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시작부터 천재 피아니스트-207화 (207/250)

207화

예선부터 본선까지 약 2개월.

오랜 시간 진행되었던 ‘이안 국제 콩쿨’이 막을 내렸다.

참관하던 관객들은 물론, 단원들도 자리를 비운 상황.

종합운동장에 마련된 무대에는 나 혼자만 있었다.

세상 사람들은 이번 ‘이안 국제 콩쿨’을 여러 음악 베테랑과 유망주의 축제이자, 새로운 교환의 장이라고 평가하고 있었다.

[이안 국제 콩쿨 참가자, ‘탈락했음에도 여운이 남는 최고의 콩쿨.’]

[국제 콩쿨 연맹 사무총장, ‘이안 국제 콩쿨은 앞으로 콩쿨이 가야 할 방향성을 제시해…’]

[영국 4대 오케스트라 단장 일동, ‘이안은 우리보다 더욱 위대한 마에스트로’라고 표현하여 클래식 팬들의 경악을 안겨…]

수많은 언론사들이 연이어 콩쿨에 대한 권위자들의 호평을 늘어놓고 있었다.

콩쿨에 참가했던 사람들을 필두로, 이번 콩쿨을 제안했던 사무총장 베니, 그 이외에도 전 세계에 포진된 마에스트로들이 연이어 반응들을 내보이고 있었다.

주변 사람들은 연이어 대단하다, 놀랍다, 믿을 수 없다 등 온갖 평을 내놓는데.

여전히 나는 담담하기만 했다.

기쁨이 없거나 환희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저 내 머릿속에는 앞으로 가야 할 길이 더욱 많이 떠오른 것뿐이다.

위대한 음악가가 되겠다.

처음에는 ‘위대한 피아니스트가 되겠다.’라고 했던 것이 어느덧 ‘음악가’라는 포괄적인 개념으로 넘어왔다.

전생의 기억에 담겨있던 거장들의 곡들을 그대로 펼쳐내고.

그 기억과 지식을 토대로 새로운 곡을 창작해내며.

지금은 피아노를 넘어 음악 전체의 선율을 이해하고 펼쳐내는 것까지.

배움에는 끝이 없다는 말이 있듯.

나도 같았다.

르네상스를 시작으로 바로크, 로코코, 낭만주의를 거처 지금의 현대 음악까지 오기까지.

수많은 거장들의 곡을 수학한 덕에 지금의 곡들이 만들어질 수 있었다.

거장들의 정신을 이어받듯.

그들이 어떻게 자연을, 사람을, 인생을 곡에 녹였는지 해석하고 표현했는지 배우지 않았던가.

‘그러니 앞으로 나는 더욱 발전해야겠지.’

지금이 내 인생의 제1악장일지, 2악장일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아직 나는 선보이고 싶은 음악이 많았고, 그 음악을 만들어내기에는 리히트를 비롯 여러 악기의 소리가 필요할 테지.

모르는 악기는 듣고, 특성을 파악하여 내 것으로 만들 뿐이다.

한창 생각에 잠겨있던 찰나.

내 어깨를 누군가 두들겼다.

한때 눈까지 가릴 정도로 고개를 숙이고 다녔던 지현이 밝은 표정을 한 채 웃어 보였다.

“연주 실력이 엄청 늘었던데?”

“다 네 덕이지. 고마워 이안아.”

지현은 이번 이안 국제 콩쿨에서 2위를 달성했다.

하지만, 2위라고 해서 1위보다 부족한 것이 아니었다.

1위인 준모는 더 큰 발전 양상을 보여 그 발전 가능성을 높게 평가한 것.

실력을 평가하자면 준모와 지현 중 우위를 다툴 수 없을 정도였다.

“드디어 함께할 수 있게 되었네. 잠깐, 그러면… 단장님? 어떻게 불러드릴까요?”

1위부터 6위까지 주어진 수상 혜택.

리히트 오케스트라에 들어올 수 있는 기회에 모든 수상자들이 입단을 결정했다.

어디까지나 수상 ‘혜택’이라 자율에 맡겼는데.

되레 수상자들이 당연한 것 아니냐며 일제히 리히트의 새 식구가 되었다.

지현은 내게 여전히 ‘이안’이라고 불러야 할지, 아님 ‘단장님’으로 불러야 할지 어색하다는 듯.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나도 단장님이라 불러드려야겠습니다.”

그때, 잿빛 양복을 입은 사람이 무대 위로 천천히 걸어 올랐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아저씨.”

지현의 아버지이자, 국내 정재계 1위 회사.

서천 그룹의 수장이 무대 위로 올라오고 있었다.

***

이안은 필무가 있다고 해서 지현에 대한 과장된 호평을 늘어놓지 않았다.

충분한 실력이 있었지만, 준모의 성장 가능성을 조금 더 높이 평가했노라고.

