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시작부터 천재 피아니스트-221화 (221/250)

221화

취리히 공항 VIP라운지.

출국을 앞둔 VIP들이 저마다 휴식 시간을 가지고 있었다.

VIP라운지에 들어왔다는 것만으로도 어마어마한 재력가, 또는 사업가라는 것인데.

그런 대단한 사람들의 시선이 라운지 한편에 서 있는 두 사람에게 향해 있었다.

“분명 이별이 올 거라 생각했지만, 막상 이렇게 다가오니 정말 아쉽네요.”

루체른 페스티벌의 위원장, 로지 에렌스트.

그녀의 앞에는 젊은 거장이라고 불리는 박이안 단장이 서 있었다.

루체른 페스티벌의 개막식을 화려하게 장식한 리히트 오케스트라의 책임자.

이안의 한국행이 얼마 남지 않은 시점이었다.

“그래도 단원들이 제 자리를 대신 해줄 겁니다.”

이안의 말에 로지는 절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처음 로지는 이안에게 축제 기간 중 강연을 부탁했었다.

본래 루체른 페스티벌의 진가는 현직 음악가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이었으니까.

베테랑과 루키가 만나 서로 조화를 이루고, 발전을 도모할 수 있는 소통의 장.

그 과정에서 새로운 인재를 발굴하는 것이 루체른 페스티벌의 또 다른 의의(意義)였다.

하지만, 일정이 있었던 이안은 로지의 제안을 거절했다.

대신, 그 자리를 단원들로 채워주었다.

가히 세계 모든 악기를 한데 모은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리히트 단원들이다.

한국 악기를 비롯해 서양 악기를 모두 섭렵하고, 기타와 테레민, 드럼과 같은 현대적인 악기까지 포함하고 있는 리히트였으니까.

게다가 단원들 하나하나의 강연을 참관했던 로지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 스승에 그 제자라서 그럴까.

모든 단원들의 말에서 이안이 가진 진중함과 깊은 철학이 묻어났다.

마치 개인을 넘어, ‘리히트’라는 거대한 이론이 존재하는 것처럼.

그동안 숱한 음악가들과 마주하며 명성을 쌓았던 로지도 단원들의 말에 감탄할 정도였다.

그뿐만이랴.

이제 축제가 시작된 지 겨우 일주일밖에 되지 않았는데.

벌써부터 언론에서는 ‘역대 최고의 루체른 페스티벌’이라는 기사가 줄지어 나오고 있었다.

축제의 포문을 연 리히트 오케스트라의 연주부터, 단원들의 강연과 강평까지.

이안이 없었다면 이룰 수 없는 일이었다.

로지는 찬사를 멈출 수 없었다.

“개막식 때 무대를… 말로 표현하는 것은 오만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온몸에 소름이 끼칠 지경이다.

플랜 B라는 갑작스런 말에 당황스럽기도 했건만.

무대 위에 올라 연주를 펼친 이안과 리히트 오케스트라의 실력을 보고 경외감이 들 정도였다.

빗소리에 파묻히지 않고, 되레 빗소리와 하나가 된 듯한 아름다운 선율.

세상에 이런 음악이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게다가.

“즉흥적으로 연주해서 그런지 부족한 점이 많았습니다.”

처음 이안의 말을 들었을 때, 로지는 자신의 귀가 잘못된 줄 알았다.

즉흥이라니.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말에 로지는 그 말을 수용하는 데만 수 시간이 걸렸다.

리히트가 펼친 연주가 예정된 것이 아닌, 그 자리에서 즉흥적으로 구성했다는 말에.

지금 생각해도 심장이 다시금 날뛸 것 같았다.

오케스트라를 거대한 악기라고 표현하는 경우는 많았지만, 그걸 진짜 악기처럼 순식간에 다뤄버리는 사람은 이안이 처음이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단장님 덕에 유종의 미를 제대로 거둘 수 있었어요.”

개막식 무대가 워낙 화려한 탓일까.

루체른 페스티벌 위원회를 비롯해 위원장인 로지에게도 찬사가 이어지고 있었다.

이안과 리히트를 초청한 것만으로도 대단한 것이라고.

특히, 이안은 단순히 행사의 명성만 보는 것이 아닌, 그 가치를 판단하는 사람이라고 평이 자자했다.

무대에 불려가는 것이 아닌, 스스로 무대를 찾아 나서는 최고의 음악가.

그런 젊은 거장의 선택을 받았다는 것만으로도 루체른 페스티벌의 명성이 점차 올라가고 있었다.

위원회에서는 로지에게 명예 위원장으로

이 모든 것이 이안 덕이라는 생각에, 그녀는 계속해서 감사함을 표했다.

“저야 그저 무대를 보여줬을 뿐인걸요.”

남들이 들으면 놀라움을 멈출 수 없는 무대였는데.

정작 이를 직접 이뤄낸 이안은 그저 담담하게 자신의 무대를 평가했다.

