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시작부터 천재 피아니스트-205화 (205/250)

205화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 일주일.

리히트 재단에서 제공한 호텔의 연습실은 불이 꺼질 줄 몰랐다.

레오에게도 이번 일주일은 그가 경험한 일주일 중 가장 긴 시간이었다.

‘얼마나 대단한 소리를 만들어 올 것인가.’

다니엘이 그랬듯, 레오도 리히트 단원의 안목에 상당히 놀란 터였다.

수년간 호흡을 맞췄던 빈 필의 단원도 그 정도는 할 수 없으리라.

물론, 리히트 오케스트라의 단원들이 대부분 이미 경력이 많은 베테랑인 탓도 있었지만, 그걸 감안해도 수준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런 단원들이, 그리고 그들의 수장인 이안이 직접 선별한 사람들이다.

마에스트로로서 직감이 묘하게 떨리고 있었다.

심지어 콩쿨장에 들어설 때부터 레오는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지난번보다 사람들이 많아졌는데?’

단순히 많아진 정도가 아니었다.

일주일 전에는 반절이 채 되지 않는 객석이 채워져 있었는데.

오늘은 반절을 훌쩍 넘긴 좌석에 사람들이 즐비했다.

빈자리가 현저히 없어진 것이 보일 정도.

1차 본선이 펼쳐진 후, 참관에 별도 제한이 없다는 것이 알려진 탓이 가장 컸다.

거기에 이안 콩쿨을 참관한 쇼팽 콩쿨 심사위원장의 인터뷰가 더해지며 세계 각국의 악기 장인들을 비롯해 이미 정점에 오른 음악가들도 대거 찾아온 것이다.

방문자들도 놀라웠건만.

참가자들의 연주를 지켜보면서 레오는 한 차례 더 놀라워했다.

‘호흡이 무슨…’

빈 필의 마에스트로로서 합주에서 호흡이 얼마나 중요한지, 또 얼마나 어려운지 잘 알고 있었다.

오죽하면 베테랑들도 처음 합을 맞춰보면 타이밍을 좀처럼 맞추지 못하기 마련.

그러나 이안 국제 콩쿨에 참여한 참가자들은 달랐다.

불과 일주일 만에 짜인 조임에도.

참가자들은 자신들의 실력을 여지없이 드러내고 있었다.

특히, 지휘가 별도로 없는 5중주는 오랜 합을 맞춰야 완벽한 연주가 가능한데.

1팀 팀원들은 마치 오랫동안 연주를 함께해온 팀처럼 멀끔한 연주를 선보였다.

정통 클래식에 집중했던 레오였거늘.

클래식 오케스트라에서 좀처럼 등장하지 않는 기타와 젬베가 선율을 더하는데도 전혀 어색한 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거기에 비올라, 오보에, 피아노가 선율을 더하자 무척이나 흥미로운 선율이 펼쳐졌다.

그런데 연주가 끝났을 때.

레오는 이안의 표정에서 석연치 않음을 느낄 수 있었다.

“D4 비올라 현, 언제 바꾼 겁니까?”

“아…”

이안의 물음에 비올라 연주가는 짧은 탄식을 더했다.

마치 들키지 말아야 할 것을 들켰다는 듯.

비올리스트의 표정에 초조한 기색이 역력했다.

“기본적인 악기 관리도 하지 않고 올라오신 겁니까?”

분노 한 점 느껴지지 않는 담담한 질문이었는데.

이안이 내뱉은 문장 하나에서 어마어마한 카리스마가 흘러나왔다.

무게감이 깃든 이안의 물음에 콩쿨장은 삽시간에 얼음장처럼 냉랭해졌다.

평을 들은 비올리스트는 당장이라도 눈물을 흘릴 듯 두려움에 떨었다.

그와 동시에 장내에 있던 사람들은 이안의 청음력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레오도 신기한 눈빛을 한 채 이안을 바라볼 정도.

‘그 찰나에 사소한 소리까지 모두 캐치해내다니.’

솔직히 말해, 레오는 눈치채지 못했다.

비올리스트가 숨기려고 한 듯, 이번 연주에서 문제가 되었던 3번째 현은 연주된 횟수가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문제가 되는 현을 완전히 배제했다면 급히 상황을 타개하려고 한 순발력으로 호평을 줄 수 있으리라.

그러나 그게 아닌 이상.

악기 관리에 소홀한 것은 충분한 감점 요인이었다.

‘나도 좀 더 귀를 기울여야겠군.’

자신의 위치는 심사위원이지 않은가.

아무리 참가자들의 선율이 좋아도 이를 객관적으로 판단하고 거침없이 평가해야 하는 심사위원.

레오는 감상적인 태도로 무대를 바라봤던 자신을 반성했다.

남은 팀들은 보다 객관적으로 파악하리라.

레오의 눈에 한기가 서렸다.

***

2차 본선.

조별로 5중주를 펼치는 것은 각자의 청음력을 보기 위함이었다.

