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4화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이 펼쳐진 지 며칠째.
이미 쟁쟁한 팀들이 화려한 연주를 펼쳐 보였다.
오페라와 콘서트, 연극에 이르기까지.
클래식에 조금만 관심이 있으면 단박에 알법한 존재들이 대거 잘츠부르크를 찾았다.
“올해도 라인업이 쟁쟁하네.”
무대를 차근히 바라보던 남성이 너스레를 떨었다.
옆에 있던 패트리카는 남성을 향해 미소를 보였다.
“브룩, 당신이 있어서 무대들이 더욱 빛나는 거지.”
브룩 쉐퍼.
그는 패트리카의 남편이자, 이번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의 총감독을 맡은 사람이었다.
이사장 자리까지 제안 받았지만, 스스로 그 자리를 거부하고 감독의 자리에 오른 브룩.
그가 얼마나 무대에 진심인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은 축제, 그 이상이지.’
클래식계의 축제.
말이 축제이지, 일종의 컨퍼런스에 가까웠다.
오페라를 비롯해 연극과 교향곡을 여타 다른 악단들이 펼치고, 이를 관람하는 형식.
그렇다 보니 같은 오페라를 하는 팀을 마주하는 것은 익숙한 일이었다.
베르디의 [라 트라비아타(La traviata)]를 비롯해 세계 3대 오페라는 45일 기간 동안에 수십 번이고 나올 정도.
필하모닉급 오케스트라들이 등장하여 잘츠부르크의 영웅, 카라얀의 곡들을 펼치는 것도 무척 많았다.
같은 곡이어도 오케스트라마다 해석이 모두 다르기에.
오히려 그 다름을 찾아내는 묘미가 상당했다.
패트리카와 브룩 또한 그 묘미를 찾아내는 재미로 오랫동안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을 맡았다.
그런데 이번에는 이전 축제와는 생각이 달랐다.
“이번 축제의 묘미는 뭐니 뭐니 해도…”
패트리카가 말을 흐렸지만, 브룩은 그 뒤에 올 말을 알 수 있었다.
브룩 또한 그녀와 같은 무대를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그 무대를 맡을 사람이 두 사람 앞에 다가왔다.
“무대 제작에 어려우셨을 텐데, 말씀드린 대로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어휴, 아닙니다. 되레 제가 한 수 배웠는걸요.”
리히트 오케스트라의 단장, 박이안.
브룩은 이안을 마주한 순간 그가 왜 젊은 거장이라고 불리는지 알 수 있었다.
이안에게서 느껴지는 젊은이의 패기와 거장의 노련미.
동시에 존재하기 힘든 두 기운이 이안에게서 느껴졌다.
하물며 연출가인 자신보다도 꼼꼼하게 요청하지 않았던가.
‘지금껏 이런 사람은 처음이었지.’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을 주관하면서 수많은 거장들과 일해봤건만.
이안과 같은 요청을 하는 사람은 없었다.
무대의 뒤편을 돔처럼 감싸 소리를 파생시킬 수 있도록 만들다니.
무대 제작에 아주 기초적인 정보였지만, 그 기초를 극한으로 끌어올린 것이 바로 이안의 방식이었다.
게다가.
‘[마술피리]를 오케스트라만으로 만들어낸다고?’
처음 이안이 가져온 연출 로드맵을 본 브룩은 절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마술피리]라는 오페라 곡을 어떻게 오케스트라로 만들겠다는 것인지.
오페라는 모름지기 오페라 가수의 압도적인 성악 발성이 꽃피는 곡이지 않던가.
그런 곡을 오케스트라의 선율만으로 채우겠다는 말에 어떤 무대가 만들어질지 가늠조차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처음 연주를 보았을 때.
브룩은 생각을 완전히 바꾸었다.
‘이게 리히트구나.’
긴 평가는 필요 없었다.
이안이 직접 보여준 무대는 환상 그 이상이었으니까.
되레 첫 시연을 거친 후로부터 브룩은 연출에 대해서 손을 뗐다.
걱정을 했던 자신이 어리석다고 느껴질 정도로 완벽한 연주와 연출.
시연 무대를 보는 것만으로도 이안이 주문한 연출들이 머릿속에서 그려질 정도로 리히트의 연주는 최고였다.
게다가 리히트에게는 이안이 준비한 비밀 병기까지 있지 않은가.
이미 그걸 확인한 브룩에게는 오직 기대감만 남아 있었다.
