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화
‘여기가 리히트의 홈그라운드, 리드미컬 체임버홀이구나.’
처음 지현은 체임버홀에 들어왔을 때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다.
대한 오케스트라를 비롯해 해외의 유수의 오케스트라들은 저마다 거대한 음악당을 지니고 있었다.
게다가 미국에 있었을 때 듣기로, 국가에서 새로운 예술의 전당 오케스트라홀을 리히트에게 선뜻 내놓았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럼에도 이안은 여전히 좁은 체임버홀을 고수하고 있었다.
계속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는데.
첫 연습이 시작되자 지현은 그 이유를 곧바로 알 수 있었다.
‘이렇게 오케스트라 소리에 집중한 건 처음인 것 같아.’
미국 유학 중에도 합주 기회는 수없이 많았다.
중창에 합류하는 것은 물론, 두 대의 피아노가 경쟁하듯 연주를 펼치는 것까지.
오케스트라와의 협업 또한 있었다.
하지만, 당시 연습 때는 자신의 선율을 챙기기도 바쁜데다, 단원들의 소리는 퍼져버리는 탓에 잘 듣지 못했다.
지금껏 오케스트라 협주에서는 넓은 오케스트라홀을 사용해서 그럴까.
비교적 좁은 체임버홀을 사용하자 소리의 특이점이 더욱 분명히 느껴졌다.
게다가.
‘진짜 신기하다는 말 밖에 나오질 않아.’
지현은 악기들을 볼 때마다 신기하다는 생각을 지우지 못했다.
자신과 함께 합격한 단원들은 모두 독특한 악기들의 소유자 아니었던가.
젬베, 클래식 기타, 리코더 등 여타 오케스트라들에서는 쉬이 볼 수 없는 악기들이었다.
게다가 피아노 또한 두 대를 놓고 준비를 하다니.
지금껏 만나본 적이 없는 악기들과 배치들이었다.
그런데, 그 만나본 적 없는 악기들의 조화가 이안의 손에 의해 맞춰지고 있었다.
“클래식 기타. 소리를 크게 내야 한다는 강박을 갖지 않아도 됩니다. 선율을 은은하게 까는 것만으로도 색다른 느낌을 주니까요.”
연주 한 번, 피드백 한 번.
그 일련의 과정이 반복될 때마다 선율이 바뀌어나간다.
틀어져있던 소리가 바로 잡히고, 완벽하다는 선율도 한층 더 아름답게 변모한다.
지현은 그 모습에 놀라워하며 하마터면 박자를 놓칠 뻔했다.
그 사소한 차이도 알아내는 면모에, 지현은 연신 감탄을 내려놓지 못했다.
어느덧 저녁 시간이 다 되어갈 무렵.
지현을 포함한 여섯 명은 완전히 리히트에 녹아들어 있었다.
“오늘도 수고했습니다. 마치기에 앞서 향후 일정을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이안의 말에 단원들의 시선이 일제히 이안을 향했다.
어떤 이야기가 오갈지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한편으로는 이미 말하지 않아도 기대된다는 듯.
그리고 그 표정은 곧바로 놀라움으로 바뀌었다.
“도나우인젤페스트. 유럽 최대 음악 축제에 초청을 받았습니다.”
음악가라면 도나우인젤페스트를 모를 리 없었다.
국내에서도 여러 음악 페스티벌이 열리지만, 그들과는 비견할 수 없을 정도의 규모와 라인업을 자랑하는 축제.
누구나 참여하여 연주를 할 수 있지만, 초대를 받은 것은 차원이 다른 이야기였다.
그런데 이안의 설명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리고 이번 일정은 꽤 길어질 것 같으니 그것에 맞춰 짐을 챙기시길 바랍니다.”
이안의 말에 단원들이 사뭇 신기한 기색으로 쳐다봤다.
도나우인젤페스트에 참여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놀라운 상태인데.
일정이 길어진다는 것은 도나우인젤페스트 이외에 다른 일정이 있다는 뜻이었으니까.
이안이 이렇게 말한다면 그 이상의 것이 있다는 것일 터.
단원들은 ‘그 무언가’를 기대하는 듯 이안을 쳐다봤다.
“빈에서의 일정을 마치고, 곧바로 잘츠부르크로 향할 겁니다.”
이안이 정확한 일정을 말하지 않았음에도 단원들 사이에서는 탄성이 터져 나왔다.
빈과 잘츠부르크, 모두 오스트리아 음악사에서 빠지지 않는 곳이니까.
자세한 설명이 없어도 이안이라면 무언가 커다란 것을 가져왔을 것이라는 확신이 오갔다.
***
8,614 km, 10시간이 훌쩍 넘는 비행시간이 지나 도착한 오스트리아.
짐을 풀고 가장 먼저 한 일은 무대를 확인하러 온 것이었다.
길게 뻗은 도나우강과 그 위를 길게 만들어진 인공섬, 도나우인젤.
