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화
시작은 에비게일의 바이올린이었다.
하지만, 유려한 현악 음색이 아닌, 몸통을 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기타를 칠 때 박자를 맞추는 것처럼.
툭툭거리는 나무 소리가 촬영장에 울렸다.
‘이어서 현악.’
내가 손을 뻗자 가야금을 비롯한 한국 현악들이 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곱고 아리따운 소리가 아닌, 줄을 필요 이상으로 뜯으면서 나오는 진한 소리.
전공자가 아닌 일반인이 치는 것처럼 딱딱한 소리가 이어진다.
관악 또한 마찬가지였다.
미리 합을 맞춘 대로 연주자가 흔히 할 수 있는 실수들이 벌어진다.
플루트에 과한 호흡이 들어가 음정이 어긋나는가 하면, 호른과 같은 악기는 호흡이 부족해서 바람 소리만 울린다.
이전에 리히트가 보여줬던 화려한 연주는 아니다.
파가니니의 선율처럼 빠른 보잉을 보여주지도, 하이든처럼 우아한 피아노 선율이 흘러나오지 않는다.
되레 투박하다고 할 수 있는 음색들의 모임인데.
그러한 투박함이 한데 모여 진정성을 만들어낸다.
하지만, 중간부에 들어가면서 곡의 분위기는 점차 변경된다.
투박한 음들과 실수가 가득한 음을 교묘하게 조합했던 선율은 점차 실수가 줄어들고, 음에는 부드러움이 더해진다.
중반부에 달하자 마치 유명한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듯 화려하고 유려한 선율이 촬영장에 뻗어나간다.
‘이게 내가 그린 <재회>.’
이미 내 머릿속에서는 <재회>를 작곡하며 떠올렸던 그림들이 영화처럼 흘러간다.
시간을 뛰어넘어 미래에 온 천재가 악기 하나 없는 세상에서 음악을 재현한다.
당연히 그 시대 사람들이 악기를 다룰 리 만무.
음에 대한 제대로 된 이해는 물론, 완벽한 연주를 보이는 데 어려움을 겪을 것이다.
하지만, 엄청난 천재 음악가가 과연 그 자리에서 좌절할까?
‘나라면 그러지 않을 거니까.’
베토벤도 청력을 잃은 상황에서 음악을 하지 않았던가.
그렇기에 나는 내가 만약 그랬다면 했을 상황을 고스란히 만들었다.
되레 투박하고 실수투성이인 음들을 조합하여 소리를 만들어낸다.
과하게 삐져나와 높은 소리는 마치 새소리처럼 활용하고, 투박하고 낮은 두드림은 타악기처럼 활용한다.
그렇게 하나하나 음악으로 맞춰지는 동안.
주인공은 자신이 온 시대를 떠올릴 것이다.
주인공이 사라진 것을 알고 슬퍼할 사람들, 그와 함께했던 동료 음악가들.
그런 사람들이 연주할 법한 선율들이 펼쳐진다.
리스트만큼이나 화려하고 압도적인 피아노 선율이 더해지는가 하면, 슈베르트의 곡들처럼 부드러운 협주들이 교향곡을 채워간다.
주인공이 미래로 간 덕에 미래 사람들이 음악을 다시금 마주했다는 의미와.
음악의 황무지에서 음악을 다시금 마주한 주인공.
그 두 의미를 담은 것이 바로 <재회>라는 곡이었다.
약 8분 정도의 시간이 흐르자 다시금 미래의 시점으로 돌아온 듯 투박한 북소리가 울렸다.
저물어 가는 해처럼 잦아드는 소리.
하지만, 연주가 끝났음에도 사람들은 한참 동안이나 말을 잇지 못했다.
형광빛 연두색이 가득한 배경에, 얼굴에는 CG를 위한 포인트 점이 가득한 몰골임에도.
이미 각자의 머릿속에서 CG처리를 한 듯 무언가 보고 놀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에드워드 또한 입을 떡 벌리고 있다가 박수를 쳤고, 그 순간 사람들이 잠에서 깬 듯 황급히 박수를 쳤다.
“이대로 사용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입니다.”
그 정도로 완벽한 연주였다고.
에드워드는 자신 있게 녹화된 화면을 보여주었다.
에드워드의 저력을 고스란히 보여주듯, 영상은 에드워드 특유의 영상미가 돋보였다.
카메라의 각도는 물론, 교묘하게 초점을 변경하며 악기를 주목하는 것까지.
포인트 점이 찍힌 얼굴과 녹색 화면으로 부족해 보일 법한 화면인데도, 영상 자체만으로도 흡입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소리가 아쉽습니다.”
에드워드는 물론, 플로도 당치도 않다는 표정을 지었다.
지금껏 들은 연주 중 가장 우수하다고.
