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화
한 여인이 비행기에 내리곤 캐리어를 챙겼다.
사실상 1년 만에 다시 밟은 한국 땅.
오랜만에 한국에 방문한 여인은 자신을 데리러 온 차를 탄 채 창밖 풍경을 감상했다.
차량이 횡단보도 앞에서 멈춰 섰을 때.
건물 외벽에 붙은 거대 전광판이 그녀의 눈을 사로잡았다.
[음악에 열정이 가득한 당신을 기다립니다. 이안 국제 콩쿨.]
국제 콩쿨 연맹의 사무총장, 베니의 한 마디를 시작으로 차례대로 영상이 펼쳐졌다.
이안이 지휘하는 영상을 시작으로 리히트의 연주 영상까지.
마치 리히트의 역사를 차례대로 보여주듯, 그동안의 리히트가 이뤄낸 행보들이 차례대로 지나갔다.
로얄 오케스트라 경연에서 우승한 모습과, 영국 여왕의 즉위 기념식 무대.
UN 자선 콘서트를 비롯해, 최근 기적의 음악회라고 불리는 덕수궁 연주회까지.
폴라로이드 사진이 차례대로 넘어가듯 영상이 진행됐다.
이미 이안 국제 콩쿨에 대한 소식은 전 세계를 뜨겁게 달구고 있었다.
음악계에서는 그동안 이뤄지지 않은 초유의 콩쿨이 펼쳐질 것이라며 기대감을 드러냈다.
[전 세계 최초, 살아있는 음악가의 이름을 딴 콩쿨이 시작되다.]
[대한민국에서 시작된 음악이 전 세계를 울리다.]
한국은 물론, 해외에서도 이안 국제 콩쿨에 대한 소식을 연신 내보냈다.
총 우승 상금 3억.
거기에 리히트 오케스트라의 단원이 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는 말에 사람들의 뜨거운 관심이 몰렸다.
하지만, 가장 사람들을 놀라게 한 것은 악기 제한이 없다는 것이었다.
ㄴ 진짜 악기 제한이 없는 거임?
ㄴ 형평성 안 맞아서 어떻게 심사함??
ㄴ 박이안 모름? 리히트에 악기가 얼마나 다양한데. 다 볼 자신이 있겠지.
ㄴ 딴 사람이면 절대 못함. 박이안만 가능한 일임.
ㄴ 왜 다 이안이안거림? ‘박이안 선생님’이라고 불러야지.
소식을 전해들은 네티즌들도 갑론을박을 벌였다.
하지만, 대부분 사람들은 이안의 편을 들었다.
이미 리히트 오케스트라의 악기들도 다양하다 못해 화려하지 않냐며.
그 악기를 모두 관장할 수 있는 이안의 능력이 증명되었으니 그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냐며 강한 확신을 내비쳤다.
게다가 심사위원 라인업 또한 큰 관심을 모았다.
콩쿨 연맹의 부탁을 받고 엄청난 규모로 진행되는 국제 콩쿨.
그 심사를 볼 두 사람의 이름이 공개되자 국내는 물론, 전 세계에서도 반응을 보였다.
ㄴ 레오? 빈 필하모닉의 그 사람?
ㄴ 팔만 다쳤을 뿐이지 청음력은 전성기 그대로일 텐데 ㄷㄷ 라인업 대박이다.
ㄴ 다니엘 최? 클래식 잡지가 선정한 젊은 지휘자 1위에 그 다니엘?
ㄴ ㅇㅇ 맞는듯, 대한 오케스트라 2대 단장이지 않음?
ㄴ 국내에서도 난리인데, 외국에서도 엄청 유명함.
빈 필 오케스트라의 마에스트로, 레오는 말할 것도 없었다.
다니엘 또한 대한을 이끌면서 오케스트라계의 많은 변혁을 일으켰기에 아는 사람이 많았다.
클래식의 불모지라고 불리는 동양에서 정통을 계승한 오케스트라가 있다고.
다니엘의 대한 오케스트라는 한국의 젊은 호랑이가 세계를 향해 도약할 준비를 마쳤다고 극찬을 받곤 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온 심사위원은 단연 이안이었다.
이안의 이름을 내건 콩쿨인 만큼, 당사자인 이안이 심사위원에 오른 것은 당연한 일.
당연한 사실에도 사람들은 열렬한 성원을 보냈다.
ㄴ 진짜 클래식계의 아이돌.
ㄴ ㄴㄴ 클래식계를 벗어난 지 오래지. 지금은 모두의 아이돌임.
ㄴ 레오도 오십이 넘고, 다니엘도 젊은 축이라 서른인데. 우리의 이안은 이제 스물둘이라니…
ㄴ 나는 스물둘에 뭐했지 ㅇㅁㅇ;;
댓글의 반응처럼 이안은 전 세계 모두의 아이돌이나 다름없었다.
오죽하면 전 세계적으로 클래식 붐이 이는 것은 물론, 베토벤의 이름은 몰라도 이안의 이름을 아는 아이도 있을 정도니까.
