었다.
뉴스를 비롯해 필하모니아 단원을 통해 아이번의 사망 소식을 접할 수 있었다.
영국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에서는 아이번의 장례식을 위해 연주회에서 장송곡을 연주했다는 말에 그제야 아이번의 죽음을 체감할 수 있었다.
“맞습니다. 일전에 저와 리히트에 관심을 많이 주신 분이니 한 번 뵙는 게 맞는 것 같아서요.”
이안의 말투에서 슬픔은 크게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동안 리히트에 끊임없는 관심을 보이고, 피아니스트로서 생을 마감한 동료를 마주하듯.
묘한 책임감이 이안의 눈에 서려 있었다.
“그럼 저도 같이 가시죠.”
일전에 아이번과 깊게 대화를 나눈 건 이안뿐만이 아니었으니까.
요한나 또한 아이번이 영국 호텔에 방문했을 때 이야기를 나눈 사람 아닌가.
게다가 오디션을 위해 노령의 몸을 이끌고 한국에 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땐 존경심마저 들었다.
같은 피아니스트로서, 한참 선배인 아이번을 위해.
요한나는 기꺼이 이안의 영국행에 동참했다.
그리고 이안과 뜻이 같은 사람은 요한나뿐만이 아니었다.
“저도 함께하겠습니다. 단장님.”
“저도요.”
“저도 갈래요.”
서령, 루이사, 아람, 에비게일을 비롯해 총 10명에 달하는 단원들.
모두 한때 오케스트라에 몸담은 인물이거나, 오디션에서 아이번을 목도한 인물들이었다.
저마다 긴 이유를 대진 않았다.
그저 가고 싶다는 의사를 표현할 뿐.
그에 대해 이안 또한 이유를 묻거나 거부하지 않았다.
“그럼 이틀 뒤에 출발하도록 하겠습니다.”
이안의 말에 단원들이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들이 공항에 도착했을 때 서로의 모습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누구 하나 약속하거나, 합의한 적이 없는데.
단원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자신의 악기를 챙겨왔다.
그리고 그것은 이안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
“한국에서 오느라 고생 많았어요.”
큰아버지를 통해 방문 소식을 전한 탓일까.
아이번의 아내, 클로이 클라크가 나와 단원들이 묵은 숙소에 찾아왔다.
양털 같은 백색 머리가 인상적인 여인.
아이번만큼이나 깊게 팬 얼굴 주름은 그녀의 나이를 가늠하게 만들었다.
“조금 늦게 와서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이렇게 와주신 것만으로도 남편은 고마워할 겁니다.”
뒤늦게 상황을 알고 준비한 것도 있지만, 일부러 늦게 온 탓도 있었다.
필하모니아 부단장인 아이번의 명성과 걸맞게 영국 뉴스에는 굵직한 거장들이 찾아왔다는 소식이 줄을 이었으니까.
기자진들도 항상 찾아와서 북적일 정도였다고.
한 사람을 보내는 자리에 그러한 주목을 끌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었다.
클로이도 내 생각을 어느 정도 눈치챈 듯.
무언가 예상했다는 듯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입관식은 내일 오후에 시작 될 예정입니다.”
장례식을 마무리하고 이제는 고인을 보내줄 시간.
클로이는 본래 가족끼리 보내려던 시간 중 일부를 기꺼이 내게 허락했다.
“남편이 어찌나 이안씨 얘기를 했는지 몰라요.”
죽기 직전까지 내 연주 장면을 보고 있었다고.
하루가 멀다고 챙겨보는 것은 물론, 그의 휴대폰에는 나를 비롯해 리히트 오케스트라의 연주 영상이 가득했다고 덧붙였다.
밤새 그것을 틀어놓아서 클로이도 그 선율을 외울 정도라고.
하지만, 그럼에도 듣기 좋았다며 칭찬 섞인 말을 내뱉었다.
“심지어 남편은 다음 생이 있다면 이안씨와 또 만나고 싶다더군요.”
다음 생에는 나와 리히트 오케스트라를 만나 꼭 함께하고 싶다며.
그만큼 나와 리히트가 만들어내는 음악에 진심이라며 이야기를 덧붙였다.
클로이의 말에 서령과 에비게일이 사뭇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아무래도 아이번이 직접 탈락하는 것을 목도한 사람이었으니까.
클로이는 분위기를 환기시키려는 듯 조금 질투가 났다는 농담을 했다.
