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화
작업자들이 피아노 조립을 서둘렀다.
여타 악기들은 단원들 개인이 움직일 수 있지만, 피아노는 아니었으니까.
피아노를 조립하는 과정도 시간과의 싸움이었다.
과하게 냉각된 소리판은 소리를 내는 데 어려움을 줄 테니까.
신속함이 필요한 것은 피아노뿐만이 아니었다.
몹시 춥고 건조한 북극의 특성상, 현악기 또한 무척 취약했다.
그린피스 측에서 열풍기와 같은 방한용품들을 준비했지만, 온도는 조절해도 습도까지 조절할 순 없다.
그러니 이번 무대는 신속하게 끝내야 했다.
“왜 북극이었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어느덧 곁에 다가온 쉐리가 물었다.
내가 가진 인지도라면 한국에서 연주를 하는 것만으로도 큰 이목을 집중시킬 수 있었을 것이라고.
그럼에도 수 시간 비행기를 타고, 배까지 갈아타야 하는 북극으로 온 이유가 궁금하다고 표현했다.
단순한 궁금증을 넘어, 다큐멘터리 감독으로서 진지한 기색이 엿보이는 질문.
나는 담담하게 내 생각을 이야기했다.
“이번 카라모섬 붕괴와 무척 밀접한 관련이 있는 곳이니까요.”
사실상 카라모섬 붕괴의 원인이나 다름없는 곳이니까.
빙하가 녹지 않았다면 수몰 위기 국가도 없었을 것이고, 카라모섬이 존재해야 할 이유조차 없었을 테니까.
게다가 수온의 변화로 재앙에 가까운 태풍과 허리케인이 만들어진다고 했으니.
그린피스가 원하는 것은 물론, 카라모섬에 대해 더욱 관심이 집중되려면 북극에서 연주하는 것이 가장 이목을 끌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한창 쉐리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자꾸만 옅은 소리들이 내 귀를 자극했다.
“독특한 소리들이네요.”
엔진까지 끈 쇄빙선은 조용하게 멈춰있는데.
주변에서는 소리가 끊이지 않고 들려왔다.
마치 탄산이 튀어 오르듯, 옅은 기포가 나와 터지는 듯한 소리가 끊이지 않고 들려왔다.
탄산음료 같다는 표현에 쉐리는 알 것 같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빙산이 깨지면서 얼음에 갇혀있던 공기들이 나오는 소리예요. 잘 모르는 사람들이 많은데, 단장님은 무척 귀가 좋으시네요.”
얼음 속에 있던 공기들이 바닷물에서 나오며 내는 소리라고.
마치 빗소리를 연상케 하는 소리에 나는 차근히 눈을 감았다.
일전에 빗소리로 음악을 만들었던 것처럼.
주변에 들리던 소리들이 음표로 바뀌어 가상의 악보에 차근히 내려앉는다.
얼음이 부딪치며 나는 마찰음, 공기 방울이 터지는 얕은 소리 등이 한데 섞여 오묘한 소리를 낸다.
이 소리들을 활용할 수 있을 것이란 생각에.
나는 곧바로 무대를 준비했다.
“가능하면 빙산이 깨지는 소리도 담아보도록 하죠.”
내 이야기에 쉐리는 사뭇 이해가 되지 않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럴 만도 하지.
방금 빙산이 쪼개지는 소리만 해도 멀리 있는 우리에게 들릴 정도로 거대했으니까.
빙산이 깨지는 소리는 사뭇 오케스트라의 소리까지 삼킬 정도로 크고 웅장했다.
하지만, 나는 오히려 그렇기에 활용하고 싶었다.
거칠게 깨어진 빙산들은 무너져 내리는 것만으로도 오묘한 소리를 내었으니까.
그 소리를 활용한다면 더욱 신비한 연주를 만들 수 있다는 확신이 섰다.
“혹시 루체른 페스티벌에서 보여주셨던 기적을 여기서도 보여주실 건가요?”
질문을 하는 쉐리의 표정에 진지함이 묻어나왔다.
루체른 페스티벌에서 빗소리에 맞춰 연주하는 영상을 보았다고.
그것이 즉석 연주였다는 소식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고 표현했다.
만약 다른 이가 빙산이 깨지는 소리를 담자고 했으면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했을 텐데.
내가 하니 무언가 큰 그림이 있을 것 같아 기대된다고 표현했다.
북극의 자연을 고스란히 담은 선율.
쉐리는 그 선율을 빠짐없이 담겠다고 선언했다.
쉐리의 말에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말한 대로, 내 머릿속엔 자연을 활용한 소리들이 쌓여나가고 있었으니까.
