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시작부터 천재 피아니스트-203화 (203/250)

203화

서지현.

그녀는 대한민국 정재계 서열 1위인 서천 그룹의 회장, 필무의 외동딸이자, 이안과는 어릴 적부터 친구였다.

피아니스트를 꿈꾸며 콩쿨을 나설 때마다 만년 2등에 그쳐 모친에게 구박을 받곤 했는데.

이안을 만나면서 지현의 삶은 송두리째 바뀌었다.

“무슨 생각 하면서 쳤어?”

청악 콩쿨을 앞두고 들었던 단 한 마디.

거창한 이론이 담기지 않았음에도 지현의 머릿속에서는 그 질문이 떠나가지 않았다.

‘내가 연주하는 음악은 맞는 걸까?’

그날 이후 지현은 끊임없이 고민했다.

한국대와 함께 국내 음악대학 양대 산맥인 연희대를 다니고, 매번 수석 자리를 놓치지 않으며 수많은 학생들의 부러움을 사는 그녀였건만.

그럼에도 지현은 여전히 무언가 잘못된 것 같다는 생각만 들었다.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지현은 이안의 연주 영상을 틀어보곤 했다.

수없이 이안이 연주하는 것을 보며 연주한 끝에 그녀는 하나의 생각에 도달할 수 있었다.

‘악보를 읽는 것은 책을 읽는 것과 같아.’

책을 읽을 때 모든 단어를 하나하나 기억하지는 않지 않는가.

책에 담긴 내용을 이해하고, 자신의 취향에 따라 기억을 할 뿐.

음악도 그와 다를 바가 없었다.

악보에 적힌 음표들은 그저 기호에 불과했다.

작곡가의 의지를 담은 음표.

작가에게도 창작 의도가 있듯, 작곡가에도 창작 의도가 있는 것이다.

그것을 자신의 뜻대로 해석하고, 자신의 기량을 최대한 발휘하여 연주에 임한다.

이것이 지현이 이안을 통해 깨달은 음악의 본질이었다.

그 생각이 머릿속에 담겼을 때.

지현은 콩쿨 1위 달성은 물론, 맨허튼 음악대학의 유학 기회도 얻을 수 있었다.

그런 지현이 이안 국제 콩쿨에 나선 것은 자신의 발전을 시험해보기 위해, 자신이 이안 덕분에 얼마나 성장했는지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그전에.

무대에 오른 지현이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따로 있었다.

“혹시 곡을 바꿔도 될까요?”

좋을 대로.

이안의 제스처에 레오와 다니엘은 동의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지현은 살며시 미소를 머금고 손가락을 건반 위에 올렸다.

본래는 오랜만에 이안을 만난 것을 기념하여 <조우>를 연주하려 했건만.

오랜 심사로 지쳐 보이는 단원들의 얼굴을 보니 떠오르는 곡이 하나 있었다.

그 기운을 고스란히 담고자, 지현의 손이 가련하게 건반을 눌렀다.

Largo.

느리고 나지막한 선율이 운동장을 가득 메웠다.

본래 비참함과 참담함을 담은 선율이건만, 단조와 불협화음들을 떼어내자 보다 부드러운 선율이 흘러나온다.

마치 안개가 잔뜩 낀 밤공기를 연상케 하는 짙은 음색.

한국 전쟁을 담은 이안의 9번째 곡, <평안>이 지현의 손에서 재탄생되고 있었다.

‘다독이고, 위로하듯이.’

단조의 선율이 점차 장조로 바뀌어 가고.

나지막한 음들은 높고 밝은 음으로 바뀌어 간다.

깊은 물살을 연상케 하는 낮고 묵직한 선율이, 이번에는 은방울꽃이 피듯 잔잔하고 투명한 소리로 바뀌었다.

변화된 소리를 알아차린 단원들이 각기 다른 표정을 지었다.

한편으로는 따스함이 느껴지는 선율에 편안한 표정을,

다른 한편으로는 <평안>을 이렇게 연주할 줄 몰랐다는 놀라운 표정을.

어느 쪽이든 지현의 연주에 감탄하는 것은 같았다.

지현의 <평안>이 마무리되었을 때.

운동장에는 잠깐 동안 적막이 흘렀다.

마치 지현이 만들어낸 선율에 모두 흠뻑 빠진 듯, 아무도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

지현과 눈이 마주친 이안만이 고개를 끄덕이며 박수를 칠 뿐.

그 박수를 기점으로 사람들이 지현에게 박수와 환호성을 보냈다.

