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시작부터 천재 피아니스트-239화 (239/250)

239화

프랑스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

이른 아침부터 웅장한 파이프 오르간의 선율이 펼쳐졌다.

성당의 성스러운 기세와 정반대되는 암울하고 무서운 선율.

끝없는 오른손의 연주가 중요한 슈베르트의 <마왕>이 파이프 오르간을 통해 현신(現身)하고 있었다.

본래 피아노에서 왼손 연주로 펼치는 셋잇단음표가 왼손 대신, 발로 펼쳐진다.

바닥에 존재하는 발건반을 누르는 여인의 몸짓은 마치 춤을 추는 것 같기도 하다.

연하듯 움직이면서도 마왕의 추격을 상상하게끔 만드는 묵직한 발걸음.

그 어마어마한 기세를 가냘픈 여인의 몸으로 만들어가고 있었다.

연주가 끝났을 무렵, 신부(神父)가 차 한잔을 건넸다.

“앨리스 자매님. 쉬시면서 하시지요.”

신부의 제안에 여인이 오르간에서 내려와 차를 들었다.

스테인드글라스를 쳐다보며 휴식을 취하는 여인.

그녀가 바로 앨리스였다.

앨리스 시몬.

그녀는 독일의 뉘른베르크 오르간 콩쿠르와 아일랜드의 더블린 콩쿠르를 동시에 우승한 세기의 천재이자, 그 이외에도 수많은 국제 콩쿠르에서 이름을 날린 오르가니스트였다.

심지어 몬트리올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명예 오르가니스트로 이름을 올리는가 하면, 지금은 미국 텍사스 주립 대학의 교수로 지내고 있었다.

그런 사람이 고향이자, 프랑스로 돌아온 이유.

다름 아닌 오르간을 위해서였다.

“이른 아침부터 연주를 해서 시끄러운 것은 아닐까 모르겠네요.”

“그럴 리가요. 앨리스 자매님의 연주를 어찌 시끄럽다고 표현하겠습니까.”

오히려 성당 사람들은 이때를 기다리곤 했다.

악기의 제왕인 오르간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앨리스.

세기의 천재라고 불리는 앨리스의 연주를 가까운 거리에서 목도할 수 있는 기회였으니까.

한편으로 사람들은 궁금해하기도 했다.

미국에서 교수로 활동하고 있는 앨리스가 왜 이맘때면 되면 프랑스로 돌아오는지.

미국에 파이프오르간이 없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사람들의 질문에 앨리스는 무척 담백하게 이유를 설명했다.

“이맘때 하는 연주회에 사용하는 오르간이 이곳의 오르간과 같은 것이거든요.”

노트르담 대성당의 오르간 선율을 듣고 감동한 한국인이 한국에 똑같은 오르간을 만들어두었다고.

보다 완벽한 연주를 위해 프랑스로 온다고 덧붙였다.

앨리스가 따뜻한 차 한 잔에 여유를 즐기고 있을 무렵.

그녀의 휴대폰이 울렸다.

익숙한 이름에 앨리스는 미소를 지으며 전화를 받았다.

-앨리스씨, 잘 지내셨습니까?-

“안녕하세요 필무씨. 곧 불러주실 거라 생각했습니다.”

한국의 서천 그룹, 그 회장인 서필무.

매년 비슷한 시기에 공연 요청이 들어오곤 했다.

프랑스에 돌아온 것도 한국 공연을 한 달 앞두고 연습을 하기 위해서였으니까.

그런데 이번에는 평소보다 조금 빨리 연락을 보내온 편이었다.

“설마, 올해는 공연을 못 하는 건 아니죠?”

-그럴 리가요. 앨리스 선생님이면 없는 기회도 만들어야 초빙해야죠.-

농담처럼 던지는 말이지만, 필무의 말에는 진심이 가득했다.

프랑스에서 그의 심장을 움직인 연주가이자, 여태껏 오르간의 선율을 잊지 못하게 해준 사람이 앨리스였으니까.

만약 일정이 바쁘다면, 필무 스스로 일정을 쪼개서라도 그녀를 초빙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이른 시일에 무슨 일이신가요?”

