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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부터 천재 피아니스트-238화 (238/250)

238화

리히트 오케스트라의 축하에 필무의 어깨가 한껏 올라갔다.

지현 몰래 서프라이즈로 준비할 수 있도록 도와준 사람이 바로 필무였으니까.

처음 이안의 연락을 받았을 때를 회상하자 필무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아저씨, 지현이의 약혼식에 서프라이즈 축하 연주를 진행하려는데요.-

가장 먼저 든 생각은 감탄이었다.

지현의 약혼식에 연주를 진행한다는 것은 서천 그룹에서 이안이 연주를 진행한다는 이야기였으니까.

수많은 그룹과 단체에서 이안을 초빙하려고 하는 것을 생각하면, 연주 의사를 밝히는 것만으로도 놀라운 일이었다.

한편으로는 대단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친구로서든, 리히트 오케스트라의 단장으로서든, 지현을 챙기려는 의지가 가득 보였으니까.

‘잘 지내고 있는 것 같아서 다행이군.’

단원들의 연주와 이를 지켜보는 지현을 보던 필무가 남몰래 웃어 보였다.

처음 지현이 이안 콩쿨에 참여하기 위해 휴학한다고 했을 때.

부모로서 필무는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으니까.

갑자기 잘 다니고 있던 맨허튼 음대를 휴학하고, 선택한 길.

지현의 실력을 믿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동안 리히트 오케스트라의 단원들을 본 필무로서는 얼마나 많은 실력자가 올지 감히 예측할 수 없었다.

그런 사람들에게 치이진 않을까, 자신의 실력에 실망하진 않을까.

혹 갑작스레 휴학한 학교에 대해 아쉬움을 토로하진 않을까 싶기도 했었다.

하지만, 필무는 차마 지현의 의지를 꺾을 수 없었다.

강력하게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하는 지현에게서 그동안 본 적 없는 거대한 자신감을 느꼈으니까.

그 자신감에 더해, 지현은 당당하게 이안 콩쿨 2위로 입상하며 리히트 오케스트라에 들어갔다.

소심하고 낯을 많이 가리는 딸이 적응을 어찌하려나 궁금하기도, 걱정되기도 했는데.

리히트 단원들이 손수 나서서 축하 연주를 준비했다는 것에 그저 감사한 마음이 떠올랐다.

심지어 연주가 끝난 후.

냉철하던 필무도 지현이 단원들을 하나하나 안아주는 모습을 보고 눈물을 흘릴 뻔했다.

대한민국에서 재벌로 살아가면서 온갖 아양을 떨고, 더러운 꼴을 보아왔는데.

그러한 회의와 불신을 단번에 잠재울 정도로 감동스러운 무대였다.

“부러운데? 리히트 오케스트라가 딸내미 약혼식에 축하 연주도 해주고.”

“그러게나 말이야. 어디 보러 가고 싶어도 못 가는 게 리히트 오케스트라 공연인데.”

필무의 오랜 친구이자, 함께 클래식을 감상하던 재혁과 태진이 말했다.

대한민국을 움직이는 3대 기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서천, 화정, 제온 그룹의 수장들.

그들조차 이안이 축하 연주를 했다는 것에 은근히 부러운 기색을 드러냈다.

재벌가를 비롯해 기업계에서는 이안에게 러브콜을 보내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였다.

광고를 요청하는가 하면, 무대를 만들어주겠다는 연락을 하기까지.

어떻게든 연(緣)을 만들기 위해 발악을 하고 있었다.

몇몇 재벌들은 이번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지현과 친분이 있던, 필무와 친분이 있던, 이안이 축하 공연을 할 정도라면 밀접한 연관이 있다는 이야기니까.

어떤 이는 이번 축주에 얼마나 들었는지 묻는가 하면, 리히트 재단에 얼마나 많은 금액을 후원하는지 묻는 경우도 있었다.

얼마의 돈이 들어도 상관없으니 연결만 시켜달라고.

이안에 대해 물으면서, 필무에게 자신들의 능력을 한껏 드러내는 사람들도 많았다.

하지만, 필무는 그런 사람들을 향해 굳은 표정으로 일관했다.

“고작 돈 따위에 박이안 단장님에 움직일 거라 생각합니까.”

담담한 말투였지만, 필무의 기세에 다른 재벌가 사람들은 꼬리를 낮췄다.

지금껏 필무가 보여줬던 반응과는 사뭇 달랐으니까.

필무에게 이안은 더 이상 어렸을 때 보았던 딸의 친구가 아니었다.

젊은 거장이자, 필무가 선망하는 클래식의 길을 걷는 음악가.

필무는 그런 대단한 사람을 고작 물질적인 욕심으로 움직이려는 사람들과는 나눌 말이 없었다.

***

무대를 끝마치고 가장 먼저 주어진 사진 촬영 기회.

