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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부터 천재 피아니스트-236화 (236/250)

236화

미국 워싱턴 D.C.에 위치한 사무실 한편의 분위기가 무겁다.

미국 항공 우주국, 나사.

회의실에서는 새로운 프로젝트에 대한 회의가 한창이었다.

Space Traveler Project.

일명, ‘우주 여행자’라고 불리는 거대 프로젝트.

최근 나사에서 진행하고 있는 우주 탐사 프로젝트 중 하나였다.

이전에 쏘아 올린 성간 탐사선, 보이저 1호와 2호가 우주를 탐사하고 있지만, 이번 탐사선은 차원이 달랐다.

태양계 외부를 탐사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진 ‘트래블러 1호’.

초속 90km에 이전에 쏘아 올린 보이저 2호보다 무려 5배나 빠른 속도였다.

어쩌면 지금 확인된 것보다 그 이상의 우주를 볼 수 있다는 생각에, 나사에서도 심혈을 기울이고 있었다.

“빠르면 이번 주에 발사 시험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지난번에 문제로 거론됐던 부분은 개선되었습니까?”

“예. 보다 유연성이 좋은 부품으로 교체하여…”

직젝이 진지한 표정으로 질문을 던졌다.

직젝 워커.

그는 나사 내 최고 연구원 중 하나이자, 이번 우주 여행자 프로젝트에 핵심 책임자였다.

근 10년 내로 쏘아 올린 인공위성과 유인 우주선 발사에 모두 손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인물.

특히, 처음 쏘아 올린 성간 우주선, 보이저 1호가 곧 수명이 다하는 탓에 이번 프로젝트는 무척이나 중요했다.

게다가, 이번 프로젝트에는 하나의 미션이 더 걸려있었다.

“‘지구의 속삭임’은 얼마나 진행되었습니까?”

“현재 70%가량 준비가 완료되었습니다.”

지구의 속삭임(Murmur of Earth).

트래블러 1호가 머나먼 성간을 넘어 외계 생명체와 접촉했을 때를 대비하여 만든 미션이었다.

지구의 위치와 정보, 음악 등을 담은 골든 디스크.

보이저 1호를 쏘아 올릴 때도 진행한 미션이었다.

하지만, 이번 미션에서는 이전과 비슷하되, 안에 들어갈 내용을 완전히 새롭게 개편할 예정이었다.

이전 보이저 1호처럼 전 세계 언어로 녹음된 ‘안녕하세요’를 이어,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중 일부, 2진법으로 구성한 모나리자, 그 이외에 수많은 것들이 제시되어 있었다.

하지만, 리스트 중 마지막 한 칸.

마치 무언가를 염두에 두고 비워둔 것처럼 한 칸이 비어있었다.

“소이? 여기 한 칸은 왜 비어있죠?”

이번 지구의 속삭임 담당자, 소이 플라워.

그는 직젝과 오랫동안 호흡을 맞춘 과학자였다.

소이 또한 직젝과 함께 현재 나사를 이끄는 주요 인물 중 하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 소이는 매사 철두철미한 성격으로 유명했는데.

서류에 텅 빈 항목을 만들 사람이 아니었다.

“사실, 넣고 싶은 음악이 있는데. 아직 허가를 받지 못했습니다.”

“어떤 곡입니까?”

“리히트 오케스트라의 곡입니다.”

리히트 오케스트라라는 말에 회의실에 있던 다른 과학자들이 일제히 술렁였다.

음악계를 주름잡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이안이 이끄는 리히트 오케스트라.

그들의 곡을 넣고 싶다는 말에 다른 연구원들도 절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대중과 전문가 모두가 인정하는 젊은 거장의 곡인 만큼, 지구를 대표할 곡으로 적절하다는 판단이었다.

직젝 또한 소이의 말에 차근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리 시간이 넉넉하진 않았다.

금속판에 모든 이야기를 담는 것은 물론, 리히트의 곡을 금속판에 담으려면 일정한 변화를 거쳐야 했으니까.

그 과정까지 하려면 최대한 빨리 허락을 받아내야 했다.

“아직 기한이 좀 남았죠?”

직젝이 고심하다 한마디를 내려놓았다.

일정을 체크하던 연구원이 스케줄표를 보곤 고개를 끄덕였다.

확인을 마친 직젝은 소이를 향해 한 마디를 던졌다.

“많이 바쁘시면 직접 찾아가 봐야죠.”

동양에는 삼고초려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직젝의 말에 소이뿐만 아니라 연구원 전체의 표정에 묘한 기색이 감돌았다.

