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시작부터 천재 피아니스트-233화 (233/250)

233화

“영화보다 더욱 영화 같은 순간이었지.”

전직 왓슨 스튜디오의 음악감독, 조지의 말에 모든 단원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단원들도 쉐리가 찍은 영상을 보면서 몇 번이고 넋을 놓았으니까.

정녕 자신들이 연주한 것이 맞는지 의심이 들 정도.

어떤 단원은 이 모든 순간이 마법 같다고 표현했다.

‘자연의 소리를 그대로 활용할 줄은 몰랐는데.’

조지가 왓슨 스튜디오에서 근무했을 때.

그는 북극을 배경으로 한 애니메이션을 만들면서 효과음을 활용하기도 했다.

하지만, 실제 북극에서 소리를 따오기엔 무리가 있었기에, 스티로폼과 드럼에 쇠 구슬을 굴리는 방식으로 인위적인 소리를 만들어 삽입한 적이 있었다.

그런 조지에게도 이번 기회는 무척이나 특별했다.

마치 오래된 숙원을 푸는 것 같은 시원함마저 느껴질 지경.

더군다나 자연과 하나가 된 소리는 아직도 조지의 귓가에 맴돌 정도였다.

굉음을 일으키며 무너져내리는 빙산의 마찰음과 바다를 떠도는 유빙이 부딪히는 소리, 깨진 얼음 조각 사이에서 나오는 기포의 소리들까지.

단순하지만 기품 있는 자연의 신비에 현혹될 뻔했는데, 그걸 잡아준 것이 바로 이안이었다.

마치 보이지 않는 끈이 자신의 눈과 손에 묶여있기라도 한 듯.

조지는 이안의 지휘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비단 지휘를 보고 음을 조절해야 하는 탓이 아니었다.

이안의 표정과 손짓, 상체 전체를 아우르는 힘에서 연주 직전에 말했던 것이 떠올랐다.

‘아쉬움을 표현한 연주.’

이안이 주문한 대로 조지는 아쉬움을 끌어내어 호른에 숨결을 불어 넣었다.

힘있게 호른을 불면서도 탄식에 가까운 소리가 섞이며 평소 듣던 것과는 다른 선율이 흘러나왔다.

그런 선율을 더욱 강화시킨 것이 이안이었다.

호른을 비롯한 금관악기들은 웅장하고 강한 소리로 전체적인 음이 낮은 곡에서는 어울리지 않기 십상인데.

이안은 이 또한 모두 예측하고 관통한 듯, 금관악기들을 연하게 다루었다.

악보 속에서 금관악기는 울음처럼 낮은 소리를 펼치되, 필요할 때는 거대한 포효처럼 금관악기들을 터뜨렸다.

매번 예상을 벗어나는 선율을 만드는 것은 이제 익숙했다.

이미 이안은 거장과 천재, 그 이상을 뛰어넘은 존재였으니까.

더 이상 놀라울 것이 있을까 했건만.

오늘 선보인 이안의 지휘와 음을 다루는 면모는 또 다른 놀라움을 선사했다.

‘어떻게 저렇게 즉각적으로 반응할 수 있는 거지?’

조지의 머릿속에서는 그의 상식으로는 도무지 해결할 수 없는 의문이 떠올랐다.

루체른 페스티벌에서 빗소리를 메인으로 한 연주도 믿기 힘들 정도였는데.

이번에도 빙하의 소리에 지휘로 음을 조절하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었다.

만약 단순히 빙하가 무너지면 소리를 낮추고, 무너지지 않으면 소리를 키우는 식이었다면 크게 놀라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안의 지시는 시시때때로 달랐다.

마치 자연의 소리를 일일이 뜯어 관찰한 후 단원들에게 지시를 내리듯.

때론 웅장한 빙하의 외침에 악기들을 줄이는가 하면, 또 다른 때에는 소리에 정면으로 도전하듯 강렬한 선율을 주문할 때도 있었다.

