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3화
대한의 염라가 웃으면서 지휘를 한다.
그동안 대한 오케스트라를 지켜봤던 팬들은 그야말로 센세이셔널한 광경에 눈을 떼지 못했다.
압도적인 카리스마와 냉철한 무대를 보여주는 것이 바로 현철식 대한 오케스트라였으니까.
하지만, 오늘만큼은 달랐다.
<스승의 은혜>.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모를 리가 없는 선율이 대한 음악당에 깊이 퍼져나갔다.
사람들의 표정은 가지각색이었다.
예정에 없던 공연에 놀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대한이라는 커다란 오케스트라에서 이런 곡이 나올 줄 몰랐다며 신기해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게다가 그 수준 또한 자신들이 알던 것과 달랐기에.
사람들은 자신이 아는 가사를 따라 부르기보다는, 대한의 선율 자체에 집중하며 연주를 감상했다.
그중에는 이안의 아버지이자, 현철의 동생.
아시아의 바흐라고 불리는 수철도 있었다.
‘내가 형의 웃는 모습을 본 게 언제였더라?’
아무리 기억을 뒤져봐도 수철의 기억 속에 현철이 웃는 모습은 없었다.
10대 때부터 현철은 다정한 형이라기보다는 무서운 형에 가까웠으니까.
매사 무뚝뚝하고 날카로워서 어릴 적에는 지레 겁을 먹은 경우도 많았다.
그 일련의 행동들이 장남이라는 무게감과 웃어른들의 압박 때문이었다는 것을 안 것은 수철이 고등학생 되고 나서였다.
그때는 이미 현철이 뉴욕으로 떠난 지 오래였다.
‘생각해보니 형이랑 추억이 별로 없네.’
이른 나이에 줄리아드에서 공부하느라 현철은 20대의 대부분을 미국에서 보냈다.
한국으로 돌아와서도 대한 오케스트라를 꾸리느라 정신이 없었던 탓에 가족과의 시간은 거의 보내지 못했다.
수철 또한 마찬가지였다.
현철이 한국에 돌아왔을 때는 수철이 한창 ‘아시아의 바흐’라는 이름으로 해외 순방을 다닐 때였으니까.
두 사람이 서른을 넘기고, 여러 사람을 만났을 즘.
그제야 형제는 서로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 모든 과정들을 떠올린 후.
수철은 무대 위에서 웃고 있는 현철의 모습에 묘한 뭉클함을 느꼈다.
그동안 현철이 억척같이 유지하고 꾸려온 대한이었으니까.
환하게 웃는 현철의 미소에서 기쁨을 넘어 해방감까지 느껴졌다.
뭉클함에 떨리는 손을.
아내, 은희가 살포시 잡아주었다.
은희 또한 수철을 만나면서 현철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현철의 미소가 어떤 의미인지 알 수 있었다.
연주가 끝나자 두 사람은 가장 먼저 일어나서 뜨거운 기립 박수를 보냈다.
“아주버님 아직 안 죽으셨네~”
은희의 너스레에 수철이 작게 웃음 지어 보였다.
한편으로는 조금 부끄러웠다.
보통이면 농담을 그리 하지 않는 아내였기에.
농담으로 자신을 웃게 만들었다는 것은 현철을 향해 뭉클한 반응을 보였다는 것을 들켰다는 셈이니까.
하지만 되레 그래서 고마운 마음이 떠오르기도 했다.
“이안이도 대단하고 말이지.”
수철의 말에 은희도 고개를 끄덕였다.
<스승의 은혜> 연주 장면을 보자마자 이번 이벤트를 누가 기획했는지 단박에 알 수 있었다.
이안의 지휘에 맞춰 대한 오케스트라의 단원들이 <스승의 은혜>를 연주했으니까.
한 손으로는 피아노 연주를 하면서도, 다른 한 손으로는 지휘를 하는 여유로움.
미국 파이널쇼에서 펼쳤던 <개화>의 퍼포먼스 중 하나였다.
영상으로 이미 확인한 퍼포먼스였는데, 직접 보니 그 놀라움은 배가 되었다.
게다가 그런 놀라운 연주를 선보여 놓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한 이안의 태도에.
‘아시아의 바흐’라고 불리는 수철마저 아들의 위용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괜히 박수철 아들이겠어?”
수철과 은희가 작은 담소를 나누며 흐뭇하게 보던 사이.
대한 오케스트라는 다음 연주를 속행했다.
본래 <스승의 은혜> 대신 가장 먼저 관객들을 맞이했을 대한 오케스트라의 <염라>.
그 선율이 대한에 재림(再臨)하고 있었다.
대한 오케스트라의 <염라>.
<세월>의 3악장이자, 이안이 만든 <염라>의 선율을 개편하여 만든 새로운 교향곡이었다.
