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시작부터 천재 피아니스트-242화 (242/250)

242화

매년 5월.

벨기에 브뤼셀에서는 모든 클래식 음악가들의 축제가 열린다.

피아노, 바이올린 등 총 5개 항목에서 최고 수준의 명망을 가진 콩쿨.

퀸 엘리자베스 콩쿨이 열린 것이다.

퀸 엘리자베스 콩쿨.

1937년부터 이어져 온 역사 깊은 콩쿨이었다.

벨기에에서 탄생한 세계적인 바이올리니스트, 외젠 이자이를 기리기 위해 만들어졌다가 점차 범위를 넓혀가며 발전한 대회.

지금은 벨기에 국왕의 왕비, 엘리자베스의 이름을 따서 더욱 그 위상을 높이고 있었다.

어마어마한 위상에 1위뿐만 아니라, 파이널리스트 12인에만 들어도 그 실력을 인정받는다고 표현할 정도.

매년 퀸 엘리자베스 콩쿨에 나온 12인이 클래식을 이끌어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게다가 퀸 엘리자베스 콩쿨에는 특이한 전통이 있었다.

바로 파이널리스트에 올라온 연주가들을 샤펠이라는 곳에 가둔 채 연습을 시킨다는 것.

휴대폰 수거는 물론, 외부와의 접촉을 완전히 차단한 채 연습을 하기에 ‘가둔다’라는 표현까지 쓰는 것이었다.

내 이름을 걸고 만들었던 이안 국제 콩쿨도 이러한 퀸 엘리자베스에서 영감을 얻었다.

그런 자리에 초청장이 온 것은 <우주>가 공개된 후였다.

친애하는 젊은 거장, 박이안님께.

귀하의 연주는 늘 클래식에 귀감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한 귀감에 많은 후배들이 따르고, 더 나은 클래식 아티스트가 되려 하고 있습니다.

거장께서 연주를 들어주신다는 것만으로도 자라나는 새싹에게는 큰 귀감이 될 것입니다.

부디 첼로 콩쿨의 파이널 무대를 더욱 빛나게 해주시길 조심스레 청해봅니다.

-퀸 엘리자베스 콩쿨 재단 이사, 퀴노른 올림.

첼로 콩쿨의 마지막, 파이널 무대 참관 초청 편지.

사실, 퀸 엘리자베스에서 보낸 초청장은 이것 하나가 아니었다.

이미 피아노와 바이올린에 이르기까지.

각 악기의 콩쿨 때마다 심사위원으로 추대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히거나, 참관을 제안하기도, 심지어 뮤직 샤펠에서 가르침을 부탁하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하지만, 내가 그 모든 것을 거절한 것은 당시 내가 <우주>를 작업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 사이 퀸 엘리자베스 콩쿨은 어느덧 막바지.

첼로와 성악을 앞두고 있었다.

그중 첼로 콩쿨은 세미파이널을 마치고 마지막 6인 중 하나를 뽑는 마지막 결승을 앞둔 상황.

그럼에도 주최 측에서는 마지막까지 내게 초청장을 보냈다.

초청장을 다시금 확인한 나는 단원들을 떠올렸다.

‘첼리스트들에게는 좋은 기회가 될 테니까.’

청음(聽音).

음악가에게 듣는 것은 무척 필수적인 것이었다.

비단 자신의 연주를 듣고 개선하는 것이 아닌, 때로는 다른 이들의 연주를 듣고 그 특이점에서 장점을 가져오는 것도 필요하다.

배움에는 끝이 없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이미 실력적인 면에서 출중한 단원들이지만, 되레 그렇기에 더욱 면밀하게 연주자들의 선율을 듣고 그사이의 특이점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리히트 오케스트라에 있는 첼리스트는 서령을 비롯해서 총 4명.

내 제안에 첼리스트 단원들 또한 모두 벨기에행을 택했다.

브뤼셀의 팔레 데 보자르 예술센터.

매년 퀸 엘리자베스 콩쿨이 펼쳐지는 무대였다.

이미 객석에는 콩쿨을 참관하러 온 사람들이 가득 메우고 있는 상태.

주최측의 배려로 가장 앞열 중앙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잠깐 앉아있을 찰나.

백발이 성성한 사내가 내게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번 콩쿨의 주최를 맡은 퀴노른이라고 합니다.”

“초청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일정이 바빠 이제야 답을 드렸습니다.”

“충분히 이해합니다. <우주>의 선율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지요.”

퀴노른은 <우주>를 듣고 놀라움을 감출 수 없다고 표현했다.

기본에 가까운 화음에서부터 마이너와 메이저를 모두 활용한 화음.

기본에서 시작하여 복잡한 화음의 전개로 만들어간 곡이 가히 신묘하다고 덧붙였다.

