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9화
여전히 일기예보에는 맑음이라고 떠 있었건만.
내 본능이, 내 청음력이 그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었다.
지금껏 수없이 센터 앞 야외무대에서 연주를 했지만, 오늘 연습만큼 음이 틀어진 적은 없었다.
그럼에도 오늘 그렇게까지 선율이 변한다는 것은 평소보다 습도가 몇 배나 높았다는 이야기.
즉, 비가 올 확률이 무척 높다는 것이었다.
‘비가 오면 악기가 상하는 것도 있지만, 소리가 틀어져.’
바이올린은 습도에 무척 취약한 악기이기에, 조금의 차이로도 크게 바뀐다.
처음부터 듣는 사람들은 변화하는 소리에도 자연스레 적응하겠지만, 차후에 영상으로 남은 소리에서 그 차이는 더욱 극명하게 나타날 것이다.
그렇다고 20분이라는 긴 시간 동안 계속 틀어진 음을 조율할 수는 없는 노릇.
게다가 비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는 악기 문제뿐만이 아니었다.
‘빗소리에 선율이 흐려질 테지.’
특히 <지크프리트 목가>는 잔잔한 호수를 생각하고 선정한 곡이기에.
빗소리와 같은 소음에는 더욱 취약했다.
무대 천장과 바닥, 하물며 호수에 떨어지는 빗방울까지 소리로 번져서 퍼질 테니까.
그렇다고 갑작스레 선율을 크게 만들 수는 없다.
습도로 인해 소리가 전달되는 것 또한 달라질 테니까.
현악기가 망가질 우려가 있는 것은 물론, 관악기들의 울림이 더 크게 전달될 테니 음악의 균형이 무너지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만약 콘서트홀에 들어가면 해결될 문제이지만, 이미 주최 추산 1만 명이 넘는 관객들이 올 예정.
1,8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콘서트홀에서 연주를 하면 연주를 듣지 못하는 사람들이 더 많을 것이다.
연주회를 미루는 것 또한 불가능.
장마철인 지금 상황에서는 언제, 어느 시점에 비가 올지 정확하게 예측할 수 없지 않은가.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피할 수 없다면 즐기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그 즐기는 방법을 찾기 위해, 내 머리가 비상하게 돌아갔다.
한참 생각을 하던 그때.
‘있다. 방법.’
순간, 내 뇌리에 무언가 스쳐 지나갔다.
빗소리가 있음에도 야외무대를 할 수 있는 방법.
나는 그 방법을 현실로 끌어올리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단장님? 이 시간에 웬일이세요?”
가장 먼저 방문한 것은 요한나였다.
요한나는 내 방문에 무척 놀란 듯 보였다.
대부분의 경우에서는 내가 직접 찾아오는 경우는 없었으니까.
특히나 내일 무대를 앞뒀다면 더더욱 단원의 컨디션을 신경 쓰는 나였으니.
그러나 지금은 그보다 중요한 일이 있었다.
“요한나, 서령과 아람을 데리고 홀로 와주세요.”
***
새벽 1시.
공식 연습이 이미 끝나고 내일을 위해 준비를 할 시간이었다.
항상 컨디션 조절을 중요시 여긴 이안이었기에, 새벽까지 연습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런데, 오늘은 달랐다.
‘대체 이번에는 무슨 일이지?’
비상호출.
모노를 비롯해, 호텔의 홀에 모든 리히트 단원이 모였다.
지금껏 이안이 단원들을 갑작스레 모은 것은 오늘을 제외하면 단 한 번이었다.
레오를 비롯한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사고로 급히 프랑스에 가야 했을 때.
하루가 채 되지 않는 시간에 영국에서 프랑스로 이동하면서 공연을 준비하지 않았던가.
‘그때보다 더 상황이 심각한가?’
당장 내일이, 아니 오늘 해가 뜨면 루체른 페스티벌이 개막할 예정이었다.
무대를 앞둔 날만큼은 특히 이안이 더 컨디션 조절에 신경을 썼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안이 자신들을 모았다면 분명 무언가 있으리라는 확신이 있었다.
단원들이 모두 온 것을 확인한 이안이 천천히 이야기를 이어갔다.
“아무래도 내일 비가 올 것 같습니다.”
이안의 말에 대부분 현악기 전공자들은 난색을 표했다.
