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9화
도나우인젤페스트(Donauinselfest).
매년 6월에 펼쳐지는 도나우인젤페스트는 1984년부터 지금까지 이어온 축제였다.
역사는 여타 축제에 비하면 짧은 편이지만, 음악의 도시 오스트리아 비엔나와 응접한 덕에 엄청난 인기를 끌고 있었다.
각국의 음악 예술이 한데 모이는 축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
커다란 규모의 축제에, 별도의 제한 없이 자유롭게 즐길 수 있다는 장점에 매년 관광객은 물론, 축제에 참여하는 음악가도 해를 거듭할수록 늘어나고 있었다.
올해 참여 의사를 밝힌 팀만 무려 2천 팀.
주관사에서는 3백만 명의 관객이 몰릴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런 대단한 축제에 리히트가 빠져서 되겠습니까?”
회의실 책상에 앉은 축제 위원장이 거들먹거리듯 얘기했다.
이미 세계 음악의 중심에 있는 사람들 아니냐며.
그런 대단한 인물들이 도나우인젤페스트에 오는 것은 되레 당연한 일이라며 너스레를 떨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하지만? 알리코, 지금 이게 망설일 일인가?”
알리코라는 남자가 동의를 하면서도 머뭇거리자 위원장의 눈빛이 흉흉해졌다.
이미 이안은 모든 사람이 동의하는 대단한 거장이지 않은가.
그런 인물이 음악 페스티벌에 오는 것에 뭐가 문제인지 알지 못한다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알리코가 망설인 것은 그것 때문이 아니었다.
알리코 지글러.
그는 도나우인젤셀페스트의 음악감독으로서 누구보다 음악계를 정통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보통 음악가가 알리코 앞에서 커리어를 논하면 뼈를 추릴 수 없을 정도.
알리코는 숱한 오케스트라의 음악감독으로 있는가 하면, 이탈리아 오페라계에서도 꽤나 이름을 날리곤 했다.
특히 스칼라 극장.
세계 3대 오페라 극장 중 하나인 밀라노 스칼라 극장에서의 음악감독 경력은 제아무리 빼어난 사람도 얻지 못하는 기회였다.
그런 곳에서 명성을 쌓은 알리코였기에, 도나우인젤페스트의 총괄 음악감독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그러한 명성을 가지고 있기에 도나우인젤페스트의 총괄 음악감독으로 오를 수 있었다.
하지만, 알리코에게도 이안은 그저 태산 같은 존재였다.
‘그러한 거장이 올까?’
수십 년 경력을 자랑하는 자신만큼이나 커리어를 쌓은 이안이지 않은가.
이미 공식적으로 발표한 오리지널 곡만 18개.
일전에 오페라와 뮤지컬 곡을 위해 만들었던 변주곡과 교향곡을 포함하면 그 숫자를 손에 꼽기 힘들 정도였다.
알리코에게도 그 정도 커리어는 있었건만.
그가 수십 년을 통해 얻었던 것들을 이안은 단 2년 만에 얻지 않았던가.
천재라는 표현만으로는 부족하여 ‘젊은 거장’이라는 타이틀까지 단 인물.
그런 사람이 도나우인젤페스트에 올까에 대한 고뇌가 더해진 것이다.
‘이미 여러 곳에서도 러브콜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이니까.’
커리어를 비롯해 오랜 시간 음악계에 몸담았기에.
알리코 주변에도 만만치 않은 음악가들이 즐비했다.
오페라 극단을 시작으로, 굵직한 오케스트라의 마에스트로, 거대 음반사의 고위 관계자까지.
그 모두가 이안에게 러브콜을 보냈지만, 반응은 없었다고 표현했다.
남들의 제안 때문이 아닌, 자신의 철학에 따라 자리를 찾아가는 음악가.
알리코에게 이안은 그런 사람이었다.
‘혹시 모르지. 우리 축제의 모토에 동감해서 참여하겠다고 할 수도 있고.’
도나우인젤페스트의 모토가 무엇이던가.
자유로움.
장르를 막론하고 전 세계 뮤지션들이 서로의 선율을 선보이는가 하면.
별도의 입장료나 제한 없이 관광객 누구나 자유롭게 들어와 음악을 감상할 수 있었다.
국경과 인종의 경계를 넘어 그저 듣고 즐길 수 있는 소통의 장.
‘음악은 누구나 느낄 수 있어야 한다.’라고 밝혔던 이안의 철학에도 맞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조금의 가능성이 보인다면 시도하는 것이 알리코였기에.
이미 머릿속에서 계산을 끝마친 알리코가 축제 위원장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럼 제가 직접 섭외하고 오겠습니다.”