핑계가 아닌 진실을 고스란히 이야기하는 이안의 모습은 ‘젊은 거장’이라는 타이틀이 왜 붙었는지 고스란히 증명하고 있었다.

“수고했다 지현아.”

필무가 지현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이전에는 매번 제 엄마에게 2등만 한다고 구박받지 않았던가.

2등도 결코 낮은 등수가 아닌데.

이번에도 그때를 다시 떠올리며 풀이 죽어있을까 봐 걱정스러웠다.

하지만, 필무의 걱정과 달리 지현의 표정은 무척 생글했다.

“괜찮아요. 제가 보여줄 걸 다 보여줬으니까요.”

괜찮다.

예전이라면 자신의 걱정을 애써 감추기 위한 말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지현은 필무를 똑바로 바라본 채 이야기를 이어가고 있었다.

2등을 생각하는 것이 아닌, 이안 국제 콩쿨에 결선에 진출했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자신의 목표를 달성했다고 말하는 듯.

필무 또한 지현을 따라 미소를 지었다.

“먼저 가 있을래? 이안이랑 이야기 좀 하고 갈게.”

“무슨 사업 이야기를 하시려고요?”

지현은 장난스레 필무에게 볼멘소리를 냈다.

이제 콩쿨을 끝내고 좀 쉬게 놔두지… 하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필무의 성정을 무척 잘 아는 지현이었기에.

지현은 이내 필무의 말대로 자리를 비켜주었다.

“할 말 있으신가요?”

순간, 이안의 태도가 순식간에 바뀌었다.

지현을 앞두고 있을 때는 그저 20대 어리숙한 청년처럼 보였는데.

지금은 필무와 버금가는 재력가와 대화하는 듯, 이안에게서는 묘한 아우라가 펼쳐졌다.

되레 필무는 그런 이안의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

한때 뛰어난 사업가적 면모에 감탄하지 않았던가.

이번에 남은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앞으로 열릴 이안 국제 콩쿨의 공식 후원사가 되고 싶다.”

본래 클래식, 오케스트라와 같은 음악에 관심이 많던 필무였지 않은가.

하지만, 이번에는 그러한 단순한 관심 이상의 것을 추구하고 있었다.

국내에도 이미 국제 콩쿨 연맹에 등록된 콩쿨이 많지만, 이안 콩쿨만 한 것은 없다고 생각한 상태였다.

게다가 이번 콩쿨에는 참관을 한 사람만 수만 명이 넘지 않은가.

입장료만 받아도 셀 수 없는 수익을 얻는 데다, 광고효과까지 누릴 수 있는 기회.

사업가로서 이런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하지만, 이안은 그런 여러 비전을 얘기하기도 전에 결론을 내렸다.

“마음은 알지만, 당장은 힘들 것 같습니다.”

“이유를 물어봐도 될까?”

“타이밍이 좋지 않잖아요.”

이안이 눈짓하듯 한쪽을 쳐다봤다.

이안이 본 방향은 지현이 나간 방향.

그걸 본 필무는 이안의 뜻을 곧바로 눈치챌 수 있었다.

“지현이가 2등에 입상한 직후에 후원이 들어오면 풍문이 돌 수밖에 없을 겁니다.”

지현이 필무의 딸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었으니까.

콩쿨 입상자의 부모가 콩쿨 직후 곧바로 주최사에 후원을 한다면 부정 청탁에 의혹이 돌 수 있었다.

사실이 아니라 한들, 소식은 부풀려질 것이고, 거짓이 진실로 둔갑되겠지.

필무도 이미 익숙한 수순들이었다.

게다가 이안이 후원을 거절한 이유는 하나 더 있었다.

“사소한 풍문이지만, 시선이 집중된 만큼 서천 그룹의 타격도 적지 않을 거예요.”

필무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룹에 타격이 갈 것이라는 예상은 필무조차 하지 못한 생각이었다.

특히 이안이 집중한 것은 국내가 아닌 국제였다.

“경쟁사들에게는 좋은 먹잇감이 되겠죠.”

이안의 말대로 지금 이안 국제 콩쿨에는 대한민국뿐만 아니라, 세계 각지의 이목이 집중된 상태.

만약 풍문이 퍼져버리면 서천과 경쟁하는 여타 국제 규모의 회사들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자그마한 소문만으로도 주가가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이 이 바닥이지 않은가.

아주 사소한 의심으로 금값인 주가가 휴짓조각으로 전락할 수 있었다.

“이미 재단에 많은 후원을 하고 계시잖아요. 그걸로도 충분합니다.”

잠깐이나마 필무는 이안의 나이를 착각했다.

이 모든 생각이 22살의 머릿속에서 나올 수 있는 생각일까.

