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시작부터 천재 피아니스트-200화 (200/250)

200화

오스트리아의 명소, 쇤브룬 궁.

바로크 시대의 건축 양식이 고스란히 보이는 궁전이었다.

그런 쇤브룬 궁이 한 눈에 내다보이는 호텔에서 휴식을 취하는 한 사람.

그는 전직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단장, 레오였다.

커피 한 잔을 마시며 하루를 시작하려는데.

레오의 시선은 궁전이 아닌 다른 곳을 향해 있었다.

‘나도 양반은 못 되는군.’

의사의 권유에 요양을 택한 레오였다.

그래서 일부러 빈 필의 홈그라운드와 반대 방향에 호텔을 잡았건만.

어느덧 레오는 본능적으로 빈 무지크페라인이 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예정된 은퇴가 아니었으니까.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레오의 가슴 한편에서는 아쉬움이 떠나지 않았다.

새로운 단장, 올란은 언제든지 오라고 했건만.

올란과 단원들이 서로에게 적응할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한 것은 레오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얕은 한숨을 쉬며 커피잔의 수면파를 보고 있을 찰나.

레오의 휴대폰이 요란하게 울렸다.

전화는 한국에서 온 연락이었다.

-잘 지내셨습니까?-

젊음과 힘이 동시에 느껴지는 목소리.

이안의 전화였다.

“연주회를 무척 잘 봤습니다.”

오스트리아에도 이안의 덕수궁 음악회 소식이 전해진 지 오래였다.

전 세계 방송사에서 생중계를 보내지 않았던가.

아직도 그때의 연주가 레오의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철판으로 만들어진 특수한 무대를 활용한 것은 물론, 스피커를 타고 나왔던 선율까지.

직접 무대에 가서 철판을 만지지 못했던 것이 아쉬울 따름이었다.

“그런데, 무슨 일 있습니까?”

전화를 받을 때부터 레오의 뇌리에 의문과 함께 묘한 기대감이 스쳤다.

이안은 용건이 있을 때만 연락을 하는 사람이었으니까.

레오는 이안이 무언가 할 말이 있음을 직감하고 있었다.

-제 이름을 딴 콩쿨이 열린다는 소식은 혹시 들으셨습니까?-

“당연하지요. 아마 전 세계 사람을 붙잡고 물어봐도 다 안다고 할 겁니다.”

레오의 평가는 그저 하는 소리가 아니었다.

리히트 재단의 뛰어난 홍보력은 물론, 이안의 명성 자체가 워낙 높다 보니 콩쿨 소식이 전해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이미 한국을 넘어 오스트리아, 프랑스, 미국 등 전 세계 모든 나라에서 이안 콩쿨 소식에 놀라지 않았던가.

레오 또한 빈 필하모닉에서 이안 콩쿨이 거론된 것을 알고 있었다.

“팔만 괜찮았다면 저도 참여해봤을 겁니다.”

레오는 아직 보호대를 빼지 못한 팔을 보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꾸준한 재활 치료로 일상생활 자체는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가동 범위가 현저히 줄어든 탓에 악기 연주나 지휘는 무리였다.

마음 같아선 억지를 부려서라도 참여하고 싶었건만.

전직 마에스트로로서 그 욕심이 오케스트라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잘 알기에 섣불리 나서지 못했다.

-그럼 참여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가능하시겠습니까?-

당연…

레오가 목젖까지 올라온 말을 겨우 다시 삼켰다.

자신의 욕심으로 이안에게 폐를 끼칠 순 없지 않은가.

-이안 콩쿨의 심사위원 자리를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제가 말입니까?”

순간, 레오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부탁이라니, 당치도 않았다.

그동안 자신이 받은 것을 생각한다면 부탁이 아니라 명령이라도 들어야 할 판이다.

프랑스 파리 공연을 대신 서 준 것은 물론, 이안 덕에 전직 LA필 마에스트로였던 올란이 빈 필의 지휘자가 되지 않았던가.

이안의 부탁이라면 멀쩡한 왼팔을 내걸고서라도 나설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런데 더군다나 이안의 부탁이 함께 심사를 하는 심사위원 자리를 맡아달라니.

분명 의사가 절대 안정이 필요하다고 했는데, 안정은커녕 심장이 자꾸만 뛰었다.