사실 알리코도 누구보다 이안이 이번 축제에 와주길 바라지 않았던가.
이미 명성을 비롯해 이안의 음악은 세계 최고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 인물을 섭외하는데 감히, 메일 하나 덜렁 날릴 수 없었다.
알리코가 생각하는 이안은 그런 인물이 아니었으니까.
동양에 삼고초려라는 말이 있지 않던가.
아무리 먼 길이라도 이안이라면 찾아가서 세 번 이상 머리를 조아릴 준비가 되어 있었다.
알리코의 열띤 반응에 위원장은 무척 만족스러운 듯 미소를 지었다.
그러더니 그는 지갑에서 무언가를 꺼내더니 대뜸 알리코에게 내밀었다.
검은색 카드에 금빛 데코가 완연한 카드.
속칭, ‘블랙카드’라고 불리는 한도 없는 카드였다.
이 카드가 이야기하는 것은 단 하나였다.
“무슨 수를 쓰든, 얼마나 비용이 들어도 상관없습니다. 모든 부대 비용은 내가 내겠습니다.”
알리코가 위원장과 함께 일한 지 어언 6년.
항상 쓸데없는 곳에서 깐깐하고 권위적이었던 위원장이 선녀로 보이는 순간이었다.
***
이른 오전.
나는 큰아버지와 함께 리히트 재단 사무실을 찾았다.
비엔나에서 손님이 올 거라는 연락이 왔다며.
이사장실에 들어와 잠깐 이야기를 나눌 즈음, 노크와 함께 한 남자가 들어왔다.
“알리코 지글러라고 합니다. 만나 뵙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정장차림에 들어온 남자는 자신을 알리코라고 소개했다.
그가 건넨 명함에 찍힌 직함, 음악감독.
나는 그가 도나우인젤페스트의 음악감독임을 알 수 있었다.
수년 전에는 지휘자 명장, 카라얀이 맡았던 업무.
그 자리를 받았다는 것만으로도 알리코의 위치를 짐작할 수 있었다.
“편하게 계셔도 됩니다.”
“아닙니다. 저는 이게 편합니다.”
알리코는 누가봐도 몸에 각을 세운 채로 나를 대하고 있었다.
젊은 거장이라고 불리는 나를 이렇게 대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그가 얼마나 나를 진심으로 생각하고 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그와 동시에 알리코는 무척이나 엄숙하게 자신이 찾아온 이유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6월에 큰 축제가 있습니다.”
6월, 오스트리아, 축제.
그 세가지 단어만으로도 나는 알리코가 어떤 것 때문에 왔는지 알 수 있었다.
“도나우인젤페스트 말씀이시군요.”
내 말에 알리코가 고개를 끄덕였다.
도나우인젤(Donauinsel).
일전에 오스트리아에 갔을 때 스쳐본 기억이 있었다.
도나우 강의 물줄기를 따라 길게 만들어진 인공섬.
그 위에서 펼쳐지는 도나우인젤페스트는 클래식을 비롯해 음악계에 몸담은 사람이라면 모를 리가 없는 축제였다.
거대한 음악의 소통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축제.
한국대에 있을 시절 견학 후보로도 오른 곳이기도 했다.
클래식을 넘어 모든 장르의 음악을 거리낌 없이 느끼고, 즐길 수 있는 곳.
그런 곳에서 나를 찾아온 이유는 무척 단순했다.
“단장님께서 저희 축제의 클라이맥스를 장식해주셨으면 해서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알리코의 말에 옆에 있던 민호가 옅은 탄성을 냈다.
그럴 만도 하지.
도나우인젤페스트는 전 세계적으로 이름을 알린 클래식 축제니까.
게다가 그동안 메인무대는 빈 필과 같은 수백 년 역사를 가진 오케스트라가 오르는 편이었다.
빈 필을 비롯해 전 세계 유수의 오케스트라들이 오르는 무대인데.
그런 무대에 만들어진 지 얼마 되지 않는 리히트 오케스트라를 올리는 것은 물론, 축제의 클라이맥스라고 부를 수 있는 메인 무대를 맡아달라는 말에 절로 감탄이 나왔다.
사뭇 도전처럼 느껴질 수 있는 시도일 텐데.
알리코는 그런 것 따위는 문제도 되지 않는다는 듯 섭외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단장님께서 원하시는 뭐든, 저희 측에서 준비해드릴 자신이 있습니다.”
무대를 원한다면 무대를, 악기를 원한다면 악기를, 원하는 시간대가 있으면 전체 시트를 엎어서라도 맟춰주겠다고.
