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시작부터 천재 피아니스트-212화 (212/250)

212화

산해진미(山海珍味)

산과 바다에서 나는 진귀한 음식들.

그 단어가 고스란히 느껴질 만큼의 음식들이 연회장 한편을 가득 채웠다.

도나우인젤페스트에서 고생했다는 의미로 위원장이 준비한 특별한 연회였다.

“약소하지만, 많이 드시기 바랍니다.”

축제 위원장의 말에 단원들이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약소하다는 말과 달리 음식들의 종류와 수준은 말 그대로 ‘약소하다’라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수준이었으니까.

음식을 만든 일류 셰프들이 직접 나서 음식을 접시에 올려주는가 하면.

최상의 맛을 낼 수 있도록 아주 작은 디테일까지 하나하나 신경 썼다.

세계 각국에서 모인 단원들을 고려한 것도 눈에 보였다.

한식에서 중식, 일식은 기본, 국내에서는 ‘양식’이라는 단어로 통칭되는 프랑스, 이탈리아, 미국식 음식들까지.

가히 수백 가지에 가까운 음식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단원들은 탄성을 내뱉으며 음식들을 하나하나 접시에 옮겨 담았다.

“단원들이 참으로 대단한 것 같습니다.”

위원장이 내게 와인 한 잔을 건네며 말했다.

그가 보는 단원들은 음식을 즐김과 동시에 저마다 음악에 대한 이야기를 건네고 있었다.

오늘 올랐던 무대를 비롯해 연습 때 조금 더 좋을 것 같다는 부분까지.

연습 중이 아님에도 음악에 대한 이야기를 건네는 그들에게서는 열성마저 느껴졌다.

위원장은 그러한 모습을 보면서도 무척 친밀해 보인다고.

그동안 숱한 오케스트라를 마주해봤지만, 이렇게 음악 자체를 즐기는 곳은 처음이라고 답했다.

‘그렇게 하지 않고서야 만들 수 없는 음악이니까.’

오케스트라는 거대한 악기나 다름없다.

몸도 조금의 소통이 되지 않고 작은 곳에서 문제가 생기면 몸 전체로 그 문제가 번지니까.

사람의 몸에 피가 흐르고, 그 피를 통해 산소를 공급 받는 일련의 과정처럼.

오케스트라도 그러한 소통이 자연스레 이뤄져야 한다.

한창 무르익어갈 즘.

요한나가 자리에서 일어난 채 입을 열었다.

“자, 다들 잔을 들까요?”

요한나의 제안에 단원들이 일제히 와인잔을 들었다.

그녀는 헛기침을 한 채 짧게 이야기했다.

“단장님을 위하여.”

요한나가

몇몇 단원들이 갑작스런 요한나의 한국어 건배사에 웃음을 참지 못했다.

하지만, 요한나는 되레 이러한 반응을 노렸다는 듯 슬며시 미소를 보였다.

나 또한 자리에서 일어났다.

단원들을 비롯해 위원장과 한편에 있던 셰프들마저 내게 시선을 돌렸다.

마치 무언가 거대한 대담을 기대하는 듯한 눈빛.

하지만, 내가 할 말은 무척 간결했다.

“단원들을 위하여.”

음악을 만들고 펼치는 것은 나 혼자만의 일이 아니니까.

당연히 오늘 연회의 주인공은 나를 비롯해 리히트 전체다.

그 간단한 뜻을 전했을 뿐인데, 단원들의 눈빛이 사뭇 뭉클해졌다.

“위하여!”

마치 모두에게 응원하는 말을 내뱉듯, 다른 단원들도 일제히 한국어 건배사를 외쳤다.

한국인 단원을 포함하여, 아직 한글이 서툰 외국인 단원들도 애써 발음을 따라 했다.

몇몇은 아직 발음이 어색한 듯 발음이 새어나갔지만, 그것이 무슨 문제가 있으리라.

여느 때처럼 이야기를 하고, 음식을 먹고, 음악에 대한 깊은 토론을 나누고.

평소와 다르지 않은 하루를 보내며 도나우인젤페스트의 마지막 밤이 지나가고 있었다.

***

도나우인젤페스트가 끝난 지 일주일.

꽤 시간이 지났음에도, 사람들은 여전히 도나우인젤페스트 축제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비엔나와 연관이 깊은 두 인물의 곡을 펼친 것은 물론, 월광의 편곡에 대해 대중들과 전문가들은 입을 모아 칭찬을 건넸다.

그런데, 축제의 이야기를 한층 더 끌어올린 것은 예상외의 것이었다.

ㄴ 저 피아노 조율도 안 되고, 반쯤 망가져 있는 피아노인데. 저걸로 연주를 해?

