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시작부터 천재 피아니스트-235화 (235/250)

235화

몇 차례 들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아이의 음감이 상당하다는 것을.

겉보기엔 그저 멍한 표정이었지만, 자세히 보면 뭔가에 집중하는 듯 보였다.

그리고 이내 확신이 선 듯.

멜로디언을 바라보던 현민은 거침없이 건반을 눌렀다.

‘그래도 이런 소리까지 나타내는 건 재능, 그 이상인데.’

현민의 재능은 다른 악기의 소리를 모방하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

아이들이 걷는 소리, 단원들이 웃는 소리, 은혜가 말하는 소리까지.

일상에서 계이름으로 표현하지 않는 소리까지 계이름으로 바꿔나가고 있었다.

문득 과거의 내가 떠올랐다.

어렸을 적, 처음 피아노를 배울 때도 손에 힘을 어떻게 주느냐에 따라 선율이 달라진다는 것을 몰랐으니까.

그 세기 차이를 몰라 무작정 건반을 세게 누를 때도 있었다.

연주곡에 담긴 의미와 의도를 찾기보단, 음표를 따라 하기 바빴던 어릴 적.

게다가 전생을 떠올린 초창기에도 손가락이 마음처럼 움직이지 않아 연주가 완전하지 않았다.

현민의 연주는 마치 그런 것 같았다.

머릿속에는 어느 정도 계산이 들어있지만, 지식과 정확한 조절 능력이 없는.

딱 어린아이이기 때문에 일어나는 오류들이었다.

하지만 그것을 감안하고 보아도 현민의 능력은 예상 밖이었다.

아직 손가락 힘을 조절하는 게 서툴긴 해도, 언어 특유의 악센트와 음을 정확히 집어냈다.

나는 행여나 하는 마음에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파일을 뒤지던 나는 음원 하나를 재생시켰다.

“현민아, 이거 한번 들어볼래?”

휴대폰으로 재생시킨 것은 최근 작곡한 <얼음>의 오케스트라 버전이었다.

쉐리가 영상에서 음원을 추출하여 건넨 것인데.

현민은 내 휴대폰을 빤히 바라보다가 여러 번 고개를 갸웃거렸다.

몇 차례 음악을 듣던 현민이 멜로디언에 손가락을 내딛기 시작했다.

‘멜로디를 꽤 찾아내는데?’

얼핏 들으면 뚱땅거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현민이 짚은 건반은 정확했다.

두 개의 음표가 화음을 펼치는 것을 비롯해 음계의 구성까지.

비록 한 손으로 연주하는 것이지만, 음악을 듣고 그 음표를 찾아낸 것만으로도 큰 점수를 줄 수 있었다.

게다가, 놀라운 점은 하나 더 있었다.

‘피아노 선율을 대부분 캐치해냈어.’

내가 튼 <얼음>은 모든 오케스트라의 소리가 모두 하나로 터져 나오는 오케스트라 버전의 곡.

그 속에서 특정 악기만을 따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특히 후반부에 들어갈수록 여러 악기들이 얽히는 <얼음>의 특성을 고려하면, 제아무리 존재감이 큰 피아노도 흐릿해지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현민은 피아노 파트, 그것도 지현이 맡았던 고음 파트를 찾아내는 데 성공했다.

곡에서 특정 악기를 찾아내고, 그 멜로디 전체를 찾아내는 것.

꽤 뛰어난 음감으로도 하기 힘든 일이었다.

신묘한 광경에 나는 가까이서 지켜보고 있던 도우미 선생님에게 물었다.

“현민이가 음악 교육을 받은 적이 있나요?”

“아뇨. 갓난아이일 때 음악을 들려준 적은 있지만, 아직 어리기도 하고, 별도로 교육을 하진 않았어요.”

분명 교육을 하지 않았다고 했는데.

현민은 내가 알려준 계이름만으로 여러 음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심지어 몇 번 두 개 이상의 건반을 눌러 화음을 만들더니, 지금은 본능적으로 어울리는 화음을 찾듯 소리를 만들기까지.

문득 북한에서 보았던 피아노 신동, 만복이 떠올랐다.

‘만약 현민이도 교육을 받는다면…’

북한에서는 만복에게 지원을 아끼지 않다고 했으니까.

게다가 현향란 단장이라는 좋은 선생까지 있는 상태.

그러나 현민의 연주를 바라보던 나는 이내 만복의 수준을 넘길 수 있을 거란 확신이 들었다.

현민이 보여주는 음감은 보통 사람들은 노력해도 다다를 수 없는 경지였으니까.

이미 내 머릿속에는 하나의 결심이 선 상태.

그 결심을 곧바로 실행에 옮기고자.

나는 도우미 선생님에게 한 가지 질문을 던졌다.

“원장님과 얘기를 좀 나누고 싶은데, 어디 계신가요?”