***

서천그룹이 소유한 고급 호텔.

호텔 내 연회장에 리히트 단원들이 가득 모였다.

평소엔 이안이 주축이 되어 이런 자리를 가졌는데.

오늘 단원들을 모은 사람은 다름 아닌 지현이었다.

“사실, 오늘 여러분께 할 말이 있어서 이렇게 모으게 됐어요.”

지현이 조금 부끄러운 듯 웃으며 말했다.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지현에게 향했을 때쯤, 지현은 자신이 할 말을 털어놓았다.

“다음 주에 제가 약혼식을 열게 되었습니다.”

지현의 말에 단원들의 반응은 반반이었다.

축하한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벌써 약혼 소식에 놀란 사람들도 있었다.

지현은 자리를 일일이 돌아다니며 초대장을 나눠주었다.

와서 식사 한 끼하고 가라고.

소탈하게 얘기하는 지현에게 단원들을 저마다 방식으로 축하 인사를 건넸다.

축하의 포옹을 건네는가 하면, 악수를 하거나, 어깨를 토닥이는 사람도 있었다.

그중에는 아람 같은 짓궂은 사람도 있었다.

“어떤 사람이래~ 이런 지현 언니를 확! 잡아간 사람이?”

익살스러운 아람의 말투에 주변에 있던 단원들도 함께 웃음을 터뜨렸다.

지현 또한 작게 웃으며 몇 마디를 건넸다.

“유학 때 만난 사람이야. 되게 좋은 사람이고.”

음악에 대해 심기일전하고 유학을 갔던 지현에게 큰 버팀목이 되어준 사람.

상대는 지현과 사뭇 비슷했다.

재벌이라는 거대한 집안의 기대를 한몸에 받는 부담감.

못하면 안 된다는 강박에 시달렸다는 고백에 지현 또한 공감했다.

이미 자신도 많이 경험해봤던 사람이니까.

그런 상대에게 지현은 과거 이안이 했던 말을 고스란히 전해주었다.

“연주에서 그치지 말고, 너라면 어떤 느낌을 표현하고 싶은지 떠올려봐.”

콩쿨을 앞두고 이안이 해줬던 조언.

그 생각을 담은 덕에 매번 하던 2위를 했음에도 한 점의 부끄럼도 느끼지 않았었지.

그런 한때의 추억을 이야기하며, 음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지금의 약혼까지 하게 되었다.

친구이자, 스승 같은 이안에게 약혼식 초대장을 건네는 것이 미묘했다.

“축하한다. 서지현. 꼭 갈게.”

이안이 가벼운 미소와 함께 초대장을 받아들 곤 악수를 청했다.

지현 또한 고맙다는 말과 함께 이안의 손을 잡았다.

악수를 하는 지현의 손에 묘하게 힘이 들어갔다.

어찌 보면 이 모든 일이 가능하게 된 것도 모두 이안 덕분이었으니까.

어머니의 닦달에 음악을 놓으려 했던 것을 잡게 해준 것도 이안이었고.

기계처럼 악보를 재현하기에 바빴던 자신의 연주를 바로 잡아준 것도 이안이었다.

만약 이안이 없었다면.

지현은 심기일전해서 피아노를 잡을 일도 없었을 테고, 그렇다면 지금 이 자리, 그 사람을 만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 이안에게 어떤 말을 해주어야 할까.

어떤 말이 가장 고마운 마음을 표할 수 있을까 생각했을 때.

지현은 곧바로 하나의 말을 떠올렸다.

“약혼해도 오케스트라에서 쭉 피아노를 연주할게.”

지현이 강한 어조로 말했다.

약혼을 한다고 해서 오케스트라를 쉬거나 나갈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지현에게는 오케스트라 단원으로서 지금의 삶이 가장 행복했으니까.

게다가, 이안에게는 그 어떠한 답례품보다 오케스트라 단원으로서 제 할 일을 하는 것이 가장 좋은 답례가 될 것이라는 생각도 있었다.

그저 자신을 뽑아준 오케스트라에서 제대로 된 실력을 펼치는 것.

그것이 이안이 해준 것에 대한 보답이자, 음악가로서 해야 하는 일이라 생각했다.

“그래.”

이안의 답은 무척 짧았지만, 지현은 그 속에서 많은 것을 볼 수 있었다.

음악가로서, 친구로서, 약혼을 앞둔 신부로서.

온전히 지현 그대로를 인정하고 받아들여 주는 면모에서 지현은 이안이 왜 거장인지 다시금 깨달을 수 있었다.

