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시작부터 천재 피아니스트-232화 (232/250)

232화

<얼음>을 연주하는 피아노는 한 대.

큰 규모의 피아노를 둘이나 가져오기 힘든 것은 물론, 안전 문제로 두 대까지 설치하지 못하는 탓에 선택한 일이었다.

리히트 오케스트라에서 피아노를 담당하는 단원은 요한나와 지현 둘.

한 대의 피아노로 어떻게 할까 했건만, 이번 무대에서 두 사람 중 하나가 빠지는 일은 없었다.

요한나는 저음역대를, 지현은 고음역대를 담당하며 연주를 펼친다.

서로가 서로의 반주와 멜로디를 담당해주며 선율을 펼치는 고난이도 연주.

특히, 손이 굳어가는 추운 북극에서 두 사람이 동일한 곡을 연주하는 것은 상당히 까다로운 작업이었다.

박자가 틀어지는 순간 연주의 분위기가 틀어질 테니까.

‘하지만 놓치지 않아.’

지현은 이를 세게 깨문 채 연주를 이어갔다.

그러나 추위라는 것은 단순히 참아낸다고 해서 참아지는 것이 아니었다.

원래 추위를 잘 타는 몸인데다, 어릴 적에는 잔병치레도 많았던 지현이었기에.

조금만 추워도 코가 막히고 콧물이 흘러나오는 지현에게 북극에서의 연주는 더욱 힘들었다.

게다가 연주가 이어질수록 손가락에는 바늘을 찌르듯 통증이 이어졌다.

보다 정확한 소리를 표현하기 위해 지현은 물론, 모든 단원들이 장갑을 끼지 않은 상태였다.

그 때문에 고통이 엄습하고, 추위에 손가락이 굳어가는데.

극한의 상황에서 연주를 하는데도 지현의 입가 한쪽에는 미소가 맺혔다.

‘너무 신기하고, 대단해.’

이미 한 번 경험해본 즉흥연주다.

최소한의 화음과 기본적인 주법를 활용해 빗소리에 맞춘 즉흥연주를 펼쳤던 것.

이번에 펼치는 <얼음>은 앞서 연주했던 선율의 발전형을 보는 것 같았다.

굉음을 내며 깨지는 빙산에 맞춰 이안의 지휘가 바뀌고, 그때마다 지현은 손가락의 세기를 바꿔 간다.

마치 빙산이 내는 소리에 맞춰 소리를 자유자재로 바꾸듯.

이안의 지휘에 빙산의 소리들이 퍼즐 맞추듯 하나가 되어 나아간다.

자연과 하나가 되어 선율을 이어 나간다는 경이로움과 쾌감.

그것이 지현의 손을 계속해서 움직이는 원동력이 되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모를 정도로 연주를 이어가던 그때.

이안이 연주를 멈추라는 듯 주먹을 쥐었다.

지휘를 보고 있던 단원들이 일제히 연주를 멈추자, 주변에서는 빙산과 유빙이 만들어내는 자잘한 소리만 울렸다.

그와 동시에 쉐리 또한 손을 들어 보였다.

마치 서로 약속이라도 한 듯 비슷한 타이밍에 멈춘 것에 단원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혹시 내가 실수라도 했나?’

지현은 순간 손을 움켜잡았다.

크게 틀어지진 않았지만, 이안이 멈추라고 지시하지 않았다면 아주 미세하게 박자를 놓칠 뻔했으니까.

하지만, 아직 연주하지 않은 부분을 어떻게 맞췄으며, 쉐리는 왜 멈춘 것일까.

궁금증만 늘어나던 가운데, 지현은 두 사람을 쳐다봤다.

***

“배터리가 방전됐네요. 이참에 잠깐 쉬시는 건 어떤가요?”

쉐리의 제안에 나는 차근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연주를 진행한 지 1시간이 다 되어가고 있었으니까.

내 손이 붉게 물든 것만큼, 단원들의 손가락 또한 추위에 빨갛게 상기되어 있었다.

주어진 쉬는 시간 동안 단원들은 저마다 챙겨온 담요를 두른 채 온풍기 앞에 모여들었다.

손을 비벼보며 추위를 떨치는가 하면, 같이 담요를 뒤집어쓴 채 체온을 나누기도 했다.

또는 따뜻한 커피가 담긴 컵을 잡은 채 손을 녹이기도 했다.

나 또한 붉게 물든 손에 손난로를 쥐었다.

온기가 전달되며 손이 조금씩 풀리던 때.

나는 지현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지현아. 잠시.”

짧은 몇 마디에 내 뜻을 알아차린 지현이 종종걸음으로 다가왔다.

단원들이 모인 곳 반대편 온풍기에 자리 잡은 나는 짧은 질문을 던졌다.

