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시작부터 천재 피아니스트-196화 (196/250)

196화

리드미컬 체임버홀 한편에 마련된 사무실.

단원들과 연습을 마친 나는 땀방울을 닦으며 자리에 앉았다.

이내 시계를 확인한 나는 노트북을 펼쳐 들었다.

잠시 후, 화면에 에드워드 감독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아주 기쁜 나날을 보내고 있죠.-

촬영 탓에 며칠 밤을 새운 것인지 에드워드의 눈에는 다크서클이 짙게 내려와 있었다.

하지만, 그의 입가에 맺힌 미소만큼은 무척 해맑았다.

-이안씨가 나온 영상을 보았습니다.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나더군요.-

공동묘지에서 연주한 것을 말하는 것이었다.

아이번을 추모하기 위해 소수의 단원만 함께 했던 작은 연주회.

클로이의 배려로 여타 관객이 없는 상태로 진행되었지만, 소리를 막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같은 시간대 묘지를 찾아온 사람들이 조심스레 촬영한 것이 SNS를 타고 급물살을 탄 것.

나 또한 영상이 퍼진 것을 잘 알고 있었다.

ㄴ 나도 저분 사망 소식 듣고 놀랐는데.

ㄴ 돌아가신 분 피아노 전공인데 아프셔서 리히트에 못 들어가신 분이라고 함.

ㄴ 개소름. 그래서 중간에 일어나는 거임? 돌아가신 후라도 합주할 수 있도록?

ㄴ 왜 저런 모습마저 멋진 거지? 거기다 장례식에 폐 안 끼치려고 일부러 늦게 찾아간 듯.

SNS를 통해 뻗어나간 영상에는 수많은 댓글이 달렸다.

몇몇은 내 생각을 알아챈 사람도 있었다.

아이번을 위해 피아노 자리를 양보한 것은 물론, 장례식에 방문하지 않고 늦게 찾아간 것까지.

국제 언론에서도 나의 행동에 옅은 감탄과 함께 유감의 표시를 전하고 있었다.

-괜찮으십니까?-

화면 속 에드워드는 무척 조심스레 내게 물었다.

나와 아이번 사이의 관계에 대해 알려진 바는 크게 없었지만, 직접 영국행을 택한 나를 보고 보통 사이는 아니라고 생각한 듯 보였다.

“네. 괜찮습니다.”

아무런 느낌이 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

무엇보다 음악에 대한 열정이 컸던 인물인데다, 리히트 오케스트라의 오디션을 보기 위해 수 시간을 단신(單身)으로 한국에 온 사람이지 않은가.

그러나 아이번이라면 내가 그를 생각하느라 음악에 집중하지 못한다면 더욱 마음을 쓸 사람이다.

클로이가 좋은 마음으로 떠나갔다고 했으니.

나도 그 마음에 부응하는 것이 맞는 것일 테지.

나는 곧바로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영화 촬영은 잘 되고 있습니까?”

-덕분에 아주 잘되고 있습니다. 그때 조정해주셨던 음악이 스태프 사이에서도 더욱 호평을 받고 있고요.-

미세한 잡음이 섞여 들어가 문제가 생겼던 곡도 나의 조언대로 수정했다고.

일전에 초안을 들었던 스태프들도 플로의 버전도 좋지만, 내 버전은 그 이상을 노린 것 같다며 찬사를 보냈다고 덧붙였다.

더 나아가 음악감독, 플로는 나와의 만남 이후 무언가 깨달음을 얻었는지 작업실에서 나오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더 좋은 곡이 나오겠네요.”

내가 남들이 듣지 못한 소리를 들은 것일 뿐.

플로의 실력도 무시할 정도는 아니었다.

에드워드 감독과 함께 일하면서 그의 영화에 음악으로 활기를 불어넣은 장본인이니까.

플로가 영화 음악계의 거장이라고 불리는 이유였다.

그가 분골쇄신해서 음악을 건든다면 어떤 음악이 나올지.

-하지만 이안씨가 보내주신 것만 하겠습니까.-

에드워드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나를 다시금 치켜세웠다.

초안을 확인했다는 말에 나는 단원들의 연주를 더해 곡의 완성본을 전달했다.

대본에 제시된 내용을 고스란히 펼치기 위해 여타 곡에는 사용되지 않는 화음, 연주법이 활용되었는데.

플로가 미디 프로그램으로 옮긴 것을 들었을 때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고.