빙산이 녹아내리는 소리를 잡기 위해.
나는 눈을 감고 들려오는 소리들에 집중했다.
몇 차례 생각을 마친 후.
나는 쉐리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자, 그럼 시작하시죠.”
내 이야기와 함께 단원들이 제 자리를 찾았다.
나와 리히트 오케스트라가 마지막 준비를 진행하자, 쉐리도 마지막 점검에 박차를 가했다.
무려 6개에 달하는 카메라.
조금의 순간도 놓치지 않겠다는 쉐리의 열망이 고스란히 보이는 대목이었다.
게다가 소리를 더욱 제대로 잡아내기 위해 붐 마이크까지 설치되었다.
오케스트라와 카메라, 마이크까지 모두가 준비되었을 때.
쉐리는 거침없이 사인을 보냈다.
“레디… 큐!”
신호가 주어졌지만, 나는 지휘를 하지 않았다.
내가 기다리고 있는 것이 하나 있었으니까.
조금 기다릴 무렵, 방금 들었던 굉음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또 다른 빙산의 붕괴.
빙산이 떨어져 나가고, 깨진 빙산이 마찰하며 내는 소리가 비명처럼 울렸다.
그 소리에 더해.
나의 지휘와 함께 리히트의 선율이 북극 전체로 퍼져나가기 시작한다.
***
‘살다 살다 이런 장면을 볼 줄이야.’
그린피스의 팀닥터, 우드라이프가 고개를 저으며 생각했다.
근 20년을 그린피스에 몸담았던 그였건만.
지금과 같은 광경은 처음이었다.
‘연출하려고 해도 이 정도는 안 되겠군.’
존재 차체만으로도 장관이었다.
거대한 빙산을 배경으로 삼고, 그 옆에서는 넓은 빙판과 잘게 쪼개진 유빙들이 떠다닌다.
한편에서는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 한편이 뻥 뚫리는 빙원이 존재했다.
쇄빙선을 타고 수없이 북극을 다녀본 우드라이프도 손꼽을 정도의 절경.
그런 절경을 배경으로 리히트 오케스트라가 연주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들의 모습은 마치 CG로 따놓은 듯 이질적이면서도 신비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 입은 구명조끼도 이안의 요청에 검은색으로 준비해 둔 상태.
이안과 단원들이 연미복 위에 걸쳐 입자 자세히 보지 않는 이상 티도 나지 않았다.
게다가 거대한 판넬에 몸을 맡긴 단원들의 모습은 바다를 표류하는 방랑자 같으면서도, 각이 잡힌 모습은 선장과 선원들을 연상케 했다.
마치 영화의 한 장면 같은 모습을 바라보던 그때.
진정한 영화의 시작은 지금부터였다.
“레디… 큐!”
쉐리의 외침과 함께 일제히 카메라들에 붉은색 빛이 들어왔다.
녹화의 시작.
그런데 이안은 곧바로 연주를 시작하지 않았다.
무언가 기다리는 듯, 빙산을 한참 바라보고 있던 찰나, 굉음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마치 거대한 돌덩어리가 서로 비벼지듯 나는 소리.
불규칙적으로 깨진 얼음이 서로 마찰하며 내는 소리였다.
소리가 들려옴과 동시에, 이안은 그제야 손을 치켜세운 채 지휘를 시작했다.
‘이 선율은 대체…’
연주가 시작됨과 동시에 우드라이프의 숨이 턱 막혔다.
느릿하면서도 웅장한 선율이 빙산의 마찰음과 섞이자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묘한 분위기를 연출했으니까.
마치 장송곡이 울려 퍼지듯, 낮고 음산한 소리가 주변에 일렁였다.
큰 너울도, 파도도 없는 북극의 바다를 떠올리게 하듯.
북극 자체를 형상화한 소리가 빙산이 깨지는 소리에 어우러져 독특한 분위기를 연출해내고 있었다.
게다가.
‘소리가 묻히는 것 같지 않아.’
음악을 잘 모르는 우드라이프도 음악이 잘 들리는지, 아닌지 정도는 판별할 수 있었다.
굉음에 가까운 빙산 소리가 울려 퍼지는데도, 리히트 오케스트라의 선율은 멈추지 않았다.
그렇다면 분명 두 소리 중 어느 하나는 짓눌려 들리지 않아야 하는데.
거대한 빙산의 마찰음에도 리히트의 선율은 차근히 우드라이프의 귀에 들어왔다.
잠깐의 선율을 듣던 우드라이프는 이내 그 이유를 알아챌 수 있었다.
