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6화
분명 영화제의 주인공들은 영화인일 텐데.
어째 나에게 더 많은 카메라가 쏠린 기분이다.
레드카펫을 걸어가는 내내 여기저기서 내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리는가 하면, 내게 직접 다가와 인터뷰를 요청하는 사람도 있었다.
심지어 헐리우드에서 수많은 업적을 쌓은 배우들이 내게 와서 사진을 부탁하는 경우도 있었다.
에드워드 감독은 그러한 광경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직접 카메라를 들기까지 했다.
“정신없진 않으십니까?”
로미오가 사뭇 걱정된다는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그가 말하기에도, 지금과 같은 열렬한 반응은 본 적이 없었다고 표현했다.
대부분 배우들은 고고한 자태를 위해 결코 사진을 부탁하는 경우가 없는데.
이렇게 많은 배우들이 내게 다가온 것은 다 내가 그만한 위치에 있기 때문일 것이라고 말했다.
“괜히 저희가 불러서 힘드신 건 아닌가 모르겠습니다.”
“괜찮습니다. 이런 활기찬 곳에서 영감을 얻어가면 되죠.”
이전에 <영감>도 사람들의 열띤 반응을 음악으로 승화시킨 것이었으니까.
새로운 경험을 통해 음악을 강화할 수 있다면 내게도 좋은 기회였다.
특히 영화인들의 축제에는 외부인의 출입이 어려우니까.
이번 기회를 발판 삼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이다.
담담한 내 말에 로미오와 에드워드, 심지어 플로까지 옅은 감탄을 내뱉었다.
매번 음악에 대한 사랑이 지대한 것 같다고.
그래서 그동안 숱한 곡을 써온 것 같다는 작은 칭찬을 곁들였다.
“그럼 교통정리는 제가 맡죠.”
에드워드 감독이 자신의 가슴을 툭툭 두드리며 자신감을 드러냈다.
수없이 많은 사람들로 얽힌 오스카 어워드인데.
에드워드는 일일 매니저를 자처해서 내 길을 만들어주었다.
오랜 감독 경력을 고스란히 담은 듯, 그가 데려온 사람들도 대부분 엄청난 사람이었다.
이전부터 오스카 어워드는 물론, 칸 영화제에서도 굵직한 행보를 보여온 감독, 국내에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의 배우진들까지.
게다가 에드워드가 소개한 인물에는 영화계에서도 명망 높은 기자도 있었다.
에드워드와 이야기를 나누던 기자는 내 얼굴을 보곤 화들짝 놀랐다.
“이런 서프라이즈 선물이 어디 있을까요!”
나와 악수를 한 기자는 이만한 영광이 없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혹, 실례가 안 된다면 인터뷰를 부탁드려도 되겠습니다.”
안 될 것도 없지.
영화에 대한 자세한 강평은 아니더라도, 음악에 대한 이야기는 할 수 있을 테니까.
기자 또한 에드워드가 간택한 사람답게 질문 수준이 무척 높았다.
단순히 기사를 쓰기 위함이 아닌, 기자 스스로 영화를 깊게 관찰하고 궁금한 점을 모은 듯.
많은 이들이 궁금해할 질문들이 연이어 들어왔다.
“곡의 이름을 <재회>라고 지으셨다고 들었는데. 선율의 중반부에 어색한 오케스트라가 아닌, 본 오케스트라 선율이 들리는 것과 관련이 있을까요?”
“맞습니다. 각본에서 주인공이 연주회를 진행하면서 회상하는 장면이 있었는데, 그 부분을 담아보려고 한 부분입니다.”
“덕분에 그림 하나가 만들어졌습니다.”
에드워드 감독은 그 장면을 ‘그림’이라고 표현했다.
어떤 명작과도 비교할 수 없는 그림이라고.
나 또한 에드워드의 말에 동의했다.
내 주변에서도 너나 나나 할 것 없이 그 장면을 가장 최고라고 꼽았으니까.
오케스트라를 꾸리는데도 수없는 시행착오를 겪었던 주인공.
