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시작부터 천재 피아니스트-206화 (206/250)

206화

12명.

150만 명에 달하는 참가자 중 마지막 결선 진출을 앞둔 사람의 숫자였다.

어마어마한 경쟁률을 뚫고 들어온 만큼.

합격자들 사이에서 흐르는 긴장감은 지금껏 흘렀던 긴장감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렬했다.

그러나 서로를 시기하는 기운은 느껴지지 않았다.

오롯이 음악에 집중하려는 면모가 돋보이는 긴장감.

당장 ‘음악가’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기에 충분한 마음가짐이었다.

“3차 결선에 오른 여러분들. 축하드립니다.”

합격자들의 전공 악기 또한 다양했다.

피아노, 비올라 등 일반적으로 오케스트라에서 사용되는 악기를 비롯.

마림바, 캐스터네츠, 클래식 기타와 같이 생소한 악기들을 연주한 연주가도 있었다.

12명 중 단 1명.

영광의 우승을 차지할 사람은 단 하나였다.

“축하의 말씀과 함께 앞으로의 일정을 설명 드리겠습니다.”

이윽고 회의실의 불이 꺼지고, 스크린 화면이 떠올랐다.

일명, ‘리히트 별궁’.

퀸 엘리자베스 콩쿨의 뮤직 샤펠 제도를 차용한 프로그램이었다.

재단에서 마련한 호텔의 한층 전체를 활용, 외부와의 접촉을 완전히 차단된 상태.

마지막 3차 결선. 파이널 진출자 12명은 2주가량 이곳에 거주하면서 곡을 연습해야 했다.

“여러분의 연습을 저를 포함해 단원들이 도울 겁니다.”

내 발언에 합격자들의 표정이 한층 밝아졌다.

이미 단원들 하나하나 개인 팬클럽이 있는 것은 물론, 개인 기량이 널리 알려진 단원들이 대부분.

그것을 아는 합격자들이 묘한 기대감을 드러냈다.

단원들과 함께, 합격자는 별궁에서 마지막 과제를 준비해야 한다.

“그럼 과제곡을 전해드리겠습니다.”

내 손짓에 몇몇 단원이 12명의 진출자들에게 악보를 건넸다.

진출자들은 흥미로운 눈빛을 한 채 악보를 바라보았다.

“<미완>. 여러분의 과제곡이자 리히트의 새로운 곡입니다.”

그런데, 악보를 한 장씩 넘기던 참가자들이 비슷한 시점에서 표정을 구겼다.

무언가 이상함을 감지한 듯한 표정에, 참가자 중 한 명이 손을 들었다.

“단장님. 악보가 조금 이상한 것 같습니다.”

한 사람을 시작으로, 다른 참가자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의문을 표하던 다른 진출자들도 이내 악보를 넘기더니 눈을 휘둥그레 떴다.

당연한 일이었다.

이들이 보고 있는 악보에는 오직 오선지만 있을 테니까.

10분가량의 연주동안 약 2분에 해당하는 부분.

3악장 선율이 있어야 할 악보가 텅 비어있었다.

이 곡의 이름이 <미완>으로 지어진 이유이자, 이번 결선 진출자들이 완성해야 할 곡.

“총 40마디. 그 빈 자리를 여러분이 채우시면 됩니다.”

합주를 펼치되, 개인의 해석을 담은 곡을 만들어 독주로 펼치는 것.

그것이 이번 파이널 라운드의 하이라이트였다.

***

가온 호텔의 크리스탈홀.

리히트 오케스트라 전체를 담은 홀에서 선율이 뻗어 나왔다.

그중 단연 돋보이는 것은 이번 결선 진출자 중 한 명인 지현이었다.

2주의 시간 동안 리히트와 합을 맞춰볼 수 있는 횟수는 총 3번.

그 2번째 기회가 지금 펼쳐지고 있었다.

‘정말 놀라운 시간이었어.’

지현은 지나간 2주를 그렇게 표현했다.

‘별궁’이라 불린 호텔에서 보낸 시간은 22년 지현의 인생에서 가장 값진 순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전직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수석 피아니스트인 요한나의 조언을 받는가 하면, 다른 리히트 단원을 통해 작곡 파트에 대한 피드백도 받을 수 있었다.

처음에는 피아노 전공이 아닌 단원들에게 피드백을 받는 게 사뭇 걱정이었는데.

단원들의 입이 열리자마자 그 걱정은 단숨에 사라졌다.

“이 부분, 반전을 준 것은 좋은 것 같아요. 하지만 너무 빨리 꺼져버린달까요?”

“맞아요. 이 부분을 네 마디 정도 앞당겨도 연주에는 문제가 없을 거예요.”

바이올린 연주가, 에비게일과 첼로 연주가 서령.

두 사람의 코멘트에 지현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다른 악기를 전공하는데도 피아노의 선율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듯.

