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시작부터 천재 피아니스트-220화 (220/250)

220화

이안이 예상했던 대로 비가 오기 시작했다.

그것도 장대비 수준으로.

백스테이지 가건물에 들어서자 빗소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을 넘어 천장에 울림을 전할 정도였다.

‘이렇게까지 비가 올 줄이야.’

일기예보를 통해서 엄청난 양의 폭우가 내릴 것이라는 얘기는 들었건만.

말 그대로 ‘엄청난’ 폭우였다.

비가 떨어지는 것만으로도 백색 안개가 만들어질 지경.

그나마 다행인 것은 바람이 크게 불지 않아 비가 무대 안까지 들어오진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치만 여전히 소리가…’

모노가 그동안 살아오면서 들었던 빗소리 중에 가장 강력했다.

손으로 천장을 내리쳐도 이런 소리는 낼 수 없으리라.

빗소리에 작은 목소리도 묻힐 정도.

그럼에도 이안은 초연한 듯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되레 눈을 감고 무언가 느끼는 듯 집중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윽고 눈을 떴을 때.

이안은 단원들을 한차례 집중시켰다.

“아마 이런 연주를 들어본 적도, 해본 적도 없어 당황스러워 할 것을 잘 압니다.”

이안의 말에 곧바로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애써 끄덕임을 참는 사람도 있었다.

모노 또한 이안을 믿고 있음에도 고개가 절로 끄덕여질 정도.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는 지금 자신들이 펼칠 연주가 단 한 번도 시도된 적이 없는 연주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안의 얼굴에서는 그 어떠한 초조함도, 걱정도 없었다.

그리고 그 이유를 설명하듯.

이안이 짧은 한마디를 덧붙였다.

“여러분이라면 가능합니다.”

이안의 말에 단원들의 표정이 일제히 펴졌다.

아주 간단한 응원이었는데.

모노는 자신의 가슴 한편에 무언가 차오르는 듯한 기묘한 기운을 느꼈다.

‘할 수 있어.’

그 어떤 설명을 하지 않았음에도.

모노를 비롯하여 모두의 머릿속에 충분히 가능하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아무리 터무니없는 연주라 할지라도 이안은 그동안 모두 연주를 성공으로 이끌어 왔지 않던가.

빗발치는 <월광>의 건반 세례를 오케스트라 버전으로 바꾸는가 하면, 이전에도 수없이 많은 자작곡들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기까지.

모두 이안이 해온 것들이고, 이안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런 젊은 거장이 뒤에 굳건하게 서 있는 것처럼.

이안의 말 한마디가 그리 든든할 수 없었다.

“리히트 오케스트라 스탠바이하겠습니다!”

이윽고 스태프의 말과 함께 입장이 시작되었다.

무대로 향하는 모노의 발걸음에는 결연함마저 묻어나왔다.

그리고 그건 비단 모노뿐만이 아니었다.

요한나, 선화, 서령, 아람, 루이사, 에비게일, 조지, 모두가 한마음 한뜻으로 강렬한 발걸음을 내딛고 있었다.

마치 전장에 나서는 한 명의 군인이 된 것처럼.

그들의 발걸음마저도 박자를 맞춘 행진곡처럼 울려 퍼졌다.

‘이 상황에서도 사람들이…’

모노는 하마터면 놀라움에 걸음을 멈출 뻔했다.

억척같이 쏟아지는 빗속에서도 관객석에 사람들이 가득했다.

형형색색의 우비를 입은 사람들.

얼핏 보아도 수천에 달하는 사람들이 리히트의 등장에 환호성을 내질렀다.

몇몇은 이러한 악천후에서도 연주를 해서 고맙다는 뜻을 전하듯, 연주를 시작하기도 전에 박수 세례를 보냈다.

무대를 시작하기 직전.

평소 무대로 보여주겠다는 마인드를 가졌던 이안이 오랜만에 마이크를 잡았다.

이안이 마이크를 툭툭 치자 환호성 가득했던 객석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객석을 채워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연주에 앞서 한 가지 안내 사항을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빗소리 때문에 저희가 준비한 <지크프리트 목가> 연주는 지금 적절치 않다고 판단했습니다.”

이안의 말에 관객들이 일제히 술렁였다.

하지만, 짜증이나 분노로 술렁이는 것은 아니었다.

어리둥절하면서도 궁금증을 가득 품은 눈빛들.

엄청난 장대비 속에서 무엇을 할지에 대해 궁금한 기색이 역력했다.

다른 곡? 다른 무대?

그것이 무엇이 됐든, 리히트라면 무언가 보여줄 것이란 미묘한 확신이 있었다.

그동안 이안과 리히트가 보여준 무대는 사람들의 예상을 훨씬 웃도는 수준이었으니까.

어느덧 사람들은 리히트가 어떤 무대를 보여줄지 기대하는 듯한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다시 한번 더 양해 부탁드리며, 연주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이안의 선언이 끝나기 무섭게 존경심 어린 박수가 터져 나왔다.