전혀 음악스럽지 않은 조합들이 모여 음악처럼 변화하는 것이 매력이라고 덧붙였다.

-어서 하이라이트 장면을 촬영하고 싶습니다.-

일정상 급한 것이 없었건만.

악보와 미디로 구성한 임시 음원을 들었을 때부터 참을 수가 없었다고.

실제 리히트가 만들어내는 선율은 얼마나 대단할지 가늠이 가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게다가 내가 건넨 컨셉 내용은 당장 촬영을 진행해도 무리가 없을 정도라고 말했다.

내게도 빠른 촬영은 오히려 환영이었다.

영화 OST 연습을 끝내고 새로운 연주를 준비하거나, 다음 스케줄을 확보할 수 있으니까.

“그럼 일정은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영화 촬영이라면 단연 미국행을 택해야 할 테니까.

80명이라는 인원이 모두 가려면 미리 일정을 조율하는 것이 필요했다.

나의 물음에 에드워드 감독은 빙긋 웃었다.

그리고 그의 입에서 뜻밖의 이야기가 나왔다.

***

진한 형광 초록색으로 가득한 공간.

크로마키 촬영장에 들어온 리히트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연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TV나 영화 비하인드에서 몇 번 본 적은 있건만.

직접 공간에 들어온 사람은 많지 않았으니까.

그중 한 명은 묘한 향수에 잠겨 있었다.

‘오랜만에 들어오는군.’

리히트 오케스트라의 단원이자, 전직 왓슨 스튜디오의 음악감독.

조지 크레이머는 옛날 생각을 하며 주변을 둘러봤다.

애니메이션 회사 음악감독 경험이 있던 탓에 조지에게 그린 스크린은 무척 익숙했다.

기술이 좋아지면서 일일이 클레이 하트를 하는 대신, 모션을 캡쳐해서 CG 작업을 하는 경우도 많았으니까.

애니메이션계의 선두주자인 왓슨 스튜디오였기에,

조지는 일찍부터 그런 시스템을 익히 봐왔었다.

하지만, 조지는 단원들과 다른 부분에서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진짜로 올 줄이야.’

조지를 비롯한 리히트 오케스트라의 앞에는 수십 명의 사람들이 여러 장비를 점검하고 있었다.

카메라를 시작으로 마이크, 레일 등 갖가지 촬영 장비들이 세팅된다.

수없이 명작을 만들어낸 에드워드 감독의 사단이 일제히 한국을 찾은 것이다.

“다음 주에 영화 촬영을 위한 스태프들이 올 예정입니다.”

처음 이안이 소식을 전했을 때.

조지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물론, 영화에서 해외 로케이션 촬영은 일반적인 일이었다.

그러나 CG처리를 위한 크로마키 촬영을 해외에서 하는 경우는 10년 경력을 가진 조지도 들은 바가 없었다.

크로마키 촬영 자체가 공간에 제약을 받지 않는 촬영이니까.

언제, 어디서든 환경과 공간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는 크로마키를 뭣 하러 해외에 가서 찍겠는가.

에드워드 감독이 얼마나 이번 촬영에, 리히트에 진심인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리히트 단원 여러분. 이번 영화의 감독을 맡은 에드워드 린드버그라고 합니다.”

한국식 인사로 허리를 숙이는 에드워드의 모습에 단원들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영화를 잘 모르는 사람도 에드워드의 명성은 알고 있을 정도였으니까.

그런 사람이 허리를 숙인다는 사실 자체가 신기한 일이었다.

게다가 조지는 에드워드의 자존심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었다.

한때 왓슨 스튜디오에 몸담았던 그였기에.

에드워드에 대한 소식도 익히 들은 바가 있었다.

‘누구에게 허리 숙일 사람이 아닌 걸로 아는데.’

예의 없는 사람이란 말이 아니었다.

촬영장에서만큼은 카리스마를 위해 무서운 이미지를 굳히는 사람이 바로 에드워드였는데.

그런 인물이 평소의 스타일을 내려놓은 것은 눈여겨볼 필요가 있었다.

자신이 제어하지 않겠다는 생각을 내비친 것이나 다름없었으니까.

‘아마도 단장님 때문이겠지.’

이안에 대한 지대한 믿음이 없다면 불가능했으리라.

영화를 촬영하는 것보다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것에 가깝다고 생각하기에 가능한 일.

그것을 증명하듯, 에드워드는 촬영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덧붙이지 않았다.