-다름이 아니라, 부탁 하나를 드리고 싶어서요.-

“부탁이요?”

필무의 말에 앨리스의 머릿속에 작은 호기심이 떠올랐다.

그녀가 아는 필무는 파이프 오르간을 넘어 클래식 전체에 무척 진심인 사람이었으니까.

어마어마한 재력의 소유자임에도, 필무는 단 한 번도 앨리스에게 함부로 행동한 적이 없었다.

되레 연주가로서 자신을 존중하듯, 연주 외에는 어떠한 부탁을 한 적이 없었다.

그런 사람이 처음으로 부탁을 한다라.

대체 무엇 때문에 그런 것인지 되레 앨리스가 더 궁금할 지경이었다.

-리히트 오케스트라의 단장, 박이안 단장님이 앨리스씨를 만나보고 싶다고 하셔서요-

“박이안 단장님이요?!”

앨리스는 하마터면 손에 들고 있던 찻잔을 떨어뜨릴 뻔했다.

클래식에 몸담고 있으면서 이안을 모를 리가.

한편으로 앨리스는 기대하고 있지 않았던가.

지금껏 영화, 뮤지컬, 오페라 등 여러 매체에 출연하고, 온갖 악기들을 모두 다루는 리히트 오케스트라를 운영하는 젊은 거장이.

오르간은 이안이 유일하게 건들지 않은 악기 중 하나였다.

그런 이안이 직접 자신을 찾았다는 사실에.

앨리스는 필무에게 대답하기도 전에 이미 머릿속으로 한국행을 떠올리고 있었다.

***

필무가 약속을 잡겠다고 말해준 지 단 이틀.

필무는 일정이 정해졌다며 내게 알려주었다.

오히려 상대 쪽에서 내 이름을 듣고 가겠다고 먼저 이야기했다고.

그 대상이 지금, 서천 콘서트홀에 와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리히트 오케스트라의 박이안입니다.”

“만나서 반가워요. 앨리스 시몬이라고 합니다.”

앨리스가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은 채 인사를 건넸다.

나 또한 앨리스의 명성은 잘 알고 있었다.

어린 나이에 성당에서 기른 오르간 실력으로 세계를 제패했다고 알려진 인물.

학교에 다닐 적에 교수님들 사이에서 ‘오르간의 정석’이라고 불리며 호평을 받던 사람이었다.

게다가, 오르간이라는 정교한 악기로 즉흥연주를 하는 엄청난 대가로 통하기도 했다.

“먼저 저를 찾아줬다는 말에 무척 놀랐어요.”

앨리스는 북극에서의 연주가 찍힌 다큐멘터리를 가슴 깊이 새기고 있다고 말했다.

북극의 아픔을 고스란히 느끼게 해준 곡.

거기에 빙산이 무너지는 소리를 효과음처럼 사용한 것은 가히 천재적인 발상이라고 표현하기에도 부족하다고 표현했다.

그러한 음악은 수십의 소리를 낼 수 있는 오르간으로도 만들지 못한다며.

그 때문에 자신을 찾은 이유가 궁금하다고 덧붙였다.

“이번에 만드는 곡을 함께 연주해주셨으면 합니다.”

단도직입적인 내 말에 앨리스는 자못 궁금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동안 내가 만든 곡들이 얼마나 좋은지 모두 들었다고.

그런 내가 이번에는 어떤 곡을 만들어냈을지 궁금하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나는 그런 그녀에게 악보를 내밀었다.

파이프오르간을 위해 만든 별도의 악보.

앨리스의 연주를 들음과 동시에 머릿속에 떠오른 가상의 악보를 함께 둘러볼 예정이었다.

“한 번 연주해주시겠습니까.”

대뜸 악보를 받으면 당황하기 마련인데.

앨리스는 되레 흥미로운 듯 악보를 받아들고 차근히 오선지를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차근히 악보를 훑어보던 앨리스의 표정이 이리저리 바뀌었다.

신기하다는 듯, 놀랍다는 듯, 자신의 두 눈을 의심하는 듯.

한참 악보를 훑던 앨리스의 눈에 경이로움이 차 있었다.