“많이 춥지?”

내 물음에 지현은 사뭇 놀란 듯 몸을 움찔거렸다.

어렸을 때부터 지현은 추위를 많이 탔으니까.

여름철 에어컨 바람에도 몸을 떨던 지현이 생생했다.

게다가 두 손의 손가락을 모두 따로 움직여야 하는 피아노의 특성상 추위는 배가 되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연주를 이어간 것을 감안하면 지현은 극한까지 연주를 놓지 않은 셈이었다.

충분히 잘해주었음에도 지현은 옅게 울상을 지었다.

“나 때문에 연주를 망친 것 같아서.”

지현은 마치 토로하듯 이야기를 이어갔다.

연주에 집중해야 하는데 손에 신경을 쓰느라 연주가 흐려졌다고.

내가 연주를 끊은 이유가 그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지현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음은 얼핏 알고 있었다.

연주를 이어가는 지현의 시선이 자꾸만 손 쪽을 향했으니까.

정확하게 타건(打鍵)을 하기 위한 탓도 있겠지만, 묘하게 찡그려지는 미간을 보면 지현의 뜻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건 비단 지현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이미 오랜 시간 연주를 이어간 탓에 나뿐만 아니라 모든 단원들의 손이 붉게 얼어붙었으니까.

더 이상의 연주는 컨디션 난조로 이어질 것이라 판단해 끊은 것이다.

“이미 선율에 다른 생각이 섞였다는 생각은 했어. 타건을 할 때 묘하게 손에 힘이 더 들어갔으니까. 아마 언 손 때문에 멈칫할 거라 생각해서 그런 거겠지.”

지현은 맞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요한나와 비교했을 때 조금 더 선율이 강해진 것은 느끼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내가 이번 연주를 통해 확인하려고 했던 것은 개인의 실력이 아니었다.

“괜찮아. 이미 지휘대로 변화할 수 있다는 건 충분히 보여줬으니까.”

얼어붙은 손에 연주가 힘들 순 있다.

하지만, 내 지휘에 따라 연주를 곧바로 변화하는 것은 별개의 일.

지현의 연주는 조금 굳었지만, 내 지휘에 정확히 맞춰 강세를 조절했다.

다른 단원들도 손이 굳은 것은 마찬가지.

하지만, 지휘에 따라 강세를 정확한 타이밍에, 동시에 맞추는 것은 성공적이었다.

그것이 확인되었다면 이번 연습은 끝이다.

나는 지현에게 괜찮다며 다독인 후, 단원들을 한데 모았다.

“이번이 마지막 연주일 겁니다.”

이안의 말에 단원들이 각기 다른 표정을 지었다.

추위에 떨던 단원들은 이제 끝이라는 안도를 하는가 하면, 일부 단원들은 내 말에 되레 의구심이 든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그동안 나는 연주를 하면서 마지막이라고 선언한 적이 없었으니까.

그저 시간이 되면 연주를 멈추고, 그것이 아니라면 계속해서 지휘를 이어갔다.

그러니 먼저 마지막 연주라고 선언하는 것에 의구심을 품을 수밖에.

‘이미 연주는 완성되어 있었지.’

무려 1시간가량이나 반복된 연주다.

이미 실력이 출중한 단원들의 연주는 완성형에 다다른 상태.

그럼에도 연주를 이어간 이유는 변칙적인 빙산의 소리에 맞추기 위함이었다.

이전에 빗소리에 맞춰 즉흥연주를 만들었던 것처럼.

단순한 소리들의 조화로 펼치는 <얼음>의 연주를 빙산에 맞춰 연주한다.

이미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것은 완성된 상태.

그러니 이제 내가 할 일은 하나였다.

“이번 곡에 담아야 하는 감정은 ‘아쉬움’입니다. 앞으로 이 절경을 못 볼 수도 있다는 생각으로 연주해주세요.”

내 말에 주변을 둘러보던 단원들이 생각이 많아진 표정을 했다.

지구온난화와 빙하가 녹는다는 문제 상황을 관통하는 생각들.

비단 사람들에게 피해가 되돌아오는 것뿐만 아니라, 지나간 세월에 대해 후회와 아쉬움을 느끼길 원했다.

그 생각이 고스란히 연주에 녹아야 사람들의 경각심이 더욱 커질 테니까.

앞으로는 지키고 싶어도 지킬 수 없는 것을 미리 지켜야 한다는 점.

더 이상 마음이 얼어붙은 채 살아가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를 펼치고 싶었다.

“자, 마지막 연주를 하러 가죠.”

쉐리의 카메라도 준비 완료.

단원들도 사명감에 불타듯 손을 자유롭게 움직였다.

이제 해야 하는 일은 단 하나, 생각을 곁들인 깊은 <얼음>의 이야기를 카메라에 담는 것뿐이다.