마치 대자연과 힘겨루기를 하는 듯한 연주에, 아직도 조지는 그때를 회상하면 손에 땀이 날 지경이었다.

“다음 무대는 어떤 무대가 될지 궁금해요.”

이번에는 지현의 한 마디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한계를 넘어, 매번 새로움을 보여주는 이안이었으니까.

단원들조차 어떤 새로운 곡이 기다리고 있을지 기대하고 있었다.

***

불과 며칠 전에는 두꺼운 패딩을 무장한 채 북극에 갔던 쉐리였건만.

지금 쉐리는 무척이나 정갈한 양복을 입고 심호흡을 하고 있었다.

“준비되었다면 가시죠.”

쉐리가 있던 대기실에 양복차림의 남자가 들어와 말했다.

영국식 영어가 돋보이는 남성의 말투.

쉐리는 지금 런던에 와있었다.

그녀가 런던에 방문한 이유는 하나, 거대 협력 기구의 회의에 참석하기 위함이었다.

OSPAR commission.

오스파 위원회는 대서양 북동지역을 보호하기 위해 미국과 영국, 프랑스 등 15개국이 참여한 협력 기구였다.

1972년 오슬로 협약을 시작으로 해양 폐기물을 비롯해 북극에 지대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단체.

그와 동시에 대서양에 있던 카라모섬을 주관하는 단체이기도 했다.

이번 회의는 붕괴된 카라모섬 재건에 대해 논의하는 자리이자, 어떻게 대중들의 관심을 모을지에 대한 이야기가 오갈 예정이었다.

쉐리는 그린피스의 일원이자, 이번에 공개한 <얼음>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어 발표차 방문한 것이다.

회의장에 들어서자 목제 테이블이 이어진 가운데 각국 책임자들이 보였다.

몇몇은 쉐리의 등장에 사뭇 날카로운 시선을 보냈다.

‘저들에게는 관심이 사라지는 게 도움이 될 테니까.’

쉐리는 덴마크를 비롯한 몇몇 나라의 책임자들이 자신에게 날카로운 시선을 보내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해당 국가들은 북극 인근에 자국의 석유 기업과 어업 단체의 이익을 위해 협정을 약화시키고 싶어 했으니까.

그린피스에서 이안까지 초빙하여 북극에 대한 인지도를 높여버릴 줄은 몰랐던 것이다.

관록이 느껴지는 책임자들의 눈길이었건만.

쉐리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발표를 준비했다.

이미 쉐리에게는 이안과 리히트 오케스트라라는 든든한 우군이 있었으니까.

한편으로는 이들의 코를 납작하게 할 자신이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카라모섬 재건을 위한 대중 관심 촉구와 관련하여 프로젝트를 실시한 그린피스 소속 쉐리 애트우드입니다.”

일상적인 인사를 건넨 후, 쉐리는 곧바로 발표를 이어갔다.

카라모섬이 붕괴된 주된 원인과, 그에 대한 해결책 등 여러 이야기가 오갔다.

하지만, 무엇보다 이번 발표의 하이라이트는 이안에 대한 이야기였다.

“저희 그린피스에서는 인식 개선을 위해 현재 세계에서 가장 인지도가 높은 리히트 오케스트라와 박이안 단장님을 초빙했습니다.”

이미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음에도 한차례 회의장은 술렁거렸다.

이안이 등장했다는 것만으로도 거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일이니까.

그런 거물이 환경 오염과 같은 사회적 문제에 대해 의견을 냈다는 것만으로도 지대한 일이었다.

이안의 영상이 공개된 이후 계속해서 언론에서는 환경에 대한 이야기를 부각시키고 있을 정도.

흡족한 결과에 위원장이 쉐리를 향해 따스한 시선을 보냈다.

“섭외에 어려움을 겪었을 텐데, 쉐리씨가 수고를 많이 해주셨습니다.”

