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4화
다니엘은 사회자에게 감사하다고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 누구보다 이안의 생각을 들어보고 싶었으니까.
일전에 현철이 25주년 기념 연주회에 참여하게끔 만든 것은 물론, 2명이 함께하는 지휘에 대한 아이디어를 제공한 것도 이안이니까.
항상 음악에 대한 생각에 가득 차 있기에 그런 생각들이 단번에 나오는 것일 터.
그런 이안이 과연 어떻게 자신들의 무대를 봤을지 궁금했다.
현철과 함께 계속 대한 오케스트라에 방문했지만, 이안은 그 어떠한 코멘트도 달지 않았기 때문에.
그 궁금증이 더욱 컸다.
청중의 궁금증이 극에 달했을 때.
드디어 이안이 입을 열기 시작했다.
“저는 할 말이 없습니다.”
이안의 선언에 관객들은 물론, 다니엘도 당황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토록 기다리던 이안의 코멘트인데.
시작부터 아무 평을 하지 않겠다는 선언을 하다니.
하지만, 한편으로는 일말의 희망을 걸어두고 있었다.
이안이 그저 말 그대로 아무런 평을 하지 않기 위해 저 말을 꺼낸 것은 아닐 테니까.
“제가 감히 어떤 말을 하겠습니까. 그저 저는 두 분을 위해 오선(五線)을 그어드렸을 뿐입니다.”
이안의 말에 사람들은 그것이 단박에 오선지를 의미함을 알아챌 수 있었다.
악보의 기초가 되는 오선지.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이안이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다소 추상적인 이안의 첫마디에 사람들이 더욱 궁금한 기세로 이안을 바라봤다.
이미 차근히 이야기를 내려놓는 말투에서부터 무언가 거대한 서사시가 느껴질 정도였으니까.
“아시다시피 악보를 완성하기에는 수많은 것들이 필요합니다. 조표에, 박자, 지시어, 음표까지. 이들이 없으면 음악이라고 할 수 없죠.”
당연한 이치리라.
음악(音樂)이라는 것은 말 그대로 소리로 만들어내는 예술이니까.
악보에 그어진 오선이 그 배경이 될 순 있겠지만, 본질적인 소리는 음표와 그 음표를 어떻게 연주하느냐에 따라 달라졌다.
같은 음표를 표현하더라도, 얼마나 길게, 짧게 연주하는지, 어떤 악기로 연주하느냐에 따라 소리는 천차만별로 달라지니까.
“그동안 연습을 바라보면서 저는 무대 위에 올라온 분들이 얼마나 열심히 자신만의 오선을 채웠는지 알고 있습니다.”
이안의 입에서 현철과 다니엘, 대한 오케스트라의 단원들이 어떻게 연습을 했는지 차례대로 나왔다.
합동 연습을 비롯하여, 개인 연습까지.
언제 다 지켜봤는지 알 수 없지만, 이안은 모두가 연습한 방향을 무척이나 상세하게, 그리고 정확하게 꿰뚫고 있었다.
분명 루체른 페스티벌 참여로 연습 모습을 거의 보지 못한 이안이었는데.
이미 다 알고 있었다는 듯 정확하고 상세하게 설명하는 모습에 그저 놀라울 지경이었다.
“이분들이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 알기에. 저는 감히 이번 무대의 비중을 높게 책정할 수 없습니다.”
이안의 겸손함에 다니엘은 오히려 고마움과 함께 존경심이 묻어나왔다.
이안이 이 무대에 기여한 부분이 얼마나 많은데.
애초에 <염라>의 곡 자체도 이안이 만든 곡을 바탕으로 만든 것이며, 자신을 대신에 이벤트 무대마저 이안이 기획해주지 않았던가.
게다가 두 지휘자가 함께 올라오는 것까지 모두 이안의 아이디어였다.
그런데 단지 오선을 그었다니.
당치도 않다고 생각하던 참이었다.
“단순히 연습에 국한된 것이 아닙니다. 수많은 관객분들 앞에 오르기까지, 이분들께서 얼마나 많은 고민과 생각을 가졌을지 제가 가치를 책정할 수 없겠죠.”
이안의 말에 많은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편으로는 이안의 말이 맞다는 생각에, 한편으로는 그 정도로 깊게 생각한 이안의 뜻에 크게 감복한 사람들이었다.
고개를 끄덕인 다니엘은 후자에 가까웠다.
자신은 단순히 이번 무대가 어땠는지 물어보고 싶었는데.