“하지만, 되레 고마워요. 이안씨. 오히려 이안씨가 아니었다면 그 양반은 아직도 미련을 갖고 제대로 떠나지 못했을 테니까요.”
클로이는 내가 듣지 못한 아이번의 이야기를 차근히 꺼냈다.
되레 아이번은 내가 탈락이라고 말해주어서 고마워했다고.
이미 몸상태가 안좋은 것을 깨달은 아이번은 만약 내가 합격이라 얘기했어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렇게 된다면 아이번이 내 결정을 번복하는 것이자, 자신의 입으로 음악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는 꼴이었다.
음악가에게 그보다 참담한 일은 없으리라.
평생 음악만을 위해 살아온 사람이 이젠 음악을 할 수 없다고.
그것을 제 입으로 말하는 것이 얼마나 참혹한 일일까.
클로이 또한 그 상황을 충분히 이해하는 듯 씁쓸한 기색이 역력했다.
나는 클로이의 손을 조심스레 잡은 채 말을 이어갔다.
내가 이곳에 온 이유.
마지막을 장식하기 위해 할 일을 짧게 언급했다.
“그래서 내일. 아이번씨의 연주를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다음날.
영국 공동묘지 한편에 의자들과 악기가 나란히 놓였다.
공원을 연상케 하는 영국 특유의 묘지공원.
아이번의 이름이 적힌 비석 앞에 10명 남짓한 인원이 자리를 잡았다.
수천에 달하는 관객도, 연주를 선보이는 것만으로도 뜻깊은 사람도 없지만, 단원들의 표정은 결연하기만 했다.
사실 어떤 곡을 연주할지, 어떤 마음가짐으로 연주할지 정한 적은 없었다.
그저 나는 내 머릿속에 떠오른 그의 마지막 모습을 고스란히 펼쳐 보일 뿐이다.
전자 피아노에 손을 올린 나는 거침없이 한 곡을 표현해내기 시작했다.
Allegro.
스케르초를 연상케 하는 빠른 선율이 차례대로 이어진다.
한 인생 곡선을 표현하듯 음들이 자연스레 오가고.
왼손은 격렬한 한 사람의 인생을 표현하듯 힘있게 선율을 표현한다.
잠깐 연주를 듣던 단원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각자의 악기를 고쳐잡는다.
이건 단원들에게도 익숙한.
아이번이 마지막으로 연주한 <염라>였으니까.
연주를 진행하는 동안 머릿속에서는 아이번의 모습이 떠올랐다.
오디션 무대에서 아이번이 펼쳤던 <염라>.
그의 뜻을 담은 <염라>가 고스란히 아이번의 묘지 앞에서 펼쳐졌다.
제대로 된 연습도 하지 않았음에도.
단원들은 <염라>의 선율에 자신들의 악기를 덧붙여가며 연주를 했다.
짧은 연주를 한 채 나는 건반에서 손을 뗐다.
이어지는 단원들의 연주와, 내 머릿속에 있던 아이번의 연주가 합쳐지며 은은한 하모니가 가상의 악보에 맺혔다.
순간, 나의 의도를 눈치챈 클로이가 왈칵 쏟아져나오는 눈물을 참지 못하고 자리에 주저앉았다.
곁에 있던 요한나가 그녀를 위로하듯 어깨를 감쌌다.
‘제가 드릴 수 있는 마지막 인사입니다.’
나는 천천히 손을 올려 단원들을 향해 지휘를 했다.
단원들도 그제야 내 뜻을 이해한 듯 더욱 결연한 표정으로 연주를 이어갔다.
마치 아이번이 리히트 오케스트라의 단원들과 함께 연주를 하는 것처럼.
묘비 앞에 놓인 피아노에는 아무도 없었지만, 누군가 연주를 하는 듯 오묘한 기운이 스며들었다.
‘어쩌면 정말로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르지.’
원래였다면 믿지 못했겠지만, 내게는 정말로 전생의 기억이 있지 않은가.
어쩌면 마법과도 같은 일이 현실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지금 내가 해야 할 것은 언젠가 모를 그때를 생각하는 것도, 아이번의 죽음에 슬퍼하는 것도 아니다.
그저 지금의 충실하여 연주를 펼치고, 지휘를 하며, 오케스트라를 이끌어갈 뿐.
어느덧 4악장까지 마친 <염라>를 마쳤을 즈음엔 나를 포함한 모든 단원들의 이마에 땀이 가득했다.
‘다음 생에 만나겠습니다. 아이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