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8화
김모노.
그녀는 2기 리히트 오케스트라 단원이 된 사람이자, 재즈 바이올린을 전공한 사람이었다.
한국 사람 중에서 그녀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몇 없었다.
한때 활기찬 재즈의 선율을 펼치는가 하면, 그 실력을 인정받아 3.1절 100주년 행사에도 초청될 정도였다.
기념비적인 공연에, 전 세계 121개국 생방송으로 진행된 연주.
이를 기점으로 그녀는 스위스 다보스에서 열린 세계 경제 포럼에서도 초청 연주를 펼치기도 했다.
그런 굵직한 실력을 가진 모노에게도 이안은 태산 같았다.
‘어떻게 이런 선율을 만들 생각을 했을까?’
재즈(Jazz).
즉흥성이 강한 선율이라 작곡가가 할 일이 없다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다.
흥을 돋우는 재즈의 선율은 생각보다 제한된 음이 많고, 그 음에서 벗어나면 좀처럼 재즈의 맛을 살릴 수 없다.
즉흥적이지만, 형식이 있다는 아이러니를 가진 장르.
그것이 바로 재즈였다.
그래서 클래식과 결이 다르다고 불리는 것인데.
이안은 그 경계를 완전히 허문 것처럼 음악을 만들어냈다.
“준비되었습니까?”
이안의 질문에 모노의 심장이 벌렁거렸다.
미사어구가 가득한 칭찬의 말을 한 것도 아니건만.
독주 자리를 주었다는 것만으로도 이안의 인정을 받은 셈이었다.
하지만, 그저 마음이 가볍지만은 않았다.
이건 자신에게 주어진 책임이니까.
왕좌에 앉으려면 왕관의 무게를 버텨내야 한다는 말이 있듯.
그에 필적하는 실력을 선보여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안의 눈길을 본 모노는 되레 마음이 차분해졌다.
반드시 해내야 한다는 강한 압박이 아닌, 자유롭게 펼쳐보라고 손을 내미는 것 같은 눈길.
그 눈길에 부응하기 위해 모노는 활을 고쳐 들었다.
molto tenuto.
악상기호는 없음에도, 모노는 머릿속에서 차근히 그림을 그려갔다.
이안이 표현하기에, 이 노래는 사랑과 관련이 깊다 하지 않았던가.
바그너가 아내 코지마에게 선물했던 곡.
모노는 바그너가 아닌, 아내의 입장에서 어떤 기분이었을까를 떠올리며 연주를 펼쳤다.
생일 아침 난데없이 펼쳐진 연주.
당황스러우면서도 행복이 샘솟듯 터져 나오지 않았을까.
벌렁거리는 심장을 나타내듯 바이올린이 스윙을 더해가고, 점차 고조되는 선율을 펼쳤다.
연주를 이어가면 이어갈수록.
모노의 가슴 한편에는 환희와 함께 놀라움이 피어 나왔다.
‘모든 것을 예상하고 쓴 악보 같아.’
마치 처음부터 자신을 위해 만들어진 것인 양.
이안이 펼친 음표들을 그대로 따라가니 자연스레 음악이 만들어졌다.
분명 악보에는 어떠한 악상 기호도 적혀 있지 않은데.
그저 연주하는 것만으로도 자연스레 속도가 빨라지고, 느려진다.
이미 이렇게 연주할 것을 이안이 모두 예언이라도 한 듯, 즉흥적이지만 즉흥적인 연주가 계속해서 펼쳐졌다.
연주가 끝났을 무렵.
모노의 이마에는 땀방울이 가득했다.
행복감에 젖은 마음을 표현하기 위해 더욱 팔과 몸을 움직였기 때문.
이에 대해 이안은 담담히 바라보다 단원들에게 물었다.
“다들 모노씨의 독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안의 물음에 단원들은 말 대신 행동으로 반응했다.
자연스레 모든 단원들이 기립 박수를 보냈다.
이미 지금으로도 충분히 완성된 선율이라고.
곧바로 이안은 본 연습을 시작했다.
수없이 연습을 하고 저녁이 되었을 즘.
모노는 방으로 돌아가기 전 이안에게 찾아갔다.
아직도 머릿속에서는 처음 곡을 연주했을 때의 의문이 떠나가지 않았으니까.
“혹시 왜 저를 선택하셨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자신의 실력이 낮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단원들 중에 바이올리니스트는 많지 않은가.
특히 수천만 구독자를 거느린 에비게일은 이미 유튜브를 통해 작곡을 비롯해 즉흥연주에 대한 능력도 증명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왜 자신일까 하는 생각이 떠나가지 않았다.
