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4화
“단장님, 저희 봉사활동 가려고 하는데 같이 가실래요?”
시작은 아주 사소한 것이었다.
요한나 옆에는 에비게일과 서령, 아람, 루이사, 가넷이 내게 기대 가득한 눈빛을 보냈지.
연아와 덕수궁 연주회를 시작으로 인연을 맺은 보육원.
리히트 재단에서도 지속적인 후원을 진행하고 있었다.
그와 별개로 몇몇 단원들이 보육원에 봉사활동을 다니고 있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이번에는 저도 한 번 가보죠.”
단원들의 기대에 부응하는 것은 물론, 새로운 곡에 대한 영감을 얻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한 선택이었다.
게다가, 어느덧 해피 보육원과의 인연을 쌓은 지도 꽤 되었는데, 한 번도 방문하지 않은 것이 떠올랐다.
연아와 덕수궁 자선 콘서트를 한 후 정식으로 후원하기 시작한 보육원.
하지만, 정작 나는 이안 콩쿨 개최와 해외 축제 공연, 최근 북극 연주까지 하며 한 번도 얼굴을 보인 적이 없었다.
리히트 재단의 모체인 리히트 오케스트라, 그 단장인 내가 얼굴 한 번 비추지 않는 것도 어불성설이리라.
해피 보육원은 탁 트인 마당이 인상적인 곳이었다.
마당에 푸르게 자란 잔디와 한편에 마련된 커다란 놀이터 구조물.
가까이 가기만 해도 아이들이 재잘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정문으로 들어서자 마당에서 아이를 돌보던 중년의 여성이 일행을 바라보았다.
해피 보육원의 원장인 함은혜였다.
연아와 청아를 손수 키운 사람이자, 연아의 재능을 일찍이 알아챈 사람이기도 했다.
“어머 요한나씨, 오랜만이에요.”
“안녕하셨어요 원장님? 잘 지내셨죠? 오늘은 단장님도 함께 왔어요.”
나의 방문에 은혜가 무척이나 반가운 듯 밝은 미소를 띠었다.
큰 도움을 입고 있는데 한 번 찾아가지 않아서 죄송하다며.
리히트 재단의 후원 덕에 아이들이 잘 커가고 있다며 감사 인사를 전했다.
내가 은혜와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단원들은 원생들을 향해 다가갔다.
“얘들아~ 누나들 왔다!”
아람의 활기찬 외침에 아이들의 시선이 일제히 단원들에게 향했다.
그러자 단원들을 알아본 듯 아이들이 저마다 단원들을 향해 빠르게 다가갔다.
이전부터 많이 왔던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단원들 또한 자연스럽게 아이들과 섞여 놀이를 시작했다.
잠깐 이런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찰나.
내게도 익숙한 두 사람이 다가왔다.
“안녕하셨어요 단장님!”
여섯 손가락 피아니스트, 연아였다.
내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자신도 보육원을 찾았다고.
옆에 있던 청아도 애써 수화로 인사를 전했다.
“북극에서 연주하신 영상은 진짜 엄청났어요.”
빙산이 무너지는 소리와, 소리를 아우르듯 나아가는 리히트의 음악이 매력적이었다며.
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장대한 자연을 맞닥뜨리고 있는 것 같다고 덧붙였다.
선율이 좋아서 몇 번이고 감상했다고.
청아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고 덧붙였다.
연아는 청아가 얼마나 <얼음>을 좋아하는지 모른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매일 1시간 넘게 <얼음>을 틀어놓은 스피커를 껴안고 있을 지경이라고 덧붙였다.
나는 말로 고마움을 표시하는 대신, 옅은 미소를 머금은 채 청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청아 또한 내 뜻을 알아차린 것인지 기분 미소를 보여주었다.
“단장님! 어서 들어오세요!”
아람의 목소리에 이안은 고개를 들어 단원들을 바라보았다.
이미 아이들과 함께 뛰놀고 있는 단원들.
게다가 아이들은 아직 내가 방문한 것이 조금은 신기한 듯 오묘한 표정을 지은 채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자연스럽게 청아의 손을 잡은 채, 아이들을 향해 다가갔다.
***
가넷에게 아이를 보는 것은 무척 쉬운 일이었다.
부모와 친척들이 고기잡이를 나가면 가넷은 아이들을 돌보는 일을 맡았으니까.
언어가 달라 직접 말을 할 순 없었지만, 가넷은 곧장 보육원 아이들을 잘 다뤘다.
아이들의 행동 패턴은 한국이나 섬마을이나 비슷했으니까.
‘이러니까 꼭 옛날로 돌아간 것 같네.’