단 2년 만에 이러한 성장을 보인 이안에 대해 찬사가 끊이지 않았다.
여인은 그런 이안의 모습을 보며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그녀 또한 이안을 보기 위해 한국에 돌아왔으니까.
‘곧 만날 수 있겠다.’
***
리히트 재단 건물에 위치한 넓은 연회장.
여러 행사는 물론, 소규모 연주회를 진행할 수 있을 정도의 규모를 가진 공간이었다.
평소에는 행사를 위한 원형테이블이 즐비한 곳인데.
오늘은 직각 테이블에 수십 개의 노트북이 나열되어 있었다.
“사실, 이리 많은 사람들이 참여할 줄은 몰랐습니다.”
이사장, 민호가 내 옆에 와서 혀를 차며 말했다.
이안 국제 콩쿨 공지가 올라간 지 한 달이 조금 지난 시점이었다.
이전 사례를 토대로 진작에 서버 증설을 했음에도 접속자 폭주로 서버가 마비될 뻔했다고.
밤새 모니터링을 하지 않았다면 일이 커졌을 것이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150만 명.
콩쿨에 참여한 사람들의 숫자였다.
어마어마한 숫자에 처음 큰아버지는 수치를 듣고 자신이 듣는 게 맞냐며 의심할 정도였다.
평소 담담하던 큰아버지가 그 정도 반응이었는데, 다른 사람은 오죽할까.
소식을 들은 대부분 사람들은 입을 떡 벌린 채 한참 말을 잇지 못했다.
그 압도적인 숫자의 참가자들을 모두 확인하기 위해.
리히트 오케스트라 단원 모두는 물론, 리히트 재단의 직원들도 총동원되었다.
소식을 접한 심사위원, 레오와 다니엘도 리히트 재단을 찾았다.
“불편한데 오신 것 아니십니까? 영상을 보내드릴 수도 있었는데.”
“아닙니다. 제가 직접 오고 싶어 온 것이니 염려 마세요.”
레오는 팔을 조금 흔들어 보이며 자신감을 드러냈다.
일상생활을 하는 데 크게 지장은 없으니 심사하는 데 문제가 없다며.
다시금 자신을 심사위원으로 추대해주어서 고맙다는 의사를 밝혔다.
다니엘도 레오처럼 다시금 감사 인사를 전함과 동시에 레오에게 팬심을 드러냈다.
오케스트라를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레오는 전설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연신 레오의 행보에 대한 감탄을 이어가던 다니엘이었는데.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노트북을 바라보면서 재차 감탄을 이어갔다.
“역시… 이안씨는 매번 틀을 깨는 것 같습니다.”
다니엘이 보고 있는 것은 참가자들의 포트폴리오 영상.
악기의 구분을 두지 않는 초유의 콩쿨이었기에 각자가 맡은 영상에는 악기를 구분하지 않은 상태였다.
하지만, 얼핏 들어도 ‘좋다.’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실력자들이 대부분이었다.
“이안씨라 가능한 콩쿨인 것 같습니다.”
악기 제한이 없는 콩쿨.
여타 다른 콩쿨에서 이런 시도를 했다면 형평성 논란이 나왔을 것이라고.
하지만, ‘이안’ 국제 콩쿨이기에 가능한 일이라고 덧붙였다.
리히트에서 이미 모든 악기를 통솔하는 이안이 주최한 콩쿨이기에 잡음이 나오지 않는 것이라고 확신했다.
“자. 그럼 시작해보죠.”
나의 말을 시작으로 모든 사람들이 노트북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예선전은 무척 간단했다.
각자가 맡은 영상을 확인하고 합격과 불합격을 매긴다.
2기 단원 오디션처럼 단원들이 참가자들의 음악을 감상하고, 그들의 음악을 평가했다.
“실력적으로 무척 쟁쟁하네요.”
서령은 혀를 내두른 채 연신 예선 영상을 둘러봤다.
어마어마한 숫자라 시험 삼아 참가한 사람도 있을 줄 알았는데, 전혀 그런 사람이 없었다.
하나하나 엄청난 실력자라는 것이 느껴질 정도라고 덧붙였다.
오죽하면 아람은 전 세계 실력자가 모두 콩쿨의 문을 두드린 것 같다고 너스레를 떨 정도였다.
다소 반복적인 작업이 될 수 있는 상황.
그 때문에 나는 독특한 시스템 하나를 도입했다.
“심사를 보면서 유독 좋거나, 모두에게 보여주고 싶은 선율이 있다면 공유해주세요.”
연회장 앞쪽에 내려온 스크린.
연회장 끝에서 바라봐도 모습과 소리를 들을 수 있을 정도의 시스템을 갖춘 화면이었다.
이전에 2기 단원 오디션을 볼 때 1기 단원들을 심사위원으로 올린 이유.
