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시작부터 천재 피아니스트-208화 (208/250)

208화

“이 늙은이를 먼저 알아봐 줘서 고마워요.”

“아닙니다 선생님. 저 같은 음악과 언론에 몸담고 있는 사람이 선생님을 모르면 쓰나요.”

그라모폰 잡지사의 팀장, 루디는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하지만, 그녀의 말에는 일말의 아양은 없었다.

왜냐하면 루디의 눈앞에 있는 백발의 노인은 정말로 그런 사람이었으니까.

노다메 히세이시.

일본 최초의 여성 피아니스트로 이름을 올린 사람이자.

평론계에서는 그녀를 ‘평론계의 교과서’라고 평할 정도인 인물이었다.

“노다메 히세이시의 붓은 칼과 같고, 연주는 총과 같다.”

1960년경.

현대음악의 거장, 이고르 스트라빈스키는 스무 살의 노다메를 보고 이렇게 표현했다.

일찍부터 음악에 재능을 드러낸 그녀는 연주뿐만 아니라, 뛰어난 청음력으로 수많은 음악가에게 강평(講評)을 내놓곤 했다.

자존감 높기로 유명한 음악가들도 노다메의 평에 혀를 내두를 정도.

평가를 받아들이지 못하던 유수의 거장들도 노다메의 한 마디에는 절로 고개를 끄덕이곤 했다.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깨달음을 주는 강평의 연속.

그것이 노다메의 진가였다.

그런 인물이 이안을 찾아온 것.

루디에게는 놓칠 수 없는 기회였다.

실례를 무릅쓰고 인터뷰를 요청했건만.

노다메는 자신도 무척 반가운 듯 인터뷰 요청을 흔쾌히 수락했다.

인터뷰가 시작되자, 노다메는 되레 못한 이야기가 많았다며 여러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처음 피아니스트로서 이름을 알렸을 때부터, 오케스트라를 창단한다는 의사를 밝히고, 지금의 자리에 오르기까지.

노다메는 이안을 보고 ‘유일하게 즐길 수 있는 음악가’라고 표현할 정도였다.

“감히 표현하기에, 이안씨의 청음력은 인간의 수준을 벗어났다고 생각합니다.”

노다메의 말에 루디는 놀란 마음을 진정시킬 수 없었다.

평론계에서는 노다메의 청음력은 세계 제일이라고 정평이 났으니까.

지금껏 그 어떤 인물도 그녀의 청음력을 따라잡을 수 없다고 평했다.

하지만, 그런 노다메가 이안의 청음력을 탈인간, 자신보다 높은 수준에 있다고 평했다.

그 말만으로도 이안이 얼마나 대단한지.

또 노다메가 이안을 얼마나 높이 평가하는지 알 수 있었다.

“말로에 이런 무대를 참관할 수 있는 것만큼 기쁜 일이 있을까요. 이 노인네가 욕심을 부려본다면, 마지막 결선에 사용된 그 곡을 리히트 모두가 연주하는 것을 듣고 싶네요.”

노다메의 말에 루디도 절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모든 단원이 연주를 하는 것을 보였지만, 어디까지나 오디션을 위한 곡.

지금으로도 충분하지만, 분명 이안이라면 오디션 곡을 넘어 리히트의 오리지널 곡으로 만들 것이란 확신이 있었다.

게다가 이안 국제 콩쿨의 수상자는 리히트에 들어갈 수 있는 기회도 주어지지 않던가.

그들이 더해진 리히트가 어떤 소리를 낼지.

노다메와 루디가 동시에 기대감 어린 눈빛으로 무대를 바라보았다.

***

이안 국제 콩쿨을 보러 온 거장들은 셀 수 없이 많았다.

노다메를 시작으로 수많은 필하모닉급 오케스트라 단장들, 곡을 들으면 모르는 사람이 없는 명곡의 소유자 등 수많은 이들이 한국을 찾았다.

그중에는 패트리카도 있었다.

패트리카 쉐퍼.

그녀는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의 재단 이사장이었다.

도나우인젤페스트와 함께 유럽 축제의 양대 산맥을 이루는 세계 최대, 최고의 페스티벌인 잘츠부르크 페스티벌.

패트리카는 그 페스티벌을 지금의 명성으로까지 유지시키던 장본인이었다.

처음에는 그저 이안과 그 오케스트라, 그리고 숱한 음악가들을 본다는 가벼운 마음에 온 그녀였다.

하지만, 올해 잘츠부르크 페스티벌도 얼마 남지 않은 시점이라 그럴까.

무대를 보는 내내 그녀의 가슴 한편에서는 생각이 떠나가지 않았다.