나를 비롯해 연주를 진행한 단원들이 지현 옆에 섰다.

우느라 눈이 붉게 충혈된 지현이었지만, 입가에는 미소가 떠나가지 않았다.

“언제 이렇게 준비했어요?”

“틈틈이? 약혼식 준비 때문에 바쁠 때를 노렸지.”

아람이 익살스런 어투로 이야기했다.

최근 큰 무대를 앞두지 않은 만큼 연습을 조금 자유롭게 하고 있었으니까.

지현이 이른 시간에 퇴근하면 함께 모여서 연습을 하곤 했다.

리스트의 <사랑의 꿈>을 준비하면서도 그동안 지현이 연주했던 콩쿨곡들을 연주하는 것.

약혼을 축하하는 것이자, 리히트에 들어오기까지 지현의 행보를 격려하는 나의 작은 선물이었다.

“정말 고마워요 다들.”

지현이 단원들을 보다 끝내 나를 향해 바라보았다.

평소 매번 나를 지휘자, 단장 보듯 엄숙하게 보던 지현이었는데.

지금은 그저 친구를 바라보듯 편안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이번 연주를 한 이유는 충분했다.

촬영까지 하고 자리로 내려왔을 때.

내 주변에는 순식간에 사람들이 몰려왔다.

“안녕하세요 단장님, 해진기업의…”

“연주 잘 들었습니다. 어찌나 좋은지… 저는…”

단 것에는 날파리가 꼬인다고 했던가.

하이에나 같은 눈빛을 한 사람들이 내게 다가와 끝없이 말을 걸었다.

그들이 말하는 기업엔 내게 무대나 광고를 제안한 회사도 있었다.

자리를 빛내 달라, 최고의 연주를 등 미사여구로 표현했지만 결국 자신들의 이득을 위해 연주를 부탁하는 자리.

음악이 아닌, 홍보를 위한 자리였기에 모두 거절한 자리들이었다.

끈질기게 붙는 사람들을 떼어내기 위해.

나는 무척이나 간단한 방법을 선택했다.

“잠깐 동석해도 될까요?”

“물론이지.”

내가 선택한 곳은 지현의 아버지, 필무의 옆자리였다.

필무는 무척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은 채 나를 맞이했다.

필무의 옆자리에 앉는 것만으로도 기업가 사람들은 조금 주춤하더니 이내 제자리로 돌아갔다.

아까 사진 촬영을 하면서 슬쩍 보았을 때.

필무의 일갈에 사람들이 움츠린 채 떠나갔으니까.

분명 내 쪽을 보며 이야기했던 것을 알기에, 분명 나와 관련된 이야기라고 확신했다.

잠깐 말없이 지현을 바라보던 필무는 감사 인사를 전했다.

“다시 한번 고맙다. 지현이를 위해 이런 자리도 마련하고.”

“저보다 단원들이 난리였는걸요. 저는 참여만 했을 뿐이에요.”

사실 처음에 서프라이즈 무대를 준비하자고 했던 것은 에비게일이었으니까.

내가 한 것은 내 기억에 있는 지현의 콩쿨곡을 하자고 제안한 것뿐.

합주를 위해 <사랑의 꿈>을 가져온 것도 단원들이었다.

그럼에도 필무는 내가 없었다면 이렇게 좋은 연주는 만들어질 수 없었을 것이라며 너스레를 떨었다.

“아버지로서 대단한 은혜를 입었는데. 뭐 필요한 것은 없니?”

지현의 아버지이자, 기업의 회장으로서 하는 말이었다.

간단한 질문이었지만, 그 수준을 생각하면 무척이나 무거운 말이었다.

일전에 오케스트라 경연을 위해 단원들 전원의 티켓을 끊어준 사람이 바로 필무였으니까.

아무리 터무니없는 것을 부탁해도 들어줄 수 있는 것이 바로 필무, 서천 그룹의 저력이었다.

지금 내가 필요한 것은 딱 한 가지.

이번에 새로 준비한 곡의 마지막 피스였다.

필무에게서 그 마지막 무언가를 채울 수 있을까.

곰곰이 생각하던 그때.

‘생각해보니… 여기에 그게 있었지?’

문득 내 머릿속에 하나의 아이디어가 스쳐 지나갔다.

국내에는 몇 없으면서, 서천 그룹이 보유하고 있는 것이 하나 있었으니까.

“콘서트홀 좀 구경시켜주실 수 있나요?”

내 말을 들은 필무는 순간 의아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이내 내 말의 뜻을 이해한 듯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필무는 익살스레 웃으며 집사와 같은 자세를 취했다.

마치 한 명의 귀족을 다루듯.

장난스런 제스처였지만, 그의 말투에는 진심이 묻어나오는 무게감이 드러났다.

“안내하도록 하지요. 단장님.”

***

서천 호텔이 있는 곳은 하나의 도시나 다름없었다.