이안은 단편적인 사실이 아니라, 지금까지 대한이, 현철이, 다니엘이 걸어온 길 모두를 보고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러니 제가 드릴 수 있는 말은 단 하나입니다.”
마지막 말을 준비하는 이안에 술렁거리던 관객석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이안이 어떤 말을 할지, 어떤 표현을 사용할지.
기대 어린 시선들이 단번에 꽂혔다.
그런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이안은 그저 자신이 할 말을 했다.
“박현철 전직 대한 오케스트라 단장님, 다니엘 최 현직 오케스트라 단장님. 오늘의 선율을 만들기까지 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
그 말을 하고 이안이 90도로 허리 숙여 인사하지 않는가.
이안의 행동에 다니엘은 가슴 어딘가에 막혀 있던 것이 뚫린 듯 후련함이 느껴졌다.
음악을 비롯하여, 자신이 그동안 해온 것들을 모두 인정받은 듯한 느낌.
그것도 그 인정을 가히 현존하는 음악가들 중의 최고라고 불리는 박이안 단장에게 받았다.
지금껏 대한 오케스트라의 단장 자리를 물려받았을 때 가장 큰 행복감을 느꼈는데.
그 기록이 경신되는 순간이었다.
‘저런 말 또한 우리에게 내어주는 과제일 테니까.’
한편으로 다니엘은 지금껏 이안이 한 말을 곱씹었다.
차근히 생각을 했을 때쯤, 다니엘은 이안이 한 말의 숨겨진 뜻을 유추할 수 있었다.
결국 누군가의 도움을 받는다 하더라도, 실질적으로 음악을 연주하고, 무대를 완성하는 것은 자신의 뜻에 달려있다고.
이안의 표현은 그 중심을 잡아가라는 것 같았다.
다만, 그 중심을 어떻게, 어디에 잡을지는 자신의 뜻에 달린 것이겠지.
다니엘의 가슴 한편에 목표가 하나 생겼다.
다음에 만날 때는 그 중심을 제대로 잡아서 마주하겠다고.
***
모든 무대가 끝나고, 정리하는 대기실.
아직 그 열기가 가시지 않은 듯 대한 오케스트라 단원들과 큰아버지, 다니엘이 서로 한데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특히 가장 큰 변화는 매번 무뚝뚝해 보였던 큰아버지의 표정이 조금은 펴진 것.
큰아버지의 스승님인 김종수 선생님이 떠오르는 인자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나는 이번 무대의 주인공들을 위해, 한 발치 떨어져서 상황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문이 열리더니 아버지와 어머니가 동시에 대기실로 들어왔다.
“형. 무대 잘 봤어.”
“아주버님, 진짜 최고였어요.”
부모님의 말에 큰아버지는 무언가 부끄러운 것을 들킨 듯 표정을 애써 감췄다.
하지만, 여전히 무대에서의 감흥이 떨어지지 않았는지 입꼬리는 여전히 올라가 있었다.
“오지 말래도.”
큰아버지는 좀처럼 부모님과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아마 첫 무대에서 자신도 모르게 활짝 웃어 보인 채 지휘를 했던 것이 뒤늦게 민망할 것이다.
<스승의 은혜>에 지휘를 더하는 큰아버지의 모습은 오롯이 그 상황을 즐기는 어린아이와 같았으니까.
그러나 그 모습이 어려 보이지 않고 눈부셨다.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두 분께서도 오셨군요.”
아시아의 바흐인 아버지와 흑발의 플루티스트 어머니니까.
다니엘도 부모님을 알아보곤 여기까지 와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을 연발했다.
거기에 다니엘은 부모님 앞에서 내 칭찬을 잊지 않았다.
“이안씨가 아니었다면 이뤄질 수 없던 무대였습니다.”
다니엘은 차마 전하지 못했다며 여러 이야기를 꺼냈다.
이번 무대를 만드는 아이디어 반절이 내 머릿속에서 나왔다며.
그저 놀라울 따름이었다고 표현했다.
“아마 마지막 축사도 저희를 배려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다니엘은 얼핏 내 생각을 예측하고 있었다.
내가 아무렴 문제점을 찾지 못했을까.
그럼에도 아무 말을 하지 않은 것은 대한 오케스트라를 위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반쯤은 맞는 말이니.
나 또한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아예 없진 않았죠.”
순간, 내 말에 대기실의 분위기가 사뭇 달라졌다.
하지만, 내가 찬물을 끼얹은 것 같은 느낌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
다니엘은 물론, 큰아버지도 내가 어떤 말을 할지 무척 궁금하다는 눈치였다.