축제의 한가운데.

거리에 놓인 화려한 피아노를 연주한 영상이 SNS를 타고 뻗어나간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연주를 하는 이안.

그리고, 도나우인젤페스트를 가본 사람들의 증언에 사람들은 더욱 경악을 금치 못했다.

ㄴ 작년에 가봤는데 저기 강가라서 아무리 관리를 잘해도 습기에 관광객들 많아서 하루 만에 피아노 작살남. 진짜 뚱땅거리는 정도지, 연주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님.

ㄴ 저도 예전에 가봤는데 진짜 딱 소리 듣고 일어날 정도?

ㄴ 저거 직접 봤는데. 황홀했음. 사실 이안이 앉기 전에 쳐봤는데, 어떤 건반은 안 쳐지고, 페달도 잘 안 돼서 금방 일어났는데. 내가 잘못 연주했네…

ㄴ 피아노 하나로 콘서트장을 만들어버리시네… 대단하다 박이안!

전 세계에서 도나우인젤페스트를 다녀온 사람들의 증언이 이어졌다.

시작부터 피아노의 상태가 그리 좋지 않았다고.

연주용이 아닌, 딱 체험용으로 알맞다는 댓글에 다른 사람들이 맞장구를 칠 정도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유려한 연주를 뽐내는 이안의 모습에 사람들은 감탄을 내려놓지 못했다.

게다가.

ㄴ ??? CG 아님?

ㄴ 우리의 이안좌. 드디어 마법까지 쓰시는 건가!

ㄴ 이게 연출이 아니라고? 하긴. 연출하라고 해도 못 하겠다.

연주를 이어가는 가운데.

피아노 위에 새들이 앉아 지저귀는 장면이 엄청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물론, 그저 새들이 앉을 자리가 있어서 쉴 순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야생 조류들이 사람 근처에 오기는커녕, 도망가기 바쁜 것을 생각하면 영상은 CG처리를 했다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이러한 모든 과정은 이안이 연주해서라고.

되레 ‘이안이라서 가능하다’라는 밈이 퍼져나갈 지경이었다.

‘놀랍다는 말로밖에 설명할 수 없었지.’

반응들을 차근히 살피던 알리코는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누구보다 가까운 거리에서 그 환상을 마주했던 알리코는 어느덧 이안의 신도가 되어 있었다.

이안이라면 뭐든지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

유수의 오케스트라에서도 엄두를 내지 못했던 <월광>의 오케스트라 편곡까지 한 이안의 모습에 알리코는 절로 고개를 저었다.

‘그 때문에 이런 결과가 나온 거겠지.’

알리코는 보고서 하나를 집어들었다.

이번 도나우인젤페스트의 성과를 비롯해 참가 인원과 현황들을 적어놓은 보고서.

알리코는 몇 번이고 검토한 보고서이건만, 자꾸만 한 곳에 눈길이 갔다.

450만 명, 올해 도나우인젤페스트를 찾아온 사람들의 숫자였다.

작년에 관객 300만 명을 달성했을 때도 엄청나다고 생각했는데.

올해는 1.5배라는 경이로운 기록을 갱신하며

‘이게 바로 이안 효과, 리히트 효과인가.’

이안이 다녀간 후, 유명해진 곳은 한두 곳이 아니었다.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지휘자를 이안이 뽑았다는 말에 최근 빈 필의 공연 예매율이 껑충 뛰는가 하면, 미국의 파이널쇼도 이안 출연 이후 시청률이 올라갔다고 하지 않았던가.

등장한다는 소식만으로도 열띤 반응을 보이는 것을 비롯해 출연 후에도 그 인기가 식지 않는 인물.

그게 바로 이안이 가진 저력이었다.

그 수혜를 자신들도 입었다는 생각에.

알리코는 이안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감사합니다 단장님. 단장님 덕에 저희 축제가 더욱 대성할 수 있었습니다.”

전화로 전한 알리코의 말은 진심이 가득했다.

이안의 피아노는 물론, 리히트의 연주 또한 지상 어디에서 들을 수 없는 경이로움을 지니고 있었으니까.

<월광>의 서정적임과 빗발치는 음표 세례를 90명에 달하는 오케스트라로 구현한 것.

이미 유튜브에서는 700만 조회수를 돌파하며 이안의 인기를 여지없이 보여주고 있었다.

그러나 전화에 대해 이안이 내뱉은 말은 하나였다.

-저희는 그저 좋은 무대에서 연주를 했을 뿐입니다.-

이안의 심지 굳은 말에 알리코는 절로 탄성이 나왔다.