이러한 악천후에서도 연주를 하려는 리히트를 응원하려는 듯.

그런 박수 세례를 듣자니 모노의 가슴도 더욱 강렬하게 박동을 보냈다.

‘그래. 보여주자.’

기다리는 관객이 있고, 선장 같은 이안이 있지 않은가.

여타 다른 걱정은 모두 내려놓고 그 부분에만 집중했다.

이윽고 단원들을 바라본 이안이 두 손을 들었다.

이번 연주에서 가장 중요한 것.

손으로 지휘를 하는 것은 매번 있는 일이었지만 오늘은 달랐다.

이안의 손이 곧 지휘고, 악보고, 음악이었으니까.

이안이 처음 가리킨 것은 호른이었다.

왼손을 악기를 가리킨 이안은 곧바로 1을 지칭하는 손동작을 했다.

이어서 플루트와 오보에도 전과 마찬가지로 가리키되, 3과 5를 의미하는 손동작을 더했다.

지시를 마친 이안은 오른손으로 천천히 지휘를 하기 시작했다.

‘시작이다.’

모노를 포함하여 모든 단원들이 볼 것은 오직 이안의 손뿐.

그럼에도 모노의 가슴 한편에서는 걱정보다는 열망이 일렁였다.

그 누구도 시도할 엄두도 못 내고, 생각하는 것조차 하지 않았을 연주.

그 연주가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

영국의 백만 유튜버이자, 클래식 기타리스트.

긴 턱수염이 인상적인 남자, 포브 해리스가 리히트 오케스트라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이안 국제 콩쿨에 참여했지만, 탈락의 고배를 마신 인물이었다.

그런 포브가 루체른 페스티벌에 온 이유는 단 하나.

리히트와 관련된 유튜브 영상으로 조휘수를 얻기 위함이었다.

탈락 후.

영국으로 돌아온 포브는 이안 국제 콩쿨 과정을 상세히 담은 영상을 게시했다.

그런데 단순히 이안과 리히트와 관련이 되었다는 이유로 사람들의 관심이 폭발적으로 쏠렸다.

그 계기로 포브는 도나우인젤페스트를 비롯해 잘츠부르크 페스티벌까지 따라다니며 영상을 제작했다.

영상 속 그는 연주에 대해 좋다, 화려하다 등 호평을 했지만.

사실 포브는 연주 그 자체보다 리히트의 이름값을 이용하려는 속셈이 더 컸다.

사실 포브는 아직도 자신이 왜 떨어지고, 준모가 붙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준모 또한 못하는 수준은 아니었지만, 자신의 연주가 더욱 화려하고 기술적으로도 우수했다고 생각했다.

이름값을 활용하려는 것은 그러한 시기심도 한몫했다.

그런데 지금은 그러한 것들을 다 배제하고, 그저 의문만 들었다.

‘대체 뭘 어떻게 한다는 거지?’

처음 이안이 마이크를 잡았을 때 다른 곡에 대한 설명이라도 할 줄 알았다.

무대를 할 수 없다면 오케스트라가 올라오진 않았을 터.

오케스트라 전체가 올라와 악기를 고쳐잡는 것을 보니 분명 연주를 한다는 것인데, 무엇을 할지 도저히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하지만, 리히트라는 거대한 악기가 울려 퍼졌을 때.

그러한 궁금증은 필요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관악기로 시작하는 연한 선율.

마치 루체른 페스티벌의 개막을 축하하는 팡파르 같으면서도 훨씬 부드러운 축하의 분위기가 연출되었다.

이어서 펼쳐지는 현악들의 합세는 박수 소리처럼 연한 경쾌함을 더했다.

좋다는 말이 절로 나오는 아름다운 선율.

동시에 포브의 머릿속에는 의문이 떠올랐다.

‘이게 대체 무슨 음악이지?’

클래식과 가요를 모두 평정한 포브였기에.

그의 머릿속에는 수천 가지 음악에 대한 지식들로 가득했다.

전주를 들려주면 어떤 곡인지 곧바로 말할 정도로 음악을 잘 알고 있다고 자신했다.

그런 포브에게도 리히트가 펼치는 곡은 알 수 없는 곡이었다.

‘자작곡인가?’

이미 이안이 만든 자작곡은 많지 않은가.

포브가 콩쿨 때 연주했던 <항해>도 이안의 작품이었다.

하지만 굳이?

그리고 애초에 자작곡을 할 예정이었다면 일정표에 <지크프리트 목가>가 올라가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럼 대체 왜? 그리고 지금 이 선율은 무엇이란 말인가.

한참을 연구하던 포브는 이안의 지휘가 평소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저건 지휘가 아닌데?’

포브도 기본적인 지휘는 알고 있었다.

