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8화
이안이 없음에도 리드미컬 체임버홀에는 단원들로 가득했다.
저마다 악기를 연주하고, 각자의 감상을 얘기해주는 것.
악기의 특색을 넘어 음악 자체를 이해하는 리히트 단원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한창 여러 선율이 얽히던 찰나.
“What the f…!”
객석에 앉아 잠깐 쉬며 휴대폰을 보던 에비게일이 화가 잔뜩 난 듯 언성을 높였다.
욕이 튀어나올 뻔하다가 가까스로 막아낸 에비게일.
그녀는 곧바로 연습을 방해한 것에 대해 사과했다.
하지만, 아람을 포함한 모든 단원은 에비게일이 이토록 반응한 것을 이상하다고 여겼다.
“에비게일? 무슨 일 있어요?”
아람이 다가가자, 에비게일은 설명 대신 휴대폰을 내밀었다.
휴대폰에서는 한 영상이 재생되고 있었다.
SNS에 올라온 오스카 어워드 동영상.
영상의 한편에는 아람에게도 반가운 사람이 있었다.
“어? 우리 단장님 아니에요?”
오스카 어워드 참석차 미국으로 향한 이안이었다.
슈트 차림을 한 멀끔한 모습에 아람은 역시 단장님이라며 너스레를 떨었다.
그러나, 그런 아람의 반응에도 에비게일의 표정은 여전히 차가웠다.
지금 에비게일은 아람조차 옅게 떨릴 정도로 서슬 퍼런 표정을 하고 있었다.
냉철한 표정을 짓더라도, 특유의 유쾌한 기운은 사라지지 않던 에비게일이었는데.
영상을 보던 아람은 이내 에비게일이 왜 그런 표정을 지었는지 알 수 있었다.
“지금 단장님을 치고 간 거예요?”
속칭 ‘어깨빵’.
시상식장으로 들어가려던 찰나, 한 남자가 이안과 부딪혔다.
이안의 몸이 살짝 출렁일 정도로 강한 충격.
의도적으로 친 것 같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당사자가 아예 모를 리 없는 수준이었다.
되레 옆에 있던 로미오가 걱정하는 눈빛으로 이안을 살피다가 분노어린 시선을 던졌다.
“이건 말도 안 돼요. 만약 실수였다 하더라도 괜찮냐는 말 한마디 하지 않잖아요.”
에비게일의 말에 아람은 영상을 몇 번이고 되돌려보았다.
분명 당사자도 충격을 느꼈을 텐데.
영상 속 남자는 고개 한 번 돌리지 않은 채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에비게일과 아람이 동시에 분노 섞인 반응을 보이자 다른 단원들도 그 둘의 곁으로 모여들었다.
모두 하나같이 영상을 보던 단원들은 말도 안 된다며 일갈했다.
특히 몇몇 단원들은 서양에서 저런 실수를 하고 사과 한마디 없는 것은 무례의 극치라며 언성을 높였다.
“근데 이 사람,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지 않아요?”
서령의 말에 단원들도 하나둘씩 맞는 것 같다며 이야기를 더했다.
단원들 사이에서 이야기가 오가던 중, 루이사가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이 사람 포브 아니에요? 왜 그 있잖아요. 콩쿨 참여한 기타리스트.”
루이사의 말에 단원들이 일제히 포브를 검색했다.
아람 또한 휴대폰으로 그의 이름을 검색하는데, 이미 발 빠른 한국 누리꾼들이 모든 것을 정리해서 업로드해둔 상태였다.
정보력은 국정원 못지 않은 것이 바로 한국 누리꾼들이었으니까.
이안에 대한 팬심으로 무장한 누리꾼들이 발 빠르게 증거를 찾아나서고 있었다.
이안의 팬클럽, 솨텐에서도 누리꾼들을 독려하면서도 확실한 증거를 찾아야 한다고 표현했다.
행여 잘못된 사람이 지목당하면, 그건 누리꾼들의 잘못이 아닌, 이안의 잘못으로 넘어갈 테니까.
이안에게 그 어떠한 손해를 끼치지 않으려는 면모가 돋보였다.
이윽고.
ㄴ 찾아보니 유튜버네요. 포브라고.
ㄴ ㅇㅇ 맞는 것 같습니다. 머리카락이랑 수염, 특징은 대충 일치하네요.
ㄴ 정면 사진 나왔는데, 확실한 것 같습니다.
ㄴ 심지어 오스카 어워드 브이로그도 올라왔습니다. 옷 똑같은 거 보니 맞는 듯.
누리꾼들은 사소한 것 하나 놓치지 않았다.
머리와 수염은 물론, 포브의 브이로그에 담긴 의상까지 면밀하게 관찰했다.