그 한 마디에 모든 심상이 들어가 있었으니까.

이안이 원하는 대로 무대를 꾸려주어서 고맙다는 감사와, 그저 자신들은 연주를 했을 뿐이라는 겸손까지.

짧게 내려놓는 말에서도 이안이 가진 거장다움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

어느덧 도나우인젤페스트가 끝난 지 일주일이 넘어갔다.

그것은 단원들에게 준 휴가가 곧 끝난다는 것을 의미했다.

내일이면 다시금 단원들과 연습을 진행해야 하는데.

현철은 이안에게 넌지시 물었다.

“내일부터 바로 연습에 들어가지?”

다음 일정까지 약 한 달 반.

다른 오케스트라에게는 무척이나 빠듯한 시간이겠지만, 그동안 리히트의 행보를 보았을 때 곡을 완성하기에 적절한 시간이었다.

현철은 아마 이안이 이 모든 것을 계산했으리라 확신했다.

<월광>의 난이도는 물론, 연주 자체에 체력을 많이 소모하는 것이기에 한 곡에 집중하려고 했던 것이겠지.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서는 어떤 곡을 할거냐?”

도나우인젤페스트가 대중음악을 아우르는 음악 축제였다면,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은 클래식에 정통한 축제.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은 1920년부터 이어져온 역사를 가진 곳이자, 루체른, 브리겐트를 포함한 3대 음악제에 해당하는 축제였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오케스트라와 지휘자, 연주가, 성악가들이 참여하는 것은 기본.

연극과 오페라, 관현악 등 여러 공연들이 펼쳐지는 곳이었다.

매번 전통과 수준 높은 클래식 공연으로, 클래식 팬들에게는 빠뜨릴 수 없는 기회였다.

그러니 특히 이번 무대에서도 선곡이 중요했다.

수준 높은 클래식 축제이자, 모차르트, 카라얀 등 굵직한 음악가들을 배출한 곳이기에.

현지 사람들을 매료시키면서도, 관광객들에게도 친숙한 곡이 필요했다.

“우선 기존의 명곡을 재탄생시켜보려고요.”

이안의 답변에 현철은 고개를 끄덕였다.

특히 이번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의 경우 정통 클래식을 고수하는 경향이 있기에, 그 점을 파고드는 것이 중요했다.

“모차르트의 곡으로 선택하려고요.”

모차르트.

현철은 그 이름을 중얼거리며 다시금 고개를 끄덕였다.

모차르트를 빼고 잘츠부르크의 역사를 논할 수 없을 정도.

세계를 주름 잡은 음악의 천재이자, 수백 개의 곡을 창작한 거물이었다.

그런 사람의 곡을 활용한다면 사람들의 눈길은 물론, 클래식의 정통성까지 충분히 유지할 수 있겠지.

당장 현철의 머릿속에도 수많은 곡이 지나갔다.

무려 41개라는 어마어마한 숫자의 교향곡은 기본, 그 이외에 피아노, 호른, 오보에 등을 메인으로 앞세운 협주곡까지.

본래라면 오케스트라에서 연주하지 않을 곡들까지 현철의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애초에 <월광> 또한 오케스트라로 선보인 적이 없는 곡이었으니까.

그러한 곡을 교향악곡으로 바꾼 것에서 이미 이안의 한계는 없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이렇게 악보를 깔아놨고?”

처음 이안의 호텔방에 들어왔을 때.

현철은 바닥에 깔린 수많은 악보들로 놀랄 수밖에 없었다.

무척 넓은 방인데, 그 방의 바닥을 가득 메울 정도의 양이었으니까.

얼핏 봐도 수십 가지에 이르는 곡들.

엄청난 양의 악보를 일일이 검수한 것에 그저 놀라울 따름이었다.

“네. 그래도 마음에 드는 곡을 하나 발견해서 다행이죠.”

모든 곡의 검수를 끝내고 한 곡을 정한 듯, 이안의 손에는 악보 하나가 들려있었다.

현철에게는 무척 익숙한 광경이었다.

합주를 진행하기 전에 악보를 보고, 편곡하는 것은 매번 하는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이안이 보고 있는 악보가 사뭇 달랐다.

이안이 들고 있는 악보에 새겨진 곡은 교향곡도, 협주곡도 아니었다.

여타 악보에 비해 악보에는 수많은 알파벳들이 적혀 있었다.

음악기호나 지시어가 아닌, 가사를 나타내는 것들이었다.

독일어로 된 가사와 악보의 상단에 적힌 단어, ‘Die Zauberflöte’.

현철은 의아한 기색을 한 채 그 이름을 불렀다.

“마술… 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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