모노의 질문에 이안은 무척 담백하게 이야기했다.
“유명하신 사랑꾼이시잖습니까.”
이안의 말에, 모노가 부끄러움에 얼굴을 붉혔다.
생긋 미소를 짓는 모노.
그녀의 머릿속에 과거의 기억 하나가 스쳐갔다.
TV토크쇼의 진행자와 사랑에 빠져 결혼까지 골인한 이야기.
당시 모노와 남편 사이 러브스토리가 사람들에게 큰 화제를 몰았었다.
매일 산책을 핑계로 만남을 가지고, 서로의 마음을 키워가던 때.
모노와 남편 모두 부끄럼이 많았기에 한참 동안 고백조차 하지 못했었다.
그런 부끄럼쟁이 모노가 처음으로 고백했던 한 마디.
“내일은 연인으로 만날까요?”
꾸밈도 없고, 미사여구 하나 없는 담담한 멘트이건만.
모노가 한 말은 한동안 사람들의 단골 고백 멘트로 자리 잡을 정도로 파급력이 강했다.
이안은 그때를 기억한다고 표현했다.
“그래서 선정했습니다. 누구보다 이 곡을 잘 소화할 테니까요.”
의문이 해결됨과 동시에, 모노의 팔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처음 떠올랐던 부끄러움은 어느덧 놀라움으로 바뀌어 있었다.
설마 10년이 다 되어가는 과거 TV토크쇼를 기억할 줄은 몰랐던 것.
게다가, 단원의 특색을 고스란히 곡에 반영한다는 결단력이 그저 놀라울 따름이었다.
선율을 생각하고, 어느 단원이 가장 적합한지 계산하는 치밀함.
그러한 이안의 면모에 모노는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
[리히트. 이번에는 루체른에서 무대를 선보일 예정!]
[모든 국가의 스위스행 비행기가 남아나질 않아, 각 항공사 스위스행 항공 추가에 총력을 기울여…]
[주최 측, 이전보다 더 많은 관광객이 올 것이라 판단. 그에 걸맞은 무대를 준비할 것이라…]
단원들이 연습 때마다 뉴스 기사를 하나씩 얘기해주었다.
아직 루체른 페스티벌을 2주가량 남기고 있는 상태인데.
리히트 오케스트라의 출연이 확정된 이후 뉴스에서는 계속해서 루체른 페스티벌에 대한 이야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인터넷에서도 온통 리히트에 대한 소식뿐.
특히 이번 무대에서는 어떤 곡을 할 예정일까에 대한 관심이 폭발적이었다.
“모두가 기대하는 만큼 잘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번 무대의 핵심을 맡게 된 모노가 강한 자신감을 드러냈다.
사랑의 선율을 더욱 강하게 하기에 사랑꾼만큼 좋은 사람은 없을 테니까.
한 때 대한민국을 ‘내일부터 연인으로 만나자’ 붐을 일으킬 정도의 모노라면 바그너가 표현하고자 했던 사랑의 이야기를 가득 담을 수 있으리라.
“무대 당일에도 이렇게 날씨가 쾌청했으면 좋겠네요.”
식당에서 함께 점심을 먹는 사이.
창밖을 바라본 요한나가 넌지시 말했다.
사뭇 갑작스러울 수도 있는 날씨 얘기였지만, 나는 그 말이 어떤 의미인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네. 아마 괜찮을 겁니다.”
이미 로지에게도 물어보지 않았던가.
보통 스위스는 8월이 되면 장마가 시작된다.
평소와 같은 루체른 페스티벌이었으면 콘서트홀에서 연주를 진행할 테니 걱정이 없겠지만.
야외 공연을 진행하는 만큼 날씨가 무척 중요했다.
비가 오면 소리가 흐트러지는 것은 물론, 바이올린을 비롯한 현악 선율이 늘어지기 일쑤니까.
바이올린 독주를 넣은 이번 무대에서 무척 중요한 부분이었다.
로지 또한 그것을 잘 아는지, 내게 날씨 이야기를 자주 알려주었다.
-올해 장마는 조금 늦을 것 같다고 합니다.-
스위스 기상청에 직접 문의를 할 정도로 로지의 열망 또한 대단했다.
일전에 호텔에서 연주를 직접 목격하고는 눈에 불을 켤 기세로 응원하지 않았던가.
그 밖에도 호텔에서의 모든 것을 책임질 정도로 최고의 대우를 해주고 있었다.
-단장님과 단원분들이 온전히 무대에 집중하실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전화를 한 로지가 연신 기대된다는 말을 덧붙였다.