그 누구보다 비와 현악기 사이의 상관 관계를 잘 아는 사람들이었으니까.
특히 모노가 사용하는 바이올린은 온도와 습도에 영향을 크게 받는 악기였다.
어제 리허설에서도 이안이 몇 번이고 조율을 지시하지 않았던가.
“그럼 연주를 콘서트홀에서 진행하나요?”
어찌보면 가장 간단한 방법이리라.
일단 실내이니 비를 맞을 염려도 없고, 악기 컨디션을 위해 홀 내부에 습도조절 장치도 있을 테니 무리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단원의 질문에 이안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연주는 기존에 하듯 야외무대에서 진행할 겁니다.”
천장이 있는 무대라 비가 직접 들어오진 않을 테니까.
아무리 비 때문이라고 할지라도
게다가 이안은 이미 모든 소리를 야외무대로 맞춰둔 상태였기에.
“오늘 제가 여러분을 부른 이유는 만약을 대비하기 위함입니다.”
일기 예보가 말했듯, 비가 내리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면 이전에 연주했듯 연주를 이어가면 될 터.
하지만, 이안은 만약의 수단까지 모두 계산하고 있었다.
비가 오면 제대로 된 선율을 펼치기 힘들 뿐더러, 빗소리에 소리가 묻혀버릴 테니까.
조금의 소리도 흩어지지 않길 바라는 것.
모노는 이안의 생각에 묘한 존경심마저 일렁였다.
“자, 다들 하나씩 받으세요.”
이안이 종이 한 부를 단원들에게 내밀었다.
평소라면 악보를 내밀었을 텐데, 이안이 내민 것은 평소와는 조금 다른 것이었다.
종이에는 1부터 7까지 7개의 숫자를 비롯해, 각 숫자에 대응하는 알파벳이 하나씩 있었다.
알파벳 아래에는 4마디 정도의 짧은 오선지가 그려져 있었다.
모노는 종이를 받자마자 알파벳이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의미를 안다고 해도 여전히 의문점은 많았다.
“만약 공연 중에 비가 온다면 저희는 이걸 연주할 겁니다.”
이안의 말에 단원들이 일제히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안이 준 종이는 악보라기엔 너무 짧았으니까.
“시범을 보여드릴 테니, 잘 기억해두세요.”
이안의 말이 끝나자 미리 약속이라도 한 듯 요한나와 서령, 아람이 차례로 나왔다.
각자 악기를 고쳐잡은 셋은 이안의 지휘를 기다리는 듯 맹렬한 눈빛으로 이안을 바라봤다.
그리고 이안이 천천히 손을 움직이며 지휘를 했을 때.
모든 단원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게… 된다고?”
모노는 연주하는 세 사람과 아까 받은 종이를 번갈아 보았다.
지금껏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새로운 연주.
그래도 자신이 주인공인 무대가 사라진다면 아까울 법도 한데.
이미 모노의 머릿속에는 그러한 실망감보다는 경이로움이 가득 차있었다.
***
루체른 페스티벌의 개막.
올해를 마지막으로 위원장 자리에서 내려오는 로지였기에 이번 루체른 페스티벌은 그 어떤 때보다 중요했다.
그 중요한 무대를 장식하기 위해 리히트까지 초청했지 않은가.
그런데.
로지는 개막 무대를 단 3시간 앞둔 상태에서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들었다.
[장마 전선으로 인하여 폭우가 예정되어…]
정말 이안이 예측한 대로, 비 소식이 전해졌다.
로지는 아연실색하면서도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불과 3시간 전에 기상청이 예견한 것을 이안은 하루 전부터 예견한 셈이니까.
그러나 지금은 놀라운 감상에 젖어있을 시간이 아니었다.
엄청난 폭우를 동반한 소나기가 될 것이라는 예보.
야심차게 야외무대까지 준비한 로지의 얼굴에는 당혹감이 묻어났다.
‘이제 와서 연주회를 바꿀 수도 없고.’
로지의 머릿속에 두 가지 고민이 동시에 떠올랐다.
무대를 본래 예정처럼 진행하기엔 빗소리에 리히트 오케스트라의 선율이 다 묻혀버릴 것이고.
그렇다고 콘서트홀로 옮기자니 이안의 연주를 듣기 위해 온 수만 명의 사람들을 다 어찌할 것인가.