물론 이들이 차후에 리히트 오케스트라의 단원이 될 수도, 아니면 독주가의 길을 걸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다른 악기의 소리를 듣고, 그에 맞춰 전공 악기의 소리를 바꾸는 것 또한 연주가의 역량일 터.

이를 위해 나는 악기의 배치를 포함하여 연주의 방식까지, 모든 제한을 배제하고 무대를 주문했다.

이미 예선과 1차 본선을 통해 충분한 실력자가 걸러졌기에.

각 팀들은 소리의 특징을 활용한 배치와 연주를 펼쳤다.

앞선 팀들이 개인의 기량을 뽑아낸 뒤.

드럼과 하프가 포함된 4번 팀이 무대 위로 올라왔다.

우아하고 은은한 음색이 매력인 하프와, 빠른 비트와 경쾌함이 상징인 드럼.

완전히 반대되는 성향의 소리가 4번 팀의 손에서 재구성되어 펼쳐졌다.

<영감>

여러 사람들의 표정을 그린 곡이었건만.

4번 팀은 이를 각 악기의 개성을 살려 표현하듯 전개했다.

다섯 악기가 자신의 개성을 표현하면서도, 중요한 시점에서는 피아노를 필두로 화음을 맞춰간다.

경쾌함과 우아함을 동시에 잡은 무대.

레오와 다니엘도 드럼 리듬에 맞춰 고개를 까딱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잠깐. 중단해주세요.”

연주의 중반부에 도달하지도 않은 시점.

내 중지 요청에 콩쿨장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지금껏 중도에 연주를 끊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것은 연주가를 위한 배려이자, 참가자들의 심리를 흔들지 않기 위함이었으니까.

그러나 이번만큼은 멈춰야 했다.

이번 무대는 개인의 연주를 최대한으로 끌어올 수 없는 무대였으니까.

무대를 멈춘 나는 곧바로 4팀의 드럼 연주가, 레너드에게 시선을 옮겼다.

“레너드씨? 원래 헤어밴드를 착용하지 않으셨습니까?”

미국 하와이 제도 출신의 드럼 연주가, 레너드 스턴.

포트폴리오 영상은 물론, 앞서 1차 본선 때도 그는 하얀색 헤어밴드를 착용하고 무대에 올랐다.

단원들도 영상을 보면서 시그니쳐라고 했을 정도.

하지만, 오늘 레너드의 이마에는 아무것도 있지 않았다.

“네, 맞습니다. 오늘은 복장에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아서 착용하지 않았습니다.”

질문을 들은 레너드가 바짝 긴장한 채 나를 바라보았다.

아마 이전에 내가 악기 관리와 같은 사소한 것에도 평을 내놓아서 그렇겠지.

당연한 일이다.

연주가에게 악기는 분신이나 마찬가지.

그리고 악기의 상태는 곧바로 소리로 연결되기 마련이다.

그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면 감점 사유가 되었겠지만, 지금은 결이 달랐다.

‘통일성을 강조하기 위해 한 선택이겠지.’

4팀 팀원들의 복장을 보니 쉽게 유추할 수 있었다.

모두 맞춘 듯 검은 연미복을 입으면서도, 4팀 팀원들은 통일성을 위해 붉은 행거치프를 꽂은 상태였으니까.

검은색과 빨간색의 조화에 하얀색 헤어밴드가 어울리지 않다고 생각했을 터.

팀으로 경연이 이뤄지는 만큼, 본인의 복장을 과감하게 포기한 것을 알 수 있었다.

문제는 그 때문에 소리가 틀어진다는 것은 미처 예상하지 못한 듯했다.

“레너드씨, 다른 사람보다 땀이 많은 체질이시죠?”

내 물음에 레너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와 동시에 레오와 다니엘, 그리고 4팀 팀원들도 레너드를 바라봤다.

이마에 땀이 맺힌 정도에 그친 다른 팀원과 달리 레너드는 머리칼이 젖을 정도로 많은 땀을 흘리고 있었다.

드럼 자체가 온몸을 사용하는 악기인데다, 땀이 많은 체형이 겹친 탓에 드럼 이곳저곳에는 땀방울이 떨어져있었다.

심벌즈에는 금속이 반짝이는 게 보일 정도.

몸에 가장 가까운 스네어 드럼(Snare Drum)과 플로어 탐(Floor Tom)에는 고였다는 표현을 쓸 수 있을 정도로 땀이 흥건했다.

‘땀 때문에 떨림이 약해져.’

아주 미세한 차이지만, 내게는 충분히 들렸다.

특히, 스네어 드럼의 경우 얕고 자주 소리를 내어야 하는데, 땀 때문에 진동이 줄어드니 소리가 퍼지는 시간이 현저히 줄어들었다.

“이미 복장 통일을 하려는 노력은 보았습니다. 괜찮으니 헤어밴드를 착용하고 다시 연주해주세요.”

누구의 의견인지 알 수 없으나, 복장 통일을 시도했다는 것만으로 가산점이다.