‘살아있는 음악 천재.’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잘츠부르크가 낳은 세기의 천재이자, 3대 음악가의 반열에 오른 인물.

[피가로의 결혼], [돈 지오바니] 등 모차르트의 오페라는 수백 년이 지난 지금도 사랑받고 있지 않은가.

패트리카 또한 이안의 명성을 모르지 않았다.

피아니스트로서 이름을 날리고, 베토벤의 미완성 곡을 완성하기까지.

숱한 업적을 쌓아온 이안에 대해 항상 경외감을 가지고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런 패트리카의 의식에 직격타를 날린 사건이 하나 있었으니.

바로 이안이 뮤지컬과 오페라에 참석했다는 사실을 접한 것이었다.

‘어찌 저렇게 자연스럽게 곡을 만들어낼 수 있지?’

교향곡과 오페라 곡은 엄연히 다른 형태의 곡.

교향곡은 악기들이 연주의 주인공이지만, 오페라 곡은 아니었다.

선율에 힘을 쓰면서도, 그 선율이 오페라 가수들의 목소리를 해치지 않도록.

오페라 곡을 만드는 것은 튀지 않되 유려한 곡을 만들어야 한다는 아이러니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베토벤과 모차르트가 동시에 깃든 사람이다.’

베토벤이 가곡과 교향곡으로 악성(樂聖)이라고 불렸다면, 모차르트는 35살의 나이에 무려 600개가 넘는 작품을 만들며 불세출(不世出)의 천재라고 불렸다.

그저 과거에 존재하는 엄청난 천재, 명인일 줄만 알았는데.

그러한 과거의 전설들을 현재로 끌어오는 이안의 모습에 그저 어안이 벙벙할 정도였다.

‘이런 오케스트라는 처음이야.’

이사장 자리에 올라 숱한 오케스트라를 봐왔건만, 이런 마음이 떠오르는 것은 처음이었다.

본선에서 결선에 이르기까지.

이안과 리히트 오케스트라를 바라보는 패트리카의 눈에는 더욱 기대감이 차올랐다.

오랜 세월 음악 무대를 바라봐왔던 그녀였기에.

무대를 진행하는 단원들의 표정, 눈빛만 봐도 그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었다.

연주에 대한 의무감과 책임감. 그 정도는 모든 오케스트라 단원이 가지는 기본 소양이었다.

하지만, 말로 차마 형용할 수 없는 생기와 자신감, 행복감은 그동안 숱한 오케스트라에서도 느끼지 못한 기운이었다.

그것만으로도 패트리카는 단원들이 얼마나 음악을, 리히트를 사랑하는지 알 수 있었다.

‘저들이 우리 축제 무대에 오르게 되면 얼마나 좋을까.’

잘츠부르크 페스티벌.

1920년부터 이어져온 깊은 역사를 가진 축제.

모차르트의, 모차르트에 의한, 모차르트를 위한 축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축제였다.

무대에 오르는 지휘자, 연주가 모두 세계 최정상급 인물들이다.

아마 이안이 참여한다면 그들 중에서도 정점을 찍겠지.

이안이 참가한다면, 지난 베토벤 재단의 행사처럼 모차르트가 돌아왔다는 표현을 써도 무방할 정도였다.

게다가 패트리카의 가슴 한편에는 가능성도 두고 있었다.

‘오스트리아에서도 그 기적을 펼칠 수 있을까?’

비엔나에서 펼쳐졌던 베토벤 행사.

사람들은 이안의 <조우>를 보고 베토벤을 현실로 끌어오는 기적을 행했다고 평가하곤 했다.

이안이라면 모차르트도 가능하지 않을까.

그 일말의 가능성을 껴안은 채.

패트리카는 강렬한 열망을 한 눈빛으로 이안을 바라봤었다.

***

이안에 대한 뉴스는 하루가 멀다고 올라왔다.

이안 국제 콩쿨이 끝난 지 일주일이 넘어간 시점이었는데.

그럼에도 뉴스 한편에는 항상 이안에 대한 소식이 올라오곤 했다.

특히 며칠이 지난 지금.

이안 국제 콩쿨을 참관한 거장들의 인터뷰가 줄을 이었다.

그중 현철을 놀라게 만든 인물은 따로 있었다.

[노다메 히세이시. ‘이안의 청음력은 탈인간적 수준’이라고 평가.’ 논할 수 없다고…]

인터뷰 사진에 맺힌 노다메의 사진.

현철은 그녀의 모습을 보자마자 등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염라’라는 이름으로 단원들을 호령했던 현철이었건만.

백발이 성성한 노다메의 얼굴에는 10년 전 현철이 봤던 강렬한 인상이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10년 전, 대한 오케스트라의 연주를 본 노다메는 강평을 아끼지 않았다.