***

은혜는 원장실에 찾아온 이안에게 루이보스 차 한 잔을 내밀었다.

연신 이것밖에 드리지 못해서 죄송하다며.

하지만, 이안은 그런 차 한 잔에도 편안한 표정을 한 채 괜찮다고 덧붙였다.

차 한 모금을 마신 이안이 부드럽게 말했다.

“제가 더 일찍 찾아뵀어야 했는데. 조금 늦었죠?”

“아휴 아닙니다 단장님. 이렇게 오신 것만으로도 감사하죠.”

이안의 말에 은혜는 허리 숙여 다시금 감사를 전했다.

해피 보육원은 이안 덕에 회생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니까.

모든 보육원이 그렇듯, 대부분 적자에 시달리기 마련이다.

국가에서 지원을 해준다지만, 아이들이 커가면서 필요해지는 것은 국가의 지원을 훨씬 웃돌 때가 많으니까.

해피 보육원은 연아 덕에 조금 나은 편이었지만, 그럼에도 어려운 것은 매한가지였다.

이곳은 매년 수십 명에 달하는 아이들이 베이비 박스에 담겨 들어오는 곳이었으니까.

교회를 모태로 둔 해피 보육원에는 문 앞에 아이들을 놔두고 가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간혹 엄동설한의 겨울이나, 폭염이 심한 여름에는 그런 아이들이 길바닥에서 사망하는 경우도 잦았던 것.

그래서 만든 것이 아이들을 보다 안전하게 둘 수 있는 ‘베이비 박스’였다.

되레 베이비 박스가 만들어지고 난 후 보육원에 들어오는 아이가 늘었지만, 그럼에도 사명감을 갖고 아이들을 돌보는 것이 은혜에게 내려진 책무라고 생각했다.

“재단의 도움으로 얼마나 많이 사정이 좋아졌는지 몰라요. 이번 자리를 빌려 다시 한번 감사합니다.”

은혜는 허리 숙여 인사를 건넸다.

이는 재단에 대한 고마움도 있었지만, 이안에 대한 고마움도 있었다.

간혹 해피 보육원에도 손님들이 찾아오는 경우가 있다.

연아의 유명세에 이어 찾아온 사람을 비롯해 연아의 연주에 감흥을 받았다며 찾아오는 유명인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유명인 중 일부는 결코 혼자 오는 경우가 없었다.

“화면 잘 나와요?”

어떤 이는 대놓고 카메라맨에게 묻지 않았던가.

아이와 즐겁게 노는 듯 딱 붙은 채로 사진을 찍어놓고, 촬영이 끝나면 표정을 싹 바꾼 채 등을 돌리는 사람들.

게다가, 마음을 다해서 봉사활동을 하는 것과 시간을 채우기 위해서 활동을 하는 것 정도는 간파할 수 있었다.

대부분 사람들이 전심으로 봉사활동을 하는 경우는 드문데.

이안과 리히트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봉사 자체를 즐기는 듯하지 않았던가.

경계심이 많은 아이들조차 그 빗장을 풀고 해맑게 다닐 정도의 모습.

그 모습에 은혜는 묘한 감동까지 느낄 정도였다.

한창 재단과 후원 등의 이야기가 오가던 사이.

이안이 천천히 본론을 꺼내기 시작했다.

“현민이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

이안의 말에 은혜는 차근히 현민을 처음 만났을 때를 떠올렸다.

동장군이 찾아왔다는 말이 절로 떠오를 정도로 추웠던 어느 겨울.

현민은 베이비 박스에서 구조된 여러 아이들 중 하나였다.

그 흔한 보자기 하나 없이 놓인 아이에, 조금이라도 늦게 구출했다면 생명이 위험할 뻔한 상태.

은혜는 그때를 회상하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끼쳤다.

팔뚝보다 짧은 아이도 결국 생명일 텐데.

이야기를 이어가던 은혜가 안타까운 한숨을 쉬었다.

“하늘도 참 무심하시죠. 아주 사소한 것이니 아이의 생일만이라도 적어달라고 했는데. 그렇게 두다니.”

언제 태어났는지도 모르는 아이.

구조된 날을 다시 태어났다고 하며 생일로 잡은 아이였다.

건강히 자라난 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갑작스런 이안의 질문에 은혜는 한편으로 긴장하고 있었다.

그런 은혜에게 이안은 담담하게 한 마디를 내뱉었다.

“재단 후원과 별개로, 제 이름으로 정식 후원 절차를 밟고 싶습니다.”

이안의 선언에 은혜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미 리히트 재단에서 막대한 후원금을 보육원에 주고 있지 않은가.

그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하다고 생각했는데.

개인 후원까지 진행하겠다는 의사를 밝힌 것이다.

세계적인 거장이라고 불리는 이안이 개인 후원을 하겠다는 말.

그 말의 뜻을 알아차린 은혜가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현민이가 음악적으로 재능이 뛰어난 것 같습니다.”