원래 자신이 있던 곳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절망과 이 절망을 음악으로 승화시키려는 욕구.
두 감정이 공존하는 주인공의 지휘가 일품인 장면이었다.
고통과 환희, 아이러니한 감정이 뒤섞인 로미오의 표정 연기를 비롯해 <재회>의 선율에 CG를 더해 로미오가 슬픈 미소를 짓는 장면까지 완벽하게 담겼다.
영화를 본 단원들은 그 장면에서 울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고.
마치 리히트에서 있었던 연주회를 회상하는 기분이었다고 설명했다.
“이안씨? 마지막 한 말씀을 부탁드리자면 뭐가 있을까요?”
“글쎄요. 그저 제가 도움이 되었다면 다행이라 생각합니다.”
내가 전해준 것은 음악뿐.
그것을 연기와 영상미로 장식하는 것은 이들의 몫일 테니까.
내 말에 에드워드와 플로를 비롯해 로미오까지 겸손하다며 손사래를 쳤다.
오히려 이번 영화의 성공 비결이 있다면 내 곡일 것이라고.
이미 스태프와 배우 사이에서는 내 이야기로 자자하다며 평을 이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에, 인터뷰까지 마무리되었다.
기자 또한 무척 전문가스러운 미소를 펼치며 내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이제 곧 오스카 어워드가 진행될 예정이오니, 내빈 여러분께서는 입장을…-
오스카의 시작을 알리는 안내음과 함께 사람들이 줄지어 안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이야기를 마저 나누려는 사람들과 시상식장으로 들어가려는 사람들로 레드카펫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가운데.
나 또한 일행과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때.
툭-
너무 강하지도, 그렇다고 약하지도 않은 부딪힘이었다.
몸이 출렁일 정도였지만, 넘어질 정도는 아닌.
그저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부딪힌 정도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가 고개를 갸웃한 부분은 따로 있었다.
내 어깨를 스치고 간 사람이 나도 아는 사람 같았으니까.
‘포브?’
지난 이안 국제 콩쿨에 참여한 참가자이자, 유튜브 구독자 100만을 거느린 클래식 기타리스트.
워낙 인상이 남아서 기억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이미 지나갔지만, 그의 밝은 갈색 머리칼과 턱수염은 여전했으니까.
그 또한 실력이 나쁘지 않았으니 영화 음악에 함께 했을 수도 있다 생각했다.
그저 어깨를 툭툭 쓸어내리고 들어가려 했건만.
로미오는 아니었다.
“괜찮습니까?!”
로미오가 경악에 가까운 목소리로 내 상태를 살폈다.
단순히 부딪힌 정도라고 말했음에도 행여 모른다며 어깨를 눌러보며 통증을 확인했다.
정말로 가벼운 충돌이었기에, 로미오가 걱정하는 것만큼 통증은 없었다.
“사람이 많아 실수했나 봅니다.”
무척 붐비는 분위기인 것은 사실이었으니까.
좁은 입구로 사람들이 몰리니 혼란스러운 것은 당연지사.
하지만…
“그래도 사과 한마디 안 하고 가는 법이 어디 있습니까.”
로미오의 표정은 지금껏 본 표정 중에서도 가장 싸늘했다.
마치 내가 아닌, 자신이 어깨를 부딪히기라도 한 듯, 무척 모욕적이라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긴, 그의 반응도 결코 부자연스러운 것은 아니었다.
미국이 한국처럼 높임말이 철저한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예의가 없는 곳은 아니다.
어떤 부분에 대해서는 한국보다 예의에 대해 철저하니까.
미국에 가려면 가장 먼저 배워야 하는 말이 ‘Excuse me.’인 것을 보면 단박에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개인주의가 강한 미국 사회에서 ‘실례합니다.’라는 말은 ‘제가 당신의 영역을 잠깐 지나가겠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라 똑같았다.
가장 중요시하는 것을 실례를 무릅쓰고 행한다는 것.
그렇기에 실수에 대해서 사과하지 않는 것을 무척이나 모욕적이라 생각했다.
지금 상황이 딱 그러지 않은가.