***

약혼식을 축하하는 자리가 마무리되었을 때.

이미 시간은 늦은 저녁을 향하고 있었다.

식사를 마친 단원들이 모두 뿔뿔이 흩어지려던 찰나.

에비게일이 내게 물었다.

“단장님, 아까 체임버 홀에 가신다고 하셨죠?”

에비게일의 질문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북극 연주회에 이어 봉사활동, 지현의 약혼 소식까지 겹쳐 검토하지 못한 제안들이 산더미니까.

이를 확인하기 위해 체임버홀 사무실에 갈 예정이었다.

“그럼 저도 같이 갈 수 있을까요? 악보를 두고 와서요.”

“네, 그러시죠.”

내 말에 에비게일은 감사하다는 말과 함께 차에 올라탔다.

차량이 출발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나는 대뜸 에비게일에게 물었다.

“할 말이 뭔가요?”

“... 어떻게 아셨어요?”

“에비게일씨는 악보가 없다고 해서 연주를 못 하는 사람이 아니잖아요.”

평소 에비게일은 암보(暗譜)를 기본으로 하는 사람이었으니까.

연주회 때도 연주보다는 눈을 감은 채 감상을 찾던 에비게일이 대뜸 악보를 가지러 간다니.

그 탓에 그녀가 무언가 할 말이 있어서 같이 가자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에비게일은 사뭇 놀란 표정을 짓다가 너털웃음을 지었다.

“단장님 앞에서는 숨길 수 없네요.”

에비게일은 인정하듯 털어놓으며 자연스레 말을 이어갔다.

“저희 지현씨를 위한 축주(祝奏)를 하는 건 어때요?”

많은 결혼식에서 축가를 하듯, 우리는 축하 연주를 준비해보자고.

리히트 오케스트라 식구로서 이런 축하행사에 가만히 있을 순 없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이미 몇몇 단원들에게 귀띔을 해두었다는 말까지 덧붙였다.

에비게일의 제안에 나 또한 고개를 끄덕였다.

“나쁘지 않네요. 이벤트로도 좋을 테고.”

내 긍정표에 에비게일은 몇 가지 이야기를 더했다.

어떤 곡이 좋겠느냐는 질문은 물론, 서프라이즈로 하는 것은 어떻냐는 제안까지.

아직 일주일이나 남은 약혼식을 마치 하루 앞둔 듯 들뜬 모습을 보였다.

한편으로 나는 과거부터 보았던 지현을 떠올렸다.

‘예전에는 저렇게 말도 못 했을 텐데.’

내가 처음 피아노 콩쿨을 나갔을 때 만났던 지현이 떠올랐다.

그때의 지현은 앞머리로 얼굴을 반쯤 가릴 정도로 소심한 모습이었는데.

지금은 얼굴도 잘 비추고, 자신의 이야기를 80명이 넘는 오케스트라 단원 앞에서 얘기하는 당당함까지 가지고 있었다.

얼마나 지현이 많이 바뀌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그런 지현을 축하하는 자리에 내가 들어가는 것은 지현에게도 큰 축복일 것이다.

나는 그녀가 속한 오케스트라의 단장이자, 어릴 때부터 보았던 오랜 친구니까.

“인원이 확정되면 제게 알려주세요.”

에비게일은 내 말에 입을 꾹 닫은 채 손가락으로 오케이 사인을 보였다.

철저하게 비밀을 지키겠다는 듯, 마치 자신이 스파이가 된 것처럼 익살스러운 모습이었다.

이야기가 오가자 어느덧 차량은 체임버홀에 도착해 있었다.

차량에서 내려 체임버홀로 향하는데, 입구에 누군가 서 있었다.

금발에 회백색 눈을 가진 여성.

누군가를 기다리는지, 여성은 종종걸음을 한 채 주변을 서성거리고 있었다.

“누구십니까?”

내가 먼저 다가가 묻자 여성은 놀란 듯 움찔거리더니 이내 내 얼굴을 보고 활짝 웃었다.

“안녕하세요! 단장님을 뵙고 싶어서 실례를 무릅쓰고 기다렸습니다.”

여성은 기다린 듯 지갑에서 명함 하나를 꺼내 내게 내밀었다.

영어로 된 명함에는 소이 플라워라는 이름과 함께 책임 연구원이라는 직책이 쓰여있었다.

하지만, 가장 눈길을 끌었던 것은 오른쪽 상단에 적힌 붉은색 알파벳 4개였다.

그녀가 있는 단체의 이름.

다름 아닌 NASA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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