“마지막 참가자, 이름을 물어도 되겠습니까?”

단원들은 물론, 관객들도 사뭇 놀란 표정을 한 채 레오를 쳐다봤다.

그동안 레오는 최대한 말을 아끼고, 이름조차 묻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니까.

처음으로 이름을 묻는 레오에게.

지현은 출사표를 던지듯 당당하게 말했다.

“서지현입니다.”

***

지현의 연주가 중반부에 이르렀을 때.

이미 나는 지현의 합격을 정한 상태였다.

앞서 연주를 펼쳤던 참가자들 중 가장 최고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의 연주였으니까.

‘기계적인 면도 없어지고, 변주 실력도 상당해.’

분명 마지막으로 보았던 지현의 연주는 기계적인 느낌이 남아있었는데.

이번 연주에서는 그런 것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게다가 본래 험악한 분위기가 연출되는 <평안>의 서장을 교묘하게 바꾸어 부드러움을 더한 것은 편곡 수준의 연주였다.

일전에 연습을 했다면 가능한 연주지만, 이를 콩쿨에서 곧바로 펼치는 것은 보통 수준이 아니었다.

리스트 콩쿨 때, 곡을 바꾼 것을 보고 수많은 사람들이 감탄사를 연발하지 않았던가.

‘흡입력도 충분하다.’

지현의 연주에 집중함과 동시에, 나는 관객 쪽에도 귀를 기울였다.

아주 약간의 웅성거림이 들리던 관객석이었는데.

지현의 연주가 흐르는 동안에는 그 어떠한 소음도 들리지 않았다.

단원들도 지현의 연주를 듣고 한참 무언가에 빠진 듯 멍한 표정을 짓지 않았던가.

몇 초간의 정적이 흘렀다는 사실만으로도 지현을 합격시킬 이유는 충분했다.

“1차 본선을 통과하신 여러분들. 축하드립니다.”

100명이라는 1차 본선 진출자 중 반절.

단 50명만 다음 2차 본선에 참가할 자격이 주어졌다.

캐스터네츠, 리코더, 해금, 기타 등 이번에도 갖가지 악기를 다루는 연주가들이 합격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자, 다들 나와서 종이를 하나씩 가져가 주세요.”

다니엘의 진행에 따라 1차 합격자들이 하나둘씩 나와서 제비뽑기함에서 종이를 꺼내 들었다.

1부터 10까지 적힌 숫자를 뽑은 합격자들의 이름이 차례대로 정리되었다.

5명씩 10개의 조로 이뤄진 팀.

2차 본선에서 함께 연주를 펼칠 팀이었다.

“2차 본선은 일주일 뒤, 같은 무대에서 치러질 것입니다.”

향후 일주일.

본선 통과자는 리히트 재단에서 제공하는 호텔과 연습실에서 연습을 할 예정이었다.

모두에게 스위트룸 수준의 방을 제공한다는 말에 본선 통과자들의 얼굴이 기대감으로 가득했다.

얼마나 기대되었는지 회의실을 나서는 참가자들의 발걸음이 무척 가벼웠다.

합격자들이 나가자 단원들은 그제야 진지한 기색을 내려놓았다.

저마다 참가자들의 연주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는 단원들.

개중에는 합격자도, 불합격자도 있었다.

“개인적으로 히로토 팬이었는데… 연주 자체는 좋았던 것 같은데 저도 즐기진 못했던 것 같아요.”

“저도 기타리스트 포브의 팬이었는데. 연주는 조금 아쉬웠어요. 뭐랄까… 연주는 현란한데 딱 거기까지인 느낌? 악보를 외운 느낌이 강했어요.”

“저는 개인적으로 해금 연주가가 무척 관심이 가네요. 특히 해금은 소리를 제대로 내기 힘든데, 1년 만에 저런 수준이라면 발전 가능성이 더욱 커요.”

단원들의 평가 또한 레오나 다니엘 못지 않았다.

일전에 다니엘이 냉철하다고 표현했듯, 단원들의 평가가 되레 날카로울 때도 있었다.

음감을 잡아내는 것은 물론, 편곡의 뉘앙스가 아쉬웠다는 등.

단원들 또한 상당한 성장세를 달성했다는 증거였다.

“빈 필에 있던 10년보다 여기에서의 하루가 더욱 의미가 깊었던 것 같습니다.”

레오가 넌지시 다가와서 내게 말했다.

빈 필 뿐만 아니라 여러 오케스트라를 보았지만, 이런 단원들은 처음이라고.

