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시작부터 천재 피아니스트-222화 (222/250)

222화

오랜만에 찾은 대한 음악당.

과거 방문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관객석에는 사람들이 가득했다.

특히 1대 단장이자, 그동안 대한을 이끌었던 마에스트로인 큰아버지의 출연 소식에 연주회 전부터 뜨거운 관심이 이어졌다.

대한 오케스트라의 명성은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도 많이 알려져 있었으니까.

이를 증명하듯 객석에는 외국인들도 여럿 보였다.

게다가 이번 무대는 대한 오케스트라의 창단 25주년을 기념하는 축제와 같은 연주회니까.

소식을 전하기 위해 방문한 기자진도 대거 포함되어 있었다.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이안씨.”

대기실에 들어서자 다니엘이 다시 한번 고마움을 전했다.

내가 아니었으면 성사될 수 없는 무대였다며.

큰아버지의 출연 덕에 대한 오케스트라 25주년 행사가 더욱 진정성이 커졌다고 표현했다.

그에 대해 나는 그저 한 마디를 건넸을 뿐이라고.

선택은 큰아버지가 한 것이니 감사할 필요 없다고 전했다.

“다들 많이 모였네요.”

“이안씨가 올 거라고 확신해서 그럴 겁니다.”

다니엘이 당연하다는 듯이 너스레를 떨었다.

언론에는 내가 출연할 것이라는 이야기를 일부러 숨긴 상태였다.

이번 무대의 주인공은 내가 아닌 큰아버지였으니까.

그럼에도 그동안 큰아버지가 그동안 리히트의 매니저를 자처했다는 것을 안 사람들이 분명 이번 공연에 내가 출연할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물론, 나도 출연할 예정이었다.

큰아버지가 만든 <세월>의 3악장, <염라>를 연주하는 것은 내 몫이었으니까.

“긴장되세요?”

“긴장은 무슨.”

메이크업을 받고 있던 큰아버지가 대수롭지 않은 듯 이야기했다.

오랫동안 지휘석이 오르지 않았어도 내력은 어디 가지 않는다며.

아직 죽지 않았음을 보여주듯 허리가 꼿꼿하게 세워졌다.

하지만, 나는 큰아버지의 가슴 한편에는 긴장감이 감돌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깍지를 낀 큰아버지의 검지가 도무지 멈출 기미 없이 계속 움직였으니까.

‘생각이 많으셨으니까 그럴 만도 하지.’

큰아버지는 무대를 일주일 앞두고서도 고뇌한 사람이었으니까.

매번 최상의 무대를 위해 곡을 연구하고, 해체하는 큰아버지인 만큼 이번 무대에 대한 생각이 많겠지.

나는 그런 큰아버지의 어깨에 손을 올린 채 힘을 더했다.

“혹시 모르죠. 무대에 오르면 생각이 바뀌실지.”

실제로 거장 중에서는 무대에 오르면 완전히 돌변해서 완벽한 음악을 보여주는 사람도 있으니까.

대개 무대를 즐기는 거장들이 그랬다.

마치 담아두었던 것을 한 번에 표출하듯, 무대에서 자신의 진가를 발휘하는 것이다.

물론, 큰아버지는 그렇게 무대를 즐기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되레 진지하게 음악을 보여주는 강연 같은 것이라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이번 무대는 아마 즐길 수 있을 것이다.

나를 비롯해 여럿이 준비하고 있는 것이 있으니까.

***

‘박단장님이랑 무대는 정말 오랜만이네.’

대한 오케스트라의 부단장이자, 바이올리니스트.

진석이 뭉클한 표정으로 과거의 기억을 되새기고 있었다.

진석에게 현철은 마치 아버지와 같은 사람이었다.

‘염라’라는 이름에 걸맞게 연주를 할 때는 그 어떤 존재보다 무시무시한 모습을 보이던 현철이지만, 그 속에는 무척 온화한 기색이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한때 음악을 포기하고 싶었을 때.

현철이 없었다면 지금의 자리에 올라오지 못했으리라.

다른 단원들도 진석과 다르지 않았다.

남녀노소를 떠나 대한에 들어온 단원들은 모두 한 번씩 현철에게 은혜를 입은 사람이었으니까.

괴로운 상황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것은 물론, 상황이 여의치 않을 때는 후원자를 연결해주는 것까지.

물질적, 심리적 모든 것에서 현철은 단장의 책임을 넘어선 상태였다.

진석 또한 그 점을 잘 알고 있었기에.

그는 당연하다는 듯 단원들에게 질문을 던졌다.

“뭐 선물 같은 걸 할까요?”

진석의 말에 단원들 여럿이 의견을 냈다.

꽃다발 증정? 그건 너무 식상해.

