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1화
천재적.
앨리스가 살아오면서 가장 많이 들은 단어를 꼽으라면 ‘천재’라는 말일 것이다.
성당에서 오르간을 연주할 때를 비롯해 여러 콩쿨을 제패하면서 천재 오르가니스트라는 말을 들었으니까.
하지만, 이안이 건넨 악보를 보았을 때.
앨리스는 어쩌면 자신이 천재가 아닐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 남들보다 음악적으로 뛰어난 재주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안 앞에서 설 때면 차마 자신이 천재적이라는 생각을 할 수 없을 정도였다.
‘마치 악보에 그림을 그린다면 이런 기분일까.’
좋은 글은 읽는 것만으로도 머리에 상상이 되지 않던가.
이안의 악보도 마찬가지였다.
악보를 보는 것만으로도 마치 그림이 펼쳐지듯 선율이 상상되었다.
단순히 상상에 그치지 않고 구체적인 이미지를 전달하는 듯한 뉘앙스에.
이안을 처음 마주했을 때 초견이어도 실수 없이 연주할 수 있던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아무리 앨리스가 초견에 자신이 있어도, 곡 전체의 특이점과 박자, 악센트를 모두 담아내는 것은 신이 아닌 이상 할 수 없었다.
분명 그렇게 생각했는데.
이안의 악보는 그 불가능의 경지를 가능케 하는 마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니 더욱 도전 의지가 불탈 수밖에.’
그동안 음악을 하면서도 느끼지 못한 새로운 심상을 느끼게 해준 이안이었으니까.
그런 이안의 곡을 연주한다는 사실에 손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더군다나 이번 기회는 무려 우주로 자신의 연주를 쏘아 올릴 수 있는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이지 않은가.
그러한 기회를 쥐어준 이안에 대한 보답이자, 그동안 천재라는 이명 아래에 안주했던 것이라 생각한 앨리스의 반성.
앨리스는 한 발자국 더 나아가겠다는 생각으로 건반들을 향해 손과 발을 내디뎠다.
Lento.
아주 느리고, 무겁게.
대지를 딛고 일어나는 타이탄을 연상케 하는 묵직한 발구름이 건반에 전달된다.
건반에 전달된 압력은 오르간 속 파이프에 바람을 불어넣고, 파이프는 그 떨림에 감응하여 소리를 토해낸다.
어둠을 상상케 하는 짙고 암울한 음색.
듣고 있는 것만으로도 심연으로 끌려 들어가는 것 같은 오묘한 분위기가 연출된다.
그런 어두운 공기를 가르고.
오케스트라의 선율들이 하나둘씩 검은 그림에 색을 칠한다.
가장 선두에 달려온 것은 호른이다.
출정식을 펼치는 것 같으면서도, 로켓의 추진을 표현하는 듯한 거대한 울림.
묵직한 오르간의 음색을 찢을 듯이 전진하는 소리가 터져 나온다.
잇따라 들어오는 관악들의 세례가 이어진다.
마치 한획을 그을 때마다 아래의 색채가 나타나는 스크래치 그림처럼.
화려한 관악이 더해지자 우주에 존재하는 별이 찍히듯 화려한 기색이 더해진다.
입체적으로 그려진 우주의 속에 현악기들이 점차 모습을 드러낸다.
쾌활한 기색을 머금은 현악들의 보잉.
마치 탐사선 발사를 응원하고 축하하는 사람들의 반응을 그린 것 같다.
거기에 타악까지 들뜬 마음과 우주의 경이로움을 표현하듯 강약을 바꿔가며 이어진다.
모든 악기들이 저마다의 특색을 뽐내고, 그림을 그리는 화려한 장면.
연주를 하면서도 앨리스의 가슴 한편에서는 경이로움이 떠올랐다.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해냈지?’
어느 하나 악기가 약하지도, 강하지도 않은 균형 잡힌 선율.
그저 환상 같은 음색에 자연스레 앨리스의 머릿속에도 공상이 펼쳐졌다.
자신이 그려낸 검은 우주에 리히트 오케스트라의 선율이 탐사선과 별, 수많은 성운들을 표현하듯.
각 악기의 특색이 전혀 어색하지 않게 이어진다.
게다가 앨리스가 놀라워한 부분은 그뿐이 아니었다.
‘기본에 충실하면서도 수많은 변주를 갖춘 곡.’
20분가량 이어지는 연주.
음악에서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이건만.
그 사이에 <우주>는 수많은 지구 음악의 법칙을 모두 담고 있었다.
기초적인 화음들과, 그러한 기초에서 파생된 수많은 변칙 화음들.
도무지 어울릴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던 선율들이 이안의 지휘 아래에 화려하게 터져 나간다.
마치 <우주>라는 곡을 통해 ‘지구의 음악은 이런 것이다.’라고 알려주듯.