내가 축제에 참가한다는 말만 한다면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특히 이번 섭외를 위해 위원장 측에서 블랙카드까지 내밀었다며.
그만큼 축제 위원회에서도 나를 강력하게 원하고 있음을 밝혔다.
“제가 왔으면 하는 이유가 있습니까?”
“단장님이 생각하시는 철학이 곧 저희 축제가 지향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이 즐길 수 있는 음악.
알리코는 그것이 도나우인젤페스트의 모토라고 소개했다.
장르에 국한되지 않는 음악가들이 찾아와서 자신들의 연주를 선보이고, 관광객을 비롯하여 다른 음악가들도 그들의 음악에 감응한다.
가사를 몰라도, 악기를 몰라도, 그저 음악에 취해 소통할 수 있는 장이라고.
그동안 이어져온 도나우인젤페스트의 생각과 내 생각이 무척 잘 어울릴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리고 단장님, 리히트가 만들어낸 음악이라면 세계 어느 사람이라도 즐길 수 있을 거라고 확신합니다.”
인종과 국경을 넘어 내 연주라면 누구든 이해하고 즐길 수 있을 것이라고.
여타 노래처럼 가사를 알아야 더욱 이해할 수 있는 것도, 정통 클래식처럼 악기에 대한 해박한 지식이 있어야 하는 것도 아닌 그저 ‘리히트’스러운 연주.
모두를 감동시킬 수 있는 그 부분이 가장 큰 이유라고 설명했다.
‘새로운 단원들이 좋은 기회를 얻겠네.’
이번 국제 콩쿨로 리히트의 식구가 된 여섯 단원들.
그들을 세상으로 보이기에 적합한 무대라는 생각이었다.
1기는 오케스트라 경연에서, 2기는 거대 방송 프로그램에서 선보였으니.
아무리 숫자는 적어도 명백한 3기 단원이지 않은가.
게다가 수상자들이 곧바로 리히트 오케스트라 입단 의사를 밝혀 사람들의 관심들이 집중된 상태.
3기 단원에게도, 리히트에게도 무척 좋은 기회일 것이다.
“좋습니다. 저희 제안 사항은 차후에 정리해서 알려드리도록 하죠.”
“감사합니다! 절대 누가 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알리코는 연이어 감사 표시를 했다.
회의를 마무리 짓고, 알리코가 자리에 나가자 민호가 곧바로 내게 말했다.
“무척 좋은 기회가 들어왔습니다.”
민호는 미리 브리핑을 준비한 듯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이어갔다.
특히 그는 날씨와 관련해서 해당 축제에 이점이 무척 좋다고 덧붙였다.
6월 비엔나의 날씨는 다른 나라와 비교했을 때 선선한 편이며, 한창 더워지기 시작할 한국과 비교하면 무척 시원하게 느낄 것이라고 표현했다.
그 때문에 본래도 관광객들이 몰리는 시즌이라고.
거기다 도나우강을 낀 도나우인젤이라면 강바람과 비엔나를 관람하러 온 유수의 관광객들이 몰릴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미 도나우인젤페스트의 명성은 꽤 높으니까요. 아마 단장님이 참가하신다는 소식이 들리면 더 많은 인파가 몰려들 겁니다.”
이미 검증된 축제에, 수많은 인파가 보장된 것 아니냐며.
그 곳에서 무대를 펼치는 것만큼 좋은 기회가 없을 것이라고 표현했다.
나 또한 그의 생각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전생의 기억 속에 도나우인젤페스트는 없었지만, 6월 날씨에 대한 기억은 선명했으니까.
게다가 알리코가 입이 닳도록 말했듯, 축제의 수준 또한 남다르지 않은가.
대신, 나에게는 한가지 생각이 더 있었다.
“그쪽이 전체가 아마 축제 시즌일 겁니다. 잘하면 조만간 거기에서도 연락이 올 수 있겠죠.”
“혹시 거기라고 하시면…”
민호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민호의 사무실 전화가 시끄럽게 울렸다.
이제 회의가 끝난 것을 알고 전화들이 쇄도하는 모양.
민호는 내게 양해를 구하고 자리에서 전화를 받았다.
예상대로 무언가 또 다른 제안이 온 듯, 민호는 수화기 너머 사람에게 일정을 비롯하여 정확한 설명들을 요구했다.
그런데 전화를 받던 민호는 조금 얼떨떨한 듯 나를 쳐다보며 전화를 이어갔다.
마치 이런 우연이 다 있는다는 듯.
또는 어떻게 알았는지 궁금하다는 듯.
전화를 끊은 민호는 놀라움을 내려놓고 내게 발신지를 알려주었다.
“잘츠부르크에서 온 전화라고 합니다.”
빙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