아주 사소한 부분에서도 피드백을 잊지 않았다.

되레 피아노 거장 둘에게서 배움을 받는 것 같은 느낌에 지현은 절로 질문이 튀어나왔다.

“리히트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모든 악기의 특성을 이해하고 있나요?”

“음… 엄밀히 말하면 악기보다 소리의 특성을 이해한다고 표현할 수 있을 것 같네요.”

악기가 아닌, 소리의 특성을 이해한다.

지현은 다소 아이러니한 답변을 단번에 이해하지 못했다.

악기마다 고유의 특징이 있는 것이고, 그 특징을 통해 소리가 나오는 것 아닌가.

그런데 악기의 특성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단원들이 소리를 어떻게 파악하는 것인지 알 방도가 없었다.

그러나 2주라는 시간이 흘러갔을 즘.

지현은 그 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음악을 느낀다는 말이 이거였구나.’

이안이, 리히트가 만드는 음악은 듣는 것이 아니라 느끼는 것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몇차례 단원들의 피드백을 듣고 마지막 협주 연습을 하는 날.

리히트의 단원들과 깊은 이야기를 나누고 참여한 협주는 사뭇 달랐다.

지금껏 피아노만 전공하고 다른 악기들은 들여다본 적도 없는데.

현악기 특유의 마찰음과 관악기들의 공기흐름, 타악기 가죽을 울리는 진동까지 모두 음악처럼 다가왔다.

과거 자신이 했듯 악보를 재현하는 데 그쳤다면 결코 느끼지 못했을 선율들이었다.

‘이걸 이안이는 진작에 깨닫고 있었구나.’

그제야 지현은 과거 이안이 했던 조언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악보의 선율을 완벽하게 이해한 후에는 자신의 생각을 깃들게 할 수 있으니까.

어떤 악기가 연주하는지는 상관없었다.

어떤 소리를 선율에 넣을지 중요할 뿐.

현악의 선율에는 우아한 음색을 더하고, 관악에는 울림을 크게 만들 강인한 소리를 덧댄다.

타악은 자칫 과한 소리를 합치면 시끄러워질 수 있으니 빈자리에 소리를 내게 반 박자씩 느리게 큰 소리를 낸다.

이안이 그린 <미완>을 이해하고, 그것을 비로소 내 것으로 완성하고 나서야 길이 보인 것이다.

<미완>을 완성했다는 생각에.

연주를 마친 지현은 땀을 닦기도 전에 이안을 쳐다봤다.

순간, 지현의 눈에 들어온 이안은 자신과 같은 나이가 아니었다.

수십 년의 시간을 건너온 거장을 보듯.

이안을 보는 지현의 시선에 존경심이 어렸다.

***

‘내가 여기까지 와있다니.’

클래식 기타를 집은 준모는 지금 이 상황이 놀라우면서도 어색했다.

이안 국제 콩쿨의 파이널 라운드, 결선 무대.

여태 콩쿨은커녕 남들 앞에서 연주를 펼친 경험도 전무후무한 자신이 여기까지 올 수 있을 줄은 몰랐던 것이었다.

‘엄청난 실력자들 사이에서 내가 할 수 있을까?’

호텔에서 머무는 2주.

준모는 몇 번이고 경쟁자들의 연주를 지켜봤었다.

매번 볼 때마다 드는 생각은 ‘나보다 잘하는 것 같아.’였다.

우아한 하프의 선율과 화려한 피아노의 음색, 심지어 캐스터네츠는 약간의 무용이 더해져 고혹적이기까지 하지 않았던가.

꼴지만 하지 않길 바란다고 생각했건만.

이안은 준모가 완벽하다 생각했던 연주에도 가차 없는 평을 내놓았다.

“핀씨. 지난 피드백에 화음이 단조로운 것 같다는 피드백이 있었던 것 같은데 안 바뀌었네요.”

하모니카 연주가, 핀이 난색을 표했다.

마치 더 이상 어떻게 하냐고 항변하는 듯한 표정.

하지만, 하모니카를 어떻게 부는지, 어떤 선율까지 표현할 수 있는지 알지 못하던 준모도 핀의 연주가 빈약한 것은 알 수 있었다.

분명 이안이 세 번째 합주 이후에 발전한 모습을 기대하겠다고 말했는데.

그때와 별반 다를 바가 없었다.

“게다가 반 숨씩 늦게 들어가시더군요. 긴장하셨나 봅니다.”

반 숨.

표현하기에 큰 것처럼 느껴지지만, 32분음표 하나가 채 되지 않는 속도의 소리였다.

눈 깜박하는 순간 지나가는 소리인데.

그 사소한 것까지 이안은 놓치지 않았다.

‘하긴, 여기서 긴장 안 되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

대기하던 준모가 물끄러미 객석을 바라보았다.

