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시작부터 천재 피아니스트-211화 (211/250)

211화

도나우인젤페스트의 마지막 날.

마지막인 만큼 무대 위에 오르는 사람들은 이름만으로도 입이 떡 벌어지는 사람들이었다.

“Are you ready?!!”

강렬한 보이스가 인상적인 디바.

사샤 피어스가 화려한 3일 차 무대를 여는 포문을 열었다.

가창, 안무, 퍼포먼스 뭐 하나 빠지지 않는 명실상부 최고의 디바.

세계 최고의 퍼포머이자, 빌보드 선정 2000년대 가장 성공한 여성 아티스트.

사샤는 미국 대중문화를 대표하는 아이콘 중 하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사샤의 곡, 이 펼쳐지자

시작에 이어, 다음 차례로 올라온 가수도 만만치 않았다.

엘리슨 오스틴.

그녀는 앨범 수입만으로도 매년 1억 달러를 벌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미국의 유명 싱어송라이터였다.

동세데 가수 중 압도적인 것은 물론, 여가수 전체 중에서도 다섯 손가락에 꼽히는 자산가.

음악은 취미로 한다는 우스갯소리가 나오면서도, 되레 취미로 하기에 그러한 자유로운 음악이 나온다는 평이 자자했다.

각자 무대를 하고 자연스레 두 사람이 콜라보 무대를 하는 연속.

이 또한 알리코가 만들어낸 배치법이었다.

21세기와 20세기를 나란히 평정한 두 디바의 콜라보 무대.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이보다 멋진 광경은 없었다.

연이어 스태프들이 이 무대를 기획한 알리코에게 찬사를 보냈는데.

알리코의 관심을 오로지 리히트 오케스트라에 가 있었다.

‘그것보다 압도적인 클래식은 들어본 적이 없었지.’

일전에 리허설을 듣고 난 이후.

알리코의 머릿속에서는 리히트의 선율이 떠나가지 않았다.

이미 첫 번째 날에 이안이 피아노로 펼쳤던 기적도 놀라웠는데.

오케스트라 선율을 들었을 때는 새로운 놀라움이 머릿속에 가득 찼다.

드디어 클라이맥스를 장식할 때.

리히트가 준비할 즘이 되자 알리코는 곧바로 대기실로 향했다.

“리히트 오케스트라 스탠바이 해주세요!”

리히트 오케스트라에게 준비해야 한다는 말을 하러 내려갔을 때.

알리코는 자신도 모르게 숨을 한 번 참았다.

자신을 바라보는 단원들의 시선에서 묘한 압박감을 느낀 것.

단원들이 의도적으로 내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자신감에 찬 단원들이 내뿜는 기운이 강렬했을 뿐.

하지만, ‘그저’ 내뿜었다고 보기에는 그 수준이 무척 강했다.

있던 두려움마저 씻겨져 내려갈 수준의 강렬한 기운.

덕분에 알리코도 긴장감을 한 층 내려둘 수 있었다.

‘이들이 실수할 일은 없겠구나.’

리히트 오케스트라 단원들의 얼굴에는 긴장감 하나 찾아볼 수 없었으니까.

되레 자신이 펼칠 것을 온전히 펼치겠다는 뚜렷한 목표의식과 자신감.

순간, 단원들의 표정에서 이안의 얼굴이 엿보이는 것 같았다.

***

90명에 가까워진 단원들이 차례대로 무대에 들어갈 무렵.

벌써부터 사람들이 열띤 반응을 보였다.

리히트라는 이름을 연이어 부르는가 하면, 나를 비롯해 단원들의 이름을 부르기까지.

연예인이라면 그들을 향해 손을 한 번 흔들어줄 법도 하건만.

단원들은 그 부름에 응대하는 대신 악기를 한 번 더 점검했다.

모름지기 음악가는 음악으로 자신의 존재를 나타내야 하니까.

내 손짓에.

그 서막이 시작되었다.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강>

요한 스트라우저 2세의 대표작이자, 매년 1월 1일만 되면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신년 연주회에서 펼쳐지는 곡이었다.

제2의 오스트리아 국가(國歌)라고 불리는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강>.

화려한 왈츠와 선율과 달리 나는 그 선율의 시작이 기쁨에서 시작하지 않았음을 잘 알고 있었다.

‘패전에 암울해진 오스트리아인을 북돋기 위해 만든 곡.’

큰북과 재치 있는 현악의 선율로 밝은 분위기를 연출하는 곡.