심지어 해당 의상이 어떤 옷이며, 포브의 이전 영상에도 나온 적이 있다는 확인까지 끝난 상황.
아람이 뭐라도 하려고 SNS를 켜는 순간.
그녀의 뇌리에 무언가 스쳐 지나갔다.
지금 우리는 개인이 아닌, 리히트 단원이지 않은가.
그렇다면 할 일은 단 하나.
“일단 단장님을 기다려 보죠.”
***
새벽 4시.
많은 이들이 단잠에 빠져 있을 시간이었다.
특히 포브는 최근 일정들이 무척이나 빠듯했던 탓에 잠을 자도 피곤한 상태였다.
이안이 출연하는 페스티벌을 세 번이나 따라다닌 것은 물론, 오스카 어워드 때문에 미국에 간 것까지.
아직 시차 적응을 하지 못한 몸뚱아리가 무겁기만 했다.
그런데, 그런 단잠을 자고 있던 포브를 깨운 것은 다름 아닌 휴대폰이었다.
몇 번 울리는 소리에 무시하고 자려 했건만.
1시간 넘게 휴대폰은 멈출 기미가 없었다.
“진짜 새벽에 이게 무슨 짓이야.”
포브는 겨우 손을 더듬거리며 휴대폰을 쥐었다.
누구에게서 온 전화인지 확인도 하지 않은 상태로 전화를 받았는데.
전화를 받자마자 벼락이 치듯 수화기 너머에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대체 무슨 일을 저지른 거야?!-
“뭐… 뭐야?!”
그제야 포브는 휴대폰 화면을 살폈다.
그의 유튜브 편집자 중 하나이자, 매니저로 일하고 있는 요제프의 전화였다.
난데없는 외침에 당황하고 있던 찰나, 요제프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너 진짜 큰일 났다. 우린 이제 끝이라고!-
“내가 뭘!”
자다가 무슨 이 난리란 말인가.
가뜩이나 단잠을 방해한 전화에 짜증 난 상태에, 포브는 갑작스런 요제프의 호통에 정신이 없었다.
그런데 요제프의 태도가 평소와는 달랐다.
평소라면 한 성격 하는 포브에게 별말 하지 않던 요제프였는데.
이번에는 진심으로 화가 난 듯, 수화기 너머에서 강한 분노가 느껴졌다.
-빨리 유튜브나 확인해봐!-
요제프의 신경질적인 말에 포브는 곧바로 유튜브를 확인했다.
자신의 채널을 확인한 포브는 잠이 한순간에 달아나버렸다.
‘이게 뭐야?!’
분명 자기 전만 해도 2백만에 달했던 구독자가 대부분 사라져 있었다.
리히트 오케스트라를 따라가기 전에도 1백만 구독자를 거느린 포브였는데.
지금은 반 토막도 못한 50만 구독자만이 포브의 채널에 남아있었다.
그마저도 실시간으로 새로고침을 할 때마다 줄어들었다.
게다가 댓글은 더욱 가관이었다.
ㄴ 위선 덩어리. 꺼져라.
ㄴ 설마 실수라고 얘기하진 않겠지?
ㄴ 진짜… 음악도 좋고, 말도 너무 잘해서 믿었는데. 실망입니다.
영상 댓글이 폭발적으로 늘어난 상태.
하지만, 대부분 포브에 대한 심한 비판이거나, 욕설에 가까운 댓글들이었다.
그 숫자가 얼마나 많은지 본래 포브를 칭찬하고, 리히트에 대해 동감하는 댓글을 찾아볼 수 없을 지경이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포브의 수난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SNS에도 수많은 메시지로 온통 난리였다.
유튜브 댓글과 마찬가지로 수없이 많은 비판 메시지나 왜 그랬냐는 둥, 해명을 요구하는 메시지까지.
심지어 포브의 지인들도 실망이라며 일침을 보내왔다.
게다가.
-오스카 어워드입니다. 계약 위반에 따른 손해 배상 청구 및 영상 삭제 관련으로 연락드렸습니다.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회신 바라며…-
오스카뿐만이 아니었다.
포브의 SNS 성장세를 보고 계약을 진행했던 여러 광고주들이 포브에게 계약 위반으로 막대한 손해 배상을 청구하겠다고 일갈한 것.
막 잠에서 깨어난 포브는 상황 판단이 잘되지 않았다.
당황스런 마음에 포브는 곧장 요제프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야?”
-뭐가 어떻게 되긴, 네가 사람 잘못 건드린 거지.-
“그래서 내가 뭐 했냐고!”
-와… 그렇게까진 안 봤는데, 그렇게 뻔뻔한지 몰랐다. 인터넷에 네 이름 검색해도 나올 거다. 아무튼 나도 관둘 거니까 다신 연락하지 마.-
거침없이 끊긴 전화에 포브는 그저 당황스러울 뿐이었다.