20만 명을 수용할 수 있다던 경기장에 사람들이 바글바글했다.

이것이 콩쿨장인지, 유명 연예인의 콘서트인지 알 수 없을 정도.

그런 사람들 앞에서 긴장하지 않는 것은 쉽지 않는 일이었다.

준모도 당장 자신의 무대를 떠올리자 손이 떨릴 지경이었으니까.

‘침착하자. 연습했던 대로만 하는 거야.’

준모는 눈을 감은 채 지난 연습을 떠올렸다.

그의 머릿속에 지난 2주라는 시간이 스쳐 지나갔다.

나일론 줄에 손가락이 붉게 물들고, 심할 때면 핏방울이 맺히기도 했던 시간.

하지만, 준모는 그 시간이 되레 그리울 지경이었다.

‘처음으로 음악을 진지하게 할 수 있는 순간이었어.’

그에겐 대부분의 시간이 연습뿐이었으니까.

포크 기타는 아이돌들이나 여타 방송에서 자주 등장하는 까닭에 배울 수 있는 곳이 많았지만, 클래식 기타는 아니었다.

남들이 연주를 하며 노래를 부르는 포크 기타에 빠져있는 사이.

준모는 한 음 한 음을 연이어 펼치는 클래식 기타에 매료되었다.

마치 실이 얽혀 옷감을 만들어내듯, 철저하게 짜여진 음표들이 하나의 화음을 만들어내는 것이 신비했으니까.

준모는 그 체계적인 짜임새를 <미완>에 입히고 싶었다.

“여러분이 원하는 대로 연주하세요.”

처음 <미완>에 대한 미션을 들었을 떄.

준모를 비롯한 다른 진출자 모두가 술렁였다.

모든 곡에는 창작자의 의도가 깃들기 마련.

그 의도를 어떻게 파악하고, 파악한 의도를 어떻게 새롭게 선보이는지가 콩쿨의 관건이었다.

그런데 ‘원하는 대로’라니.

그러나 이어지는 이안의 말에 준모는 물론, 다른 참가자들의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어렸을 때 하던 색칠 놀이를 떠올려보세요. 틀이 주어져 있지만, 그걸 어떤 색으로 채우는지는 본인의 몫입니다. 단색으로 칠할 수도 있고, 명암을 넣을 수도 있겠죠. <미완>은 그런 빈칸이 있는 곡입니다.”

전문 교육을 받지 않은 준모에게도 이안의 <미완>은 무척 쉬웠다.

대부분 익숙한 화음들의 연속으로 만들어진 곡이니까.

도미솔, 도파라, 솔시레 등 초등학교 때 기억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을 법한 화음들이었다.

기타 연주를 위해 코드를 익혔던 준모도 그 정도 상식은 있었다.

그러한 기본을 시작으로 만들어낸 준모의 <미완>.

그 시작이 펼쳐지고 있었다.

‘그저 연습하던 대로 하자.’

매번 집에서 연주할 때도 그리하지 않았던가.

지금 와서 거창한 변화를 꾀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욕심이리라.

그렇기에 준모의 머릿속에는 단 하나.

이안이 말해준 대로, 리히트 단원들이 피드백해준 대로, 그리고 그 의견들을 모아 연습을 했던 대로.

준모의 손가락이 현란하게 현을 튕겼다.

아르페지오 선율로 오케스트라를 아우르듯.

잔잔하면서도 힘 있는 튕김이 무대를 가득 메웠다.

때로는 약세를 보이면서 반주처럼 선율을 펼치다가도, 강세를 보일 때는 마치 오늘의 주인공이 자신이 된 양 강렬한 선율을 내뱉는다.

대망의 클라이맥스.

준모는 그동안 갈고 닦은 선율을 마음껏 펼쳤다.

파가니니와 리스트의 압도적인 속도를 그대로 펼치듯, <미완>의 곡에 기타 선율이 빠르게 번져나간다.

압도적이고 강렬한 튕김음에 객석에서는 숨을 참는 소리가 연이어 들려왔다.

마치 그동안 무대에 올라간 적 없는 자신의 모습을 모두 내려놓듯.

준모는 연주를 마침과 동시에 상쾌한 미소를 한 채 하늘을 쳐다봤다.

준모를 마지막으로 콩쿨의 무대는 모두 끝났다.

이제 수상자 발표만 남은 상황.

총 12명의 결선 진출자 중, 이안에게 혹평을 받은 6명은 시상의 기회도 받지 못하고 탈락했다.

남은 6명의 순위가 역순으로 차례대로 밝혀졌다.

6위, 5위, 4위, 3위까지…

어느덧 무대 위에는 1위와 2위 결정만 남겨두고 있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준모와 지현이 올라와 있었다.

1위 발표를 앞둔 상황.

무대는 물론, 객석에서도 정적이 흘렀다.

“우승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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