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8화
화려한 개막식을 시작으로 치러진 대한민국 월드컵.
수많은 나라의 시선이 한국으로 꽂혔다.
그중 단연 돋보인 것은 대한민국이었다.
월드컵 3위.
2002년에 있었던 4강 전설을 다시금 부활시킴과 동시에, 3, 4위 전에서 승리하며 32개 팀 중 세 번째로 우뚝 선 것이다.
[전 세계 축구팬, ‘한국이 새로운 역사를 썼다.’ 평가.]
[한국, 다음엔 2위에 도전하나? 전 세계 분석가. 가능성 있다고 판단.]
그동안 월드컵은 1위에서 4위까지 모두 서방국가가 차지하기 마련이었는데.
지난 2002년 한국의 4위에 이어, 이번 월드컵에서 3위를 차지했다는 것에 외신 또한 열렬한 반응을 보였다.
그 성공 신화의 중심에 선 사람이 바로 기백인데.
그런 기백은 되레 나를 향해 감사표를 던졌다.
[연기백, ‘3위 신화는 리히트 오케스트라의 <결심>이 있었던 덕.’이라고 발언.]
[FIFA. 응원곡을 만들어준 리히트에 대해 감사의 뜻을 전해.]
[대한축구협회장, 향후 10년간 <결심>을 공식 응원가로 지정하겠다고 선언하다.]
[깜짝 등장한 강재익. 이안과 의리를 지키기 위해 전날 한국으로 귀국해서 더욱 화제.]
내가 만든 <결심> 또한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곡 자체는 물론, 재익 깜짝 출연, 기백의 직접적인 언급까지.
월드컵의 열기가 식었음에도 <결심>에 대한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다.
하물며, 이번 일로 반가운 손님도 찾아왔다.
“오랜만입니다. 단장님.”
일전에 북한 무대를 꾸릴 때 처음 마주했던 최진웅 대통령 비서실장.
정부의 최측근인 그 또한 리히트 재단의 문을 두드렸다.
이번 월드컵은 상상 이상의 관객들이 몰렸다고.
본래 월드컵을 유치하는 국가는 자금난에 빠진다는 징크스를 단번에 깨뜨렸다며.
이 모든 것이 나와 리히트 덕이라며 낮은 자세를 취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금관문화훈장을 아껴둘 걸 그랬습니다.”
국가에서 주는 예술계 최고 권위 훈장, 금관문화훈장.
나는 이미 런던 올림픽의 개막 무대를 오른 경력으로 수여 받은 적이 있던 것이었다.
그 때문에 어떻게 이번 일에 대한 감사함을 표할지 무척 고민했다고.
“대통령님께서 부디 이것으로라도 감사의 뜻이 전해지길 바란다고 하셨습니다.”
크리스탈로 만들어진 작은 트로피.
대통령의 친필 사인이 새겨진 감사패였다.
형식적인 감사가 아닌, 대통령이 직접 내용을 고안한 감사패라며.
이 때문에 비서실장인 자신이 직접 전달하러 왔다고 덧붙였다.
심지어 선율에 대한 이야기는 국내에서 끝나지 않았다.
[<결심>. 이 곡은 축구인 모두의 심장을 아우르는 곡이라 생각합니다. - 브라질 대표팀]
[리히트의 선율을 들을 수 있었던 것은 또 다른 영광이었습니다. - 프랑스 대표팀]
[비록 한국에 패했지만, 전혀 암울하지 않습니다. 이미 리히트의 선율이 선물처럼 저희의 가슴에 맺혔으니까요. - 이탈리아 대표팀]
브라질과 프랑스, 이탈리아 등.
월드컵 경기를 위해 한국을 찾았던 모든 국가에서 재단을 통해 소감을 보내왔다.
<결심>을 듣는 것만으로도 묘한 울림이 느껴졌다며.
단순히 한 국가의 팀을 응원하는 것을 넘어, 축구인 전체를 아우르는 명곡이 탄생했다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어떠한 감독은 내 곡을 듣곤 ‘축구 인생 중 가장 뿌듯한 순간’이라고 표현할 정도.
<결심>에 축구선수들의 노고를 담은 것이 느껴진 모양이다.
심지어 시간이 지날수록 응원곡은 다른 국면을 맞이했다.
한국의 응원곡임에도 불구하고, 전 세계 사람들이 ‘대한민국’을 부르짖으며 <결심>을 따라 부른 것이다.
재익의 영상을 비롯해 세계 각국의 인플루언서와 SNS 사용자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따라부르며 영상을 올리는 것이 일종의 트렌드처럼 자리 잡았다.
“이 정도면 국민송인데요?”
아람이 재치 있게 말했지.
주변 사람들이 큰 이유 없이 ‘대한민국’을 부르짖고 다닌다고.
단원들도 연주한 이후에 <결심>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앞으로 연주할 때 <결심>이 생각나서 다른 곡에 집중하지 못할 거라며 우스갯소리를 하기도 했다.