하지만, 곡이 만들어질 당시의 오스트리아 분위기는 사뭇 달랐다.

1866년 경에 있었던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 간의 전쟁.

오스트리아는 이 전쟁에서 참패를 당하며 거리에는 부상병과 전쟁으로 폐허가 된 도시만 남았다.

사람들의 우울감이 극에 달했을 때.

의뢰를 받은 요한 스트라우저 2세가 도나우강을 보며 만든 곡이 바로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강>이었다.

수천 년의 세월 동안 빈을 감싸듯 흘렀던 도나우강의 생명력과 변치 않음을 표현하는 음악.

그 생명력을 표현하기 위한 악기들이 다수 사용되었다.

기본적인 현악과 관악의 조화.

거기에 국악을 조심스레 스며든다.

국악 특유의 서민적인 소리가 더해지면서도 서로 다른 음색이 위화감 없이 섞여들어 간다.

마치 누가 귀족이고, 누가 서민인지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자연스럽게.

오스트리아를 비롯해 독일, 헝가리, 세르비아, 루마니아 등에서 각기 다른 이름으로 불리지만, 결국 한 줄기인 것을 나타내듯 선율이 한 지점으로 모여든다.

그렇게 뭉친 선율이 붓을 만들어내고, 그 붓이 사람들의 머릿속에 그림을 그려줄 테지.

‘지금은 그 어떠한 도시보다 아름답게 변했지.’

아름답지 않은 시기에 만들어진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강>.

하지만, 이제는 수백만에 이르는 사람이 관광을 오고, 2천여 명이 찾아와 선율을 펼치는 평화와 화합의 장이 되지 않았던가.

도나우인젤이라는 새로운 인공섬이 만들어지고, 지금처럼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

그 아름다움과 활기찬 이미지가 머릿속에 감돌고, 오케스트라라는 악기를 통해 그 이미지를 전달한다.

내가 주문한 대로 단원들은 생글한 표정을 지은 채 연주를 이어갔다.

엄숙한 분위기가 아닌, 왈츠 특유의 발랄함을 즐기듯.

아주 사소한 차이이지만, 생각이 곁들여진 선율을 한층 더 분명한 감정을 전한다.

‘이제 변할 차례.’

나는 순간적으로 손을 꺾듯 지휘를 이어갔다.

기존 지휘는 손바닥이 아래를 향했지만, 지금은 손바닥이 위를 향한다.

곡의 끝과 함께 새로운 곡이 시작됨을 알리는 사인.

단원들은 재빨리 그 사인을 알아채고 선율을 바꿔 간다.

마치 시간이 거꾸로 가는 듯한 신묘한 선율.

갑작스레 틀어지는 선율에 청중들은 사뭇 당황한 듯 움찔거린다.

하지만, 이내 펼쳐지는 선율을 받아들이고 편안한 표정으로 음악을 감상한다.

이 곡 또한 오스트리아인을 비롯해 전 세계 사람들이 알 법한 곡이니까.

베토벤의 3대 피아노 소나타에 속하는 소나타 14번.

일명, <월광>이 리히트의 빛으로 새롭게 터져나간다.

‘빈은 베토벤의 제2의 고향이나 다름없으니까.’

독일에서 태어났지만, 베토벤은 35년간 빈에서 머물다가 죽음을 맞이했다.

빈이 음악의 고장이라고 불리도록 가장 큰 기여를 한 인물.

오스트리아 출신 음악가들은 자신이 베토벤의 후예라고 생각하지 않은가.

그것을 겨냥한 선곡이었다.

은은한 달빛을 형상화하듯 나아가는 제1악장.

베토벤이 ‘섬세하게 연주할 것’이라는 부가 설명을 붙일 정도로 공을 들였던 선율이 리히트라는 거대한 악기에 맞춰 새롭게 펼쳐진다.

감성을 더하기 위한 피아노에 아쟁과 플루트와 같은 연한 선율이 사용된다.

조금이라도 틀어지면 특유의 감미로움이 순식간에 사라질 수 있는 고난이도의 선율.

이 부분을 위해 가장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점차 선율이 흐르고, 제3악장에 들어왔을 때.

<월광>은 또 다른 국면을 맞이한다.

Presto Agitato.

급속하고 격렬하게라는 지시에 걸맞게 3악장이 펼쳐진다.

본래 피아노 곡에서도 빗발치는 건반 세례로 엄청난 압도감을 선사하는 곡인데.

한 마디에 8분음표가 무려 12개나 등장하는 빠른 박자가 무대 위를 가득 메운다.