어찌 보면 자신보다 더 많은 세월을 산 사람에게서 나올 법한 생각을 저리도 쉽게, 곧바로 꺼내놓을 수 있을까.

평소라면 뜻을 굽히지 않는 필무였건만.

이안의 혜안에 감탄한 필무는 두 손을 들며 항복 표시를 전했다.

***

영국 그라모폰.

1923년에 창간하여 매달 잡지를 발행하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클래식 음반잡지사였다.

고전 음악에서는 그라모폰을 이길 곳이 없다고 할 정도.

이미 현장에서 뛰어난 커리어를 쌓은 비평가들의 질 좋은 비평들이 실리는가 하면, 새로 나온 클래식 음반도 하루가 채 되지 않은 시간에 비평할 정도였다.

이러한 양질의 비평과 엄청난 속도는 업계에서도 손꼽혔다.

그런 그라모폰에게도 이안은 엄청난 존재였다.

이미 그라모폰 어워드에서 올해의 오케스트라상을 수상했는데.

수상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시점에 벌써부터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지 않은가.

특히 이안 국제 콩쿨 진행 소식에.

팀장급 인원이 한국을 찾았다.

루디 알렌.

그녀는 잡지팀 팀장으로서 그라모폰 어워드 투표권까지 가지고 있는 인물이었다.

‘정말 대단한 인물이라는 표현으로는 부족한 사람이라니까.’

이안이 그라모폰 어워드를 수상하는 날.

루디 또한 그 자리에 있었다.

여왕의 초청을 받아 왕립음악대학에서 강연을 하는 것은 물론, 수백 년 전통의 오케스트라가 수상한 상을 고스란히 이어받을 정도의 오케스트라를 거느리는 젊은 거장.

이안을 직접 목도한 루디는 연신 감탄을 금치 못했다.

모차르트, 베토벤과 같은 고전의 거장을 비롯해 차이코프스키, 지베르만 같은 현대의 거장들도 이러한 행보를 보이진 않지 않았던가.

이안이 음악계에 모습을 드러낸 지 이제 겨우 2년째이다.

하지만, 그동안 해온 행보는 숱한 거장에 비견할 정도.

22살 이안이 거장과 비슷한 나이가 되었을 때 어떤 길을 갈지 예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런 인물의 이름을 딴 콩쿨이 열린다면 당장 가야지.’

처음 한국행임에도 이안 국제 콩쿨이 펼쳐지는 종합운동장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콩쿨 개최 소식에 서울시에서도 발 벗고 나섰으니까.

고개를 돌리면 이안에 대한 홍보 팜플렛이 걸려있고, 오죽하면 인천과 김포 공항에는 종합운동장으로 바로 가는 셔틀버스가 만들어질 정도였으니까.

루디 또한 셔틀 버스를 타고 편안하게 콩쿨이 펼쳐지는 곳으로 올 수 있었다.

‘이게 무슨 콩쿨장이야?!’

루디는 종합운동장에 마련된 무대를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콩쿨인줄 모르고 보면 가히 연주회 무대를 연상케 할 정도 아니던가.

되레 이안이 의도적으로 실전 감각을 파악하기 위해 무대를 만든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게다가.

‘사람들이 무슨…’

객석을 가득 메운 사람들.

게다가 본선을 거듭해 갈수록 객석에 사람들이 많아지는 모습에 루디도 혀를 찰 정도였다.

만약 기자의 신분으로 자리를 얻지 못했다면 제아무리 그녀였다고 한들 들어올 수 없을 정도.

마지막 결선이 펼쳐진 날에는 20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객석이 가득 찰 정도 아니었던가.

수 없이 취재를 나가봤던 루디도 이런 콩쿨은 처음이었다.

콘서트장을 방불케 하는 인원이 모인 콩쿨이자, 참여자들의 연주 또한 놀라움의 연속.

오직 리히트가, 이안이기에 가능한 콩쿨이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이재 취재가 모두 끝났으니.

루디 또한 본국으로 귀국할 준비를 했다.

그러던 그때, 그녀의 눈길을 사로잡은 사람이 하나 있었다.

모두가 떠나가 텅 빈 객석에 앉아있는 한 여인.

그런데 루디는 그 여인이 낯설지 않았다.

‘저 사람…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데.’

겉으로 보기에는 그저 흔한 노파나 다름없었다.

새하얀 백발에 등이 굽은 동양인.

그러나 무대를 바라보는 눈길만큼은 서슬 퍼런 것이 엄청난 노련함이 엿보였다.

설마.

외모를 보고 루디의 머릿속에서 한 인물이 떠올랐다.

모든 음악 평론가들의 선망을 한 몸에 받는 인물이자, 음악 평론계의 살아있는 거장이라고 불리는 사람.

바로 그 사람이 루디의 눈앞에 있었다.

‘대박 인터뷰 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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