‘지금도 저렇게 줄 서 있는데.’
리히트의 무대는 아직 2시간이나 남아있는데.
루체른 문화 센터 앞에는 좋은 자리를 선점하기 위해 줄을 선 사람들이 셀 수 없이 많았다.
얼핏 봐도 그 숫자가 1,800명은 훌쩍 넘겨 보였다.
이들 중 소수만 콘서트홀에 들이면 분명 잡음이 흘러나올 터.
유종의 미를 거두고 싶었던 로지에게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도저히 머릿속에 해결 방안이 떠오르지 않는데.
이안이 마치 구세주처럼 다가왔다.
이안이라면 지금 상황을 타개할 묘수를 가지고 있지 않을까.
그동안 불가능이라고 불리던 일을 가능으로 만들었던 이안이었으니, 무언가 방법이 있지 않을까하는 일말의 희망을 걸어보았다.
하지만.
“관객들을 위한 우비나 우산 같은 게 있습니까?”
“네, 비치되어 있긴 합니다만…”
한 달이라는 긴 기간 동안 펼쳐지는 루체른 페스티벌이니까.
장마철을 대비한 우비는 이미 창고에 산더미처럼 있었다.
지금 지급해도 충분할 정도의 양.
하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어떡하죠? 지금이라도 콘서트홀로 옮겨야 할까요?”
“아닙니다. 연주를 할 순 있겠지만, 관객들을 많이 잃을 겁니다.”
이안의 생각도 로지와 같았다.
사람들을 수용하는 데 한계가 있는 것은 물론, 소리 또한 적절치 않을 것이라고.
지휘를 하면서 즉석으로 소리를 조절할 수 있겠지만, 완벽한 무대를 위해선 하지 않는 것이 나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안의 말에 로지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즉석에서 소리를 조절할 수 있다는 자신감만으로도 놀라운데.
완벽한 무대를 위해 그런 눈 가리고 아웅 하는 행동은 하지 않겠다는 소신을 밝히는 이안.
다시금 그가 왜 젊은 거장이라고 불리는지 알 수 있었다.
“무대에 올라도 괜찮겠습니까?”
로지 또한 위원장이기 이전에 음악가이지 않은가.
환경에 따라 악기의 소리가 변할 수 있다는 사실은 음악감독에게 기본이었다.
현악기가 습기에 의해 늘어지는 것은 물론, 빗소리가 과하게 들리면 전체적인 음악의 밸런스를 무너뜨릴 것이다.
이안이 이를 모를 리가 없었다.
브룩에게 들은 대로,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서 철저하게 음악을 만들었던 이안이라면 그 이상을 생각했을 테니까.
그럼에도 이안은 그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무대는 관객들과의 약속이니까요.”
그 짧은 말에 로지는 단박에 이안의 뜻을 알 수 있었다.
이안은 무대를 내려갈 생각이 없다는 것.
되레 우직한 얼굴에서는 환경에도 굴하지 않고, 최고의 공연을 선보일 수 있다는 자신감이 묻어났다.
아직 이안이 정확히 어떤 대처방안을 가지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 어떤 문제가 있어도 헤쳐나갈 수 있을 것이란 확신이 떠올랐다.
이미 이안은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드는 젊은 거장이었으니까.
한편으로는 환경을 탓하지 않고 고뇌하는 모습이 존경스러울 지경이었다.
로지가 이안의 말에 깊게 사유(思惟)하는 사이.
바깥에서 가장 듣고 싶지 않은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툭.툭. 솨아-
아, 제발.
하늘에서는 로지의 마음도 몰라준 채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것도 엄청난 장대비.
실내에 있는데도 빗소리가 울려 퍼질 정도로 요란하게 비가 오고 있었다.
그럼에도 바깥에 사람들은 우비를 입은 채 자기 자리를 지켰다.
비를 맞아가면서까지 리히트의 무대를 기대하는 사람들의 눈길을 보니 로지의 입에서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러나 로지와 달리 이안은 그저 태연했다.
마치 이렇게 굵은 장대비를 예측이라도 했다는 듯.
이안은 조금의 흐트러짐 없이 그저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비가 오는 것을 보던 이안은 아무렇지 않은 듯 담담하게 한 마디를 건넸다.
“플랜 B로 가야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