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시작부터 천재 피아니스트-217화 (217/250)

217화

취리히 공항을 나서자 페스티벌 측에서 준비한 리무진 버스들이 줄지어 우리를 반겼다.

이윽고 가장 선두에 있던 빨간색 승용차에서 한 여인이 내렸다.

여성은 곧장 내게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단장님. 로지 에렌스트입니다.”

루체른 페스티벌 위원회의 대표이자, 나를 여기로 초청한 장본인.

로지는 나와 악수를 나누며 자신의 팬심을 여지없이 드러냈다.

영상으로나마 보았지만, 직접 가지 못해 무척 아쉬웠다고.

그동안 리히트가 걸어온 발자취는 기본, 최근 두 개의 페스티벌에서 보여줬던 무대들 또한 엄청나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그럼 가보실까요?”

단원들이 리무진 버스에 탑승하는 사이, 나는 짐을 맡긴 채 로지의 차에 탑승했다.

연습을 치르기 전에 확인해야 할 것이 있었으니까.

차량을 타고 한 시간가량 지났을 즘.

저만치 보이는 루체른 호수가 이곳이 루체른 알려주고 있었다.

스위스 루체른.

스위스에서 7번째로 큰 도시이자, 루체른 호수와 로이스강을 끼고 있어 ‘물의 도시’라고 불리는 곳이었다.

“이번 페스티벌의 주제는 무엇입니까?”

매년 루체른 페스티벌에서는 주제를 선정한다.

내가 학생 신분으로 왔을 때는 ‘혁명’이라는 주제가 선정되었었지.

이에 말 그대로 혁명적인 연주를 보았던 기억이 선명했다.

재활용 악기로 오케스트라를 만들었던 것에서부터, 클래식과 일렉을 섞은 밴드까지.

그러한 주제를 바탕으로 펼치는 공연이 루체른 페스티벌의 묘미였다.

“올해는 ‘변화’로 잡았습니다.”

세월이 변함에 따라 클래식도 변화하고 있다고.

과거 직접 들어야 하는 오케스트라 선율이 앨범에 담겨 전 세계인에게 퍼지는 것처럼 클래식도 무수한 선택의 기로에 직면했다고 설명했다.

그러한 변화의 아이콘이 바로 나라며.

로지는 리히트야말로 그동안 자리 잡았던 정통 클래식에 정면으로 도전한 영웅이라고 표현했다.

한창 이야기가 오가고, 어느덧 차량은 목적지에 도달해 있었다.

“도착했습니다. 단장님.”

단원들이 호텔로 향한 사이, 나는 다른 곳에 와있었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보이는 커다란 건물.

루체른 호수를 등진 건물은 웅장했다.

창문에 호수가 비치면서 마치 건물이 호수 속에 들어가있는 듯한 신비로운 분위기를 연출했다.

페스티벌 무대를 펼칠 루체른 문화 컨벤션 센터였다.

Kultur- und Kongresszentrum Luzern.

콘서트홀을 비롯하여 미술관을 보유하고 있는 루체른 문화 컨벤션 센터.

호수와 어우러지는 멋을 자랑하는 이곳은 루체른 페스티벌의 중심이 되는 곳이었다.

로지는 센터에 대한 설명을 곁들이며 안내를 시작했다.

루체른에서 제일 가는 관광지이자, 거대한 오케스트라홀을 보유한 곳이었다.

하지만, 로지가 가장 중요시하게 소개한 곳은 따로 있었다.

“이곳이 바로 단장님과 단원분들이 오를 무대입니다.”

로지가 가리키는 방향에는 야외무대 설치가 막바지에 다다른 상태였다.

검은 판넬로 된 바닥과 목각 구조물로 이루어진 돔 형태의 무대.

소리를 응집하는데 최적의 구조를 하고 있었다.

게다가 넓게 편성된 관객석은 수천 명의 관객도 거뜬하게 유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거기에 아름다운 루체른 호수의 전경이 펼쳐지자 한 폭의 그림 같은 상황이 연출되었다.

“리히트를 모시기엔 콘서트홀이 좁을 것 같아서요.”

루체른 문화 센터 콘서트홀의 수용 인원은 1,800명.

결코 적은 숫자는 아니었다.

하지만, 로지는 그동안 내가 다녀온 페스티벌을 생각하면 터무니없이 좁은 것이라고 표현했다.