월드컵 준비로 꽤 힘을 뺐을 단원들인데.
누구 하나 약속하지 않았지만, 단원들은 일제히 체임버홀에 출근해서 연습을 이어가고 있었다.
언제든지 연주할 준비가 되었다는 듯.
고요하면서도 강한 열망이 단원들에게서 느껴졌다.
앞으로의 일정을 생각하던 나에게, 큰아버지가 휴대폰을 잠깐 쳐다보더니 내게 이야기를 건넸다.
“이안아. 연기백 선수가 식사라도 대접하고 싶다는데. 어떻게 할래?”
***
서울 외곽의 최고급 한정식 식당.
기백이 그동안 숱한 한정식집을 가보았지만, 이곳만 한 곳이 없었다.
예스러움이 느껴지는 인테리어에, 정갈하게 놓인 반찬들.
본래 한 달 전부터 예약을 해야 하는 곳이지만, 이안과 함께 오기 위해 식당 측에 몇 번이고 양해를 구했다.
“제가 아는 한 제일 맛이 좋은 곳인데. 입에 맞으시려나 모르겠습니다.”
좀처럼 누군가를 대접해본 적이 없던 기백이 머쓱한 듯 말했다.
게다가 평소에는 이런 화려한 한정식집에 오기보다는 양 많은 백반집을 가곤 했으니까.
이안을 위해 어렵사리 예약한 곳인데, 혹 이곳 음식이 이안의 입맛에 맞지 않으면 어쩌나하고 걱정했다.
하지만, 기백의 우려와 달리, 이안은 그저 담담하게 갈비 한 점을 집어 들었다.
“괜찮습니다. 충분히 맛있는걸요.”
혹 이안이 불편하게 생각하진 않을까 걱정했는데.
아무렇지도 않은 듯 식사를 하는 이안의 모습에 기백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식사가 마무리되어 갈 때쯤, 기백은 차근히 이야기를 이어갔다.
“무척 바쁘실 테지만, 감사하다는 말씀을 꼭 드리고 싶었습니다.”
사실 바쁜 것으로 치면 기백이 더했다.
월드컵을 마치고 곧바로 유럽 리그 경기에 뛰어야 했으니까.
그럼에도 이안과 식사 자리를 만든 이유는 월드컵 성과가 비단 자신의 것이 아니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월드컵 3위.
그것도 축구 강국 중 하나로 손꼽히는 이탈리아를 상대로 승리를 거둔 순간은 기백에게서도 잊혀지지 않았다.
돌진해오는 상대 선수들을 피한 것과, 매끄럽게 이어진 패스, 자신에게 주어진 골 기회까지.
모든 것이 촘촘히 짜인 악보처럼 나아가지 않던가.
분명 훈련 때 이렇게까지 좋은 시너지가 나오진 않았는데.
자신을 비롯해 다른 선수들 모두 무언가 달라져 있었다.
‘경기를 뛰는 내내 <결심>이 들려왔으니까.”
기백은 아직도 경기 때 장면이 선명했다.
마치 이안의 지휘에 사람들이 일제히 노래를 부르듯.
<결심>의 박자에 맞춰 ‘대한민국’을 부르짖는 국민들의 목소리가 경기장을 가득 메웠다.
비단 <결심>에 취한 것은 관객뿐만이 아니었다.
사뭇 흥분될 때는 정확한 박자처럼 나아가 그를 진정시켰고, 지칠 즈음엔 화려한 선율로 기백을 다시 움직이게끔 만들었다.
음표들을 이음줄로 연결하듯 자연스럽게 나아가는 패스와, 결정적일 때 나아가는 선율처럼 쏘아지는 슈팅.
이루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를 느끼지 않았던가.
몇 달간 같은 훈련을 했음에도 변화가 없었는데.
리히트 오케스트라의 선율을 들은 후 일어난 결과가 놀랍기만 했다.
“저희는 그저 연주만 했을 뿐입니다.”
담담한 이안의 모습이 신선처럼 보였다.
욕심을 모두 내려놓고 자신의 길을 갈 것 같은 모습.
거장으로서 이안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영국에서도 단장님의 인기가 대단합니다.”
그저 이안을 포장하기 위한 소리가 아니었다.
기백이 활동하고 있는 영국 무대에서도 이안의 인기는 대단했으니까.
팀원 중 이안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쉬는 시간에 기백이 리히트 오케스트라의 곡을 틀어놓으면 다른 팀원들도 따라 흥얼거릴 정도.
기백처럼 경기에 임하기 전까지 리히트의 선율을 감상하는 팀원도 있었다.
“축구에 관심이 있으시면 말씀해주십시오. 언제든지 티켓을 드리겠습니다. 저희 팀원들도 단장님이 오시면 무척 반가워할 겁니다.”
기백이 속한 구단은 유럽에서도 명망 높은 구단이었다.
전 세계를 아울러 두터운 팬층을 지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정도.
매 경기 티켓이 매진되는 것은 기본이었다.