거기에, 퀴노른은 자리에 와준 것만으로도 감사하다는 말을 잊지 않았다.

몇 번이나 감사함을 표현하던 찰나.

홀 전체로 방송이 울려 퍼졌다.

-곧 콩쿨이 시작될 예정이오니, 참관자 및 내빈 여러분께서는 자리에 착석하시어…-

사회자의 방송과 함께 퀴노른이 인사를 건네고 자리에 돌아갔다.

퀸 엘리자베스 콩쿨의 첼로 파이널.

선별된 6명이 무대에 올라 연주를 펼쳤다.

3대 콩쿨의 저력에 걸맞게, 각 참가자의 연주는 자신이 왜 이 자리에 올라와 있는지 여지없이 보여주었다.

연주 실력은 기본. 거기에 화려한 보잉과 스타카토들을 자연스럽게 연결하는 감각까지.

하지만, 무언가 특이점을 이야기하라고 하면 크게 두드러지지 않는 연주들이었다.

이미 내 머릿속에서 4명은 지나간 상태.

다음 다섯 번째 참가자가 무대에 들어오자 주변의 분위기가 다소 달라졌다.

큰 소리를 내진 않았지만, 묘하게 환영하는 듯한 제스처를 취하는 사람도 있었고, 심사위원들의 눈빛도 사뭇 기대감이 감도는 것이 보였다.

밝은 갈색 머리칼이 인상적으로 보이는 남성 참여자.

남자의 모습은 사뭇 전생의 기억 속에 있는 귀족의 이미지와 비슷했다.

‘과연 실력도 인기에 비례할까.’

나는 들어온 사내를 쳐다보며 귀를 열었다.

만약 그의 연주에 특이점이 있다면 우승도 노릴 수 있으리라.

연주를 앞둔 그의 모습 또한 자신감으로 넘쳤으니까.

심사위원들을 향해 인사를 건넨 사내가 이내 활을 고쳐잡았다.

***

피에트 바우만.

그는 일찍부터 영재 소리를 들은 독일의 첼로 유망주이자, 현재 첼로계에서 가장 눈여겨보는 아티스트였다.

이미 첼로계의 권위 높은 국제 콩쿨들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뒀기에.

독일뿐만 아니라 각국의 첼로 권위자들의 이목을 끌고 있었다.

세계 3대 첼로 콩쿨 중 2개의 콩쿨에서 우승을 거머쥔 유일무이한 사람.

이번 퀸 엘리자베스 콩쿨에 우승하면 세계 3대 첼로 콩쿨 트리플 크라운이라는 전무후무한 성과를 이룩할 예정이었다.

무대에 오른 피에트는 귀족스럽게 인사를 하며 청중들을 살폈다.

응원과 격려가 가득 담긴 박수 세례.

그런 사람들의 반응에 피에트는 익숙한 듯 웃음을 지었다.

‘늘 하던 대로 하면 되겠지.’

일찍부터 그의 연주에 토를 달거나, 부정적인 인식을 더한 사람은 없었으니까.

매몰차다고 소문난 그의 스승조차 피에트에겐 큰소리를 하지 않았다.

그만큼 뛰어난 연주 실력을 가지고 있기에 콩쿨에서 연이어 우승한 것이라며.

피에트는 이미 자신의 1위 수상을 예견하듯 하고 있었다.

그 자신감에 힘입어.

피에트는 첼로 현을 향해 거침없이 활을 내디뎠다.

Poulenc Cello Sonata FP143.

프란시스 풀렝코가 작곡한 첼로 소나타가 보자르 예술 센터에 울려 퍼진다.

속도는 그리 빠르지 않지만, 섬세한 왼손 컨트롤과 오른손의 보잉이 특징인 곡.

저음과 고음을 오가는 면모로 상당한 난이도를 가지고 있는 곡이었다.

1악장의 알레그로.

행진곡을 연상케 하는 빠른 선율과 함께, 발걸음을 형상화한 선율이 빠르게 흘러나간다.

피아노의 글리산도와 함께 내딛는 빠른 선율의 변화.

선율을 들은 심사위원들도 눈썹을 들썩이며 고개를 끄덕인다.

뛰어난 기교를 고스란히 보여줄 수 있는 1악장이 끝나자, 이번에는 1악장보다 속도는 느리되, 풍성한 음색이 돋보이는 2악장이 나타난다.

느린 만큼 표현의 깊이감이 중요한 2악장.

그 또한 피에트는 무리 없이 소화해냈다.

자신 있는 미소와 함께 굵직한 선율을 토해내자 청중에서는 황홀경에 빠진 듯 화사한 표정을 보였다.

‘이미 끝났네.’

청중들의 대부분은 물론, 심사위원 몇몇도 무척 긍정적인 표정을 짓고 있었으니까.