하나하나 거장과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는 평을 늘어놓았다.

“저는 마에스트로께서 왜 이안씨를 따라가려고 했는지 알 것 같습니다.”

정통 클래식을 고집하던 다니엘마저 레오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클래식을 넘어 음악 자체에 대한 이론을 새롭게 써 내려가는 것 같다고.

‘이안’이라는 장르를 새로 만들어야 한다는 다니엘의 너스레에 레오가 함박웃음을 터뜨렸다.

***

호텔의 라운지.

중년의 여성 한 명이 여유롭게 와인을 마시고 있었다.

회색 머리칼에 녹색 눈빛을 반짝이는 여인.

한창 분위기를 즐기고 있는데, 여인의 휴대폰이 요란스럽게 울렸다.

-마르타, 언제 오실 겁니까?-

“오랜만에 여행 아닌가. 천천히 가도록 하겠네.”

마르타 폴리니치.

폴란트 출신인 그녀는 피아니스트의 축제, 쇼팽 콩쿨의 심사위원장이었다.

음악을 수학하는 사람 중 쇼팽 콩쿨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세계 3대 국제 콩쿨에 드는 대회이자, 1차 본선에 통과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재능을 증명할 수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수준.

게다가 수상의 문턱도 무척 높아 매 콩쿨 때마다 1위가 나오지 않는 경우도 많았다.

그중, 마르타는 쇼팽 콩쿨에서 1위가 나오지 않게 만드는 주범 중 하나였다.

‘연주를 잘하는 것과 콩쿨 1위가 될 실력은 다른 겁니다.’

마르타의 철학은 무척 확고했다.

쇼팽 콩쿨을 스쳐 간 무수한 음악가들이 뛰어난 연주를 뽐냈건만.

단순히 잘하고, 뛰어난 수준이라는 것만으로는 쇼팽 콩쿨의 1위를 달성할 수 없었다.

쇼팽의 곡을 얼마나 잘 이해하고 있는가, 어느 정도 재현하는가, 또 어느 정도 자신의 스킬을 활용하여 재탄생 시키는가.

그 모든 것들을 할 수 있어야 진정한 1위에 자리에 오를 수 있다고 판단했다.

분명 어려운 것은 자명한 사실인데.

마르타는 이안의 연주를 보고 그 모두를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확신했다.

‘쇼팽 콩쿨에 나오길 기대했는데.’

마르타는 처음 이안이 해외에 알려졌을 때부터 그를 주목하고 있었다.

피아노를 수학한 지 단 1년만에 유수의 콩쿨에서 입상하는 것은 물론, 독창적인 자작곡을 선보이며 세상을 뜨겁게 달구지 않았던가.

특히 리스트 콩쿨에서 전날 곡을 바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마르타도 기염을 토할 정도였다.

악보에 검은 칠을 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리스트의 곡들을 콩쿨 무대 전날 바꿔놓고 1위까지 달성한 무시무시한 실력.

게다가 당시 경연곡이 3곡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마르타가 생각하기에도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엄청난 피아노 실력과 기억력으로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마르타는 이번 콩쿨 참관을 통해 이안의 청음력 또한 보통내기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관객의 반응까지 체크하고 있었을 줄이야.’

마르타도 평소에 청음력 하나에는 자신이 있었다.

청음력은 그녀를 심사위원장에 올리게 만든 주된 재능이자, 모두를 납득시킬 수 있는 무기였으니까.

하지만, 그렇기에 더욱 청음력이 대단한 능력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도 했다.

‘단순히 잘 듣는 것과는 다른 문제지.’

청음이라는 것은 단순히 소리를 듣는 것에서 그치지 않는다.

선율의 특이점을 파악하고, 음표를 표현하는 방식은 어떠한지, 수많은 음악 기호를 어떻게, 얼마나 활용하고 해석했는지에 따라 곡은 완전히 바뀐다.

마치 해부학과 같은 세심한 관심이 필요한 작업인데.

그런데 이안은 그 작업을 개방된 대형 무대에서, 그것도 참관자들이 술렁이는 데서도 이뤄내지 않았던가.

‘그런 이안이 뽑은 1위는 누구일까.’

와인잔을 빤히 들여다보면서 든 생각이었다.

마르타 또한 쇼팽 콩쿨의 심사를 보면서 예선부터 자신만의 1위를 책정하곤 했다.

대부분 그 예상은 들어맞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니 이미 이안 속에는 1위에 오를 사람이 뻔히 보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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