지하로 내려가면 지하철이 연결된 것은 물론, 미로에 가까운 복합 상업단지와 아쿠아리움, 심지어 거대 쇼핑몰까지 붙어있는 곳이었다.

영화관과 여러 전시장도 모두 서천그룹의 자산이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내가 보려고 한 것은 단 하나였다.

“매번 너에게 자랑하고 싶은 곳이었지.”

필무가 나를 향해 자신 있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젊은 거장에게 이곳을 꼭 소개해주고 싶었다며, 만약 내가 한국에서 연주회를 열면 이곳을 빌려주겠노라 생각했다고.

자신있게 문을 열자, 길게 뻗어나간 좌석과 끝자락에 있는 무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무대를 아우르는 객석들.

2천여 명의 관객을 수용할 수 있는 서천 콘서트홀이었다.

그리고 이곳의 특이점은 다름 아닌 무대에 있었다.

“참으로 아름다운 친구이지.”

필무가 무대 한편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파이프 오르간.

악기의 제왕이라는 별명처럼 수십 개에 달하는 소리를 낼 수 있는 거대한 악기.

겉보기엔 피아노처럼 생겼지만, 연주하는 방식을 비롯 소리를 내는 원리 자체가 완전히 다른 악기였다.

건반악기 같은 외모에, 관악기의 특성을 가지는 신묘한 악기.

오죽하면 파이프 오르간이 만들어내는 선율을 ‘신의 목소리’라고 표현하겠는가.

국내 최대 규모의 파이프 오르간이 바로 이곳, 서천 콘서트홀에 있었다.

내가 이곳에 찾아온 이유였다.

“어떻게 파이프 오르간을 넣을 생각을 하셨어요?”

“멋모르고 다녀온 프랑스에서 오르간의 선율에 매료되어버렸거든.”

필무가 빙긋 웃으면서 과거 이야기를 짧게 해주었다.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

관광차 들렀던 성당에서 들었던 오르간이 여태껏 잊혀지지 않는다고 표현했다.

찬송가를 위한 연주였음에도 소리 자체가 환상이라는 말로밖에 설명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고.

무신론자인 필무의 가슴 속에 신이 나타난 것 같았다며 너스레를 더했다.

그때의 감동을 잊지 못해 그곳에 있던 오르간과 완벽히 똑같은 오르간을 콘서트홀에 설치했다고 설명했다.

오르간에 다가간 나는 천천히 전체적인 모습을 훑어보았다.

건반만 보면 피아노와 비슷하지만, 연주 방식은 완전히 다른 오르간.

상단과 중단, 하단 건반까지 고려해야 하는 데다, 스톱의 위치에 따라 각 층에 해당하는 건반들이 서로 다른 소리를 낸다.

서천 콘서트홀에 있는 오르간은 건반만 무려 4단에 달하는 거대 오르간이었다.

그 소리를 1차적으로 확인하기 위해.

콘솔을 조작한 나는 건반 위에 손을 올렸다.

건반을 누르자 은근한 바람소리와 함께 옅은 선율이 콘서트홀에 울렸다.

방금 축하 연주로 했던 리스트의 <사랑의 꿈>이 오르간으로 펼쳐진다.

피아노로 연주하는 <사랑의 꿈>이 완연한 봄과 같은 깊은 사랑을 표현한다면, 오르간은 바람소리가 더해지며 그 모든 꿈이 한여름 밤의 꿈 같은 뉘앙스를 펼쳐낸다.

시범에 불과한 짧은 연주.

하지만, 필무는 그 짧은 연주도 무척 좋았다는 듯 박수를 보냈다.

여느 오르가니스트와 비견해도 훌륭할 지경이라고.

거기에 오늘 나의 연주를 두 번이나 들어서 좋다고 감사함을 표했다.

그러니 자신도 답례를 해야겠다며, 필무는 자신감 넘치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사실 이곳의 묘미는 바로 이거란다.”

필무가 말을 끝남과 동시에 어딘가로 손짓했다.

이내 콘서트홀에 켜져 있던 조명이 천천히 빛을 잃어갔다.

완전히 어두워지려던 찰나.

무대에서 켜진 조명이 켜짐과 동시에 환상이 펼쳐졌다.

형형색색의 조명이 은빛 파이프에 비쳐 새로운 빛깔을 펼쳤다.

마치 하늘에 떠 있는 별을 고스란히 형상화한 듯.

그 면모에 내 머릿속에 하나의 생각이 떠올랐다.

‘이거다.’

이미 연주를 하면서도 묘한 기운에 확신했다.

우주로 쏘아 올릴 곡의 마지막 히든 피스.

묘한 아쉬움이 감도는 바람 소리를 적절하게 활용하면 우주에서의 공허감을 표현할 수 있으리라.

나는 곧바로 필무에게 한 마디를 덧붙였다.

“추천해주실 만한 연주가가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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