케이크 이벤트? 선생님은 단 거 안 좋아하시는데.

무대를 끝내고 헹가래라도 할까? 선생님 성격에 정색하실걸?

여러 이야기를 꺼내봤지만, 도저히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았다.

워낙 음악에 대해서만 이야기했지,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좀처럼 하지 않는 현철이었으니까.

무엇을 좋아하는지, 어떤 것을 해야 기뻐할지 도저히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음악… 그래! 몰래 무대를 준비하죠!”

진석의 말에 단원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의견을 모았다.

현철은 음악의 근본부터 탐구하는 음악가였으니까.

음악으로 무언가를 만든다면 분명 방법이 생길 것이라 생각했다.

불과 무대에 올라가기까지 3시간 남짓이 남았지만, 그 사이에 할 수 있는 무언가를 찾아야 했다.

어떤 곡? 어떤 연주?

여러 질문이 오가던 그때…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고 계셨네요.”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진석은 물론, 모든 대한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얼어붙었다.

어떻게 준비한 이벤트인데 현철에게 들키면 모두 수포로 돌아가지 않는가.

이야기를 처음 내뱉은 진석은 제발 현철만 아니길 기도했다.

다행히 대기실에 들어온 사람은 현철이 아니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이안씨. 아니, 이제 단장님이라 불러드려야겠죠?”

진석이 너스레를 떨며 이야기했다.

분명 예전에 진석을 보고 바이올리니스트로서 롤모델이라고 했건만.

지금은 되레 진석이 롤모델로 보고 있는 인물.

박이안이 대기실에 방문한 것이었다.

“어디서부터 들으셨습니까?”

“대부분 다 들었을 겁니다.”

이안의 입에서 계획들이 차례대로 나왔다.

한편으로는 대체 어느 순간에 들어왔는지 의문스러울 정도로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내용을 알고 있는 이안이 사뭇 신기하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그와 동시에 걱정스러움도 떠올랐다.

젊은 거장이라고 불리는 만큼 음악에만큼은 항상 진심을 강조했던 이안이었으니까.

혹 자신들이 준비한 이벤트가 장난처럼 보이진 않을까 싶었다.

하지만, 진석이 걱정한 것과 달리.

이안의 표정은 되레 흥미로운 듯한 반응이었다.

“저도 돕죠.”

이안의 한 마디에 대한 오케스트라 단원들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동안 숱한 연출로 세상을 놀라게 한 이안이지 않은가.

청각장애인에게도 연주를 선물했던 덕수궁 연주회를 비롯해 이번 루체른에서 펼친 즉석 교향곡까지.

그런 이안이 참여한다는 말에 단원들의 표정에 묘한 기운이 감돌았다.

***

대한 오케스트라 창단 25주년 기념 연주회.

그 서막이 점차 열리고 있었다.

무대에는 대한 오케스트라의 단원들을 비롯해 현철과 다니엘이 동시에 지휘석에 올랐다.

‘처음엔 이게 맞나 싶었는데.’

1대 단장과 2대 단장이 함께 지휘석에 오르는 것.

이 또한 이안의 아이디어였다.

마치 가수들이 서로 듀엣을 하듯, 지휘에서도 합을 맞추면 되지 않냐며.

때론 같은 박자로 동일한 움직임을 할 때 사람들은 맞아떨어지는 그 부분에서 소름이 돋을 것이고, 다른 스타일로 갈라지는 두 사람의 지휘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할 것이라고 표현했다.

게다가 이렇게 하면 현철과 다니엘, 두 사람 모두 주인공처럼 보일 테니까.

누가 들러리 같다느니, 주객이 전도되었느니, 잡음이 나오지 않을 것이라 확신했다.

이안의 생각은 적중했다.

무대가 시작되기도 전인데, 사람들은 의문보다는 기대 가득한 시선을 보내고 있었으니까.

첫 곡은 <세월>이었다.

이안이 만든 <염라>가 들어간 곡이자, 현철이 작곡한 교향곡.

그때의 그 감동을 재현하기 위해 이안 또한 무대에 올랐다.

‘저 녀석. 바빴을 텐데.’

현철은 피아노 앞에 앉은 이안을 빤히 쳐다봤다.

이제 스위스에서 귀국한 지 일주일이 채 지나지 않았는데.

이미 출중한 실력이지만, 틈틈이 <염라>를 연습했을 이안이 선명했다.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현철은 이안에게 고마운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때론 말하지 않아도 행동 자체만으로도 위로가 될 때가 있으니까.

무례하지 않은 선에서, 무척 당연하게 자신을 믿어주는 이안의 태도가 그 자체만으로도 위안이 될 때가 많았다.