지휘봉을 든 사람, 한 손으로 지휘하는 사람, 양손을 모두 사용하는 사람 등 지휘를 하는 방식은 각양각색이었다.

그러나 이안은 오른손으로 지휘를 하되, 왼손으로는 끊임없이 무언가 지시하고 있었다.

차근히 이안의 손과 오케스트라 선율을 확인하던 포브는 그것이 일종의 수식임을 알 수 있었다.

모든 음악에는 화음이 있기 마련.

포브가 전공한 기타에서는 그것을 코드(chord)라고 불렀다.

이안의 손이 움직이면, 그대로 오케스트라들이 해당 코드를 펼쳤다.

이안이 손가락 하나를 들면 C코드, 4개를 들면 F코드, 심지어 손가락을 아래로 지칭하면 오케스트라에서 반음을 낮춘 마이너(minor) 코드를 펼쳤다.

지시를 알아챈 포브는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설마 지금 이 자리에서 즉석에서 곡을 만들고 있는 거야?!’

절대. 그럴 리가. 말도 안 돼.

아무리 포브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부정해도 가능성은 하나밖에 없었다.

이안과 리히트는 지금 무대 위에서 즉석으로 곡을 만들어내고 있다.

포브는 입을 떡 벌린 채 리히트 단원들을 바라봤다.

대체 누가, 어떤 사람이 오케스트라를 이끌고 즉흥곡을 한단 말인가.

하지만, 그것 말고는 이안의 수식을 설명할 방도가 없었다.

이미 완성된 곡을 연주한다면 구태여 코드를 일일이 지시하며 지휘할 필요는 없었을 테니까.

마치 거대한 오케스트라를 하나의 음악 프로그램 삼아 연주하는 것처럼.

이안의 지시에 따라 화음이 연이어 나오고, 여러 악기에서 나오는 화음들이 한데 모여 하나의 음악을 만들어낸다.

그 자리에서 일렁이는 감상을 곧바로 음악으로 만드는 것도 어려운 일인데.

그것을 만드는 것은 물론, 오케스트라를 이용하는 이안의 모습은 차마 놀랍다는 표현으로 감탄하기엔 부족했다.

게다가 놀라운 점은 하나 더 있었다.

‘빗소리를 음악에 활용하고 있어?’

규칙적이게 울려 퍼지는 빗소리들.

바닥에 떨어지는 빗방울, 천장에 떨어지는 빗방울, 호수에 떨어지는 빗방울.

빗방울이 어디에 떨어지느냐에 따라 저마다 다른 소리를 낸다.

마치 그 소리를 앞세워 반주를 맞춰주듯.

리히트 오케스트라의 선율이 더해지자 소음 같았던 빗소리가 하나의 음악으로 재탄생하고 있었다.

선율의 진실을 알았을 때.

포브는 온몸에 소름이 끼치는 것을 느꼈다.

대체 누가, 어떤 생각으로 이런 곡을 만들어낸단 말인가.

‘쇼팽도 이렇게는 못 할 거야!’

프레데리크 쇼팽.

피아노 역사상 최고의 업적을 이룩한 작곡가이자, 지금껏 그 누구도 명성을 부정하지 않는 최고의 피아니스트 아닌가.

피아노의 발전에 가장 큰 기여를 한 사람을 뽑으라면 단연 쇼팽을 거론할 수 있는 정도다.

보다 기초에 가까운 연주곡을 만들고, 그가 만든 <환상 즉흥곡>은 지금도 수많은 피아니스트의 귀감이 되고 있었다.

쇼팽 콩쿨이 현존하는 피아노 콩쿨 중 가장 위대하게 받아들여지는 것도 모두 쇼팽의 공로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 쇼팽도 즉흥곡에서 강점을 보였지만, 오케스트라에선 약세를 보여 일부러 화려한 선율을 넣는다며 비판을 받았는데.

이안이 만들어내는 선율은 쇼팽의 즉흥성을 띠면서도, 교향곡의 아버지라고 불린 하이든에 필적할 정도였다.

더군다나 이안이 신이 아닌 이상, 비가 얼마나, 어떻게 올지 예상하겠는가.

얇고 굵어지는 빗줄기에 따라 이안은 재빨리 지시를 바꿔 선율을 바꿔가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 수준은 상상을 초월했다.

무수한 음악의 거장이 한 몸에 들어갔다는 착각이 일렁일 정도로.

모든 것이 그저 믿을 수 없는 환상처럼 느껴졌다.

‘대체…’

순간, 주변을 바라본 포브는 그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리히트 오케스트라가 만들어낸 환상에 모두가 취한 듯.

수만 명에 달하는 관객들이 서로 약속이라도 한 듯 손을 내민 채 비를 느끼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포브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툭.

그의 손에 들려있던 카메라가 땅에 떨어졌다.

카메라를 들고 있던 손은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비를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급히 카메라를 들거나, 비를 닦아내야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리히트가 만들어낸 장관(壯觀)의 한 조각이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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