뉴스에서도 나왔듯 가히 수천 대에 달하는 비행기가 스위스로 날아오고 있다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올지 모른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드디어 다음 주입니다.-
어느새.
루체른 페스티벌이 다가오고 있었다.
***
스위스에서의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내일이면 루체른 페스티벌의 화려한 서막이 열린다.
그 서막을 장식할 존재가 바로 리히트 오케스트라 아닌가.
리허설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로지의 가슴 한편이 뜨거워졌다.
‘이건 변화를 넘어 창조의 경지 아닌가?’
<지크프리트 목가>.
루체른 페스티벌 위원회의 대표로서 그녀 또한 잘 아는 곡이었다.
파도처럼 잔잔한 선율이 인상적인 곡인데.
그걸 수십가지의 악기로 탄생시킨 것이 믿기지 않을 지경이었다.
처음 본 한국 악기임에도 리히트의 연주를 보는 것만으로도 연주해보고 싶은 욕망이 떠오를 정도.
게다가 그뿐만이랴.
‘바이올린 독주는 정말 신의 한 수야.’
사랑이 항상 잔잔하기만 할 리가 없다.
몽글하게 피어오르는 꽃처럼 온화하기도 하고, 때로는 기쁨에 겨워 활기차게 변하기도 하니까.
모노의 바이올린 독주는 그런 변화무쌍한 사랑의 감정을 고스란히 표현하고 있었다.
독주가 더해진 <지크프리트 목가>는 이안의 손을 거쳐 사랑이란 감정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했다고 봐도 무방했다.
‘오늘이 딱 본 무대였으면 얼마나 좋을까.’
리허설로 확인한 리히트의 무대는 한폭의 그림 같다는 표현도 부족할 정도였다.
잔잔한 수면과 무대의 검은 타일들이 맞춰지며 리히트 오케스트라가 마치 물 위에서 연주를 하는 착각을 일으켰다.
게다가 돔 형태로 만들어진 무대는 조개의 모양을 본떠 만들어 화려함을 더했다.
마치 조개 속 진주가 된 것처럼, 리히트 오케스트라가 그 중심에 있었다.
장마철인데도 구름 한 점 없는 날씨도 그 아름다운 광경에 한몫을 했다.
신이 리히트의 연주를 듣기 위해 구름을 모두 거뒀다고 해도 믿을 것 같았다.
그 정도로 충분히 좋은 무대라고 생각했는데.
이안의 표정이 평소와 사뭇 달랐다.
모노를 비롯해 현악기를 다루는 단원들에게 연주를 주문하는가 하면, 하늘과 오케스트라를 번갈아 보기도 했다.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과 비슷한 표정을 짓는 이안.
이안의 모습은 고뇌에 빠진 거장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무언가 마음에 안 드시나?’
걱정스런 마음에 로지는 곧바로 이안에게 다가갔다.
위원장으로서, 이번 축제를 맡은 총책임자로서 무대를 보다 완벽하게 만드는 데 도움을 주는 것이 자신의 책무였으니까.
그런데, 이안이 꺼낸 이야기는 뜻밖이었다.
“비가 올 것 같네요.”
갑작스런 이안의 말에 로지는 그저 어리둥절했다.
이토록 맑은 하늘에, 일기예보를 확인해도 모레까지는 화창하다고 되어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 예보도 믿을 순 없었다.
장마철에는 갑작스레 소나기가 오는 것이 비일비재했으니까.
그러나 기상청도 잡아내지 못한 것을 이안이 말하는 게 신묘하면서도 왜 그런 확신을 했는지 궁금할 지경이었다.
“자꾸 현악 선율이 틀어지네요.”
이안은 확신에 찬 목소리로 이야기를 이어갔다.
바이올린 독주 부분에서 현이 자꾸만 느슨한 소리를 낸다고.
이전에도 실전 연습을 위해 무대 위에서 연습을 했지만, 이런 적은 없었다고 설명했다.
비가 오기 전, 습기가 차면 이런 일이 발생한다는 이안의 말에.
로지는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그 차이가 있어?’
그동안 리히트의 리허설에 모두 참여한 로지였다.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선율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사이에서도 변화를 찾았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게다가 그 생각이 비가 온다는 확신으로 이어지기까지.
사뭇 믿기 힘든 이야기였지만, 어느덧 로지는 이안의 말에 설득되어 있었다.
‘제발…’
로지는 맑은 하늘을 보며 그저 이안의 기우(杞憂)이길 바랐다.
그러나 이안이 젊은 거장이라고 불리는 이유가 분명 있지 않겠는가.
그저 로지가 할 수 있는 것은 단 하나.
하늘을 향해 비가 내리지 말라고 기도할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