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7화
체임버홀에 들어온 나는 소이에게 따뜻한 차 한 잔을 건넸다.
아직 밤에는 추운 계절이었으니까.
그녀 또한 꽤 오래 기다린 듯, 따뜻한 차를 마시며 보다 편안한 얼굴을 했다.
이내 몸을 녹인 소이는 차근히 이야기를 꺼냈다.
“이렇게 온 것도 갑작스러우셨을 텐데, 제 부탁까지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사무실에 들어온 소이는 다시금 감사의 뜻을 전했다.
본래 함께 들어왔던 에비게일을 물러줄 수 있겠냐는 부탁.
보안 상의 문제 때문에 그렇다는 말에 이안은 에비게일을 돌려보냈다.
“다시 한번 제 소개를 하겠습니다. 저는 NASA의 책임 연구원, 소이 플라워라고 합니다.”
정식으로 인사를 하는 소이의 표정에는 결연함마저 묻어나왔다.
마치 반드시 무언가를 이루고 싶다는 강한 열망을 담은 채.
그녀는 이내 가지고 있던 서류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서류 위에 찍힌 도장이었다.
TOP SECRET.
그제야 나는 소이가 왜 그렇게 보안에 대한 신경을 썼는지 알 수 있었다.
서류를 몇 장 넘기자 좀처럼 사용하지 않는 어려운 단어들이 즐비했다.
모두 천문학이나 과학에 관련된 단어들.
하지만, 얼핏 내용을 이해하는 데는 큰 문제가 없었다.
우주, 탐사, 여행자, 보이저 등
몇 차례 읽어보던 나는 유추한 것을 소이에게 물었다.
“예전에 쏘아 올린 보이저호와 같은 맥락인가요?”
“네, 맞습니다.”
소이는 간단하게 프로젝트에 대해 소개했다.
우주의 끝을 탐사하기 위한 탐사선.
이번에도 NASA에서는 보이저 호를 쏘아 올린 적이 있으니, 나 또한 이해하는데 어렵지 않았다
특히 소이는 서류의 중간 즈음에 있던 부분을 두들기며 말을 덧붙였다.
“제가 부탁하고 싶은 부분은 이 부분입니다.”
이번 프로젝트의 세부 미션 중 하나.
소이는 그것을 ‘지구의 속삭임’이라고 표현했다.
일전에 보이저호에 골든 디스크를 넣었던 것처럼, 이번에는 개편된 내용을 넣은 새로운 디스크를 붙인 채 쏘아 올릴 것이라고 설명했다.
먼 훗날, 외계의 지적생명체가 이 디스크를 확인하고 지구에 찾아오거나, 지구라는 별에 인간이 있음을 알리는 아주 중요한 것이라며.
이야기를 이어가는 소이의 얼굴에는 사명감이 잔뜩 묻어 있었다.
“단장님만 괜찮으시다면 리히트 오케스트라의 곡을 디스크에 넣고 싶습니다.”
이미 한국과 미국을 비롯해 전 세계가 놀라워하는 곡들이 아니냐며.
내가 만든 곡 어떤 것을 수록하더라도 무척이나 영광일 것 같다고 덧붙였다.
지구에 대한 정보와 기록들을 비롯해 내가 만든 곡이 들어간다면 언젠가 이 디스크를 해석할 존재가 감명 깊어할 것이라고 표현했다.
소이의 말에 나는 차근히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당장 외계의 생명체에게 내 음악이 알려진다는 허무맹랑한 생각은 아니다.
소이가 설명하기에도 실제 외계 생명체가 이 디스크를 읽으려면 최소 수억 년이 걸릴 것이라 했으니까.
그러나, NASA와 협업한다는 것만으로도 메리트가 있으리라.
전 세계에서 NASA를 모르는 곳은 거의 없을 테니까.
범지구적 행보라는 의미와 함께, 나와 리히트의 이름을 크게 부각시키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다만, 내 머릿속에는 생각이 하나 있었다.
“좋습니다. 대신, 저도 원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뭔가요?”
소이는 무엇이든 좋으니 이야기해달라고 덧붙였다.
수락해준 것만으로도 감사하다며.
어떤 요청사항이든 반영할 자신이 있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그러나 그녀의 너스레는 오래가지 않았다.
내 말에 소이의 눈이 동그랗게 떠지고, 입이 벌어졌으니까.
“디스크에 새로 만든 곡을 넣었으면 합니다.”
***
소이와의 짧은 만남을 뒤로한 채.
나는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음악실로 향했다.
NASA와 함께하게 된 ‘지구의 속삭임’ 프로젝트.
내 머릿속은 디스크에 담을 새로운 곡을 만들겠다는 생각으로 가득했다.
“NASA에 연락해 도움이 될만한 자료를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소이는 내 요청에 흥분감을 감추지 못했다.
우주로 쏘아 올릴 새로운 곡을 만들겠다는 선언에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필요한 자료가 있다면 뭐든 요청하라 표현했다.
그러나 공과 사는 구분해야 하는 법.