다니엘이 처음 들은 순간, 헌정곡으로 재탄생시키고 싶다고 생각했던 곡.
하나의 헌정곡을 두고, 헌정을 받는 사람과 헌정을 하는 사람이 함께 무대 위에 오른 셈이었다.
조금은 아이러니할 수 있는 일이건만.
연주가 시작되자 그러한 생각은 단숨에 사라졌다.
대한 오케스트라의 선율은 관객들을 매료시키는 데 충분했으니까.
두 사람의 지휘는 마치 바둑과 같았다.
흑백의 돌을 내려놓으며 서로의 수를 읽고, 승부를 겨루는 것처럼.
두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듯, 서로 번갈아 가며 지휘의 특이점을 더했다.
현철이 1부 바이올린에게 힘을 주라고 지시하면, 다니엘이 맞받아치듯 트럼펫에 더욱 강한 선율을 주문했다.
가히 치열하다고 표현할 수 있을 정도로 두 사람의 지휘는 날카로웠다.
하지만, 결국 승패가 나야 하는 바둑과는 결이 사뭇 달랐다.
치열한 전투를 하는 것 같으면서도, 어느 순간에는 서로의 등을 맞댈 정도로 돈독한 전우가 된 듯.
두 사람의 지휘는 어느덧 경쟁을 떠나 대한 오케스트라의 선율 자체를 강화하는 데 힘쓰고 있었다.
한차례 현철이 플루트의 소리를 강화시키면, 다니엘이 첼로들에게 지시를 해 현철이 강화한 관악에 웅장함을 더한다.
또는 다니엘이 현악에 경쾌함을 주문하면, 현철은 그 경쾌함을 북돋을 타악기들에게 소리를 키우라고 지시한다.
그러한 두 사람의 지시가 계속해서 쇄도하는데도 단원들의 연주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되레 그 사이에서 무언가를 배우려는 듯.
어느덧 단원들의 눈빛에도 현철과 다니엘의 눈빛과 같은 강한 열망이 맺혔다.
그야말로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은 연주와 퍼포먼스.
이윽고 서로 짜기라도 한 듯, 정확하게 같은 타이밍에 멈추는 지휘에 전율이 일었다.
장내에 있던 사람들은 그 전율에 감응(感應)함과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 세례를 보냈다.
둘 중 누가 더 나은가에 대한 판단은 필요가 없었다.
오로지 더욱 강렬해지고 화려해지는 대한 오케스트라의 선율에 감탄할 뿐.
“직접 보러 오길 잘했다.”
“그러게. 아주버님이 그렇게 오지 말라고 했었는데.”
꼭 가서 보겠다고 연락했더니 오지 말라고 한 현철이었다.
하지만, 어찌 오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은퇴했던 현철이 다시금 무대에 오른 중요한 순간인데.
전 세계에 ‘대한’이라는 이름을 알린 마에스트로의 귀환 무대나 다름없었다.
게다가 이번 무대에는 가족의 일원이 무려 둘씩이나 무대에 오를 예정이지 않은가.
가족 관계를 떠나서 부부는 이안과 현철의 무대를 무척 기대하는 상태였다.
가히 대한민국의 오케스트라 계보를 써 내려가고 있는 두 사람이 만들어내는 무대였다.
그 시너지가 무대를 넘어 관객석에게 고스란히 전달되고 있었다.
***
연주회의 막바지.
어느덧 대한 오케스트라 25주년 연주회는 끝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연이어 연주들에 대한 지휘를 펼친 탓에 큰아버지와 다니엘의 이마엔 땀이 흥건했다.
매번 굳건한 기세로 지휘에 임하던 두 사람이었건만.
두 사람 모두 오늘만큼은 상쾌한 표정을 지었다.
‘사람들 반응도 나쁘지 않네.’
쏟아지는 박수 세례와 환호성들.
마치 연주를 듣는 동안 묵혀뒀던 감성들을 모두 털어놓듯 열띤 반응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나는 그 이상의 반응들을 보았다.
‘비교하며 보는 사람이 없게 만들려고 이번 시스템을 설계했으니까.’
일반적인 무대에서는 단연 지휘자가 한 명이다.
두 지휘자가 필요 없을 뿐더러, 박자가 꼬이면 되레 연주에 방해가 될 테니까.
하지만, 두 사람에 대한 그런 걱정은 없었다.
큰아버지는 물론이거니와, 다니엘 또한 지휘에 대한 관록이 만만치 않은 사람이었으니까.
다만, 이런 독특한 방법을 사용한 것은 비교를 피하기 위함이었다.
특히 1대, 2대 지휘자인 큰아버지와 다니엘이 따로 무대를 하면 당연스레 비교의 눈길이 많이 일어날 테니까.