간결함과 풍성함을 동시에 갖춘 곡에 혀를 내둘렀다.
‘다들 어떻게 보면서 연주하는 거야?’
이안에 이어, 단원들의 모습에서도 절로 경이로움이 들었다.
앨리스가 앉은 오르간에는 수십 가지의 조명이 펼쳐져 건반과 악보가 아주 잘 보였다.
하지만, 리히트 오케스트라는 아니었다.
파이프에 비친 빛을 최대한으로 분명하게 하기 위해 조명을 최소한으로 켠 상태인데.
당연하게도 오케스트라에게는 불편함을 줄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단원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연주를 이어갔다.
이미 악보는 외웠다는 듯, 오로지 단원들의 시선은 이안에게로 향해 있었다.
‘이안이 저들에게 우주구나.’
방대한 우주에게 경이로움을 느끼듯, 앨리스 또한 이안의 행보에 경이로움을 느끼지 않았던가.
<우주>의 선율을 더욱 견고하게 만든 것은 단원들이 평소 우주와 같은 존재와 함께 있어서이지 않을까.
그런 이안의 선택을 받았다는 생각에.
앨리스는 손길에 경의를 가득 담은 채 연주를 이어갔다.
***
마이스터, 레율 핸슨.
그는 서천 콘서트홀의 파이프 오르간을 관리하는 관리자이자, 세계에서 몇 안 되는 마이스터 중 하나였다.
매번 앨리스가 서천 콘서트홀에서 공연을 할 때마다 특별 관리를 하던 그였는데.
이번에 펼쳐진 연주와 오르간의 선율은 그 또한 상상 이상이었다.
‘참으로 경이롭다.’
레율은 촬영 전 상황을 잠깐 떠올렸다.
위대한 제왕처럼 압도적인 선율을 만들어낸다는 이유로 ‘악기의 제왕’이라고 불리는 파이프 오르간.
레율은 ‘악기의 제왕’이라는 이유는 제왕에게 수많은 하인과 시종이 붙듯, 까다롭기 때문이라며 우스갯소리를 하곤 했다.
파이프 오르간은 단순히 연주하고 싶다고 연주하는 악기가 아니었다.
최상의 연주를 위해서는 내부의 수많은 파이프를 일일이 점검해야 하고, 스웰박스를 비롯한 내부 부품들이 문제없이 움직이는지 점검해야 한다.
오르간을 점검하는데 가히 10시간이 소요된다는 것은 거짓말이 아니었다.
특히 다른 악기와 협업을 하면 더욱 골치 아파진다.
다른 악기들이 소리를 작게 표현하려면 단순히 힘을 덜 가하면 되지만, 오르간은 세팅 자체를 처음부터 다시 해야 했으니까.
그 작업만으로도 오래 걸린다 생각했는데.
이안은 마치 그 모든 것을 예측하고 통달한 듯 이야기하지 않았던가.
“조명이 강할 예정이니 온도 조절에 특히 신경 써주시기 바랍니다.”
아주 단순한 말이었지만, 레율은 놀란 기색을 숨길 수 없었다.
보통 이런 말은 레율, 자신이 먼저 하는 편이었으니까.
온도와 습도에 민감한 오르간이 제대로 된 소리를 내기 위해선 수많은 환경적 요소를 고려해야 한다.
그건 마이스터인 본인만 알고 있을 줄 알았는데.
그 부분을 먼저 짚는 것만으로도 놀랍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아까 들어보니 이 파이프가 소리가 특히 셌습니다. 파이프 온도 때문인 것 같으니 조금 더 약하게 부탁드립니다.”
조명까지 켠 채 진행한 리허설 때.
이안이 몇 번 건반을 쳐보더니 한 소리였다.
듣기에는 음정, 소리 자체에 틀어짐 없는 깔끔한 음색인데.
협주를 진행하면 해당 소리가 갑자기 앞으로 나와 분위기를 깨뜨린다고.
미세한 차이를 알아차리는 면모에 감탄을 내려놓을 수 없었다.
‘이게 젊은 거장의 저력이구나.’
레율도 그동안 수많은 거장들을 만나고, 거장들의 존경을 받는 마이스터였건만.
이안 앞에서는 그저 경이로운 표정밖에 지을 수 없었다.
***
[말씀드리는 순간, 트래블러 프로브(Traveler Probe)가 발사를 앞두고 있습니다!]
전 세계에 생중계 되는 무인 탐사선, ‘트래블러’ 발사.
이전에 칸 영화제 생중계를 보았듯 단원들이 모두 체임버홀에 모였다.
특히 한국에서도 이번 무인 탐사선에 대한 관심이 폭발적이었다.
[NASA. 이번 탐사선 골든 레코드에 리히트 오케스트라의 <우주>를 담았다 발표.]