게다가 즉석으로 만든 곡이라 부족했으니, 앞으로 더욱 다듬어야겠다고 이야기하지 않던가.

자신의 작품에 대해서도 거침없이 강평을 하고, 새로운 무언가를 찾아간다.

이것이 젊은 거장이라고 불리는 이안의 저력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다음에 인연이 되면 또 뵀으면 하네요.”

인연이 아니라도 좋다.

만약 이안이 어디선가 연주회를 가진다고 하면 그게 어디든 찾아갈 자신이 있었다.

로지의 마지막 인사와 함께 이안은 비행기 포트 쪽으로 사라졌다.

***

리드미컬 체임버홀에서 오케스트라의 선율들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리히트 오케스트라도, 나도 자리를 비운 체임버홀에서.

안에서는 중년의 남자가 음악을 크게 켜놓은 채 지휘봉을 휘두르고 있었다.

마치 보이지 않는 가상의 오케스트라를 앞에 둔 듯, 각 파트에 지시를 내리는 손길이 뻗어나갔다.

아주 살짝.

문소리가 바람 소리만큼이나 작게 들렸는데.

이를 들은 큰아버지가 지휘를 멈췄다.

“왔냐.”

“연습 중이셨네요.”

리히트 오케스트라의 매니저이자, 나의 큰아버지.

박현철이 곧 있을 무대를 준비하고 있었다.

다니엘의 요청으로 성사된 큰아버지의 대한 오케스트라 무대.

내가 단원들을 두고 한국으로 넘어온 이유이기도 했다.

큰아버지는 무대에서 내려와 내가 있는 쪽으로 다가왔다.

수건에 흥건하게 묻어나오는 땀방울이 얼마나 많은 시간 동안 연습했는지 대신 알려주고 있었다.

“루체른에서 또 한 건 했던데.”

역시.

큰아버지가 그 소식을 모르고 있었을 리 없지.

“화음을 미리 숙지시키고, 그걸 즉석에서 연주한다라. 꽤 큰 도전이었을 텐데 잘했더라.”

아직 내가 어떤 방식으로 연주를 했는지 알린 적이 없건만.

큰아버지는 영상만으로 이번 연주를 어떻게 했는지 알아챈 것이다.

그래도 2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오케스트라를 지휘한 큰아버지니까.

그 실력이 어디 가지 않았겠지.

큰아버지 말대로 이번 연주는 단원들에게 화음을 숙지시키고 즉석에서 펼친 것이었다.

모두 베테랑급 음악가니까 화음을 모르는 단원은 없을 터.

화음에 플랫과 샵을 추가하는 것은 손을 내리고 올리는 정도로 변경할 수 있었다.

종이에 건넨 코드표는 그러한 화음을 어떻게 펼치자는 일종의 약속이었다.

같은 1도 화음을 진행하더라도 한음씩 아르페지오로 펼치는 것과 한꺼번에 펼치는 것은 달랐으니까.

모든 박자를 4분의 4박자로 고정하고, 일제히 화음을 펼치도록 만드니 오케스트라가 하나의 거대한 피아노로 느껴졌다.

그 피아노에서 내가 원하는 선율을 만드는 것.

그것이 이번 빗속 연주의 핵심이었다.

이야기를 이어가던 큰아버지의 묘한 감정이 일렁였다.

예전에 처음으로 <염라>를 연주했을 때 봤던 표정.

좀처럼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큰아버지의 얼굴에 자랑스러움이 묻어났다.

아마 이번 연습을 통해 그동안의 향수가 떠오르는 모양이다.

“연습은 잘돼요?”

“언제는 잘한 적 있었던가.”

짧게 응수한 큰아버지는 휴식을 끝내고 다시 연습에 매진했다.

무려 20년 동안 지휘봉을 잡았던 큰아버지인데.

예전부터 기본기를 중요시했던 큰아버지인 만큼, 연습 또한 기본기부터 시작이었다.

음원으로 된 연주를 들으면서 지휘를 연습하는 것.

별 거 아닌 것 같지만, 그 속에서 소리의 특이점을 찾아내고 머릿속으로 자신의 해석을 곁들인 선율을 예상해야 한다.

이전 오케스트라의 장점을 차용하고, 단점을 바꾸는 일.

그것이 지휘를 시작하는 첫걸음이었다.

차근히 지휘를 지켜보던 나는 큰아버지의 지휘에서 특이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말없이 지켜보고 있기를 한참.

20분에 달하는 교향곡이 끝나자 자연스레 큰아버지가 물었다.

“뭐가 문제냐?”

표현이 강할 뿐, 시비조가 아니었다.

되레 큰아버지의 목소리에선 진지한 기색이 묻어났다.

그저 조카로서 의견을 묻는 것이 아닌, 같은 지휘자의 입장으로 강평을 해달라는 무게감이 느껴졌기에.

나 또한 미리 머릿속에 생각해뒀던 이야기를 고스란히 내려놓았다.