위원장의 말에 다른 위원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각국에서도 이안의 연주를 듣기 위해 많은 러브콜을 보낸 상태였으니까.

개중에는 환경단체로서 보낸 요청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이 모두 반려된 이 시점.

몇몇은 그린피스에서 이안과 함께 작업을 했다는 것에 부러운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찬사를 보냈지만, 쉐리는 위원장의 말에 겸손하게 답했다.

“아닙니다 위원장님. 제가 한 것은 거의 없습니다.”

쉐리의 말은 진심이었다.

촬영본을 매만지면서 쉐리가 한 것은 단 하나밖에 없었으니까.

6대에 이르는 카메라들의 시점을 적절하게 배치하여 리히트의 연주 모습을 더욱 가까이, 실감나게 스크린에 담는 것.

음악에는 그 어떠한 편집도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쉐리는 당당하게 영상을 내놓을 수 있었다.

이미 리히트가 펼친 연주는 편집이 필요 없는 완성 그 자체였으니까.

‘영상을 만지는데도 몇 번이나 소름이 돋던지…’

몇 번이고 들으면 익숙해질 만도 한데.

편집을 하면서도 몇 번이고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이안과 리히트가 만들어내는 선율은 경이로움을 넘어 어떻게 만드는지 이해할 수 없는 지경이니까.

마치 거대한 자연을 하나의 악기처럼 다룬 이안의 행보는 지금도 이해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이미 보셨을 테니 짧게 영상을 확인하시고 다음으로 넘어가겠습니다.”

발표를 위해 1분가량으로 잘라온 영상.

단 1분에 불과한 시간이었지만, 영상이 끝났을 때, 위원회 사람들의 표정은 모두 같았다.

놀라움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표정.

몇몇은 아쉬움을 금치 못한 채 한참 동안이나 영상이 끝난 검은 화면을 바라보았다.

“해당 영상은 온라인상에서 큰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총 조회수는 약 5,700만. 지금도 계속해서 증가하고 있습니다.”

유튜브에 업로드한 지 일주일밖에 지나지 않은 시점.

그린피스 공식 유튜브 페이지에 올라온 영상의 조회수는 5천만을 넘긴 지 오래였다.

게다가 이안과 리히트 오케스트라 공식 홈페이지에 오른 조회수도 그를 상회(上廻)할 정도.

세 계정에 업로드한 영상들의 조회수를 합치면 억 단위 조회수는 가뿐하게 넘겼다.

“게다가 이번 홍보에 힘입어 많은 사람들의 서명 운동에 함께해주고 있습니다.”

영상 업로드와 함께 온라인 서명을 부탁했으니까.

첫날에만 수백만에 달하는 사람들이 온라인 서명을 통해 카라모섬 재건을 응원했다.

벌써 일주일, 그사이 워낙 바빴던 탓에 쉐리도 얼마나 서명했는지 확인하지 못했다.

현황 발표를 위해 일주일 만에 서명 사이트에 접속했는데.

서명 사이트에 적힌 숫자를 본 쉐리는 자신의 두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이… 이게 무슨?!”

쉐리는 자신도 모르게 경악성을 터뜨렸다.

본래 회의나 발표에서는 감정을 최대한 배제한 채 자리를 지키던 쉐리였다.

지금 쉐리가 서 있는 장소는 어디까지나 공식 석상이고, 환경보호를 위한 회의를 진행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지금 쉐리의 눈에 들어온 숫자와 글자들은 도무지 믿을 수 없는 것이었다.

그녀의 입에서 절로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천만…! 천만 명이 카라모섬 재건에 힘을 보태겠다고 서명했답니다!”

리히트 오케스트라의 영상이 공개된 지 단 일주일.

이안과 리히트가 만들어낸 기적이었다.

***

북극에 다녀온 지 2주가량이 지났다.