무섭고, 뻣뻣하고, 고지식한 음악가.

노다메가 현철의 연주를 바라보고 내뱉은 첫 마디였다.

사뭇 현철을 폄하하는 것에 가까운 말투들이었지만, 그 이유들을 들었을 때 현철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무대에 오르기 전까지 수백 번에 가까운 생각과 해석을 한 곡이었건만.

노다메는 그러한 현철의 생각을 꿰뚫어 보기라도 한 듯.

해석의 특이점을 잡아내는가 하면, 그 생각을 어떤 방법으로 강화할 수 있는지까지 알려주기도 했다.

빙판 위의 피아니스트라고 불리는 현대의 피아노 거장에게도 ‘무식한 도전가’라고 칭할 정도로 숱한 음악인들을 웃고 울렸던 노다메.

칭찬과 평론, 잔소리를 오가는 평론에 살아있는 거장이라는 타이틀을 가진 인물이었다.

문득 노다메의 평론을 떠올리던 현철의 머릿속에 대한에서의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처음 지휘봉을 들고, 사람을 모아 대한을 창설했을 때의 이야기.

수많은 사람들이 나가고, 들어옴을 반복하여 지금에 이르기까지.

자꾸만 지휘석에 있던 자신이 떠올랐다.

‘쓸데없는 이야기를 해가지고.’

계속 잊으려고 노력했건만.

현철의 머릿속에서는 계속해서 이안과 나눴던 대화가 떠나지 않았다.

대한 오케스트라의 기념 무대에 지휘를 맡아달라는 다니엘의 부탁.

현철이 어떤 선택을 하든 존중하겠다고 했던 이안의 말이 자꾸만 머릿속에 맴돌았다.

하지만, 현철은 이안에게 뭐라 할 처지가 아니었다.

지금 현철이 고뇌하는 것은 비단 이안의 말 때문만은 아니었으니까.

현철은 누구보다 자기 자신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이미 마음이 정해졌다면, 아무리 이안이 대신 부탁했다 하더라도 제안을 거절했으리라.

사리분별이 깔끔하고, 효율에 대해서는 예외가 없었던 그였으니까.

하지만, 이번에는 좀처럼 생각이 떨어져 나가질 않았다.

이미 그 시점부터 자신이 이렇게까지 떨치지 못하는 것은 분명 무언가 있는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다만, 이미 굳혀놓은 ‘염라’의 이미지를 생각하며 고뇌에 빠졌다.

‘그 양반이 나를 제대로 봤군.’

현철의 입에서 헛웃음이 나왔다.

어쩌다 보니 뻣뻣하고 고지식하다고 평가했던 노다메의 말과 정확히 맞아떨어지지 않은가.

현철 또한 지금의 상황이 자신의 고집으로 벌어진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이안의 말대로, 다니엘의 말대로 무대 한 번 오르면 그만인 것을.

그의 머릿속에는 그 이외의 것들이 자꾸만 스쳐 지나갔다.

이미 은퇴를 선언하고 무대에 오르는 것부터 어불성설이라 생각하는데.

그 한 번의 무대에 오르고 말 것이라면 무대에 오르지 않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자신이 더 많은 무대를 원할 것 같다는 생각도 있었다.

자신도 모르게 이안과 리히트에 눈길이 갔지 않던가.

현철은 그들을 바라보며 수없이 대한 때의 생각에 잠기곤 했다.

그저 과거에 대한 추억을 떠올린다고 생각했거늘.

그것이 아님을 깨달은 것은 얼마 되지 않은 상태였다.

그 때문에 종수와의 대화에서도 쉽사리 답을 내놓지 못했다.

‘어떤 염라로 기억되고 싶은가.’

현철은 그 질문에 대답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자신의 행동을 결정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 답을 찾기 위해 눈을 감으려던 찰나.

현철의 휴대폰이 시끄럽게 울렸다.

곧장 꺼내든 휴대폰에 떠오른 인물.

리히트 재단의 이사장, 황민호였다.

불과 몇 시간 전에 노다메를 비롯해 굵직한 인물들의 코멘트를 알려준 그였는데.

다시금 전화가 걸려온 것에서 무언가 있음을 눈치챌 수 있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자질구레한 인사를 생략하고 곧바로 본론을 묻는 질문.

현철의 나지막한 목소리에 민호도 사뭇 놀란듯 숨을 삼켰다.

그 사이에 몇 가지 제안이 들어왔다는 말과 함께.

민호는 전화가 한 통 왔다는 말을 내뱉었다.

-매니저님, 비엔나에서 손님이 올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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