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5화
주미는 여전히 그날의 기억을 잊을 수 없었다.
새벽에 다다른 시간.
모두가 잠든 시간임에도 주미는 스토리를 분석하기 위해 대본을 보고 있었다.
차기작으로 선정한 [코스모스].
보다 면밀히 캐릭터성을 살피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중이었다.
그런 주미의 휴대폰에 알림 하나가 떠올랐다.
처음 그녀는 누구에게서 연락이 왔는지만 보고 무시하려고 했다.
그녀와 함께하는 미국인들은 업무 시간 이외에는 절대로 연락을 보내지 않았으니까.
사생활을 우선적으로 생각하는 미국 정서상, 새벽녘에 오는 연락은 대부분 스팸이었다.
그리 생각했는데…
박이안
주미는 떠오른 이름을 보고 하마터면 입에 머금던 커피를 모두 뿜어버릴 뻔했다.
무려 박이안이다.
22살의 나이에 세상을 호령하고 있는 젊은 거장을 불리는 박이안.
지난 오페라, [모정]을 통해 인연을 쌓은 이안이 주미에게 연락을 보내온 것이다.
그녀는 곧바로 메시지를 확인했다.
리히트 오케스트라 단장, 박이안입니다.
늦은 시간에 연락 죄송합니다.
연락 가능한 시간대에 연락 부탁드립니다.
이안의 번호로 온 한 통의 문자.
늦은 시간, 죄송, 이런 단어들은 일절 필요 없었다.
연락 부탁한다는 말 하나에 꽂혀 곧바로 전화를 걸었으니까.
‘무슨 일이지?’
궁금해하면서도 주미의 가슴 한편에는 기대감이 가득 차올랐다.
이안과 같은 젊은 거장이 단순한 안부 차 연락을 보내진 않았을 터.
혹 이전에 오페라를 했던 것처럼 자신의 목소리가 필요한 것은 아닐까.
착각하지 말자고 스스로를 다독이면서도 뛰는 가슴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만약 이안이 무언가를 부탁한다면, 주미는 그것이 무엇이든 오케이 사인을 내릴 준비가 되어 있었다.
-리히트와 함께 무대에 오르지 않겠습니까?-
“영광이죠!”
이안의 제안에 주미는 듣지도 않고 즉답했다.
안할 이유가 없었으니까.
지금 이안의 명성은 음악계는 물론, 대중들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퍼져있지 않은가.
이안이 함께했다는 이유만으로 [모정]이 대박난 것은 물론, 연이어 오페라에 이안과 리히트를 초청해달라는 요청이 쇄도했을 정도.
2년 차 음악가임에도 오페라와 뮤지컬 곡을 동시에 작곡한 젊은 거장.
그런 인물이 자신에게 무대를 제안했다는 사실만으로도 가슴이 뛰었다.
-[마술피리], 밤의 여왕 아리아. 가능하시겠습니까?-
소프라노 중에서 가장 고음을 낼 수 있는 콜로라투라 소프라노.
진주미는 세계에서도 손꼽히는 콜로라투라 소프라노 중 하나였다.
원곡 그대로의 밤의 여왕 아리아를 펼칠 수 있는 것은 전 세계에 단 5명인데, 그중 하나가 바로 진주미였던 것.
이안이 주미에게 연락을 보낸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출연한 것만으로도 소프라노 명성에 큰 획을 그을 수 있던 [마술피리] 무대를 주미는 수없이 올라간 경험이 있었다.
“물론이죠!”
자신있게 대답했지만, 주미는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오페라 [마술피리] 속 밤의 여왕 아리아는 3옥타브 F라는 상상을 초월하는 음을 반복해서 내는 부분이었으니까.
이름난 소프라노도 좀처럼 하지 못하는 곡이었다.
하지만, 이안과 함께할 수 있다는 생각에 그녀는 거침없이 제안을 수락했다.
이미 곡에 대한 정보와 캐릭터 분석, 억양까지 모두 그녀의 머릿속에 있었으니까.
그 이후 주미가 할 것은 오직 하나, 목관리뿐이었다.
3옥타브 F라는 극강의 고음을 위해서는 목의 컨디션이 가장 중요했다.
주미는 차기작도 잠깐 내려놓고 연습할 정도로 강한 열의를 보였다.
게다가, 차기작을 맡기로 한 제작사에서도 이안의 무대에 오른다는 소식에 리딩 일정을 미룰 정도.
주미가 이안과 함께 무대에 오른다는 사실만으로도 차기작 홍보에 큰 보탬이 될 테니까.
모든 것을 마무리하는 데 걸린 시간은 단 하루.
그녀는 곧바로 오스트리아행 비행기에 올랐다.