리히트 오케스트라 공식 유튜브 채널에 올라간 <얼음>의 영상은 1억 조회수를 넘긴 것은 물론, 그린피스 채널에도 그와 비슷한 조회수가 쌓였다.

1억뷰를 달성한 후 쉐리가 흥분에 겨운 목소리로 말했던 것이 생생했다.

북극에서의 연주회를 끝낸 휴가.

나는 집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때, 초인종 소리와 함께 누군가 방문했다.

“어서 오세요 이사장님. 쉬는 날인데 집까지 찾아오시고.”

“재단 일에는 휴일이 없죠.”

리히트 재단의 이사장, 민호가 집을 방문했다.

소파에 앉은 민호는 앉자마자 놀라울 따름이라며 너스레를 떨었다.

“이번 신곡 <얼음>에 대한 반응도 대단합니다.”

미국을 비롯해 전 세계 방송사에서 내게 인터뷰를 요청하고 있다고.

일전에 프로그램을 함께했던 미국 최대의 방송사, NBJ에서도 러브콜은 보내왔다고 말했다.\

댓글 반응도 많았다.

뉴스 기사를 비롯해 유튜브 영상에도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댓글이 달리고 있었다.

└ 이안 그는 천재인가?

└ Just Amazing!

└ 자세히 들어보면 탄산 소리? 그런 것도 들리는데 너무 자연스러워서 그것도 악기 소리인 줄…

└ 웅장한 연주에, 절경을 배경으로 한 영상인데 왜이리 슬프지 ㅠ

└ 저렇게 만드는데 얼마나 많은 노력이 들었을까. 그저 경의를 표합니다 박이안 센세.

댓글에 대한 이야기에 민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게다가, 민호는 여러 환경단체에서도 감사 성명(聲明)을 보내왔다고 알려주었다.

덕분에 북극을 비롯해 환경에 대한 인식이 많이 높아졌다며.

환경단체에서 보낸 감사 성명의 수가 백을 넘겼다고 표현했다.

한참 이야기를 이어가던 민호는 그제야 자신이 온 이유가 떠올랐다는 듯 가지고 온 상자를 내 쪽으로 밀어주었다.

“단장님 앞으로 온 소포입니다.”

너무 크지도, 그렇다고 너무 작지도 않은 크기의 상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영어로 가득한 택배 송장이었다.

단번에 국외에서 온 물건이라는 것을 알아본 나는 천천히 포장을 뜯기 시작했다.

안에는 크리스탈로 된 감사패와 편지 한 통이 동봉되어 있었다.

편지 속에는 오스파 위원회라는 곳에서 보낸 편지가 들어있었다.

리히트 오케스트라 단장, 박이안 선생님께.

귀하의 노고에 감사하다는 말을 시작으로 오스파 위원회도 경의를 표합니다.

<얼음>의 공개 이후 많은 사람들이 환경 파괴에 관심을 갖고, 카라모섬에 대해서도 많은 지지를 보내주고 있습니다.

여느 환경단체와 비슷한 감사 성명.

기부금액이 상당 수 들어와 카라모섬 재건에 더욱 박차를 가할 수 있을 것이란 소식이 더해져 있었다.

하지만, 내가 본 것은 편지의 말미.

지금껏 보지 못한 감사 표현 방식이 적혀 있었다.

“독특한 방법으로 감사를 전하고 싶다네요.”

내 말에 민호가 다소 의아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동안 온갖 곡을 만들었던 내가 ‘독특’하다고 표현한 것에 의문을 품은 듯 보였다.

내가 건넨 편지를 받아든 민호는 곧장 편지를 읽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던 민호의 표정이 말미에 갈수록 경이로움에 가득 찼다.

마지막 문구를 본 민호는 할 말을 잃은 듯 입을 벌린 채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말하지 못하는 그를 대신해 오스파 위원회의 의사를 말했다.

“재건된 카라모섬의 항구 이름을 ‘리히트’로 짓고 싶다고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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