연주를 마치면서도 피에트는 스스로 자축하듯 활대를 높게 올린 채 인사를 건넸다.

‘내가 아니면 누가 받겠어.’

자만은 물론, 객관적으로 평가했을 때 앞서 연주했던 네 사람은 크게 돋보이는 점이 없었으니까.

무리 없이 우승을 할 수 있으리라.

무대를 내려가려던 그때.

피에트의 눈에 다음 차례를 기다리고 있던 소년이 보였다.

앳된 얼굴을 한 동양인 소년의 출연에 피에트는 옅은 웃음을 지었다.

설마 자신이 앳된 동양인에게 지겠냐는 생각으로.

무대를 내려가는 피에트는 의기양양하게 제 갈 길을 갔다.

***

‘우와… 저 사람은 누구지?’

서령은 피에트의 연주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여유로운 미소를 머금은 채 화려한 보잉을 이어가는 모습은 가히 천재의 본모습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으니까.

유려하게 나아가는 선율은 물론, 강세를 적절하게 활용하여 곡의 이미지를 만들어가는 것까지.

서령을 비롯해 함께 온 나머지 세 명의 첼리스트들도 옅은 감탄사를 토해냈다.

하지만, 피에트를 연주를 듣던 서령은 군데군데 미간이 좁아졌다.

‘이 이질감은 뭐지?’

분명 연주 스킬을 비롯해 소리 또한 무척 좋았다.

첼로라는 악기의 특색을 최대한으로 이끌어내는 보잉과 기교, 거기에 적절한 무대 매너까지.

흠이라고 잡으려야 잡을 데가 없는 유려한 연주였다.

그런데 왜 그럴까.

피에트의 화려한 연주가 좋으면서도 마음에 와닿지는 않았다.

머리에서는 감탄사를 연발하고 있지만, 가슴은 그저 조용하달까.

서령이 한참 동안 의문을 가지고 있을 찰나.

이안이 옆에서 툭 말을 꺼냈다.

“자신의 거만함에 잡아먹히면 안 될 텐데.”

혼잣말에 가까운 말이었다.

하지만, 이안의 말이 들려옴과 동시에 서령의 머리에서는 무언가 퍼즐이 완성되듯 확신이 떠올랐다.

그녀가 계속해서 느꼈던 묘한 이질감.

이안의 말에 힌트를 얻자 정답이 튀어나왔다.

‘너무 자만하고, 연주를 앞서가려고 하고 있어.’

피에트가 만들어내는 첼로 선율은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화려한 기교가 적절하게 섞인 연주는 그야말로 금상첨화(錦上添花)였으니까.

하지만, 그런 피에트가 망각한 것은 이번 콩쿨 무대가 홀로 하는 연주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피에트가 연주하고 있는 첼로 소나타.

대개 첼로 소나타는 피아노와 함께 연주를 하는 곡이었다.

그 때문에 첼로 소나타 연주에는 첼로뿐만 아니라, 피아노도 함께 오른다.

퀸 엘리자베스 첼로 콩쿨 파이널도 당연히 피아니스트와 함께 연주를 진행한다.

피아노의 반주에 맞춰, 첼리스트가 멜로디를 넣어 곡을 더욱 풍성하게 하는 것이 첼로 소나타의 묘미인데.

피에트의 연주는 피아노와 함께 나아가기보단 경쟁에 가까운 소리를 만들어내었다.

항상 한발 앞서 나가려는 듯 나아가는 음색.

서령은 그 소리가 전체적인 밸런스를 무너뜨리고 있다고 확신했다.

게다가 최종적으로.

‘단장님이 고개를 저으셨으면 말 다했지.’

피에트의 연주가 끝나고 사방에서 탄성이 흘러나올 때.

오직 이안만 무언가 느낀 듯 고개를 저었다.

서령 또한 이안과 의견이 크게 다르지 않았기에.

작게 고개를 저으며 다음 사람을 맞이했다.

‘되게 어려 보이는데?’

피에트에 이어 들어온 연주자는 무척 앳된 얼굴을 한 동양인 소년이었다.

키는 컸지만, 얼굴에는 어린 느낌이 여지없이 남아있었기에.

과연 중후한 첼로의 선율을 고스란히 재현할 수 있을까 걱정이 될 정도.

그러나.

‘세상에.’

소년의 연주가 시작되었을 무렵.

서령은 자신도 모르게 몸이 앞으로 나아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비단 서령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함께 온 세 명의 첼리스트들 또한 서령처럼 목을 뺀 채 소년의 연주를 바라보고 있었다.

더 나아가 다른 청중들도 몸을 앞으로 뺀 채 연주를 듣고 있었으니.

서령은 놀라움과 함께 냉철한 기색으로 소년의 연주를 바라봤다.

‘어떻게 이런 선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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