***
모차르트의 [마술피리]를 펼치기로 생각을 굳혔을 때.
내 머릿속에 드는 생각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어떻게 오페라 곡을 오케스트라의 선율만으로 펼칠 수 있을까에 대한 것이었다.
[마술피리]에 사용된 곡은 한두 개가 아니니까.
본래 [마술피리]는 서곡부터 피날레까지 무려 14개의 길고 짧은 곡들로 이뤄진 오페라다.
그 모든 곡을 몇 시간 동안이나 펼칠 수는 없는 법.
2막을 통틀어 어떤 곡을 선보일지 결정하는 것이 첫 번째 과제였다.
‘마치 메들리처럼.’
이야기에 따라 곡을 가져오고, 이를 교향곡처럼 악장을 나눠 편성한다.
그동안 4악장을 통해 음악을 펼쳤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만, 본래 오페라 [마술피리]의 스토리라인에 맞춰 악장을 짜야 했지.
오페라 자체의 음악 특색이 뚜렷했기에, 그 과정은 크게 어렵지 않았다.
두번째 생각은 곡이 가진 특성이었다.
오케스트라 버전으로 편곡했지만, 이 곡은 본래 오페라 곡이었으니까.
분명 사람들은 오페라로서의 면모도 기대하고 있을 것이다.
게다가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은 콘서트를 비롯해 오페라와 연극까지 아우르는 축제니까.
하루에도 오페라가 몇 개씩이나 펼쳐지고, 그 오페라 무대 중에서도 어떤 팀이 우수했는지 경쟁이 돌 정도.
그런 무대에서 성악 없이 진행하는 것은 되레 마이너스가 될 수 있었다.
리히트에는 성악가가 없지만.
대신, 나는 그 부분을 채울 사람을 한 명 알고 있었다.
“이번 무대에서 성악 파트를 맡아줄 진주미씨입니다.”
처음 호텔 강당에 진주미가 들어섰을 때.
단원들은 주미를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한국인 중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고, 외국 단원들도 그녀의 명성을 대부분 알고 있었으니까.
세계적인 지휘자, 카라얀이 ‘신이 내린 목소리’로 극찬한 인물이자, 20대에 동양인 최초로 세계 5대 오페라 극장에서 프리마돈나로 활약한 인물이자,
최고의 소프라노에게 주어지는 이탈리아의 황금기러기 상을 수상하고, 50이 넘은 지금까지 전성기의 목소리를 놓치지 않은 진주미.
그녀가 함께한다는 말에 환호와 함께, 영광이라는 사람도 몇몇 있었다.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실 주미를 초청하는 것은 도박에 가까웠다.
20분이라는 공연 시간 동안 주미가 등장하는 5분이 채 되지 않을 정도로 작았으니까.
5분을 채우기 위해 한 달 이상을 오스트리아에 머문 것이다.
그럼에도 주미는 그저 좋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오히려 연습, 리허설을 가리지 않고 대단하다는 말만 내뱉었다.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하셨나 모르겠네요.”
주미는 연주의 한 부분에 크게 주목했다.
보통 오페라 공연을 위해서 펼쳐지는 소리는 극의 분위기를 만들되, 가수들의 목소리를 해치면 안 된다.
그 때문에 오케스트라는 고유의 웅장함을 조금 내려두고 약소한 울림을 펼쳐야 한다.
주미는 그러한 점들이 때론 아쉽다고 덧붙였다.
자신의 노래와 가사의 뜻이 정확하게 전달되어야 함은 알고 있지만, 그 때문에 소리가 약해지는 것이 다소 아이러니하다고 표현했다.
“어디까지나 음악이 주된 예술이잖아요. 그런데 음악 때문에 다른 음악이 손해를 보아야 한다는 것이…”
주미의 말도 꽤 일리가 있었다.
오케스트라에서도 더 나은 소리를 위해 소리를 약하게 하는 경우는 있지만, 오페라는 결이 달랐다.
결국 무대에서 더욱 빛을 받는 것은 오페라 가수니까.
그렇기에 주미는 내가 만든 [마술피리] 메들리는 무척이나 센세이셔널하다고 표현했다.
오페라 가수와 오케스트라 모두가 돋보일 수 있는 선율의 연속.
게다가 주미는 분명 다른 성악가가 없음에도 다른 가수와 함께 무대를 하는 착각이 들 정도라고 덧붙였다.
악기들이 만들어내는 소리가 마치 사람의 목소리 같다고.
이마저도 내가 만든 마법 같다고 말했다.
완전히 특별한 것은 아니었다.
오케스트라에서도 흔히 성악가의 독창에 맞춰 반주를 펼치기도 하니까.