도나우강을 바라보던 요한나가 향수에 빠진 듯 빙긋 웃었다.
“여긴 볼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참으로 아름다운 것 같아요.”
“그래서 요한 스트라우스도 곡을 만든 것이겠죠.”
요한나가 내 말이 맞다며 맞장구를 쳤다.
이번 무대에서 선보일 왈츠곡,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강’.
왈츠의 왕이라고 불린 요한 스트라우스 2세가 도나우강을 보고 작곡한 왈츠곡이었다.
힘차게 나아가는 물결을 표현하 듯 펼쳐지는 선율.
선율의 아름다움은 물론, 오스트리아 제국 시기의 제2의 국가(國歌)로 불릴 정도였다.
게다가 들어보면 세상 사람이 알 법한 선율이기에.
불특정 다수가 찾아오는 이곳에서 가장 적합한 음악이리라.
“무대도 나쁘지 않네요.”
“단장님께서 보내주신 내용을 최대로 반영했습니다.”
참여자들을 위해 만들어진 무대들이 눈에 들어왔다.
3일 동안 치뤄지는 거대한 축제이자, 수많은 출연진들이 참가하는 만큼 무대 또한 다양했다.
홀로 올라갈 수 있는 소규모 무대부터, 리히트 오케스트라와 같은 단체가 오를 수 있는 대규모 무대까지.
특히, 내가 설 무대는 광범위하게 펼쳐진 무대에서 소리를 더욱 효율적으로 모아 펼칠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나는 무대에서 발을 구르며 소리를 체크했다.
남들은 크게 체감하지 못할 소리지만, 내게는 무대의 선율을 확인하는 데 큰 무리가 없었다.
“벌써 축제를 보러 몰려든 사람이 많네요.”
“아마 이안씨 덕일 겁니다. 작년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방문했어요.”
무대에서 내려다보자 도나우인젤페스트를 즐기는 사람들이 훤히 보였다.
이제 1일차에 접어들었지만 꽤 많은 사람들이 축제를 즐기고 있었다.
레게풍의 선율을 보이는 부스부터, 클래식 4중창을 선보이는 부스, 심지어 재활용 악기를 활용한 부스도 있었다.
나와 리히트 오케스트라의 무대는 축제의 대미를 장식하기로 되어 있었다.
3일간의 축제 기간을 온전히 즐기려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모이는 날이자, 굵직한 음악가들이 총출동하는 날.
리히트의 음악을 보여주는 날은 그때였다.
막 무대를 점검하고 내려올 즘.
같이 따라나선 단원들이 내게 물어왔다.
“단장님, 연습하기 전에 축제를 즐길 시간을 주실 수 있나요?”
단원들이 한마음 한뜻으로 질문했다.
벌써부터 흥이 돋는 선율들이 곳곳에서 나오지 않은가.
단원들 또한 음악가로서 그러한 소리들을 무척 흥미롭게 듣고 있는 듯 보였다.
게다가.
“그렇습니다 단장님. 여독이 만만치 않으실 텐데 하루쯤 구경해보는 건 어떻습니까?”
알리코가 한 마디를 더하자 단원들이 더 큰 기대를 안고 나를 바라봤다.
이미 무대를 위한 선율 준비는 모두 끝난 상태이고, 오늘 저녁과 내일을 통틀어 마무리를 지으면 되기 때문에.
나 또한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내 끄덕임이 끝나기 무섭게 단원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저마다 팀을 꾸려 순식간에 흩어졌다.
내 옆에 남은 사람은 지현과 요한나, 에비게일 정도.
그 남짓도 에비게일과 요한나는 많이 와봤다며 숙소로 돌아갔다.
“그럼 두 분께서 충분히 즐기실 수 있도록 제가 안내해드리도록 하죠.”
나와 지현을 보던 알리코가 가이드를 자처했다.
오랫동안 축제를 담당했던 음악감독답게, 그녀는 자세한 설명들을 해주며 축제를 이끌었다.
여러 음악가들의 연주를 비롯해 먹거리까지.
특히 지현은 레몬을 약간 뿌린 슈니첼을 무척 좋아했다.
나 또한 일전에 오스트리아에서 먹은 국민 먹거리였기에 편안하게 먹을 수 있었다.
알리코의 설명 또한 여정에 좋은 활기를 불어넣었다.
음악감독이라는 위치가 그냥 얻어진 것이 아님을 증명하듯, 발음하기조차 힘든 악기들에 대한 정보가 그의 입에서 술술 튀어나왔다.
한창 구경과 먹거리를 즐길 무렵.
지현이 어딘가를 가리켰다.
“저건 되게 거리 피아노 같이 생겼다.”
지현이 가리킨 한편에는 화려한 문양으로 장식된 피아노가 있었다.
낡은 피아노에 칠을 더해 색다른 작품을 만든 구조물.
한국에도 ‘거리 피아노’라는 이름으로 유명 관광지에 악기를 가져둔 것으로 알고 있었다.