‘이럴까 봐 일부러 이야기 안 한 건데.’
그동안 큰아버지의 연습을 비롯해 대한 오케스트라의 연습을 바라보면서 나는 그 어떠한 코멘트도 달지 않았다.
이번 무대는 오로지 대한의 무대라는 것도 있었지만, 내가 한마디를 하면 큰아버지와 다니엘은 열 가지를 생각할 사람들이니까.
물론 깊은 생각을 더할수록 무대의 퀄리티는 높아지는 것이 맞다.
하지만, 그걸 과연 ‘대한의 무대’라고 할 수 있을까.
특히 이번 창단 25주년을 맞이한 대한 오케스트라의 기념 연주회였기에, 일부러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이다.
***
수철과 은희는 거하게 뒤풀이라도 하자고 했건만.
현철은 그 모든 것들을 거절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동안의 긴장이 한꺼번에 풀려서일까, 아니면 무대에서 예정보다 지휘를 더욱 힘차게 해서 그럴까.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힘들 정도로 피곤했다.
‘하지만, 오늘만큼 기분 좋은 날은 처음이군.’
무대에서는 물론, 허심탄회하게 웃어본 적이 언제였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늘 삶에 쫓기듯 살아가면서, 오케스트라를 책임져야 한다는 중압감을 버티며 살지 않았던가.
약해보일 수 없고, 가벼워 보일 수 없기에 현철은 오랜 기간 동안 가면을 썼어야 했다.
그러나 오늘.
그 가면을 말끔하게 벗어버린 것 같아 속이 후련할 지경이었다.
‘오랜만에 영양가 있는 대화도 했고.’
현철의 머릿속에는 여전히 이안의 피드백이 선명했다.
이안의 평가는 거침이 없었다.
다니엘에 대해서도 역량이 뛰어나지만, 경험적으로 차이가 두드러져 보였다고.
특히, 현철을 차용하려는 면모가 많이 보여 아쉬운 부분이 보였다고 답했다.
현철도 예외는 아니었다.
“큰아버지는 힘을 너무 주는 게 조금 보였어요. 스타카토에서는 자칫 힘이 거세질 수 있었다고 봐요. 아마 그 부분이 살아난 건 단원들이 큰아버지의 지휘를 알고 있기 때문이었을 거예요.”
이안의 피드백은 무척 상세했다.
몇 번이고 현철의 지휘를 봐왔다지만, 단번에 현철의 지휘 특이점을 파악하고, 이를 단원들이 알고 있었을 것이라는 예측까지 하지 않던가.
이안이 말하는 것을 들을 때마다 양심이 움찔거리듯 몸이 먼저 반응을 일으켰다.
본능적으로 느꼈던 미세한 잘못들.
그마저 꿰뚫어 보는 이안이 그저 신기할 뿐이었다.
“하지만, 저는 완벽한 무대는 없다고 생각해요.”
자신의 무대를 바라볼 때도 항상 그렇다고.
다른 무언가의 선율이 추가되었으면, 더 특이점을 두면 곡을 살릴 수 있을 것 같은 생각들.
이안은 그저 그런 것들을 덧댈 뿐이라고 설명했다.
“그럼에도 누군가 최근 연주 중에 가장 최고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단번에 오늘을 꼽을 거예요.”
결코 사탕발림 같은 어조가 아니었다.
오히려 객관성이 가득한 듯, 이안의 눈빛이 선명했다.
그렇기에 더욱 안심할 수 있었다.
매번 대한민국 오케스트라의 거장이라는 무거운 직책에서 벗어나, 음악가 대 음악가로 만나 이야기를 나눈 기분이었으니까.
마음으로는 뒤풀이에서 이안과 더욱 깊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하지만, 오랜만의 지휘와 오십이 넘은 몸뚱아리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생각을 마치고 막 잠에 빠지려던 찰나.
현철의 휴대전화가 시끄럽게 울렸다.
오늘만큼은 다 잊고 자려고 했건만.
울리는 전화가 개인 전화가 아닌, 사업용 전화라는 점에서 현철은 무거운 몸을 이끌고 휴대폰을 받아들었다.
“여보세요?”
피곤함에 반쯤 눈을 감은 채 전화를 받았거늘.
수화기 너머 들려온 소식은 현철의 졸음을 싹 가시게 만들었다.
이윽고 몸을 일으킨 현철의 눈에는 이전과 같은 매서움이 깃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