큰아버지가 잘하면 원조가 낫다는 말이 나올 것이고, 다니엘이 잘하면 새바람이 낫다는 이야기 나올 것이다.
두 사람 모두 우수한 실력과 지도력을 가지고 있기에 발생하는 딜레마였다.
음악에는 정답이 없지만, 개인의 취향에 따라 비교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니까.
그 딜레마를 해결하기 위해.
나는 독자 지휘 대신, 공동 지휘를 제안했다.
신(新)지휘자와 구(舊)지휘자의 합치라는 명목을 달성함과 동시에, 어깨가 녹록지 않은 큰아버지에게는 쉴 텀을 줄 수 있을 테니까.
큰아버지와 다니엘, 두 사람이 만드는 선율에.
처음엔 날카로운 눈빛을 보내던 평론가들도 어느덧 날선 눈빛 대신, 음악에 취한 듯한 부드러운 눈길로 무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럼 마지막 순서에 앞서 넥타이 교환식이 있겠습니다.”
넥타이 교환식.
동서양을 막론하고, 중요한 일을 앞두고 넥타이를 매주는 것은 같았다.
앞으로 더욱 번창하라는 의미를 담음과 동시에, 넥타이를 바꿔 매어주며 서로가 결속되어 있음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행사.
다니엘은 앞으로의 대한이 나아가면서 이러한 전통을 만들어갈 것이라고 선언했다.
사회자의 이야기에 따라 큰아버지와 다니엘이 각자 자신의 나비넥타이를 풀었다.
큰아버지의 검은 넥타이와, 다니엘의 파란 넥타이.
큰아버지는 다니엘에게 넥타이를 걸어주며 어깨를 토닥였다.
마치 오늘 연주에 대한 칭찬을 하면서도, 앞으로를 부탁하는 포부를 밝히듯.
토닥임을 받은 다니엘의 표정에 묘한 뭉클함이 묻어나왔다.
“자, 1대 단장님.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다니엘이 큰아버지의 목에 넥타이를 걸고 난 후, 사회자가 마이크를 내밀었다.
잠깐 마이크를 바라보던 큰아버지는 무언가 할 말이 생각났다는 듯 마이크를 잡았다.
“지휘를 주고받으면서 저는 오늘 다니엘이 이전보다 한층 더 성장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시작은 다니엘에 대한 칭찬이었다.
같이 지휘를 해보니 확실히 달라진 점이 보였다고.
2년 간의 실전 경험이 빛을 발한 것 같다며 다시 한번 다니엘의 어깨를 토닥였다.
“단원들의 실력 또한 좋아졌다고 확신합니다. 이 모든 것이 현재의 대한을 잘 이끌어나가고 있는 다니엘 단장의 성과라 생각합니다.”
이야기를 끝냄과 동시에 현철이 다니엘을 향해 박수를 쳤다.
담담하게 내뱉은 소감에, 사람들도 현철의 마음을 이해하는 듯 박수를 보냈다.
큰아버지의 소감이 끝나자, 사회자는 마치 답가를 요청하는 듯 자연스럽게 마이크를 다니엘에게 건넸다.
다니엘 또한 큰아버지의 말에 무언가 떠오른 듯 곧바로 마이크를 받아들었다.
“지금의 제가 있을 수 있었던 것은 1대 대한 오케스트라의 단장이자, 저의 스승이신 박현철 선생님께서 계셨기 때문입니다.”
다니엘의 소감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큰아버지에 대한 감사함을 다시 한번 전하는가 하면, 이번 연주를 위해 힘써준 단원들, 그리고 25주년 행사를 빛내준 관객에게 감사함을 전했다.
마지막 말이 끝났을 즘, 다니엘은 한 마디를 덧붙였다.
“그리고 이 자리를 빌어서 2인 지휘 체계에 대한 생각과 <염라>의 완성, 그리고 선생님을 위한 이벤트까지 모두 도와주신 리히트 오케스트라의 박이안 단장님께도 감사하다는 말씀을 올립니다.”
말을 끝낸 다니엘은 곧장 나를 향해 몸을 돌리더니 허리 숙여 인사했다.
90도에 가까운 허리 숙임에서 경건함마저 느껴질 정도였다.
내 이름이 거론되자 순식간에 음악당은 이전과 비교할 수 없는 환호성으로 가득 해졌다.
이 틈을 놓칠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인지 사회자가 내게 마이크를 건넸다.
“혹시 해주실 말이 있으신가요?”
사회자의 진행에 모든 이들의 시선이 내게 쏠렸다.
대한의 단원들을 시작으로, 큰아버지와 다니엘, 거기에 관객들까지.
모두 나의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을 향해 한 마디를 건네기 위해.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마이크를 고쳐 쥐었다.
“저는 할 말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