-이미 수백 년 전통의 빈 필을 이끌어오신 마에스트로 아니십니까. 역량은 충분하시다고 생각합니다.-

수화기 너머에서 그동안 레오가 해왔던 일들이 고스란히 펼쳐졌다.

빈 필을 이끌어온 것은 비롯해 이안을 따라 ‘뉴 클래식’을 차용한 것까지.

충분히 그 자리에 오를 자격이 있다는 말에 레오는 뭉클함을 느꼈다.

오랜 시간 음악가로 살아오면서 수 없는 평론들을 들어봤건만.

이안의 말은 그 세월 전체를 아우르고 위로하는 묘한 힘이 있었다.

그 힘에 부응하기 위해.

레오는 힘있게 선언했다.

“영광스러운 자리를 제게 맡겨주셔서 감사합니다.”

***

수화기 너머에서 들리는 레오의 목소리는 약간 상기되어 있었다.

몇 차례나 나보고 이야기해주어서 고맙다고 할 정도.

심사위원 참가 의사를 밝힌 후에도 레오는 감격을 주체하지 못하는 듯 보였다.

‘한 명은 완료.’

레오와의 통화를 마친 나는 그대로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이안 국제 콩쿨의 심사를 맡을 세 사람.

하나는 나, 다른 둘은 모두가 인정할 만한 전문가가 채울 예정이었다.

엄밀히 말하면 심사 인원을 특정하는 방법은 많았다.

리히트 오케스트라도 1기 오디션 때는 나 혼자, 2기 오디션 때는 단원들 모두가 심사위원의 자격으로 참여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이번에는 결이 조금 달랐다.

‘오케스트라 오디션과 콩쿨은 엄연히 다르니까.’

콩쿨 우승자에게는 리히트 오케스트라 참가 자격이 주어질 예정이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수상 혜택이지 콩쿨 전체를 대변하는 것이 아니니까.

국제 콩쿨이라는 타이틀에 걸맞은 형식을 갖추는 것도 중요했다.

국제 콩쿨의 위상에 걸맞은 공정함과 전문성을 가진 심사위원.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이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이끌었던 레오였다.

180년 전통의 빈 필 오케스트라를 10년 넘게 이끌어온 마에스트로.

누구보다 정통 클래식에 대한 지식이 해박한 사람이자, 이전에는 ‘뉴클래식’이라는 행보를 걸어온 사람이지 않은가.

이미 세계적으로도 유명한 마에스트로였으니 그 수준을 길게 평할 필요는 없었다.

‘이제 한 명 더.’

나는 다음 사람을 영입하기 위해 거침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처음 피아노를 잡았을 때 자주 온 곳.

하지만, 해외 활동이 많아지고, 리드미컬 체임버홀에 대부분 연주를 진행하며 거의 찾지 않은 곳이었다.

‘여기도 오랜만에 와보네.’

대한 음악당.

높게 뻗은 천장과 보는 것만으로도 나무의 질감이 느껴지는 무대.

피아노를 잡은 이후 몇 번이고 올랐던 익숙한 무대였다.

이곳에서 나는 큰아버지의 요청으로 애피타이저 무대에 오르는가 하면, 큰아버지의 은퇴를 기념하여 <염라>를 공개하기도 했다.

그런 무대에, 100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저마다 악기를 든 채 소리를 내고 있었다.

Mozart, Piano Concerto No.21

현악 선율과 피아노의 조화가 일품인 곡이었다.

강렬하지 않은 바이올린과, 그 현악 선율을 더욱 밝게 만들어주는 플루트와 오보에의 음색.

거기에 피아노가 섞여 들어가면서 곡은 마치 봄의 향취를 표현하듯 음악당을 가득 채운다.

그리고 그들을 지휘하는 사내가 땀을 흘리며 지휘봉을 흔들었다.

동양인 특유의 흑발에 검은 눈동자를 가졌지만, 체격은 서양인 같은 사람.

대한 오케스트라의 2대 수장, 다니엘이었다.

***

“오래 기다리신 것 아닙니까?”

“아닙니다. 좋은 무대를 감상할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이안의 말에 다니엘은 뭔가 모를 서늘함을 느꼈다.

젊은 거장이라는 타이틀에 걸맞은 아우라.