‘빙산의 소리에 맞춰 소리를 조절하는 거야?!’
우드라이프는 하마터면 소리를 낼 뻔했다.
당연히 빙산이 언제 붕괴되고, 어떤 소리가 날지는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다.
20년 동안 북극에 살다시피 한 우드라이프도 할 수 없는 일인데.
이안은 마치 그 모든 것을 예측이라도 한 듯 자연스럽게 지휘를 더해갔다.
커다란 빙산이 쪼개질 때는 피아노와 첼로의 낮은음을 강조시켜 묘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기포소리가 올라올 때는 플루트와 바이올린을 앞세워 경쾌한 소리를 더해간다.
경쾌함과 침울함이라는 아이러니가 뒤섞이며 <얼음>은 독특한 이미지를 더욱 견고히 한다.
연주가 끝났을 때는 경이로운 상황에 입을 다물 수 없었다.
누가 빙산의 소리에 맞춰 곡을 연주할 것이라고 상상이나 했겠는가.
불규칙적이게, 예측 불가능하게 무너지는 빙산의 소리를 마치 예측이라도 한 듯 곡을 바꾸고, 단원들은 그에 걸맞은 선율을 펼쳐낸다.
지휘를 하는 단장이나, 그걸 현실로 이끌어오는 단원이나.
그저 대단하다는 생각에, 연주가 끝나자 우드라이프는 오케스트라를 향해 박수를 보냈다.
이 한 번의 연주로도 엄청나다고 생각했는데.
이안은 쉐리가 녹화한 영상을 보더니 부족하다며 말을 꺼냈다.
“소리가 아쉽네요. 이미 오케스트라 소리는 잘 들어가니, 빙산과 바닷소리를 붐마이크로 잡아주세요.”
이안은 소리의 아쉬움은 물론, 장면에 대해서도 코멘트를 아끼지 않았다.
쉐리 또한 만만치 않은 깐깐함의 소유자였건만.
우드라이프는 쉐리보다 더한 이안의 모습에 혀를 내두를 지경이었다.
이안의 결단력과 청음력에 감탄하는 사이.
우드라이프는 살아생전 좀처럼 느끼지 못했던 것을 느끼고 있었다.
‘이게 문학적으로 살아있다고 표현하는 건가?’
의학도로서 우드라이프에게 ‘살아있다’라는 개념은 심장이 뛰고 있는 상태를 의미했다.
분명 그 불변의 진리를 모르는 것이 아닌데.
우드라이프는 평소와 다른 심장박동을 느끼고 있었다.
리히트 오케스트라가 연주를 할 때부터 느꼈던 묘한 감정.
그것은 단순히 환희나, 즐거움, 감탄이라고 표현하기엔 부족한 것이었다.
마치 감정의 소용돌이에 휩쓸린 듯, 우드라이프의 머릿속에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감정들이 떠올랐다.
그동안 각박한 병원 생활에, 삶에 치여 살았던 우드라이프였건만.
리히트의 선율을 들으니 심장이 뜀과 동시에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이 느껴졌다.
게다가.
‘눈에서 빛이 사라지지 않아.’
우드라이프가 이안을 보며 생각했다.
눈에서 빛이 난다니.
의학도로서 차마 할 수 없는 추상적인 판단이었다.
사람의 눈이 반짝여 보이는 것은 그저 각막과 눈물에 의한 빛 반사뿐이니까.
하지만, 우드라이프는 이번에도 의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무언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엄동설한에도 조금도 꺾이지 않는 모습.
오로지 음악에만 열중하는 이안의 모습이 이제는 신기할 지경이었다.
마치 혼자만 따뜻한 공간에 들어가 있다는 듯.
조금도 움츠러들지 않고 지휘를 이어가는 모습에 기이하다는 생각까지 들 정도다.
몇 번이고 촬영은 재개하는데, 표정 한 번 변하지 않고 연주를 관장하는 이안의 모습에 이제는 경이로울 지경이었다.
게다가 매번 연주를 할 때마다 넋을 놓게 만드는 리히트 오케스트라에 감탄할 정도.
이번에도 충분히 좋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안에게서 나온 말은 똑같았다.
“다시 해보죠.”
이쯤 되면 그만하자고 얘기할 법도 한데.
이젠 우드라이프의 가슴 한편에도 묘한 기대감이 들었다.
매번 최고라고 생각했지만, 반복할수록 그 이상을 보여주는 이안과 리히트이기에.
이미 이마 끝이 얼얼해진 상태였지만, 리히트를 향한 눈길을 거둘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