감히 평가할 수 없는 지경이라는 말까지 덧붙였다.
하지만, 이내 그들은 표정을 거둔 채 나의 이야기에 집중했다.
“가야금에 마이크를 조금 떼주세요. 실제 영화에서는 가야금이 아닌 재활용 악기가 나올 테니 소리가 이처럼 분명하지 않을 테니까요.”
먼 미래에 가야금이라는 악기가 완벽하게 보존되어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게다가 배경이 서양인 것을 고려하면 가야금의 소리가 분명하게 날 리가 없었다.
“지미집 마이크는 조금 더 앞으로 보내주세요. 중앙에서 오는 소리보다 앞으로 나오는 소리가 관객에게는 더욱 익숙할 겁니다.”
나의 코멘트는 계속 이어졌다.
소리가 사뭇 묻힐 수 있는 악기는 마이크를 조절하고, 직접 녹음되었을 때 예상과 다른 부분을 고쳐나간다.
일련의 피드백들은 프로그램으로 충분히 조절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음을 올리거나 낮추는 것, 필요 없는 소리는 기계의 힘을 빌려 삭제하면 된다.
하지만, 본디 녹음부터 완벽해야 제대로 된 곡이 나오는 법.
플로도 그 뜻을 이해한 것인지 내게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모든 세팅을 마쳤을 때.
나는 다시금 단원들에게 다가갔다.
그저 무대 세트에 올랐을 뿐인데, 단원들은 준비되었다는 듯 악기를 고쳐잡았다.
마치 지휘를 기다리는 것처럼.
에드워드 또한 신호를 보내자 나는 아까와 같이 지휘를 준비했다.
***
처음 리히트의 선율이 끝났을 무렵.
플로의 옆에 서 있던 사내가 남몰래 눈물을 훔쳤다.
이번 촬영에 따라온 유일한 배우.
영화의 주연을 맡은 로미오였다.
후드까지 뒤집어쓰며 눈물을 가려봤지만, 가빠오는 호흡과 들썩이는 어깨까지 가릴 순 없었다.
‘어떻게 이런 연주를 펼칠 수 있는 거지?’
분명 시작은 투박하고, 소음에 가까운 소리로 만든 연주였다.
그럼에도 그 소리를 음악으로 승화시키는 것에 로미오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재치 있게 연주를 하는 리히트 단원들의 모습에서 정말 대본에 등장하는 철부지 사람들이 떠오를 정도.
전문 배우가 대역으로 올랐다고 해도 믿을 정도로 자연스러운 장면이 연출되었다.
그러나 로미오의 심경을 자극한 부분은 중반부였다.
‘아름다우면서도 그리움이 느껴져.’
분명 아름답고, 유려한 연주였다.
평소라면 감탄을 자아내며 연주가 끝나자마자 기립 박수를 했을 텐데.
리히트가 펼치는 선율은 오묘하면서도 슬픈 기색이 묻어났다.
<재회>라는 곡의 제목처럼.
미래로 온 주인공이 자신이 있었던 곳을 그리워하며, 음악으로라도 당시를 떠오르려는 면모가 드러났다.
그 이야기를 모두 알고 있어서일까.
단원들의 연주는 부드러웠지만, 그것을 지휘하는 이안의 손길을 마치 절박함에 허우적거리는 것처럼 보였다.
단숨에 울컥거림이 올라올 정도로 완벽한 연주.
하지만, 이안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이게… 가능한 겁니까?”
로미오는 입을 떡 벌린 채 차마 나오지 않는 말을 겨우 내뱉었다.
이미 완벽하다고 생각했던 연주였는데.
이안이 코멘트를 더하고, 오케스트라가 연주를 이어가자 조금씩 더욱 옹골찬 연주가 펼쳐진다.
피아노 페달을 조금 더 길게 밟는 것, 바이올린 현을 치듯 짧게 소리를 표현하는 것 등.
아주 사소한 차이가 첨가될수록 <재회>는 더욱 다채로운 색을 펼쳤다.
그 사소한 차이가 얼마나 중요한지, 로미오는 잘 알고 있었다.
연기를 할 때도 아주 작은 호흡, 얼굴 근육의 차이, 눈꺼풀을 어떻게 뜨고 감는지에 따라 세심한 감정 전달이 차이가 나니까.
자신의 몸을 컨트롤하는 것도 어려운데, 이안은 자신을 넘어서 단원 전체를 컨트롤하고 있었다.
이 이상으로 좋아질 수 있을까 생각했건만.
로미오가 본 이안은 항상 그 이상의 무언가를 추구하고, 그것을 현실로 이끌어왔다.
“저도 한때 그렇게 느꼈죠.”
플로가 옅은 미소를 머금은 채 로미오를 쳐다봤다.