중주(重奏)은 다양한 악기가 모이면서도 하나의 악기처럼 보여야 하니까.

만약 무대에 오른다면 머리카락과 비슷한 색깔로 맞추면 될 터.

하지만, 연습에도 바빴을 콩쿨 무대에 그러한 것을 바랄 순 없을 것이다.

게다가 땀은 신체적 특징인데 그것으로 감점을 매기는 것도 어불성설이지 않은가.

“충분히 시간을 가지고 연주를 재개해주세요.”

일반적인 연주가였다면 이 시점에서 이미 심리적으로 위축되어 연주를 포기했으리라.

하지만, 4팀은 전혀 그러한 점이 없었다.

레너드 또한 자신의 잘못이 아님을 깨닫고는 곧바로 헤어밴드를 착용하고 비장한 눈빛으로 연주를 재개했다.

게다가 이번에는 땀이 드럼에 닿지 않게 하려는 듯.

몸을 뒤로 빼고 연주를 하는 순발력도 보였다.

4팀이 깔끔하게 연주를 마무리하고 내려가자 이어서 마지막 팀이 올라왔다.

5팀이 자리 잡음과 동시에 레오와 다니엘도 자세를 다잡았다.

“개인적으로 이 팀이 가장 관심이 갑니다. 지현이라고 했던가요? 피아니스트의 선율이 무척 매력적이었습니다.”

“이하동문입니다. 하지만 저는 기타리스트에 조금 더 눈길이 가네요.”

피아니스트 지현과 클래식 기타리스트 준모가 속한 팀이었다.

짧게 심사위원석을 향해 인사를 건넨 그들은 곧바로 연주에 돌입했다.

피아노의 선율이 마치 선장처럼 연주의 포문을 열었다.

“하.”

서장에 돌입할 때부터 다니엘이 감탄 섞인 탄성을 내뱉었다.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낸 다니엘이 사뭇 놀란 듯 손을 입가에 가져갔다.

5팀이 선택한 곡은 <동행>.

검소한 스미스 교황의 뜻에 맞춰 화려하지 않게 만들어진 행진곡인데.

5팀의 연주 또한 화려하지 않게, 되레 담담하고 경쾌함이 더해진 채 나아갔다.

특히 두 사람이 기대한 만큼, 지현과 준모의 연주가 돋보였다.

‘누가 깃발을 들었는지 알겠네.’

마치 내가 <개화>를 지휘했을 때처럼.

지현이 펼치는 <동행>의 선율은 묘하게 지휘의 느낌을 띠고 있었다.

정확한 박자에 맞춰 특정 음을 반복적으로 치며 리듬감을 부여하고, 이에 네 악기가 박자에 맞춰 정확한 선율을 표현해낸다.

그중 가장 유려한 선율을 내보이는 것은 준모였다.

일주일의 기간 안에 새로운 기타를 가져온 것인지, 멀끔한 기타에 준모의 손이 더욱 화려하게 움직였다.

기타 특유의 경쾌함이 사뭇 피아노의 우아한 선율에 어울리지 않을 법도 하건만.

되레 은은한 피아노 음색에 포인트를 주듯 기타의 튕김음이 적절하게 들어갔다.

마치 지현의 피아노 음색은 고고한 교황을, 준모의 기타 선율은 그런 교황 곁에서 걸어가는 아이들을 연상케 했다.

두 사람이 2중창을 선보여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말끔한 전개.

단원들의 시선 또한 두 사람에게 고정된 것이 느껴질 정도였다.

“더 들어보지 않아도 될 수준입니다.”

다니엘의 평에 레오도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껏 올라왔던 무대 중에 가장 완벽한 것은 물론, 중창의 특징을 가장 잘 살렸다고.

심지어 두 사람은 5팀에서 우승자가 나올 것이라는 호언장담까지 내놓았다.

“피아노의 리드가 이번 연주의 꽃 아니겠습니까? 결선에서도 저 면모가 그대로 드러나면 이미 게임은 끝난 거나 다름없습니다.”

“하지만, 결선을 고려하면 기타리스트도 만만치 않죠. 조금 어려울 수 있겠지만, 그 길을 준모씨가 찾아낸다면 단연 우승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레오와 다니엘의 의견이 팽팽하게 맞부딪쳤다.

서로의 의견에 동의를 하면서도 한편에서 지지하는 연주가가 조금 더 잘하길 원하는 듯한 눈빛.

한참 이야기를 나누던 둘이 도저히 답을 내지 못하겠다는 듯 내게 물었다.

“이안씨는 생각해둔 사람이 있습니까?”

다니엘과 레오, 두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내게 꽂혔다.

그들의 말대로 내 머릿속에도 한 사람이 떠올랐다.

이미 세 차례나 연주를 들어보지 않았던가.

실력은 물론, 순발력, 재치와 카리스마를 동시에 갖춘 연주까지.

비등한 사람들이 있었지만, 내 머릿속에 있는 참가자가 가장 유력한 우승 후보로 손꼽혔다.

“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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