이안의 입에서 믿을 수 없는 이야기들이 나왔다.

뛰어난 음감을 갖춘 것은 물론, 그 음감이 워낙 출중해서 모든 소리를 음악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는 말.

처음 잡은 악기를 단박에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는 말까지.

은혜는 이안의 설명에 감탄하면서도 한편으로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조금 더 신경을 써주었다면 더욱 만발(滿發)할 수 있었던 재능이라는 것이니까.

그동안 돌봐온 사람으로서 씁쓸했다.

‘그러면 혹시…’

은혜는 조심스레 이안의 다음 말을 예상했다.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은혜의 숨결이 경이로움으로 가득 차는 일이었다.

세계적인 젊은 거장이라고 불리는 이안이, 국제적으로도 인정 받는 오케스트라의 수장, 이안이.

“제가 그 재능을 한번 키워보고 싶습니다.”

처음 누군가를 집중적으로 키워보겠다는 의사를 밝힌 것이다.

***

단원들이 보육원을 나왔을 때.

어느덧 시간은 저녁을 넘어가고 있었다.

“애들도 정말 대단해. 어떻게 지치질 않냐.”

“그러니까 애들이죠. 한창 날뛸 때잖아요.”

“그래도 같이 있으니까 괜히 어려진 것 같고 그러지 않아요?”

혈기 왕성한 아이들과 놀아주느라 진을 모두 뺀 단원들이건만.

각자의 얼굴에는 환한 미소가 떠 있었다.

게다가 그들의 이야기는 곧장 음악으로 넘어갔다.

“애들 생각보다 악기 잘 다루더라? 쉬운 악기라서 그런가?”

“언니 콩깍지 씐 거 아니에요? 프로답게 봐야죠! 프로답게!”

“너는 10살배기 애들한테 그러고 싶니?”

단원들은 농담과 진담을 오가면서 오늘 일을 떠올렸다.

어떤 아이가 악기에 재능을 보인다는 말에, 어떤 아이가 참 귀엽다든지.

소탈한 이야기가 오갔다.

그때, 무언가 생각하는 듯 아무 말 않던 이안을 향해 요한나가 물었다.

“단장님은 아까 원장님이랑 길게 이야기 나누시는 것 같던데. 무슨 일 있으신 건 아니죠?”

요한나가 걱정스런 질문 한 마디를 건넸다.

혹 주말에 봉사활동을 와서 업무 얘기를 한 것은 아닐까.

다른 단원들도 의문 가득한 표정으로 이안을 향해 눈길을 돌렸다.

하지만, 걱정과 달리 이안의 표정은 편안했다.

“일이 있는 건 아닙니다. 그저 관심이 있는 아이가 생겨서요.”

“네?!”

이안의 발언에 단원들이 더욱 궁금한 표정을 했다.

지금껏 음악 외에 이안이 먼저 무언가에 관심이 간다든가, 무언가 하고 싶다고 이야기한 적은 없었으니까.

게다가 아이에 관심이 간다는 말.

부연 설명이 없는 말이었지만, 단원 모두 이 사안이 음악과 관련된 것임을 확신했다.

“미래를 기대해도 될 아이더라고요.”

담담하게 말하는 이안과 달리, 단원들은 반쯤 경악스런 표정을 지었다.

‘단장님이 기대하신다고?!’

지금껏 이안이 무대를 앞두고 기대된다라고 한 적이 있었던가.

명망 높은 대회들과 연주회에서도 이안은 단 한 번도 ‘기대’라는 단어를 언급한 적이 없었다.

그저 자신이 원하는 음악을 펼치고, 자신의 소임을 다할 뿐.

기대하는 대신 미래를 괄목하는 것 같았던 누군가를 기대한다는 말에 그 대상이 누구일지 궁금증이 샘솟았다.

아람이 한창 머릿속에서 그 아이가 누굴지 떠올리던 찰나.

그녀의 휴대폰이 시끄럽게 울렸다.

전화벨에 아람은 다시금 정신을 차리고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화면에 떠오른 이름에 아름이 한 마디를 덧붙였다.

“지현 언니다!”

오늘 봉사활동을 제안했지만, 일이 있다고 하며 거절했던 지현이었다.

기수 차이는 있지만, 나이도 별로 차이 나지 않는 데다 아람 특유의 서글한 성격으로 둘은 금세 친해졌다.

사소한 이야기라도 전화를 하며 나눌 정도.

아람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그런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뭐?!”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온 지현의 이야기에 아람의 눈이 동그래졌다.

비명에 가까운 목소리에 단원을 비롯해 이안도 아람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여전히 수화기를 붙잡은 아람은 오묘한 표정을 한 채 지현의 이야기를 덜었다.

당당한 듯하면서 한편으로는 소심하고.

애써 낯을 가리지 않으려고 하는 착한 사람.

그런 사람이…

“약혼식을 한다고?!”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