이미 충분한 실력을 가진 단원들이 여러 소리를 듣고 다시금 안목을 키울 수 있게 만들기 위함이었다.
1기는 물론, 2기 단원들도 리히트의 사조에 충분히 적응하고 그만한 청음력을 지녔으니까.
이들의 인정을 받았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실력자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독특하네요. 캐스터네츠가 이런 소리를 낼 줄은 몰랐어요.”
처음 공유 화면에 영상을 띄운 것은 서령이었다.
서령이 영상을 틀자 물방울무늬가 가득한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여성 연주가가 등장했다.
fandango de boccherini.
현악 4중주로 펼쳐지는 보체리니 판당고에 캐스터네츠 선율이 더해진다.
스페인 무용과 접목시키며 양손에 든 캐스터네츠를 치는 연주가는 마치 탭댄스를 추듯 경쾌한 소리를 펼쳐 보였다.
단원들도 그 선율에 옅은 감탄사를 내뱉을 정도.
나는 연주 영상을 보며 잠깐 눈을 감았다.
캐스터네츠와 배경음악이 함께 더해지자 탱고를 추는 여인의 이미지가 떠올랐다.
영상 속 참가자처럼 스페인 전통 의상을 입은 여인.
파트너의 현란한 지도에 더해 치마가 흩날리고, 고혹적인 춤사위가 펼쳐진다.
주변에 춤을 추는 사람들과 같은 속도, 같은 박자로 춤을 펼치자 축제장의 사람들이 한마음으로 군무를 추는 것 같다.
하지만, 내가 집중하려는 것은 그들이 아니었다.
‘오직 캐스터네츠 소리만.’
어느덧 소리에 적응한 내 귀가 차차 불필요한 소리를 지워나간다.
재즈풍의 피아노 선율과 아코디언의 음색이 사라지자 내 머릿속에서는 온전히 캐스터네츠 소리를 담은 여인의 춤사위만 남았다.
무용의 화려함이 사라졌음에도 경쾌한 캐스터네츠의 음색이 명확하게 들려왔다.
발걸음의 소리에 따라 그 사람의 기분을 알 수 있듯, 빠르기에 따라 캐스터네츠의 소리가 밝다가도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이 정도 실력자라면 합격할 수 있다고 보는데. 단장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서령이 반쯤 확신을 가진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럼에도 내 의향을 묻는 것은 재차 합격 여부를 확인을 하기 위함이리라.
머릿속에 그림이 떠오를 정도로 명확한 연주, 속도를 통해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실력, 그 모든 것을 표현할 수 있는 기교까지.
나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후에도 연이어 다양한 참가자들이 공유 화면에 떠올랐다.
열렬한 기세로 드럼을 치는 참가자부터.
표정에서는 감정이 느껴지지 않지만, 기타 선율로 모든 감정을 표출하는 참가자,
서양인임에도 해금을 연주하는 참가자까지.
실력만 보면 이미 리히트에 들어오고도 충분한 실력자들이 이어졌다.
“저도 괜찮은 분을 찾았네요.”
요한나가 꼽은 사람은 피아노 연주가였다.
화면을 공유하자 하얀색 스타인웨이 피아노가 눈에 들어왔다.
화면에 잡힌 주황색 샹들리에와 깨끗하게 관리된 피아노에서 관리 수준을 짐작게 했다.
뒷모습부터 보여준 여성 연주가는 얇고 긴 손가락을 건반 위에 가지런히 올렸다.
유려하고 부드러운 연주만 펼칠 것이라 생각했던 인물은 건반에 손을 올리자 색다른 연주를 펼쳤다.
“이건 최근 곡인 <지진> 아니에요?”
아람의 질문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덕수궁 연주회에서 펼쳤던 17번째 자작곡 <지진>.
진동에 힘을 주기 위해 쉬는 부분이 거의 없고, 강렬한 선율이 연속적으로 이어져서 협주를 하는 단원들도 대단한 체력을 요구하는 곡이었다.
하지만, 영상 속 여인은 그 모든 악기를 통합한 편곡을 선보일 뿐만 아니라, 원곡이 가진 강렬함을 고스란히 표출하고 있었다.
오죽하면 그 진동이 벽을 타고 발끝에 느껴질 정도.
하지만, 나는 그 사이에서 다른 무언가를 보았다.
‘뭔가 익숙한데.’
연주에는 연주가의 성격과 습관이 고스란히 담긴다고 하지 않는가.
강렬한 선율임에도 그 속에는 묘한 부드러움이 숨겨져 있었다.
마치 지진이 일어나고 난 후 이어지는 여진(餘震)처럼.
절제력 있는 기교, 미세한 손가락의 압력을 활용한 조절력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연주였다.
그리고 그런 연주를 펼칠 수 있는 사람이 내 머릿속에 한 명 있었다.
카메라가 찬찬히 옆으로 옮겨가며 얼굴이 드러났을 때.
내 머릿속에 있던 인물이 화면에 그대로 나타났다.
‘역시. 너였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