대부분 내용은 이안의 아이디어에서 왔으며, 이미 단원들이 충분히 알고 있으리라 생각한다고 할 뿐.

대신, 그것을 촬영하기 위해 카메라 워크를 활용할 것이라는 말을 더했다.

“이 장면은 원테이크로 진행될 예정입니다.”

장면을 끊지 않고 그대로 이어가는 원테이크.

단원들은 짧은 소개에 고개를 끄덕이며 크게 개의치 않은 반응을 보였다.

한 곡을 처음부터 끝까지 연주하는 것은 늘상 하는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조지는 에드워드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잘 알고 있었다.

‘8분에 달하는 교향곡을 원테이크로?’

이미 원테이크 기법을 활용한다고 했을 때부터 장면을 끊을 생각이 없다는 것일 터.

그렇다면 영화 관객들은 8분에 달하는 협주곡을 그대로 봐야 했다.

보통 영화에서 한 장면이 5분 이상 진행되면 관객 집중도가 확연하게 떨어지는 게 정설이다.

이를 에드워드가 모를 리 없을 텐데.

그럼에도 원테이크로 진행하겠다는 것은 정설을 깨버릴 자신이 있다는 뜻이었다.

“여러분은 평소에 하던 대로 연주하면 됩니다.”

카메라에 나온다고 어색해할 필요 없다.

어차피 얼굴에 찍은 포인트 점을 기점으로 모두 배우들의 얼굴이 CG처리 될 예정이었으니까.

되레 에드워드는 단원들에게 자연스러운 표정을 주문하고 자리를 비웠다.

단원들이 막바지 준비를 앞두고 있던 찰나.

한 사내가 조지에게 다가왔다.

조지 또한 사내를 알아보곤 먼저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일세, 플로.”

“자네를 여기서 보게 될 줄은 몰랐구만.”

조지와 플로는 서로에게 악수를 청했다.

장르가 달라도 같은 업계이지 않은가.

애니메이션 음악계에 조지가 있다면, 영화 음악계에는 플로가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으니까.

게다가 에드워드의 명작 속, 플로의 명곡.

을 완성하는 데 도움을 준 것이 바로 조지였다.

박진감 넘치는 장면에 강점을 보였던 플로였지만, 감상적인 음악에 대해선 애니메이션 음악의 대가인 조지가 더욱 우수하다고 판단하여 부탁한 것이었다.

“리히트에서의 생활은 어떤가?”

플로가 조지에게 물었다.

전 세계 애니메이션 업계 1위, 왓슨 스튜디오를 나오면서 선택한 결과이지 않은가.

말도 제대로 통하지 않는 타지에, 기존의 유명곡들이 아닌 전혀 다른 새로운 창작곡을 연주하는 것에 어려움이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 어느 때보다 행복하네.”

조지는 단번에 대답할 수 있었다.

자신이 손수 만든 곡이 아님에도, 매번 이안의 곡을 연주할 때마다 손에 절로 활기가 깃듦을 느낄 수 있었다.

게다가 활동 또한 다양하지 않은가.

첫 데뷔 무대를 미국의 거대 TV쇼, 파이널쇼에서 하는가 하면.

내로라하는 뮤지컬, 오페라 감독의 작품 초연에 오르기까지.

세계 1위 기업에 있을 때보다 더욱 굵직한 활동을 하고 있지 않은가.

조지는 지금이 제2 전성기라고 자신 있게 얘기할 수 있었다.

“한번 기대해보겠네.”

플로의 말은 조지에게 하는 것이기도 했지만, 리히트 전체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아직 본격적인 리히트의 연주를 들어본 적은 없었건만.

그럼에도 초안을 듣는 것만으로 확신이 차올랐으니까.

되레 플로의 가슴 한편에는 어서 연주를 들어보고 싶다는 마음으로 가득했다.

“그럼 촬영 시작하겠습니다!”

에드워드의 말과 함께 촬영장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숙연한 느낌마저 감돌 정도로 고요한 촬영장.

이안은 카메라를 묘한 눈길로 쳐다보곤 뒤를 돌아 단원들을 바라봤다.

마치 연기를 하듯, 단원들을 모두 쳐다보던 이안은 천천히 손을 들었다.

이안의 지휘 준비에 단원들이 일제히 날카로운 눈빛으로 이안의 손끝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이안이 손을 움직이는 순간.

이안의 18번째 곡, <재회>가 카메라에 담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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