[리히트 재단, 트래블러 호 발사와 동시에 오케스트라 곡, <우주>를 공개하겠다 선언.]
[NASA 최고 지휘자 직젝 워커, ‘리히트의 곡을 넣을 수 있던 것은 영광’이라 표현.]
엠바고가 해제되며 터져 나온 NASA와 리히트 오케스트라의 콜라보 소식.
재단에서는 발맞춰 기사를 뿌리는 것은 물론, <우주>의 공개를 준비했다.
몇 차례 언론에 소식을 전했음에도 재단 전화가 불탈 지경이라고.
이사장, 민호가 이번에도 한 건 했다며 너스레를 떨었지.
[지금 카운트 다운을 시작합니다! 3… 2… 1… Launch! 국내 오케스트라, 리히트의 곡을 담은 트래블러호가 도약을 시작했습니다!]
격앙된 앵커의 설명과 함께 단원들도 자축의 박수를 전했다.
몇몇은 뭔가 뭉클한 듯 눈물을 훔치기도 했고, 몇몇은 생중계 중인 우주선을 바라보며 감탄을 이어갔다.
그동안 했던 연주회와는 전혀 색다른 감정이 느껴진다고.
청중이 없음에도 우주선 발사를 보는 것만으로도 찡한 느낌이 든다고 표현했다.
열띤 반응을 보이는 것은 온라인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발사와 동시에 곡을 공개하겠다고 전한 탓에 유튜브에는 벌써부터 수만 개에 달하는 댓글들이 쌓여가고 있었다.
예약 공개 5초 전부터 몰려온 사람들의 댓글이 엄청났다.
└ 진짜 우주까지 알려지네 ㄷ
└ 나사에서도 인정한 리히트… 대단하다는 말도 이젠 부족하다.
└ 빨리 영상 공개해주세요!! 현기증 난단 말이에요!! ㅠㅠ
폭발적인 반응.
이내 <우주>가 공개되자 내가 생각했던 영상이 고스란히 펼쳐졌다.
어두운 서천 콘서트홀에서 울려 퍼진 <우주>의 선율.
파이프 오르간을 선두로 한 음색이 영상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거기에 더해지는 관악과 현악의 선율까지.
이미 나 또한 검수를 마친 영상이건만, 직접 보내 새로웠다.
그에 대한 반응도 실시간으로 갱신되고 있었다.
└ ㄷㄷ 진짜 대박이다. 눈 감고 들으면 진짜 오묘함. 막 몸이 붕붕 뜨는 것 같음.
└ 저기서 촬영한 것도 신의 한 수임. 파이프에 반사되는 빛이 별 같지 않음?? 설마… 이게 다 설계? ㅇ0ㅇ?
└ 얼마나 열심히 준비하면 이런 곡을 만들 수 있을까? 애초에 음악을 시작한 지 3년 만에 이런 곡을 만들 수 있을까?
└ 이안이라서 가능한 거지… 일반인은 절대 못함.
<우주>를 들은 대중들의 평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오르간의 선율이 무척이나 매력적이라며, 앨리스에게 시선이 돌아가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그런 앨리스를 기용한 내가 신의 한 수를 보여주었다며.
그동안 행보를 보았을 때, 이번 <우주>에 대한 계획도 모두 내가 짰을 것이라 확신하고 있었다.
내 곡에 대해 호평하는 사람들은 대중뿐만이 아니었다.
직접 연주를 보러 왔던 직젝 워커와 소이 플라워.
발사 직후 진행된 인터뷰에 두 사람이 나타났다.
두 사람은 시작부터 <우주>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그야말로 보이는 음악’이라며.
먼저 그 광경을 보고, 들을 수 있어서 영광이었다는 표현까지 더했다.
-만약 외계인이 리히트의 곡을 듣는다면 어떨 것 같습니까?-
-당장 지구로 오고 싶을 겁니다. 그 정도로 좋은 음악이거든요.-
익살스런 질문에 소이가 재치 있게 답하자, 질문을 한 앵커와 이를 듣고 있던 단원들도 웃음을 터뜨렸다.
단원들도 소이의 말에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함께 영상을 보고 있던 앨리스 또한 자신이라도 그럴 것이라며.
만약 나를 모른 채로 <우주>를 들었다면 단박에 팬이 되었을 것이라고 표현했다.
앨리스를 비롯해 한창 단원들이 자축하는 사이.
큰아버지가 휴대폰을 보더니 내게 다가왔다.
“벨기에에서 너를 초청하고 싶다는구나.”
큰아버지가 말한 것은 벨기에라는 나라 이름 하나뿐이지만, 나는 단번에 그곳에서 나를 부른 이유를 알아차렸다.
전 세계 클래식 음악가들이 모이는 5월의 벨기에.
그곳에서 나를 부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