지금 로미오가 짓고 있는 표정은 이전에 이안이 작업실에 왔을 때 플로가 지은 표정과 같았다.
경이로움으로 가득 찬 표정.
플로 또한 이전에 이안의 청음력을 직접 목도하지 않았다면 로미오와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을 것이라 확신했다.
‘재능의 영역을 아득히 벗어난 수준이지.’
음을 하나하나 주문하는 이안의 모습은 도저히 22살 청년으로 보이지 않았다.
마치 에드워드의 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수십 년의 세월을 거슬러 올라온 거장을 보듯, 모든 것을 꿰뚫고 있었다.
촬영장에서 단원들에게 피드백을 하는 것은 기본.
마이크의 위치와 조절까지 모두 이야기하지 않았던가.
음을 느끼고, 그것을 어떻게 하면 바꿀 수 있는지 알아내는 통찰력까지.
이안을 볼 때면 모든 것을 통달한 대현자를 보는 것 같은 기분을 거두지 못했다.
“어쩌면 에드워드 감독님의 대본은 픽션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플로의 우스갯소리에 로미오가 피식 웃었다.
영화는 영화일 뿐, 현실이 아니지 않은가.
어느 누가 모종의 이유로 미래에 건너오고, 과거 자신이 있던 시대의 그리움을 음악으로 승화시키겠는가.
분명 영화니까, 픽션이니까 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는데.
로미오와 플로는 이안의 연주가 이어질 때마다 눈길을 거두지 못했다.
설마.
리히트를 볼 때마다 소설에 등장할 법한 이야기가 자꾸만 현실처럼 느껴졌다.
이미 그런 인물이 눈앞에서 지휘를 하고 있지 않은가.
***
“이사장님, 이번 결제는…”
“이사장님. 지난번에 기부했던 장애인 단체에서 감사 편지를…”
“이사장님. 투자 의사를 밝히셨던 곳에서 연락이…”
이제 재단을 설립한 지 3개월가량이 지난 시점이었는데.
이사장실에 사람들이 분주하게 오갔다.
신생 재단임에도 왕성한 활동을 하는 탓에 하루에도 수십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어김없이 울리는 전화에 이사장이 전화를 받았다.
“네, 리히트 재단입니다.”
리히트 오케스트라를 모체로 둔 리히트 재단.
오케스트라의 규모가 커지는 것은 물론, VR 체험관을 위해 건물을 알아보면서 재단의 필요성을 느낀 이안이 만든 것이었다.
이안에게 재단의 필요성을 먼저 언급한 것이 현철이었기에.
현철은 순식간에 재단에 필요한 것들을 꾸렸다.
“이사장으로는 누가 좋을까요?”
대부분의 재단 관련 일을 현철에게 맡겼지만, 이사장에 대해서는 이안도 관심을 보였다.
차후 재단을 이끌어가는 것은 물론, 투자에 대해서도 혜안을 가진 사람이 필요했으니까.
그 자리에 오를 사람은 이미 현철의 머릿속에 들어있었다.
황민호.
그는 현철의 대학 동기이자, 성공한 사업가였다.
줄리아드에서 오보에를 전공하여 실력을 인정받았음에도, 졸업한 지 1년 만에 오보에를 내려두고 다시금 경영 대학원에 들어간 수재.
심지어 1년 만에 들어간 학교도 무려 하버드였다.
뛰어난 두뇌와 과감한 실행력, 그리고 그것을 뒷받침하는 철두철미한 성격까지.
현철이 아는 한, 이사장 자리에 민호만 한 사람이 없었다.
‘아무리 초기라지만, 이만한 곳은 또 처음이네.’
유수의 음악 재단에 몸담았던 그였건만.
리히트 재단에 들어오는 제안과 투자 제안은 상상을 초월했다.
하루에 수십 건씩이 밀려와 쉴 틈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게다가.
‘신생 재단에 커넥션이 무슨…!’
서천, 화정, 제온 등.
이름만 들어도 까마득한 수준을 알 법한 기업들이 일제히 후원 의사를 밝혀왔다.
그뿐만이랴.
오스트리아의 베토벤 재단, 네덜란드의 리스트 재단과 같은 명망 높은 음악 재단들의 협력 의사를 보내왔다.
민호 또한 이안이 얼마나 대단한 행보를 걸어왔는지 알건만.
다시 한번 이안의 저력을 확인할 수 있는 순간이었다.
연이어 오는 전화를 받던 민호는 숨을 몰아쉬었다.
잠깐 쉬는가 싶었는데.
다시금 들어오는 전화에 재빨리 수화기를 들었다.
-이사장님, 독일 뮌헨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연결해주세요.”
민호는 익숙하게 전화를 받고 유창한 독일어를 내뱉었다.
매번 담담하게 전화를 받던 민호였건만.
이번에 온 전화에는 놀란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