“참으로 웃긴 사람입니다. 지금이라도 사과를 요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괜찮습니다. 혹 시상식이 끝나고 나서라도 오지 않겠습니까.”
로미오는 내 말에 대해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그럴 것이라며, 아니, 분명 그래야만 할 것이라는 반응이었다.
전 세계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 나를 그저 모르고 지나칠 리 없다며.
만약 사과를 하지 않고 돌아간다면, 그건 무척 큰 실수를 저지르는 것이라고 표현했다.
그런 로미오에게 나는 그저 고맙다며 어깨를 토닥였다.
그제야 로미오의 주먹이 조금은 펴졌다.
“자, 그럼 들어가 보실까요?”
***
로미오는 애써 화를 삭인 채 시상식장에 들어섰다.
만약 자신에게 그랬다면 당장 불러다가 사과를 요구했을 것이다.
몸을 건드려놓고 사과하지 않는 것은 무척이나 무례한 일일 테니까.
그런 무례한 일을 당했음에도, 영화제와 일행을 생각해주는 것에서 이안의 인자함을 여지없이 느낄 수 있었다.
미국 캘리포니아 돌비 극장.
2002년부터 현재까지 오스카 어워드를 진행하는 장소인 만큼, 그 화려함이 매번 배가되었다.
작년에는 오스카상 형태를 한 석고상으로 무대를 꾸몄는데.
올해는 고급스러운 황금빛 장내를 가득 장식하고 있었다.
매번 오스카 어워드의 문을 두드리는 만큼, 로미오에겐 그 변화를 확인하는 것도 묘미였다.
그리고 달라진 점은 하나 더 있었다.
‘매번 상에 목매달았는데.’
아예 기대가 없다고 한다면 거짓말이리라.
영화인들에게 가장 권위 있는 상을 번번이 거머쥐지 못한 것이 아쉬워 악착같이 영화를 찍지 않았던가.
하지만, 이번에는 마음이 조금 달랐다.
지금껏 했던 촬영 중에서도 가장 각본과 분위기에 심취해 연기를 펼쳤다는 생각에 되레 후련할 뿐이었다.
그 때문일까.
상을 무조건 받아야 한다는 생각보다는, 이번 연기에 대해 인정을 받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가득했다.
분명 그렇게 마음을 다잡고 왔거늘.
이어서 벌어지는 심상치 않은 상황에 심장이 마구 뛰었다.
“올해의 감독상. [유일한 음악가]의 에드워드 린드버그!”
“올해의 음악상. [유일한 음악가]의 플로 치머!”
“올해의 작품상. [유일한 음악가]!”
연속적으로 상이 이어지는 것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로미오의 옆에 앉아있던 에드워드 감독과 음악감독 플로도 마찬가지.
아무리 영화를 만족스럽게 찍었다지만, 이렇게까지 인정을 받을 줄은 몰랐던 것이다.
게다가 ‘올해의’이라는 타이틀이 붙은 것은 말 그대로 한 해의 영화를 총망라한 상태로 후보작을 뽑는 것인데.
굵직한 영화 명장들을 제치고 당당하게 상을 거머쥔 것이다.
연이어 수상을 하면 시기할 사람도 있기 마련인데.
되레 사람들의 표정은 무언가 당연하다는 듯 박수를 이어갔다.
“아카데미 주제가상. [유일한 음악가]의 <재회>!”
벌써 4관왕째.
심지어 이번 상은 쟁쟁할 것이라고 의견이 많았던 아카데미 주제가상이었다.
뮤지컬을 방불케 하는 뛰어난 음악 영화들이 줄을 이었던 한해였음에도.
이안이 만든 곡이 당당하게 1위를 차지한 것이다.
본래라면 플로가 단상 위에 올라가야 했지만, 플로는 이안에게 넌지시 자리를 양보했다.
“단장님, 이건 단장님에게 주어지는 상이나 다름없습니다.”
플로의 말에 에드워드를 비롯해 로미오도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초안을 작성한 것에서 완성하기까지 이안이 모두 만든 곡이니까.