그리고, 이름만 검색하면 나올 거라니.
포브는 떨리는 손길로 자신의 이름을 검색했다.
인터넷을 비롯해 SNS상에서는 포브와 이안이 나온 영상이 즐비했다.
오스카에서 공개한 다방면 CCTV 화면에도 포브가 이안의 어깨를 치고 그냥 지나가 버리는 영상에 제대로 녹화되어버린 것.
오스카 측에서는 이미 논란으로 해당 영상을 내렸지만, 이미 캡쳐된 영상이 떠돌아다니고 있었다.
‘설마 그때…?’
포브는 잠깐 기억을 더듬어보았다.
셀럽의 삶에 흠뻑 젖어 오스카 어워드에 참여하지 않았던가.
사진을 찍고, 영상을 찍으며 돌아다니는 탓에 몇 번 부딪힌 기억이 있었다.
영상을 찍느라 사과를 하기도, 안 하기도 했었는데, 그들 중 하나가 이안이었을 줄이야.
하지만, 후회해봤자 소용이 없었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으니까.
***
‘아주 대스타가 되셨구만.’
리히트 재단의 이사, 민호가 화면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민호가 보는 스크린에는 포브의 사과 영상이 떠 있었다.
어지간히 급했던 것일까. 포브는 방금 잠에서 깬 듯 헝클어진 머리에 초췌한 몰골을 한 채 영상을 촬영한 상태였다.
-물의를 빚어 죄송합니다. 맹세코 고의가 아니었습니다. 이 자리를 빌려 박이안 단장님께 죄송하다는 말씀을…-
포브가 곧바로 사과 영상을 올렸건만.
여전히 사람들의 반응은 냉랭하기만 했다.
ㄴ 이제 와서??
ㄴ 시상식이 끝난 지 얼마나 됐는데 이제 사과를? 너무 속 보인다.
ㄴ 몰랐다고? 넘어지진 않아도 저렇게까지 몸이 휘청거렸는데 몰라?
애초에 말이 되지 않는 것 아니냐며.
되레 사과답지 않은 사과를 하지 말라며 조롱할 정도였다.
포브에 대한 이야기가 삽시간에 퍼지며 로미오의 인터뷰도 재조명되었다.
오스카 시상식을 생중계하던 카메라에 로미오와 함께 있던 이안이 발견된 것.
게다가 포브가 어깨를 치고 사라졌을 때, 로미오가 이안의 어깨를 털어주는 모습까지 고스란히 카메라에 담겼다.
그제야 사람들은 로미오가 이안의 어깨 이야기를 왜 했는지 알 수 있었다.
ㄴ 헐. 직접 밝히지 않고 돌려 표현했구나.
ㄴ 생각 진짜 깊다. 저렇게 젠틀하게 말할 수도 있구나.
ㄴ 로미오의 행동은 이안을 배려한 것도 있는 것 같음, 결국 자신이 성내봤자 이안한테 손해니까.
ㄴ 게다가 저걸 가만히 듣고 있는 이안도 몰랐을까? 끄덕이는 거 보면 백퍼 알고 있었지.
ㄴ 캬, 젊은 거장에 대배우답다. 그저 박수(박수)(박수)
연이어 로미오의 언변과 이안의 넓은 아량이 주목되고 있었다.
하지만, 결국 이번 사안도 수습해야 할 터.
이안도 그 부분을 이미 들었는지 귀국과 동시에 민호를 찾았다.
“저희도 성명 발표하죠. 불은 꺼야 할 테니까.”
이안은 이것이 자칫 마녀사냥으로 번질 수 있을 것이라고 표현했다.
잘못을 했으면 용서를 구하고, 당사자는 용서할 것이라면 용서를 하면 된다고.
이를 크게 문제 삼고 싶지 않은 이안의 넓은 아량이 돋보였다.
민호는 곧바로 이안의 말을 실행에 옮기면서 생각했다.
‘단장님도 그렇고, 단원들도 아주 똑똑하시다니까.’
사태가 터지고 나고 부단장인 요한나가 전화를 하지 않았던가.
-이사장님, 혹시 공식발표를 한다면 저희도 단장님과 같은 생각이라고 해주세요.-
이안을 하루 앞둔 시점에 걸려온 전화였다.
아직 이안이 어떤 말을 할지, 어떤 의사를 표현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이안의 선택을 믿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만약 단원들이 나서서 포브에게 무어라 했다면 이 또한 집단 린치로 비쳤을 터.
하지만, 그러지 않는 단원들의 면모를 보면 어느덧 이안의 영향력을 사뭇 알 것 같았다.
단장과 단원들이 뜻을 모았으니, 재단 이사인 자신이 할 일은 하나겠지.
“그럼, 저는 제 할 일을 하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