분명 예상을 필적하는 관객들이 오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루체른 호수를 배경으로 리히트가 펼치는 선율이 어떨까 궁금하다고 덧붙였다.

“브룩에게서 제 이야기를 들었나 보군요.”

“바로 알아보셨군요. 브룩이 단장님의 안목과 청음력에 감탄하더라고요. 사실 그 무대 구성조차 단장님 생각이었다는 말에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요.”

지어지고 있는 무대의 돔 형태.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서 내가 브룩에게 주문했던 구조였다.

로지 또한 그부분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고.

더 좋은 소리를 펼치기 위해 전문가들을 초빙하여 더욱 면밀히 만들었다고 덧붙였다.

건축을 비롯해 사소한 것까지 놓치지 않으려는 모습.

그녀가 얼마나 루체른 페스티벌에 진심인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이 무대에서 어떤 곡을 펼칠지 생각해보셨습니까?”

연습을 위해 여유롭게 온 터라 아직 곡에 대한 것을 알려주지 않았다.

아직 정하지 않은 탓도 있었다.

루체른 문화센터에 온 것은 무대를 보는 것도 있었지만, 이 무대에서 가장 어울릴 곡은 무엇일까 생각하기 위함도 있었다.

그리고 넓은 호수를 보자 떠오르는 곡이 하나 있었다.

***

호텔방이 피아노 선율로 가득 메워졌다.

연주를 하면서 내 머릿속에는 가상의 악보가 떠올랐다.

루체른 페스티벌을 가장 잘 나타내는 연주이자, 잔잔한 호수를 배경으로 펼칠 수 있는 최적의 곡.

<지크프리트 목가>가 새로운 모습으로 재창조되고 있었다.

<지크프리트 목가>.

19세기 음악에 큰 획을 그은 리하르트 바그너가 만든 곡으로, 관악과 현악의 조화가 인상적인 곡이었다.

바그너가 아내인 코지마의 생일을 기념하기 위해 깜짝 선물로 만든 곡.

그에 걸맞게 <지크프리트 목가>는 사랑과 평화를 담은 곡으로 유명했다.

바이올린과 오보에, 플루트와 같은 금관악기와 현악 5부가 섞이며 편안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마치 루체른 호수의 잔잔한 물결을 형상화한 것 같은 선율.

내가 이 곡을 선택한 첫 번째 이유였다.

그리고 두 번째 이유.

이 곡이 루체른 축제와도 깊은 연관이 있는 곡이기 때문이었다.

‘사실상 루체른 페스티벌의 기원을 함께한 곡이니까.’

루체른 페스티벌의 시작은 아주 작은 갈라 콘서트였다.

1938년. 19세기 음악에 큰 획을 그은 리하르트 바그너에게 헌정하기 위해 펼쳐진 갈라쇼.

그리고 헌정 갈라쇼의 중심 연주곡이 바로 <지크프리트 목가>였다.

연주가 펼쳐질 무대와 가장 어울리는 선율이자, 루체른 페스티벌과 가장 연관이 깊은 곡이기에.

무대에 올릴 이유는 충분했다.

‘이제 어떻게 살릴지가 관건이겠지.’

소규모 관현악단이 연주하던 곡을 리히트가 연주해야 한다.

악기의 성부를 나누는 것은 물론, 리히트에만 존재하는 악기들에도 적용시키려면 꼭 필요한 과정.

이미 머릿속에서는 그 그림이 차례대로 쌓이고 있었다.

신비로운 소리를 가진 테레민으로 음악의 서막을 열고, 뒤이어 관현악의 선율이 등장하도록.

특히 국악 현악기들의 등장은 물결처럼 나아가는 선율에 생동감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마치 호수에 사는 물고기가 튀어 오르듯, 가야금의 선율이 더해지겠지.

이미 충분한 선율이건만.

나는 무언가 더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축제의 주제에 맞추려면 더 큰 변화가 있어야 해.’

누군가는 이미 <지크프리트 목가>가 바뀌었다고 할 것이다.

하지만, 내가 한 것은 그저 관현악의 종류를 늘인 것일 뿐, 그게 변화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사람들을 매료시킬 더 큰 변화.

음악적으로도 뛰어난 선율을 만들기 위해선 그러한 변화로 임펙트를 줘야 한다.