플로는 차마 곡의 볼륨을 조절한 것으로 이 상을 받을 수 없다고 표현했다.
이안 또한 플로의 정중한 부탁에 자리에서 일어나 연단으로 향했다.
이안의 출연에 수많은 영화인들이 환호성과 함께 경악성을 터뜨렸다.
“이 상의 영광을 함께한 리히트 오케스트라와 기회를 주신 에드워드 감독님, 곡을 매끄럽게 만들어준 플로 음악감독님께 돌리겠습니다.”
아주 짤막한 소감에도 사람들의 환호는 멈추지 않았다.
되레 그 짧은 말에도 이안이 얼마나 단장으로서 리히트를 아끼는지, 그리고 영화 제작진을 존중하는지 알 것 같다고.
여기저기서 이안의 배포에 대한 찬사가 이어졌다.
어느덧 마지막 차례까지 당도한 오스카 어워드.
이제는 마지막 하이라이트를 남겨두고 있었다.
남우주연상.
로미오가 수차례 도전했지만 번번이 놓친 상이었다.
올해는 분명 욕심을 내지 않으려고 다짐했건만, 4관왕에 도달하자 없던 욕심도 생길 지경이었다.
게다가, 로미오는 눈앞에 펼쳐진 풍경을 믿을 수 없었다.
전광판에 떠오른 것은 지금껏 한 번도 보지 못한 것이었으니까.
***
남우 주연상 수상 후보
[망령] - 로미오
[유일한 음악가] - 로미오
[서커스] - 해머 페레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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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 후보 화면에 자신의 얼굴이 두 개나 비친 것이었다.
지금껏 오스카 어워드에 수차례 방문했지만, 이런 경우는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었다.
한 인물이 서로 다른 영화로 남우주연상 후보에 오른 것.
게다가 경쟁자 중에는 공포 영화 [서커스]의 주인공, 해머도 있었다.
20세기 미국을 공포에 몰아넣었던 광대 살인마를 모티브로 만든 영화.
해머는 사이코패스 살인마 연기를 소름 돋게 해낸 것은 물론,
‘실로 엄청난 연기였지.’
로미오가 보기에도 해머의 연기는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영화 속 해머는 아무리 배우라 할지라도 살인마를 연상케 할 정도로 완벽했으니까.
특히, 삶의 의혹을 잃은 무덤덤하던 주인공이 삐에로 분장을 하고 기괴한 웃음을 짓는 반전 모습은 모든 영화인들의 찬사를 받았다.
그런 두 사람 사이에서 누가 남우주연상을 받을 것인가.
모든 사람들의 이목이 단상에 있는 크리스티아나 그린에게 향해 있었다.
전년도 여우주연상을 받은 스타 배우이자, 이번 남우주연상 시상자로 올라온 크리스티아나.
수상자가 적힌 봉투를 보던 크리스티아나가 빙긋 웃으며 마이크에 입을 댔다.
“드디어! 축하합니다! [유일한 음악가]의 로미오 메이슨!”
마지막 피날레를 장식하듯, 팡파르가 터져 나왔다.
그동안 오스카 어워드에 도전했던 로미오에 대해 축하와 존경을 담은 박수가 터져 나왔다.
분명 내려놓고 있으려고 했거늘.
오랜 친구이자 동료인 크리스티아나의 수상자 발표에 로미오는 절로 벌떡 일어나서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로미오가 가장 먼저 한 것은 이안에게 감사함을 표하는 것이었다.
“단장님! 단장님의 음악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겁니다!”
진심이 가득한 말이었다.
이안의 <재회>를 듣고 난 후부터 완벽하게 캐릭터를 이해하고 흡수될 수 있었으니까.
도무지 흥분감을 내려놓지 못하는 로미오를 향해, 이안은 그저 바라볼 뿐이었다.
이상하게도 그 시선에 로미오의 마음이 차분해졌다.
마치 거룩한 거장을 마주하고, 그 앞에서 예의를 차리듯.
로미오는 이안에게 허리 숙여 인사하곤 당당하게 연단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