“최종 리허설은 내일이죠?”
“네, 맞습니다. 내일 모든 공연이 끝난 이후에 진행될 예정입니다.”
내일이면 리허설, 모레면 리히트의 본 공연이 올라간다.
이미 오늘자를 비롯하여 브룩의 연출을 기다리는 무대들은 많았다.
하지만, 브룩은 그저 모레만 기다려질 뿐이었다.
모레 공연에도 리히트를 비롯하여 수많은 공연이 예정되어 있었다.
오페라의 거장이 직접 연출한 무대를 시작으로, 새로운 수장이 오른 빈 필하모닉도 참여할 예정.
몇 달에 걸쳐 기대했던 공연들이건만.
리히트의 첫 시연을 본 이후로 그들의 공연은 전혀 생각나지 않았다.
그저 리히트가 실전 무대에서 어떤 연주를 선보일지.
이안이 만들어낸 그림이 자신이 만든 무대 위에서 어떻게 꽃 필지 기대할 뿐이었다.
***
잘츠부르크 축제의 서막이 올랐다.
7월과 8월에 걸친 45일의 시간 동안 펼쳐지는 페스티벌.
소규모 4중주를 시작으로, 필하모닉 급 오케스트라들이 대거 참여했다.
이러한 광경을 보기 위해 전년도에만 25만 명에 이르는 관객들이 페스티벌을 방문했다.
참가자도 자신들의 무대를 펼치고 관객으로서 페스티벌을 즐기니, 그 숫자는 사실상 더 많았다.
그중에는 네덜란드 콘체르테 오케스트라의 마에스트로, 빌렘 하이팅스도 있었다.
작년에도 이곳에서 무대를 펼쳤던 콘체르테였기에.
빌렘은 기꺼이 다시 잘츠부르크를 찾았다.
이미 작년에 참가 의사를 밝히고 무대에 오른 지 오래.
몇몇 단원들은 이미 네덜란드로 돌아간 상태였다.
하지만, 빌렘만큼은 오스트리아에 남아있었다.
자신이 이끄는 콘체르테 오케스트라와 협업을 하고, 리스트 콩쿨에서 우승을 거머쥔 사람.
박이안이 이번에는 오케스트라를 이끌고 잘츠부르크에 왔다는 소식을 들었으니까.
라인업이 적힌 종이를 보았을 때.
빌렘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마술피리]의 선율을 표현한다고?’
빌렘도 [마술피리]를 무대에 올린 적이 있었다.
젊은 시절, 오케스트라 피트에서 연주를 펼쳤던 기억이 선명했다.
그렇기에 그는 [마술피리]가 가진 특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성악부가 없는 상태에서 무대를 진행한다고?’
말 그대로 ‘오페라’ 곡 아닌가.
오페라는 음악, 그중에서도 사람의 목소리를 악기 삼아 펼치는 노래가 중심이 되는 장르였다.
하지만, 무대에 오르는 리히트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그저 악기를 든 채 집중하고 있을 뿐.
성악을 담당한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러한 걱정은 리히트의 선율이 터져 나옴과 동시에 사라졌다.
가야금을 필두로 [마술피리]의 서곡이 시작되었다.
강약이 중요한 서곡.
크고 작은 소리들의 조절이 서곡의 매력이었다.
마치 앞으로 펼쳐질 비극과 희극을 예고하듯 바이올린의 보잉이 크고 작아질 때마다 묘한 긴장감을 불러일으킨다.
특히, 빌렘은 두 대의 피아노에 눈길이 갔다.
‘어찌 소리 하나 겹치지 않고 연주를…’
자칫 소리가 어긋나는 순간 가장 차이점을 크게 느낄 법한 피아노.
그것도 두 사람이 연주하니 한 사람이 조금이라도 박자를 늦게 연주한다면 어긋남은 고스란히 청중에게 전달되리라.
하지만, 눈을 감고 들으면 피아노가 두 개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두 사람의 호흡은 완벽했다.
되레 열 손가락이 아닌, 스무 손가락으로 펼치는 서곡은 특유의 웅장함을 더해갔다.
그 앞에서 지휘를 펼치는 이안은 마치 이야기꾼 같았다.
동작을 덧대어 생동감을 불어넣고, 이야기 군데군데에 악기를 연주하며 이야기를 들려주는 이야기꾼.
때로는 크게, 때로는 작게.