“어깨에서 멈칫하는 경향이 많은 것 같은데요? 결리시는 게 있는 것 같은데, 그러다 보니 지휘가 3단으로 구성되어서 박자감이 밀리는 느낌이에요. 미리 어깨를 든 상태에서 팔꿈치의 움직임으로 지휘를 이어나가면 한 단계를 생략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아무렴 50대 나이까지 지휘를 이어간 큰아버지다.

지휘자들에게 흔히 발생하는 어깨 통증이 아예 없진 않을 터.

큰아버지도 그것을 금세 시인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 더, 내가 할 말이 있었다.

“혹시 무대에 오르는 걸 망설이고 계세요?”

고통 때문이라면 모든 움직임에서 멈칫하는 기색이 있어야 하는데.

하지만, 큰아버지는 지휘를 부드럽게 이어가다가 뜬금없는 부분에서 멈칫했다.

마치 무언가 잡념이 스쳐 지나가면서 지휘를 망치는 것처럼.

남들은 부드럽게 변했다고 느낄 정도로 사소한 차이였지만, 내 눈에는 망설임으로 보였다.

“글쎄. 망설인다면 망설이는 것이겠지.”

큰아버지는 조금은 털어놓듯 말을 이어갔다.

결국, 이번에 다시금 무대에 오르는 것은 은퇴에 대한 내용을 번복하는 것이라는 생각.

그 부분이 자꾸만 마음에 걸렸다고 토로했다.

사람들의 반응은 물론, 자신의 철학에도 위배되는 것 같다고.

근간에 큰 비중을 두는 큰아버지가 생각할 법한 것들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 말에 대해 간단한 말을 내뱉었다.

“음악가는 보여줄 뿐, 판단하지 않잖아요.”

바이올리니스트이든, 피아니스트이든, 지휘자이든.

음악가가 해야 할 것은 그저 자신이 생각하는 음악을 보여주는 것뿐이다.

그 후에 생각들은 오롯이 청중에게 맡겨야 한다.

이에 대해 비판이 나오면 일부 수용하고, 적절치 않다면 자신의 소신을 지켜야겠지.

하지만, 지금은 그걸 할 때가 아니라는 게 내 생각이었다.

그와 동시에 내게는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게 걱정이시라면, 기존의 지휘가 아닌 색다른 지휘를 해보시죠.”

큰아버지가 말한 대로, 이전과 같은 지휘를 하면 결국 되감기하는 것밖에 되지 않으니까.

하지만, 지휘가 아닌 완전히 색다른 이벤트를 함께하는 것이라면?

내 이야기를 차근히 듣던 큰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

대한 음악당.

대한 오케스트라의 홈그라운드에서 선율이 한창 펼쳐지고 있었다.

2대 단장인 다니엘의 지휘에 따라 오케스트라의 선율이 변화한다.

냉철하면서도 올곧은 다니엘을 닮은 듯.

날카로우면서도 웅장한 기사단 같은 선율이 나아갔다.

‘선생님을 모실 수 있다.’

대한 오케스트라 창단 25주년.

다니엘은 처음 기념행사를 준비하면서 가장 먼저 현철을 떠올렸다.

2년간 자신이 맡은 것에 비해 현철은 무려 23년 동안 대한을 이끌어오지 않았던가.

만약 그 영광을 분배할 수 있다면 필히 현철이 더 많이 가져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걸 이안을 통해 이룰 수 있게 되었으니.

연습에 더욱 박차를 가하는 것은 당연하리라.

한창 연습을 끝내고 사무실에 돌아왔을 때.

어떻게 알았는지 이안의 전화가 걸려왔다.

전화를 받은 다니엘은 곧바로 루체른 페스티벌 이야기를 꺼냈다.

“가히 환상적이었습니다.”

다니엘도 리히트의 무대를 보고 두 눈을 의심하지 않았던가.

그 또한 숱한 오케스트라 곡을 들어봤지만,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곡.

게다가 왼손으로 계속 지시를 내리는 것에서 일반적인 지휘가 아님을 단박에 깨달을 수 있었다.

오죽 궁금했으면 다니엘이 현철에게 전화해서 직접 의견을 물어봤겠는가.

페스티벌 얘기를 하던 다니엘은 자신이 무려 10분 동안 찬사를 보냈다는 것을 깨달았다.

흥분을 가라앉힌 다니엘은 무례에 대해 사과를 하며 전화한 이유를 물었다.

-제안이 있습니다.-

“말씀해주십시오. 뭐든 좋지 않겠습니까.”

이미 무대 위에서 활약은 다니엘이 모두 봐왔지 않은가.

연주와 지휘, 통솔력 모두를 아우르는 천재 음악가.

그러니 어떤 이야기라도 받아들일 용의가 있었다.

그런데 이안의 입에서 나온 말은 사뭇 신기한 이야기였다.

-큰아버지와 다니엘씨. 두 분이 함께 지휘에 서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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