***

혹 카메라 배터리 문제로 흐름이 끊긴 것은 아닐까.

촬영을 위해선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만, 쉐리의 가슴 한편에서는 묘한 긴장감이 흘렀다.

분위기를 잘 타고 간데다, 이미 몇 차례 연주로 대단한 선율이 펼쳐나가고 있었는데.

그 흐름 자체를 깬 것 같아 옅은 걱정이 일었다.

한편으로는 단원들이 쉬었으면 하는 바람도 있었다.

1시간에 가까운 시간 동안 단원들이 쉬는 시간은 아주 적었으니까.

그 사이도 바쁘게 손난로로 손가락을 데울 뿐, 따뜻한 방에서 휴식을 취하진 못했다.

악기의 손상으로 인해 최대한 빨리 연주를 해야 한다는 이안의 요청에 진행된 일.

그런데 단 한 번의 휴식을 취한 것뿐인데, 리히트 단원들의 얼굴에는 묘한 기운이 깃들어 있었다.

‘기합이 잔뜩 들어간 얼굴인데?’

리히트 오케스트라 단원들의 표정에는 비장함마저 묻어났다.

아직 큐 사인이 진행되지도 않았는데도 악기를 고쳐잡은 사람이 있을 정도.

이안이 무엇을 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분명 단원들 사이에서 불던 기류가 달라진 것은 사실이었다.

단원들의 눈빛이 결연해진 탓일까.

촬영을 준비하는 쉐리의 눈에도 그런 결연한 의지가 깃들었다.

“레디… 큐!”

이전과 같은 큐사인과, 이전과 같은 선율의 전개.

하지만, 곧바로 들려오는 소리에 쉐리는 무언가 묘한 변화를 느꼈다.

빙산의 붕괴에 맞춰 선율을 펼친 것도 동일하고, 이어지는 계이름도 이전과 다를 바가 없는데.

연주를 듣는 쉐리의 가슴 한편에 묘한 일렁임이 일어났다.

‘연주에 깃든 우울함에 빠져드는 것 같아.’

이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색다른 감정.

심기일전을 한 듯, 리히트에서 펼쳐지는 소리는 슬픔과 우울감을 동시에 가지고 있었다.

마치 짙은 푸른색을 바라보고 있으면 이런 기분이 느껴지리라.

끝을 알 수 없는 북극의 심해를 바라보듯, 연하게 느껴지던 공기 방울과 바이올린 선율이 귓가에 맴돌았다.

쉐리는 자신도 모르게 거대한 빙산으로 눈길이 갔다.

마치 조금이라도 그 절경을 머릿속에 담아두려는 듯.

쉐리의 눈길이 높은 빙산 끝자락에 머무르며 떠나가지 않았다.

쉐리가 정신을 차린 것은 거대한 빙산 하나가 무너지며 마찰음을 낼 때였다.

거인의 외침처럼 들리는 소리에, 리히트 오케스트라의 선율이 외침을 받쳐주듯 나지막하게 나아간다.

‘마치 여신을 달래는 의식 같군.’

쉐리는 북극의 원주민인 이누이트에게서 들었던 전설을 떠올렸다.

이누이트의 조상이자, 바다의 모든 생물을 다스리는 바다의 여신, ‘세드나’에 대한 이야기.

빙산 사이에서 튀어나오는 공기 방울은 세드나의 숨결이요, 녹아내리는 빙산이 내는 마찰음은 세드나의 슬픈 비명이라고 했다.

그런 소리에 리히트 오케스트라의 선율이 더해지자 세드나의 슬픔이 극대화된다.

마치 그 서글픈 뜻을 이해한다는 듯.

묘하게 동조하는 듯한 음색이 쉐리의 가슴 한편에 뭉클한 감정을 더해준다.

‘이걸 위해 그토록 많은 연주를…’

연주를 지켜보던 쉐리는 그제야 이안의 큰 뜻을 알아챌 수 있었다.

낮고 웅장한 음색은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북극을 마주한 슬픔을 나타내는 것 같았고. 연한 바이올린과 플루트의 소리는 기포 소리가 끊어지지 않도록 이어서 소리를 표현한다.

천혜의 자연과 소리를 함께 하고, 이것이 완벽해졌을 때 단원들의 컨디션을 회복시키는 선택.

그 덕에 단원들이 만들어내는 소리는 최고, 그 이상의 것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을 만들어내는 이안의 손길이 힘있게 나아간다.

리히트의 선율이 모두 카메라와 마이크에 담겼을 때.

쉐리는 감정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한참 넋을 놓고 있었다.

그러나 마지막 점을 찍기 위해.

낮은 목소리로 딱 한 마디를 내뱉었다.

“오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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