단원들의 연주는 물론, 단장의 지휘까지 마술피리에 존재하는 인간의 환희와 절망이 스며들어 있었다.
어느덧 서곡이 끝나고.
타미노 왕자와 제사장 자라스트로가 만나 오해를 푸는 2악장의 선율이 지나갔다.
이제3악장. 마치 평화가 찾아온 듯 밤의 고요함을 나타내는 잔잔한 선율이 이어졌다.
곡이 끝난 것 같은 착각이 일 정도로 조용하고 연한 음색이 일렁이던 순간.
갑자기 모든 조명이 꺼짐과 동시에 소리도 단번에 멎었다.
마치 모든 것이 암흑에 휩싸여 멈춰버린 듯한 시간.
필렘을 포함한 사람들은 당황스러움을 금치 못했다.
그때.
“Der hoelle Rache kocht in meinem Herzen(지옥의 복수심이 내 마음에 끓어오르고).”
어둠 속에서 강렬한 억양의 독일어가 튀어나왔다.
분노와 복수심에 들끓는 목소리가 무대를 넘어 객석에 퍼져나갔다.
관람하고 있던 빌렘의 팔에도 오소소 소름이 돋을 정도.
이안의 편곡에 한 차례 소름이 돋았던 빌렘은 목소리를 듣자마자 단박에 목소리의 주인공을 알 수 있었다.
‘진주미 소프라노?’
빌렘의 궁금증을 해결해주듯, 스포트라이트가 켜지며 진주미를 비췄다.
밤의 여왕 분장을 한 주미가 처음부터 무대에 올랐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아리아를 불렀다.
딸의 행동에 분노하듯 쏘아붙이듯 내뱉는 독일어가 빌렘을 포함한 모든 이들의 귀에 꽂혔다.
마치 당장이라도 여왕의 분노에 삼켜질 듯.
주미의 노랫소리가 무서운 기세로 사람들에게 퍼져나갔다.
‘이걸 함께하는 리히트는 대체!’
빌렘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현재까지 이러한 선율을 선보인 곳은 단 한 곳도 없었으니까.
오케스트라가 오페라 가수가 된 듯, 오페라 가수가 오케스트라가 된 듯.
같을 수 없는 선율이 마치 하나가 된 듯 선율을 펼치고 있었다.
보통 오페라가 가수 중심인데 반해, 리히트의 무대는 가수와 오케스트라가 동시에 돋보였다.
마치 주미가 밤의 여왕, 리히트 오케스트라가 상대 배역인 딸을 맡은 것처럼.
반주와 동시에 [마술피리] 속 딸의 불안감을 표현하듯 가야금과 해금 선율이 주미의 목소리와 대비되게 펼쳐졌다.
반대되는 소리가 합쳐지면 어색하기 마련인데.
목소리와 악기 소리가 마치 화음을 맞춘 듯 교묘하게 섞여들어 갔다.
본래 [마술피리]의 하이라이트는 콜로라투라 소프라노가 펼치는 극강의 하이노트였다.
‘아’라는 발음 하나 밖에 나오지 않지만, 마치 악기를 연주하듯 소리를 나타내야 하는 고강도의 성악 발성.
하지만, 리히트가 펼치는 [마술피리]는 처음부터 끝까지 하이라이트였다.
‘이게 악기가 인간의 소리를 모방한 증거?’
악기는 본래 소리를 만들되, 그 기원은 사람의 목소리를 모방하기 위한 것이다.
학계에서 흔히 말하는 것이었다.
사람이 내지 못하는 소리를 악기로 대신 내기 위해 만든 것이 악기라는 의견이었다.
관악기는 사람의 호흡으로 하여금 목소리를 형상화하고, 찰현악기들은 목소리가 가지는 떨림을 형상화한 것이라고.
마치 그 이론이 현실이 된 것처럼 리히트의 선율이 펼쳐지고 있었다.
그 대미를 장식하는 압도적인 선율과 주미의 보컬이 휘몰아쳤다.
“Hoert! der Muttersschwur(이 어미의 맹세를 들어라)!”
복수의 신까지 거론하며 저주를 내리는 밤의 여왕.
길게 이어지는 하이노트가 끊어지는 순간, 마치 어둠이 내린 듯 목소리와 악기 소리가 동시에 멎었다.
마치 관객들도 어둠에 삼켜진 듯 아무 말도 못 하는 순간.
한참이 지나 박수 소리와 함께 사람들이 정신을 차린 듯 엄청난 환호성을 내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