도나우인젤페스트에서 펼쳤던 <월광>은 지현와 요한나의 압도적인 연주처럼,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서 주미가 밤의 여왕 아리아를 불렀던 것처럼.

이번 루체른 페스티벌에서도 강력한 무언가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강력한 무언가가 이미 내 머릿속에 만들어져 있었다.

그걸 테스트하기 위해.

나는 오랜만에 피아노 대신 다른 악기를 집어들었다.

***

‘세 번이나 페스티벌에 초청받다니...’

3기 리히트 오케스트라 단원으로 들어온 준모는 여전히 지금이 꿈만 같았다.

도나우인젤페스트, 잘츠부르크 페스티벌, 루체른 여름 페스티벌.

현실에 치이며 바라만 보던 유럽의 음악 축제들인데.

연주를 듣는 것만으로도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던 과거와 달리 지금은 자신이 그 무대에 설 준비를 하고 있지 않은가.

이미 두 차례나 되는 무대를 이어온 탓에 피곤해야 정상일 텐데.

되레 루체른 페스티벌 소식을 듣고 더욱 심장이 뛰지 않았던가.

준모는 이 모든 것이 가능한 이유는 바로 이안이라고 생각했다.

이안에게 가르침을 받으면 흐렸던 정신도 올곧게 펴지는 기분이었으니까.

“이 곡은 감정이 무척 중요한 곡입니다.”

<지크프리트 목가>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이안은 마치 대학교수 같았다.

장황하게 설명하면서도, 포인트를 적절하게 살려 모든 학생들의 사랑을 받는 대학교수.

루체른 페스티벌의 연관성을 비롯하여, 바그너가 사랑하는 아내를 위해 만든 곡이라는 설명이 귀에 쏙쏙 들어왔다.

그러한 행복감과 사랑을 담아야 한다는 말.

분명 추상적인 개념인데도 이안의 말대로 하니 전혀 다른 선율이 튀어나왔다.

‘나도 할 수 있는 거였구나.’

감정을 담아 연주를 펼치는 것.

처음 준모는 자신은 그 방법을 모른다고 생각했다.

자신은 그동안 감정보다는 이성에 충실한 연주를 했다고 생각했으니까.

실수하지 않고 빼어난 선율을 펼치기 위해 노력했던 나날들.

보다 명확한 음악을 위해 곡의 이야기를 머릿속으로 끊임없이 생각했다.

그 일련의 과정들이 모두 선율에 감정을 넣는 과정이었다는 것을 리히트에서 깨달을 수 있었다.

이안의 조언대로 사랑하는 감정을 이끌어서 기타 현을 퉁기자 보다 부드러운 선율이 떠오른다.

마치 사랑하는 이를 어루만지듯.

나무에서 나는 딱딱한 소리가 아닌, 인간성이 잔뜩 묻은 소리가 흘러나왔다.

개인 연습을 마치고 본 연습에 들어가려던 찰나.

한 단원이 크게 질문했다.

“단장님. 이 솔로 파트는 뭔가요?”

단원의 질문에 준모는 악보를 다시금 쳐다봤다.

이전에 페스티벌에서 봤던 악보에 비해 이번 악보에는 한 줄이 더 만들어져 있었다.

게다가 독특한 것은 음악 지시어가 빼곡한 다른 부분에 비해, 솔로 파트에 해당하는 악보에는 그 어떠한 악상 기호도 존재하지 않았다.

마치 즉흥 연주를 위한 악보처럼 말이다.

“이번 연주에 특이점입니다.”

이안은 질문에 대한 답을 짧게 더했다.

이번 페스티벌의 주제인 ‘변화’에 맞춘 부분이라고.

그저 평온하기만 한 <지크프리트 목가>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키는 새롭게 창작한 부분이라고 덧붙였다.

이안의 설명에 몇몇 단원들은 기대감을 감추지 못했다.

이미 오케스트라 선율로 바꾼 것만으로도 대단한데.

거기에 완전히 새로운 성부(聲部)를 추가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한 번 연주해보겠습니까?”

이안의 질문과 누군가를 지칭했다.

그 동시에 모든 단원들의 시선이 한 군데로 꽂혔다.

언제든지 준비가 되었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는 여인.

여인은 준모가 오케스트라에 들어오기 전부터 알고 있던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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