다르다면, 이번 공연이 ‘독창’과 ‘협주’ 사이를 오가는 것이랄까.
이것이 무척 독특하게 다가왔던 것인지, 무대를 끝내고 오자 무수한 사람들이 내게 다가왔다.
“정말 인상 깊었습니다.”
“역시, 리히트라면 무언가 색다른 것을 펼칠 줄 알았습니다.
연이어 오케스트라계의 거장들이 대기실을 찾았다.
네덜란드 콘체르테의 빌렘 하이팅스를 시작으로, 현직 빈 필의 수장, 올란, 한때 내게 비판적인 시선을 보냈던 런던 필의 수장까지.
그중 몇몇은 아직 감동이 가시지 않은지 눈시울이 붉었다.
그때, 한 사람의 말에 대기실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어떻게 이런 연주를 생각하게 되었습니까?”
전직 빈 필의 수장이자, 지금은 감독으로 있는 레오가 넌지시 물었다.
동시에 다른 마에스트로도 동시에 내게 눈길을 보냈다.
마치 그들 또한 이 질문에 대한 답이 궁금하다는 듯.
내 대답을 강렬하게 원하고 있음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내가 그들에게 해줄 말은 하나였다.
“모차르트였다면 이렇게 하지 않았을까요?”
***
[잘츠부르크 페스티벌, 그 막을 올리다.]
[권위와 전통의 축제. 이번에도 유수의 오케스트라가 몰려 화제…]
[평론가, ‘부드러운 매력의 콘체르테냐, 강인한 기세의 빈 필이냐.’]
클레식계는 잘츠부르크 페스티벌 소식으로 한창이었다.
매해 열리는 컨퍼런스와 같은 축제였기에.
페스티벌 자체에 대한 평가도 있는가 하면, 벌써부터 무대를 관람한 평론가들이 여러 평론들을 연이어 배출하고 있었다.
평론 하나하나가 논문 수준에 가깝고, 남다른 퀄리티를 자랑하기에.
참가팀들은 이러한 평론을 바탕으로 새로운 성장을 꾀하기도 했다.
하지만, 평론이 아닌 칭찬으로만 가득한 팀이 하나 있었다.
[리히트. 이번에도 새로운 장르를 개척하나.]
[주최측, 오페라와 오케스트라를 합친 최고의 무대였다고 극찬.]
[노다메 히세이시 ‘리히트의 무대는 콘서트도, 오페라도 아닌 새로운 장르. 즉, 이안은 개척자라고 소신 발언.]
[‘이런 무대에 오를 수 있게 되어 감사.’ 진주미, 리히트 박이안 단장에게 모든 공을 돌려.]
리히트의 무대는 순식간에 방송과 SNS를 타고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연이은 보도에 브룩은 쾌재를 불렀다.
지금껏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 이러한 이목이 집중된 적은 없었다.
클래식계의 축제이자, 컨퍼런스이기에.
일반 대중들에게는 접근성이 현저히 낮은 것이 사실.
음악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는 대중들에겐 그저 같은 작품을 반복해서 연주할 뿐이니까.
잘츠부르크 도시 전체가 축제의 장에 변하는 것에 비해, 대중들의 참여도는 무척 적었다.
하지만, 이안의 소식이 전 세계로 펼쳐지자 그러한 인식이 완전히 뒤바뀌었다.
‘이안이 방문한 유명한 축제.’
이안이 방문했다는 이유로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은 대중들의 관심을 한눈에 받았다.
이안이 인정하고, 참여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하다며.
몇몇 팬층은 이안이 머물렀다고 알려진 호텔에 머무른다고 인증샷을 보내는가 하면, 몇몇은 이안이 연주한 [마술피리]에 대해 관심을 가지기도 했다.
늘어나는 관심에 사람들의 발걸음이 늘어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봤어? 매일 방문객 숫자가 갱신 중이야.”
패트리카는 하루에도 몇 번씩이고 놀랍다는 말을 연이어 내뱉었다.
지금껏 진행했던 잘츠부르크 페스티벌 중에서도 최고의 호황기를 맞이하고 있다며.
이안의 무대가 끝난 이후에는 방문객이 떨어질 것이라 생각했지만, 그렇지 않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이안의 명성으로 방문한 사람들은 대부분 클래식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었으니까.
그들이 다른 유명 오케스트라나 오페라에 빠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안이 이목을 집중시켜주었으니 브룩이 할 일은 하나.
앞으로 더 많은 공연에서 리히트를 본받은 연출을 하는 것뿐이다.
막 다시금 업무에 집중하려는데, 브룩의 전화가 울렸다.
오랜만에 걸려온 반가운 전화에 그는 곧장 전화를 받았다.
“오랜만이다! 웬일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