지휘석에서 내려와 일반인으로 돌아왔음에도 공허함 하나 느끼지 않고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은 그러한 이안의 믿음 덕이었다.

게다가 이안이 아니었다면 이 무대에 오를 엄두도 내지 않았을 것이다.

스승인 종수의 이야기를 듣고도 한편에서 의문을 거두지 못했으니까.

하지만, 소름 돋게도.

이안이 종수와 비슷한 이야기를 하지 않던가.

음악가는 그저 보여줄 뿐, 평가는 청중들이 하는 것이다.

그러니 음악가인 자신이 어떤 연주를, 어떤 지휘를 펼칠지 고민하면 된다.

거장인 두 사람이 같은 말을 했다면 분명 그 말이 정답일 터.

그 확신이 현철을 더욱 강인하게 만들어주었다.

지휘의 첫 시작을 끊은 것은 현철이었다.

<세월>의 본래 주인이자, 이안과 함께 만들어가는 하모니.

현철이 지휘함과 동시에 이안의 피아노가 빠르게 박자를 타고 들어왔다.

그런데.

‘이건 <세월>이 아닌데?’

자신이 쓴 곡을 어찌 모를까.

분명 이안이 시작한 연주는 <세월>의 선율이 아니었다.

상황을 파악하는 현철의 머릿속에 두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하나는 이안의 연주가 실수가 아님을 깨달았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 선율이 무척 익숙하다는 것이었다.

‘이건…’

생각을 더하기도 전에 갑자기 관현악단에서 선율이 터져 나왔다.

일전에 이안이 연주를 하며 지휘를 했듯.

어느새 이안이 오른손을 들어 작게 지휘를 더하고 있었다.

그리고 악기가 더해진 선율이 나아가자 현철은 단번에 선율의 정체를 깨달을 수 있었다.

스승의 은혜는 하늘 같아서 우러러볼수록 높아만 지네.

참되거라 바르거라 가르쳐주신 스승은 마음의 어버이시다.

익숙한 선율에 현철은 자신도 모르게 가사를 읊조렸다.

<스승의 은혜>

스승의 날만 되면 단골로 나오는 곡이었다.

그와 동시에 이 모든 것이 누구를 향하는 것인지 알 수 있었다.

모든 단원들의 눈길이 악보대나, 이안이 아닌, 현철을 향해 있었으니까.

다니엘 또한 지휘 자세를 내려놓고 현철과 단원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순간, 현철의 머릿속에 빠르게 기억들이 흘러갔다.

마치 주마등을 경험하는 것처럼.

대한에 몸담으면서 있었던 일들이 영화 보듯 일렁였다.

처음 소규모 오케스트라로 창단했던 시절부터, 피아니스트 주은미의 영입과, 여타 관현악기들의 대거 투입, 거대 오케스트라로 성장하여 대한민국의 일타 오케스트라로 성장했던 것들까지.

그 모든 과정에 현철이 있었다.

‘이 녀석들.’

진석, 혜미, 정민, 주혁…

대한을 떠나온 지도 어느덧 2년이 다 되어가는데, 단원들의 얼굴을 보니 단번에 이름이 기억났다.

자신이 고생한 것을 단원들은 느끼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에.

단원들에게 조금이라도 어려운 일이 생기면 현철은 가장 먼저 발 벗고 나섰다.

생계가 어려운 단원에게는 서천의 후원을 받게 연결점을 만들어주었고, 사비를 털어 악기를 사주기도 했다.

단원들의 눈빛에는 그 모든 기억이 담긴 듯 반짝이고 있었다.

‘그럼 나도 가만히 있을 수 없지.’

3분의 4박자, Moderato.

현철은 약속되지 않은 곡에 지휘를 덧붙였다.

현철이 지휘를 진행하자 이안은 자연스레 오른손을 건반에 가져다 대고, 단원들은 현철의 손끝에 집중했다.

호통만 지르지 않을 뿐, 현철의 지휘는 과거 대한의 마에스트로일 때와 같았다.

매섭게 움직이는 지휘봉은 허공을 가를 것 같고, 날카로운 눈빛은 단원들을 순식간에 통솔했다.

아이들이 삼삼오오 부르는 이미지가 제격인 <스승의 은혜>가.

현철과 이안, 그리고 대한의 손에 의해 풍성하고 화려한 교향곡으로 변모했다.

그리고 그날, 모두가 현철의 모습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현철 스스로도 깨닫고 놀라워했던 변화였다.

대한의 마에스트로, 대한의 염라(閻羅).

매번 벼락같은 호통과 맹렬한 기세를 가진 채 지휘를 이어가던 대한의 거장이.

처음으로 함박웃음을 지은 채 지휘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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