“자유롭게 연주할 수 있도록 준비해둔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래도 연주보다는 작품을 위해 놓은 것이라 상태는 조금 안 좋을 수 있습니다.”
알리코의 설명대로 피아노의 상태는 크게 좋지 않았다.
내부의 선이나 해머가 망가진 것인지 음이 불분명한 건반도 있었고, 세 개의 페달 중 소리를 울리는 뎀퍼 페달만 작동했다.
조율 또한 습기가 많은 강가라 그런지 평균보다 훨씬 무겁게 변해있었다.
남들이라면 연주할 엄두를 못 냈겠지만.
되레 선율을 들은 내 머릿속에서는 작은 가능성이 스쳐 지나갔다.
‘이거 <환상>을 연주하면 되게 색다르겠는데?’
애니메이션 음악에 사용되었던 <환상>.
신비의 숲에서 펼쳐졌던 소리였건만, 머릿속에서 피아노의 음색에 더해져 새롭게 재창조되었다.
본래의 <환상>이 햇살이 새어 나오는 아침을 연상케 했다면, 지금 펼칠 <환상>은 어두운 밤 중의 선율을 떠올리듯.
자연스레 내 손가락이 피아노 위에서 춤을 추기 시작했다.
***
처음 이안이 피아노 앞에 앉았을 때.
알리코는 이안이 곧 피아노에서 일어날 것이라 생각했다.
지금껏 완벽한 곡을 펼쳐 보였던 이안이지 않은가.
숱한 음악감독 경력으로서, 만만치 않은 청음력을 지닌 알리코는 사소한 선율의 차이가 어떤 변화를 일으키는지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이 안다면 이안 또한 모를 리 없을 테니까.
그러나 알리코의 예상과 달리 아인은 건반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그 순간.
‘와…’
알리코의 머릿속은 마치 새하얀 도화지가 깔린 듯 모든 생각이 지워졌다.
마치 본능이 이안의 연주를 온전히 담으려는 듯.
이안의 선율이 알리코의 귀를 타고 머릿속으로 스며들었다.
깨끗해진 그녀의 머릿속에 낮은 선율이 선을 긋듯 들어왔다.
낮은 음색이 서로 엉키며 풀벌레와 바람을 만들어내고, 묵직한 소리는 어두운 밤하늘을 형상화한 것처럼 뻗어나간다.
선율이 이어질수록 머릿속에 감도는 이미지는 더욱 선명해진다.
이안이 만들어낸 선율의 숲, 그리고 그 몽환적인 숲에 자신이 빠져든 것 같은 착각.
하지만 그러한 환상이 결코 거북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기 직전, 밤에 모든 불을 꺼놓은 것 같은 편안함과 잔잔함.
그동안 축제 준비로 고되었던 알리코는 위로받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저걸 어떻게 연주하는 거지?’
이미 이안이 테스트할 때 문제점은 똑똑히 보지 않았던가.
틀어진 조율과 몇몇은 건반이 소리조차 내지 않았다.
게다가 부드러운 소리를 위해 세 페달 모두를 사용해야 하건만, 그마저도 되지 않았다.
고친다 할지라도 수만 명의 손길을 타서 순식간에 망가지는 것은 물론, 강가 주변이라 습기에 취약한 악기가 상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이안의 연주는 한 치의 흐트러짐이 없었다.
페달을 미세하게 조정하며 끌림음을 펼쳐 분위기를 만들고, 나지막한 소리를 되레 느긋하게 펼쳐 편안함을 더했다.
이미 이안의 선율에 매료된 사람들이 근처에 가득 모여있었다.
선율에 감탄한 듯 미소를 짓는 것은 기본, 몇몇은 눈을 감은 채 온전히 흐름에 몸을 맡긴 듯 음악을 감상하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놀라운 일이 펼쳐졌다.
“이게 무슨…”
자신도 모르게 육성이 튀어나올 정도로 신묘한 광경.
강가나 나무 근처에 앉아있던 작은 새들이 피아노 위에 앉은 것이다.
마치 이안의 연주를 감상이라도 하러 온 듯.
뚜껑 위에 앉아있는 새들이 평안한 듯 눈을 감은 채 가만히 있었다.
몇몇은 감상을 내놓듯 작게 지저귀었다.
그마저도 이안은 선율로 받아들이는 듯, 작게 선율을 추가하여 새들의 지저귐에 응수했다.
이미 사람들은 신비로운 광경에 카메라를 꺼내 들어 영상을 찍고 있었다.
하지만 놀랍게도 사진을 찍는 사람들은 없었다.
마치 카메라 셔터음 하나 들어가면 안 될 것 같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낀 듯.
주변 일대는 약속이라도 한 듯 고요하게 피아노 선율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 건반을 누르며 곡이 끝났을 때.
마치 마법사의 퍼포먼스 장면 중 하나처럼 새들이 일제히 푸드덕거리며 날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