가넷은 아이들을 보며 뭉클한 감성에 젖었다.
모래사장을 뛰놀며 공놀이를 하는 아이들, 바닷물에 모래를 더해 모래성을 짓던 아이들, 병정놀이랍시고 마구 뛰어다니던 것까지.
섬에서 있던 행복한 일들이 자꾸만 그녀의 머리에 스쳤다.
지금은 수몰되어 존재하지 않고, 카라모섬 또한 붕괴되며 흐려진 추억이건만.
그 흐려진 추억을 한국에서 회복하고 있었다.
‘이렇게라도 보답해야지.’
가넷의 가슴 한편에는 여전히 이안에 대한 감사함이 남아있었다.
심지어 한국에 온 가넷의 부모가 난민 신청 절차를 밟게 해준 것도 이안이었으니까.
재단 고문 변호사의 도움으로 가넷은 한국 국적을 가진 채 활동할 수 있었다.
국적을 떠나, 안전한 곳에서 부모와 함께 지낼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감명스러웠으니.
이안을 돕고 싶어 무작정 봉사행을 선택한 것도 있었다.
그러나 분명 이안을 도와주러 왔는데.
어느덧 도움을 받고 있는 것은 가넷 쪽이었다.
‘얼마만에 이런 편안함을 느껴보는 거지?’
편안.
모든 것이 편하고, 걱정이 없는 상태.
지금 가넷이 느끼는 감정이 바로 그것이었다.
주변에서 아이들의 재잘거림이 끝도 없이 들리고, 아이들이 자신과 놀자고 팔을 잡아끄는데.
오히려 그 속에서 가넷은 편안함을 느끼고 있었다.
넓은 모래사장은 아니지만, 모래 상자 안에서 자신의 특기를 살려 모래성을 만들고.
아이들은 커다랗게 지어진 모래성이 감탄하며 박수를 친다.
섬에서 아이들을 놀아줄 때 많이 했던 공놀이를 하며 아이들은 울상을 짓기도, 고함에 가까운 환호성을 지른다.
그렇게 초록빛 잔디밭을 정신없이 뛰놀던 아이들이 점심을 먹을 때면 입에 묻히기도, 부끄러운 듯 혼자 닦기도 한다.
밥을 먹었으니 더욱 신나게 놀자는 아이들이 있는 반면, 점심을 먹을 때부터 눈을 끔뻑이며 잠을 청하는 아이들도 있다.
분명 아이를 하나하나 챙기는 일은 단순한 돌보기가 아닌 노동에 가까운 일인데.
오히려 가넷은 자신이 아이들에게서 에너지를 얻어가는 오묘한 기분을 느꼈다.
게다가.
‘단장님의 저런 모습은 또 처음이네.’
가넷은 이안을 바라보며 남몰래 웃음 지었다.
그동안 이안이 해준 것만 생각하면 이안은 가넷에게 어마어마한 존재였으니까.
음악계의 젊은 거장으로 통하는 사람이자, 재단을 운용할 정도인 거대 오케스트라를 이끄는 단장.
그 어떤 것이든 전지적일 것이라 생각했던 이안인데.
아이들과 함께 있는 모습은 영락없는 20대 청년 같았다.
보통 23살 청년이 아이에 대한 잘 아는 경우는 드물었으니까.
게다가 이안의 경우, 사촌들 사이에서도 막내였던 지라 어린아이를 다루는데 더욱 익숙지 않았다.
그럴 때마다 가넷은 조심스레 이안의 옆에 다가가 그를 도왔다.
“아이들은 질투심이 많을 때가 많아요. 하나하나 신경 쓰는 게 무척 어려우실 거예요.”
가넷이 울먹거리는 아이 하나를 안은 채 말했다.
그녀가 아이들을 돌볼 때도 이런 경우가 많았으니까.
뭐든 다른 아이들보다 잘해서 내버려 뒀던 것을 자신에게 관심이 없다고 오해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이미 아이들을 다뤄본 경험이 많은 가넷은 손쉽게 아이들을 다뤘다.
그런 가넷의 모습에 이안은 짧게 물었다.
“가넷씨는 아이들과 많이 지내본 모양이네요.”
“... 네, 그렇죠.”
이안의 질문에 가넷은 잠깐 멈칫하곤 긍정표를 더했다.
이미 머릿속에서는 아이들과 함께했던 기억들이 많았지만, 차마 가넷은 모든 이야기를 꺼낼 자신이 없었다.
만약 이야기를 이어 나간다면 왈칵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으니까.
애써 말을 아끼고 있던 가넷을 향해 이안이 어깨를 토닥였다.
말하지 않아도 모든 것을 이미 다 알고 있다는 이안이 태도에.