그 때문에 웃돈을 주고 암표를 사는 경우도 많았는데, VVIP 좌석은 천만 원에 달하는 금액에 암거래되곤 했다.
기백은 이안을 비롯해 리히트 오케스트라 전체가 온다고 해도 모두 자신이 감당할 자신이 있었다.
거기에 단원들이 원하는 사인볼이나, 굿즈가 있으면 주겠다는 말까지.
기백의 말에 이안은 짧게 몇 마디를 건넸다.
“그럼 몇 개 주시겠습니까? 단원들 중 연기백 선수의 팬이 많거든요.”
이안 또한 빈말이 아니었다.
기백의 명성은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무척 높았으니까.
리히트 단원들 중 기백을 모르는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
괜히 해외에서 기백이 출전하면 ‘Go! Yeon!’이라고 구호를 외치는 것이 아니었다.
기백은 이안의 말에 감사와 함께 사인 볼 등을 보내겠다고 덧붙였다.
“단장님은 필요하지 않으십니까?”
기백이 기대감 가득한 표정으로 물었다.
자신의 연예인이나 다름없는 이안이 자신의 소장품을 가진다.
그것만큼 성공한 일이 또 없을 테니까.
기백의 질문에 이안도 사인볼 하나를 부탁했다.
더 많은 것을 해주고 싶었던 기백이 조금 아쉬워하려던 찰나, 이안이 짧은 말을 덧붙였다.
“오늘 말고도 날은 많을 테니까요.”
이번에 받는 사인볼은 그저 시작일 뿐이라는 듯.
더 먼 미래를 바라보는 것 같은 이안의 말에 기백은 옅은 감탄사를 내뱉었다.
동시에 기백은 설레는 마음을 지울 수 없었다.
앞으로 선수로서 기백을 기대하겠다는 말처럼 들렸다.
마치 다음에는 더 큰 무대에서, 더 큰 성과를 이룰 수 있을 것이라 격려하는 것처럼.
이안의 말에 기백은 괜스레 주먹을 꽉 쥐었다.
‘다음엔 트로피를 쥔 채 마주해야지.’
다음 월드컵까지 4년.
그때는 당당하기 월드컵 1위를 달성하고 이안을 만나리라.
또 다른 ‘결심’을 한 기백이 자신 있게 미소를 지었다.
***
음악실.
나의 첫 자작곡 <환생>에 이어 최근 공개한 <결심>이 탄생한 곳이었다.
평소에는 끝없는 연습과 곡 작업으로 피아노 선율이 펼쳐지는 곳이었는데.
오늘은 고요하기만 했다.
‘벌써 3년이나 지났네.’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이 지난 탓일까.
음악실에도 꽤 많은 변화가 일어난 상태였다.
아버지의 피아노만 있던 방 중앙에는 내 피아노가 들어섰고.
새로 들인 책장에는 내가 그동안 만든 자작곡 악보들을 비롯해 하르모니아사에서 나온 음반들과 루트비히 출판사에서 낸 교재가 꽂혀있었다.
매번 반짝이던 내 피아노도 꽤 색이 바랜 상태였다.
처음 왔을 때는 금빛으로 반짝이던 페달이 지금은 닳아버린 탓에 빛을 잃었다.
수많은 연습과 창작의 결과물이었다.
방을 둘러보던 나는 한편에 전시되어 있던 바이올린을 향해 다가갔다.
어릴 적부터 신동 소리를 듣게 만든 장본인이자, 20년 가까이 나의 음악 인생을 책임졌던 바이올린.
어찌 보면 여기서 시작이었지 않은가.
전생을 떠올리고, 음악의 의미를 되찾고, 지금의 자리에 오르기까지.
의미를 찾지 못해 내려놓았지만, 음악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가치 있는 일이었다.
‘모두가 즐기고, 함께할 수 있는 음악.’
내가 생각한 음악의 양식을 사조로 정립하고, 이를 퍼뜨리기까지.
이미 전 세계에서는 ‘뉴 클래식’이라는 이름에 이어 나의 스타일 자체가 하나의 장르라며 표현하고 있었다.
혼자보다 다수의 힘이 더욱 유용할 것이라 판단했던 사조의 유행.
그 중심에는 리히트 오케스트라가 있었다.
내가 원하는 소리를 만들고, 그 소리를 모두에게 이해시키는 데 어려움이 없으니.
이제 다른 행보를 준비해야 할 때가 되었다.
징징징-
새벽이 넘은 늦은 시간이었지만, 내 휴대폰이 계속해서 울렸다.
리히트 재단 이사장, 민호의 전화.
아직 전화를 받지 않았음에도 나는 그가 무슨 말을 할지 알 수 있었다.
내가 민호에게 부탁한 것 중 하나가 있었으니까.
-단장님. 모든 준비가 끝났습니다.-
전화를 받았을 때, 민호는 길게 설명하지 않았다.
그 또한 긴 말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이제 오랜 시간 동안 준비한 계획을 실행으로 옮길 차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