“오르간을 배운 적이 있나요?”

“아닙니다.

기본적으로 오르간은 세 개의 오선지에 곡이 담긴다.

오른손과 왼손, 발까지.

그 세 개의 선율을 합치시키는 것이 핵심이었다.

하지만, 어울리는 화음이어도 악기에 따라 조심해야 하는 부분이 있다.

악기의 특색이 모두 다르고, 각자 가진 스타일이 모두 다르니까.

본래 어울리는 음들이 모여도, 특징에 따라 음이 어긋나기 마련이다.

앨리스는 그 부분까지 모두 챙긴 악보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초견(初見)이라 잘 될지 모르겠네요.”

겸손한 앨리스의 말과 달리.

건반에 손과 발을 올린 앨리스의 표정이 순식간에 뒤바뀌었다.

은은한 미소는 냉철하게 바뀌었고, 편안한 눈길에는 강렬해졌다.

앨리스가 페달 건반을 누르자 짙은 음색이 터져 나온다.

파이프를 따라 은은하게 나오면서도, 바람 소리와 함께 묘한 떨림이 더해지며 흐릿한 음색이 장내를 채운다.

마치 천천히 발사를 기다리는 우주선의 두근거림을 표현하듯.

나지막한 음색에 손이 움직이자 부드럽고 가녀린 소리가 더해진다.

NASA 직원들이 발사를 앞둔 우주선을 보면 이런 기분일까.

머릿속에서는 새카만 페인트를 덧칠하듯 어두운 선율이 계속 흘러들어온다.

옅은 공포감이 떠오를 것만 같은 선율.

선율과 함께, 내 머릿속에서는 또 다른 그림이 그려지고 있었다.

‘다른 악기들이 섞였을 때 괜찮은가.’

이미 가상의 악보는 저마다의 소리를 펼쳐내고 있었다.

엔진 소리를 표현하듯 튜바와 트럼펫이 울리고, 빠른 속도를 여지없이 드러내듯 현악기들이 보잉을 멈추지 않는다.

오르간이 장대한 우주를 그린다면, 오케스트라의 선율은 탐사선의 이미지를 그려나간다.

“이 정도면 충분할 것 같습니다.”

내 말이 나옴과 동시에 앨리스가 짧은 연주를 마쳤다.

옆에 있던 필무는 짧은 연주에도 감명스러운 박수를 치고 있었다.

물론 앨리스의 연주는 무척 유려했다.

초견으로 연주를 한 것을 고려하면 이보다 좋을 순 없을 정도.

하지만, 앞으로 곡을 완성하기 위해선 해야 할 것이 많았다.

우선 오케스트라와 협주를 했을 때 어울리는지 재차 확인해야겠지.

내가 만든 곡은 오케스트라와 오르간, 이 두 악기가 절묘하게 합치되어야 보다 확실한 소리를 만들 수 있을 테니까.

그 사이 오르간이 낼 수 있는 디테일을 챙기는 것도 내 몫이었다.

아직 갈 길이 많았지만, 그럼에도 앨리스의 연주를 듣고 하나는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오르간이 우주의 소리를 표현하는 데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악기라는 사실.

바람 소리와 함께 섞여나오는 묘한 선율.

경험해보지 못한 우주의 표현하는 데는 그만한 것이 없었다.

연주를 마친 앨리스가 나를 향해 돌아보자, 나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충분하다는 내 뜻을 눈치챈 것인지.

앨리스는 짧게 웃으며 내게 물었다.

“연습은 언제부터 하나요?”

***

평소와 다른 연습 장소에 단원들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체임버홀보다 3배가량 큰 서천 콘서트홀의 위용에, 단원들은 한편으로 기대감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한편, 오르간을 보고 있는 에비게일은 자신도 모르게 경탄의 한숨을 쉬었다.

수백 개의 크고 작은 달하는 파이프들이 존재감을 드러낼 뿐만 아니라, 3층에 걸친 서천 콘서트홀의 천장까지 파이프들이 뻗어나가고 있었으니까.

크기는 물론, 그 위용까지.

어느 하나 엄청난 것이 없었다.