이를 고스란히 펼치는 것은 바이올린을 비롯한 양악 현악기들과 피아노.

그중에서도 이 곡은 피아노가 가장 돋보였다.

마주보듯 놓인 두 개의 피아노.

그 두 개에서 서로 경쟁이라도 하듯 압도적인 선율이 튀어나온다.

1악장의 은은함과 달리 얼핏 오싹함마저 느껴지는 음색.

관객들의 입이 벌어지면서 탄성은 나오지 않는다.

마치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막힌 것처럼.

요한나와 지현의 현란한 연주에 사람들은 압도되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점차 세상에 뻗어가는 달빛을 형상화하는 연주의 연속.

연주가 끝났을 때, 사람들은 마치 헛것이라도 본 듯한 표정으로 무대를 바라보고 있었다.

***

올란 로저스.

전직 LA 필하모닉을 이끈 거장이자, 현재는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단장을 맡은 사내였다.

빈 필 또한 도나우인젤페스트와 무척 연관이 깊은 곳이었다.

한 때 빈 필을 이끌었던 거장, 카라얀이 도나우인젤페스트의 음악감독을 맡았으니까.

그 유지를 잇기 위해 이번에도 빈 필은 도나우인젤페스트에 참여했다.

올란은 2일차에 공연을 끝내고, 오늘은 편히 감상하러 도나우인젤을 찾았다.

그런데.

‘이안이 대단한 것은 알지만…’

리히트의 무대가 끝났을 때.

올란은 차마 박수를 칠 수 없었다.

그가 박수를 칠 수 없었던 이유는 크게 세 가지.

첫 번째는 모든 이들이 그렇듯, 자신 또한 얼이 빠진 듯 지켜보고 있었기 때문.

두 번째는 뭉클하게 남은 곡의 감동을 놓치기 싫었기 때문.

마지막 세 번째는…

‘내가 평가할 수 있는 것인가.’

이미 숱한 오케스트라를 정상급으로 올리고, 지휘계 거장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자신이건만.

그럼에도 박수를 칠 용기가 나지 않았다.

어찌보면 박수조차 잘했다며, 수고했다며 칭찬을 하는 것이 아닌가.

자신보다 훨씬 앞서 나가고 있는 젊은 거장에게 칭찬이라니?

그만큼 부끄러울 일은 또 없을 것이다.

게다가 차마 박수를 칠 수 없었던 이유는 하나 더 있었다.

‘이것을 무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무대, 공연, 연주 등 이안과 리히트가 보여준 것을 묘사할 수 있는 단어는 수십 가지가 넘을 것이다.

하지만, 그 어떠한 단어도 부족할 것 같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어떤 단어를 사용하더라도 리히트가 펼친 것에 비하면 아주 약소한 개념일 테니까.

인간의 단어로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월등한 아름다움을 표현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월광>을 편곡하다니.’

베토벤의 3대 소나타 중 하나인 <월광>.

무척 유명한 곡임에도 <월광>은 오케스트라에서 연주한 적이 없었다.

만약 연주하더라도 피아노 솔로로 연주할 뿐, 여러 악기가 함께 합주하는 경우는 없었다.

3악장의 압도적인 속도의 선율을 오케스트라 선율로 만드는 것이 어려운 것도 있었지만, 1악장의 부드러움을 오케스트라로 만들어내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기 때문.

하지만, 이안은 그 불가능의 영역을 가능으로 만들었다.

특히, <월광>의 3악장이 터져 나올 때는 올란은 자신도 모르게 팔을 쓸어내렸다.

‘미친 재능, 그 이상의 무언가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겠어.’

평소라면 곡을 듣고 자신의 감평을 늘어놓을 것이다.

하지만, 올란의 머릿속에서는 오로지 선율이 떠오를 뿐, 다른 생각은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머릿속에는 이안이 만들어낸 달빛에 파묻힌 자신만 있었다.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지휘자 오디션에서 자신을 발견한 것은 물론, 수십 가지의 악기로 <월광>을 완성하기까지.

올란은 그저 혀를 내두르며 이안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이런 사람이니 그런 것들이 가능했겠지.’

올란의 머릿속에 빈 필의 수장을 뽑던 때가 고스란히 떠올랐다.

지휘만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날카로운 안목과 모든 이들의 지휘와 선율을 정확히 기억했던 것들.

숱한 오케스트라를 성공 가도로 이끈 올란이었건만.

그런 자신조차 범접할 수 없는 천재성에 올란은 온몸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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