당장이라도 이안의 코멘트가 자신에게 쏟아질 것만 같았다.

그러나 이안은 말을 아끼려는 듯 무대에 대한 이야기는 일절 하지 않았다.

‘내게 기회를 주는 것처럼 보인다.’

마치 스스로 방법을 찾아가라고 얘기하는 대현자를 마주한 것 같은 기분.

다니엘은 자신도 모르게 속으로 그 길을 찾아가겠다고 다짐하고 있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몇 마디만 나눴을 뿐인데.

다니엘은 존재만으로도 거장의 기운을 풍기는 이안의 모습에 절로 경외감이 들었다.

다니엘이 이안에 대한 감탄을 놓지 못하고 있을 찰나.

이안은 단도직입적으로 자신이 온 이유를 설명했다.

“곧 이안 국제 콩쿨을 열 예정입니다. 같이 심사를 봐주셨으면 합니다.”

이안의 말에 다니엘은 표정을 차마 숨기지 못했다.

이미 다니엘도 이안 국제 콩쿨에 대한 소식은 들은지 오래였다.

대한 오케스트라 단원 사이에서도 단연 화두에 오른 소식이었으니까.

게다가 국제 콩쿨 연맹에서 직접 이안에게 부탁을 했다고 하지 않은가.

그런 자리에 함께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영광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묘한 의구심이 들었다.

“왜 저입니까?”

“대한의 단장라는 것으로도 이유는 충분합니다.”

이안의 설명은 무척 간결했다.

이미 현철의 인정을 받아 대한 오케스트라의 수장에 올랐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이안 또한 다니엘이 이끄는 대한 오케스트라를 눈여겨 봐왔다고 설명을 덧붙였다.

그 통솔력과 안목이면 가능하다는 말에 다니엘의 표정이 사뭇 진지해졌다.

‘역시. 내가 어리석었어.’

문득 다니엘의 머릿속에 자신이 이안에 대해 생각했던 것들이 떠올랐다.

처음 이안을 마주했을 때는 빈 필의 제의를 거절한 어리숙한 피아니스트라 생각했고.

대한 오케스트라의 1대 단장인 현철이 이안의 매니저를 자처한다고 했을 때는 자신의 롤모델을 매니저로 전락시킨 것 같아 이안을 원망하기도 했다.

심지어 오케스트라를 창단한다고 했을 때는 건방지다는 생각까지 하지 않았던가.

‘건방진 건 나였지.’

이안이 선보인 <염라>의 선율은 환상 그 자체였고, 리히트 오케스트라는 2기 단원까지 모집하며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다니엘이 러브콜을 보냈던 무대들을 이안은 되레 러브콜을 받고 올랐다.

그리고, 단순히 유명세를 넘어 매번 다니엘의 가슴을 울리는 선율을 펼쳐 보였다.

분명 어리숙한 피아니스트라 생각했던 이안은 어느덧 자신보다 까마득한 곳에 올라가 있었다.

‘이안씨도 내 태도를 모르진 않았을 테지.’

현철에게 이안의 오케스트라 창단을 못마땅하게 느낀다고 말하긴 했지만, 현철이 이안에게 그대로 일러바쳤을 것이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도 모르게 노골적으로 적의를 드러내거나, 못마땅한 기색을 숨기지 못한 일이 많았으니.

그걸 젊은 거장인 이안이 눈치채지 못할 리 없었다.

그럼에도 능력만을 보고 자신을 심사위원으로 추대하겠다는 것.

이안이 얼마나 너른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제게 먼저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기쁜 마음으로 하겠습니다.”

확신이 없으면 행동에 옮기지 않는 다니엘에게는 무척 이례적인 결심이었다.

아직 콩쿨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어떤 악기들이 나오는지 듣지 못한 상태였으니까.

하지만, 국제 ‘이안’ 콩쿨이지 않은가.

이안이라는 이름 하나만 들어가도, 그리고 이안이 직접 관리하는 콩쿨이라면 그 자체만으로도 믿을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서로 악수를 나누는 사이.

다니엘의 뇌리에 무언가 하나 스쳐 지나갔다.

오랫동안 고민하고, 시도하려고 계획을 세우고 있지만, 자신 혼자서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일.

하지만, 이안이 있다면 충분히 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 저도 부탁 하나 드려도 되겠습니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