오르간에 대해 감탄하고 있던 찰나.

누군가 에비게일을 부르는 듯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에비게일이 뒤를 돌아봤을 때, 그녀는 오랜 친구를 만난 듯 반가운 얼굴을 했다.

“오랜만이에요 에비게일씨.”

“앨리스씨! 이게 얼마 만이에요! 텍사스에서 뵙고 처음이죠?”

텍사스 주립대학교는 오르간 이외에도 수많은 악기들로 유명한 학교였으니까.

앨리스는 물론, 에비게일 또한 바이올린 권위자로 초청 교수 자리에 오른 적이 있었다.

함께 초청 교수로 이야기를 나눈 것을 비롯.

학생들을 위해 즉석 2중주를 펼친 경력도 있었기에.

비록 미국에서 함께한 기간은 짧았어도 대단한 유대감을 쌓은 상태였다.

“이번 곡도 늘 그렇듯 단장님 혼자서 만드셨죠?”

앨리스의 질문에 에비게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리히트의 모든 곡을 이안이 홀로 만든다는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

하지만, 그것을 이미 알고 있으면서도 앨리스는 그저 신기할 따름이었다.

이안이 건넨 악보는 간결하지만 결코 간단하지 않았으니까.

아직 만든 지 일주일밖에 되지 않았다고 했지만, 한 달 이상을 고뇌해서 만든 것처럼 완벽한 화음을 자랑했다.

기본에서부터 쌓아 올린 탑처럼.

화음의 체계를 비롯해 세 파트가 엉키지 않게 적절히 배치되어 있었다.

이안에게 오르간을 배웠냐고 물었던 것이 바로 이 때문이었다.

“단장님이 오르간을 연주하지 않아서 다행이네요.”

농담처럼 내뱉은 앨리스였지만, 한편으로는 오싹하기도 했다.

이안의 능력은 지금껏 천재라고 불렸던 앨리스도 놀랍게 만든 실력이었으니까.

오르간의 특이점을 정확히 꿰뚫은 상태로 곡을 만든 것은 물론, 연주를 하지 않은 상태로도 완성에 가까운 곡을 만드는 실력이라니.

오르가니스트도 하기 힘든 일을 했다는 사실에 고개가 절로 돌아갔다.

“자, 정식으로 소개하겠습니다. 앨리스씨?”

이안의 인도에 앨리스는 지휘석 옆에 서서 인사를 건넸다.

앨리스의 등장에 다른 단원들도 몇몇 그녀를 알아보았다.

텍사스 주립대 교수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단원을 비롯해 수많은 오르간 콩쿨을 제패한 것도 이미 알려져 있었다.

“이번 곡은 앨리스씨의 오르간 연주와 협주로 진행할 예정입니다.”

앨리스의 뿌듯한 미소와 함께 단원들이 놀라움을 더했다.

악기의 제왕이라고 불리는 오르간. 그리고 그것을 다루는 세기의 천재, 앨리스.

그런 거물과 협주한다는 사실에 단원들이 기대감을 감추지 못했다.

하물며, 모든 악기의 소리를 낼 수 있는 오르간과 협주라니.

모든 악기를 대변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오르간으로 어떤 협주를 만들 수 있겠냐는 의문이 들면서도, 이안과 함께라면 충분히 가능하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게다가 단원들은 자연스레 새로운 곡에 대해 떠올렸다.

지금껏 만든 곡들이 매번 단원들을 놀라게 했는데.

이번 곡은 대체 어떤 곡이기에 오르간과 협주를 하여 완성한다는 것일까.

몇몇은 벌써부터 어떤 악보를 받을지 기대된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미 놀라운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닌데.

하지만, 이안의 선언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그리고, 이번 곡의 특이점이 하나 더 있습니다.”

앨리스도 모르는 이야기에 이안을 향해 쳐다보았다.

심지어 이안이 ‘기밀’이라고 표현하기까지 할 정도.

어떤 이야기인지 모르는 단원들과 앨리스는 긴장감에 침을 삼켰다.

“이번에 우리는 우주로 진출합니다.”

이안의 21번째 곡, <우주>가 공개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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