곡 제작에 자료가 필요했지만, 기밀문서를 타국에 남겨두고 떠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대신 소이는 곧바로 내게 도움이 될만한 다큐멘터리와 영상자료를 알려주었다.
먼 우주를 끝없이 유영하는 보이저호의 이야기를 시작으로, 보이저 1호에 담겼던 골든 디스크에 대한 NASA 직원들의 인터뷰가 차례대로 흘러갔다.
거기에 이미 읽었던 프로젝트 문건을 떠올리자 여러 생각이 머릿속에 감돌았다.
‘이름처럼 우주를 여행하는 이미지를 그려볼까.’
프로젝트 이름부터 ‘우주 여행자’였으니까.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기 위해 끝없이 나아가는 탐사선의 이미지가 필요했다.
이미 머릿속에서는 영상으로 봤던 이미지와 함께 가상의 악보에 별빛 같은 음표가 새겨진다.
새까만 우주 속에서 꿋꿋이 앞으로 나아가는 탐사선.
우직해보이는 탐사선의 이미지가 머릿속에서 떠오른다.
그러나 탐사선이 나아가는 우주는 우리가 늘상 보는 별빛 하늘이 아니다.
빛 하나 없는 고요한 가운데, 홀로 임무를 다하는 탐사선은 한편으로 외로워 보이기까지 하다.
흐릿하면서도 우직한 낮고 웅장한 선율.
그것이 이번 곡의 시작이었다.
‘끊임없이 나아가는 우주를 형상화하듯.’
우주는 지금 이 순간에도 팽창하고 있다고 했으니까.
트래블러 호도 우주가 커지듯, 끝없이 나아가겠지.
그런 허무함을 표현하면서도 숱한 우주의 신비를 알아갈 환희와 아름다움을 떠올린다.
그것이 우울한 곡의 특이점이 될 수 있도록 바이올린과 플루트가 소리에 가세한다.
마치 음악도 과거부터 지금까지 끊어지지 않고 변화하며 전해졌듯.
무한한 가능성이 가상의 악보에 담긴다.
하지만, 나는 한편으로 부족하다는 느낌이 감돌았다.
여타 오케스트라보다 훨씬 많은 종류의 악기들이 즐비한 리히트 오케스트라지만, 그럼에도 가상의 악보로 만들어진 곡은 어느 한 편이 비어있었다.
무언가 우주 특유의 신비로움이 결여되었달까.
금관악기들의 선율은 웅장하지만, 흐릿한 이미지가 없었고.
현악기는 비현실적인 고음을 표현하기엔 좋았지만, 신비롭다고 표현하기엔 다소 강렬했다.
테레민이 우주의 신묘함을 나타내듯 만들어졌지만, 하나의 악기만으로 무언가 만들어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좀 더 분위기를 채울 수 있는 게 없을까.’
처음 오케스트라를 꾸릴 때 국악을, UN 자선 콘서트 공연에서 사당패를 불렀던 것처럼.
보다 우주에 나아가는 탐사선을 표현할만한 무언가가 필요했다.
이미 곡의 갈피를 잡고, 새로운 무언가에 대해 생각하고 있을 때는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계속해서 곡의 완성도를 채울 무언가를 떠올리던 찰나.
휴대폰에 알림이 떠올랐다.
[단장님, 단원들 모두 준비되었습니다. - 에비게일]
설명을 모두 생략한 메시지였건만, 나는 곧바로 그녀의 뜻을 알 수 있었다.
그럼 나도 내가 할 일을 해야겠지.
나는 이벤트를 더욱 확실히 열기 위해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네, 잘 지내셨죠?”
***
일주일이라는 시간은 순식간에 흘러갔다.
그 사이 지현의 약혼식은 예정대로 진행되었다.
국내 최고급 호텔 중 하나인 서천 호텔.
연회장이 화려한 모습을 드리우고 있었다.
“우와… 이게 약혼식이야? 결혼식이야?”
주변을 둘러보던 단원들이 감탄사를 연발했다.
보통 약혼식이면 약소하게 치르기 마련인데.
재벌가의 약혼인 만큼, 그 스케일이 남달랐다.
천장에 펼쳐진 샹들리에와 하얀색 꽃으로 장식된 연회장.
모르는 사람이 보면 약혼식이 아닌, 결혼식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화려했다.
자리를 채운 사람들도 사뭇 달랐다.
지현은 물론, 약혼자도 대한민국을 주름잡는 재벌가의 자제였기에.
연회장에는 정재계에 한 획을 긋는 사람들이 여럿 참여했다.
필무가 굵직한 사람들을 마주하는 사이, 지현은 로비에서 단원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다들 와줘서 고마워요.”
“헐! 진짜 언니야? 못 알아볼 뻔했어!”
“그러게~ 이렇게 이쁜 모습을 어떻게 숨겼대?”
단원들의 칭찬 세례에 지현은 머쓱한 웃음을 지었다.
지현은 여전히 거울 너머의 자신이 어색했다.