가넷은 그저 뭉클한 미소로 화답했다.
***
처음 이안이 보육원에 가려고 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연아는 차마 고마운 마음을 이루 표현할 수 없었다.
이미 덕수궁 무대를 통해 연아에 대해서는 물론, 장애인, 아동 복지에 대한 관심이 크게 늘었으니까.
그런데다 봉사활동까지 오겠다는 말에 한편으로 존경스러울 정도였다.
게다가.
“빈손으로 올 순 없으니까요.”
이안을 비롯한 리히트 단원이 가져온 물건들.
다름 아닌 악기들이었다.
트라이앵글이나 캐스터네츠와 같은 간단한 악기를 비롯해, 멜로디언과 실로폰 등 어린아이도 비교적 쉽게 연주할 수 있는 악기도 포함되어 있었다.
세계를 호령하는 오케스트라답게, 아이들을 위한 선물도 악기였다.
게다가, 리히트 오케스트라는 단순히 악기를 선물하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
아이들이 제대로 연주할 수 있도록.
단원들은 아이의 눈높이에 맞춰 악기에 대해 차근차근 설명했다.
“이건 이렇게 소리를 내는 거야.”
“강아지 만지듯이 살살! 실로폰도 너무 세게 치면 ‘아야’해.”
1기 때부터 한국에 있던 요한나와 루이사는 유창한 한국어로 아이들에게 악기를 가르쳐주었다.
특히 요한나는 본래 빈 필에서도 음악을 가르쳤던 경험을 살렸다.
가르치는 것에 큰 두각을 드러내는 것은 다른 단원들도 마찬가지였다.
아직 한국어에 서툰 가넷과 에비게일은 서령과 아람의 도움을 토대로 아이들에게 연주를 가르쳐주었다.
음악계의 거장이라고 불리는 이안 또한 한 아이를 품에 안은 채 멜로디언을 가르쳐주고 있었다.
연아는 악기를 가지고 놀며 웃는 아이들을 보며 이루 말할 수 없는 고마움을 느꼈다.
그럼 고마움과 함께 묘한 존경심이 들 정도였다.
‘무대 위에서 본 것과는 또 다른 모습이네.’
연아는 한편으로 신비한 감정을 느꼈다.
무대에서는 그토록 카리스마 있는 리히트 단원이었는데.
지금 단원들이 보여주는 모습은 거리낌 하나 없는 옆집 언니, 동생 같았다.
자신도 얼핏 마음을 내려놓을 수 있을 것 같은 친근함.
혹 음악에 대해서 날카롭게 피드백하진 않을까 걱정했던 것은 어느덧 사라진 지 오래였다.
연아가 한 발치 떨어져서 단원들을 쳐다보던 그때.
그녀는 이안의 모습에서 사뭇 다른 것을 보았다.
방금 전만 해도 이안의 표정은 편안하게 풀려있었는데.
지금은 무언가 고뇌하는 듯 진지한 기색이 담겼으니까.
혹 무슨 일이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마음에.
연아는 곧바로 이안에게 다가갔다.
“무슨 문제 있으세요?”
걱정스레 묻는 질문에, 이안은 표정을 조금 풀고 연아를 맞이했다.
조금 풀렸지만, 연아의 표정은 여전히 묘한 의구심이 떠 있었다.
이안이 뭐라 표현하기도 전에.
멜로디언 소리가 두 사람 사이에서 터져 나왔다.
빰빰 빰빰 빰빰빰빰
이안의 품에 있던 아이, 윤현민이 내는 소리였다.
갓난아이 때 해피 보육원에 들어와 벌써 9살이 된 사내아이.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현민의 멜로디언 소리에 연아는 순간 자신이 잘못 들었나 의심했으니까.
“현민아?”
빰빰빰.
현민은 연아에 말에 대답하는 대신 멜로디언에 바람을 불어넣으며 건반을 눌렀다.
연이어 나오는 소리에 현민은 개구진 표정을 지으며 몸을 움직였다.
두 번째 연주까지 들었을 때, 연아는 이안이 왜 그런 표정을 지었는지 알 수 있었다.
현민이 낸 소리는 방금 연아가 말한 소리를 그대로 모방하고 있었으니까.
사람의 목소리에도 음계가 있다.
그걸 굳이 표현하지 않을 뿐이지.
사람의 목소리는 하나의 소리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미묘하거나, 두 개 이상의 음계가 만들어내는 미묘한 소리.
그것을 단박에 찾아내는 것은 연아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연아가 설마 하는 눈빛으로 이안을 쳐다봤다.
연아의 뜻을 읽은 듯, 이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한 마디를 건넸다.
“음감이 남다른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