재벌가의 딸이지만, 명품보단 편한 옷이 좋았고. 눈에 띄는 화려함보다는 소탈한 것이 좋았으니까.
하지만, 지금의 지현은 화려하다는 표현으로는 부족했다.
순백의 파티 드레스와 적절하게 한 메이크업, 어깨를 덮는 레이스 숄까지.
하지만, 단원들이 허물없이 대해준 덕에 조금은 긴장을 풀 수 있었다.
“단장님은?”
“지금 오고 계시대요.”
평소에 약속이라면 늦는 법이 이안이었건만.
그런 이안이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는 말에 지현은 사뭇 놀랐다.
하지만, 지현이 이안을 신경 쓸 겨를은 없었다.
곧 약혼식이 시작된다는 방송이 울려 퍼졌으니까.
“그럼 지금부터 약혼식을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사회를 맡은 사람이 선언하자 사람들이 일제히 박수를 보냈다.
형식적인 인사를 시작으로, 반지를 교환하고, 케이크를 자르는 일련의 과정까지.
많은 이들의 축하를 받는 지현의 입가에는 미소가 계속 맺혀있었다.
두 사람의 약혼을 축하하는 샴페인을 마시고.
기념 촬영 순서를 떠올린 지현이 중앙으로 나가려는데.
“그럼, 약혼을 축하하는 무대를 한 번 감상하시겠습니다.”
갑작스런 사회자의 말에 지현은 당황스런 표정을 감출 수 없었다.
식장에 들어올 때까지만 해도 무대에 대해서는 일절 들은 바가 없었으니까.
지현이 약혼자에게 고개를 돌려봤지만, 약혼자도 무슨 상황인지 모르는 듯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두 사람이 여전히 눈을 끔뻑이며 있던 찰나.
연회장 한편을 가리던 커튼이 한쪽으로 치워졌다.
피아노와 바이올린, 플루트 등을 든 단원 열 명 남짓이 악기를 고쳐잡은 채 연주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리고 피아노 자리에는 이안이 앉아있었다.
지현이 놀라움을 표현하기도 전에, 이안의 손가락이 건반에 쏟아졌다.
‘<사랑의 꿈>.’
연주가 시작됨과 동시에 지현은 곧바로 어떤 곡인지 알 수 있었다.
피아노계의 파가니니로 악명 높은 리스트의 곡.
하지만, 그런 리스트의 곡들 중 가장 쉬운 곡이자, 가장 사랑스럽다고 일컬어지는 곡이었다.
지현은 곡을 누가 선택했는지 단박에 알 수 있었다.
본래 피아노곡이었던 곡을 여러 악기로 표현하는 것은 물론, <개화>의 무대처럼 연주와 지휘를 겸하는 것은 오직 이안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으니까.
‘언제 이런 걸…’
지현은 이안을 빤히 쳐다보았다.
단원들의 연주는 결코 잠깐 연주한다고 해서 나올 선율이 아니었으니까.
특히, 이안은 오케스트라 연습을 비롯해 최근 새로운 곡을 만든다고 무척 바쁘다고 들었는데.
그럼에도 시간을 쪼개어 준비했을 이안을 생각하니 가슴 한편이 뭉클해졌다.
수만 명의 청중이 아닌, 이런 작은 무대에서도 최선을 다하는 모습에.
벌써부터 지현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게다가 축주는 한 곡에서 끝나지 않았다.
연이어 터져 나오는 선율들.
때로는 간결하고, 때로는 복잡한 선율들이 이어지자 식장에 있던 사람들은 감탄도 뒤로 한 채 감상에 열중했다.
연주를 듣던 지현의 눈에는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이어지는 선율들은 단순히 지현에게 ‘아는 곡’이 아니었으니까.
‘내가 콩쿨에 나가서 연주한 곡들…’
<쇼팽 에튀드 9번>, 바흐의 , 마지막으로 <평안>까지.
모두 지현이 이안 앞에서 연주한 곡들이었다.
슬며시 자신을 쳐다보는 이안의 눈길에 지현은 곡을 매만진 뜻을 얼핏 알 수 있었다.
‘축하이자 응원.’
이안과 단원들이 펼치는 연주는 마치 지현이 성장한 단계를 보여주는 것만 같았다.
자신감 하나 없던 시절의 연주에서, 이안을 통해 자신감을 회복한 연주, 더 나아가 완전히 자신의 스타일을 찾아 연주한 <평안>에 이르기까지.
앞선 <사랑의 꿈>이 약혼식에 선 지현을 축하하는 곡이었다면, 이번 세 곡들은 음악가로서의 지현을 응원하는 듯했다.
그러니 앞으로도 잘해낼 것이라고 격려를 하듯.
이안과 단원들의 연주가 클라이맥스로 향했다.
지현의 눈가에는 이미 눈물이 가득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감동과 함께 환희가 가득 찼다.
수많은 축하에, 음악가로서 최고의 순간이라는 생각에.
지현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눈물을 떨어뜨리며 해사하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