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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화 〉 0. Prolog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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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뭐야! 진짜 해낸 거야?! 진짜 막은 거냐고!!]
활기찬 인상의 소년이 소란을 떨며 외쳤다. 어울리지 않게 권총을 하나 들고 있는 소년의 주위에서 동료들이 한 마디씩 내뱉는다.
[허, 이걸 진짜 해내다니.]
[이제 아무래도 좋아…. 집에 가서 좀 쉬고 싶다….]
[집에 가긴 무슨! 이렇게 멋진 일을 해냈는데 맥 빠지게 그냥 집에 간다고?]
[오랜만에 옳은 소리! 오늘 같은 날은 맥주라도 한 잔 해야지!]
떠들썩한 분위기가 연출되는 가운데, 화면이 전환되어 다른 장소를 비춘다.
[마지막으로 남길 말은.]
[쿨럭…. 빌어먹, 을.]
먼지가 내려앉은 폐건물. 때마침 노을이 지며 대기 중의 먼지들이 반짝반짝 빛나는 환상적인 배경을 등진 남자와 그의 앞에 쓰러진 또 다른 남자.
[난 그저, 쿨럭! 없는 자들의 구제를 원했을 뿐인데…….]
쓰러진 남자가 피를 쏟아내며 서서히 눈을 감는다. 그는 흐린 목소리로 억울함을, 분노를 토로했다.
[망할, 리델….]
툭. 고개가 떨어지고 홀로 선 남자가 시선을 하늘로 돌린다.
뒤따르듯 화면이 서서히 하늘을 향하고, 끝내 화면이 붉은 노을로 가득 차올랐다.
“와…. 명작이라더니 진짜 장난 아니네.”
화면이 검게 변하며 게임의 크레딧이 올라오는 것을 본 남자, 이진현이 감탄했다.
‘더 사이버펑크(The Cyberpunk)’. 출시된 지 3년 지난 이 명작은 지난 두 달 간 그의 여가 시간을 모조리 앗아갔다.
동료들, 그리고 적으로 설정된 NPC들과의 상호작용과 스토리 진행 중 나눠지는 수많은 분기점들. 묘한 여운을 남기며 또 다른 얘기를 암시하는 듯한 엔딩까지.
무려 4테라바이트라는 어마어마한 용량을 자랑하는 게임답게 그 내용물 역시 알차기 그지없었다.
“근데 이런 스토리가 네 개는 더 있다고?”
하지만 그렇게 한 번 엔딩을 봤다고 끝이 아니다. ‘더 사이버펑크’ 내부의 도시는 총 5개가 있으며, 그는 이제 단 하나의 도시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를 끝냈을 뿐.
진짜 괜히 세기의 명작이라고 불리는 게 아니었다. 이진현은 다른 도시에서 또다시 펼쳐질 이야기에 가슴이 두근거리는 걸 느꼈다.
플레이타임 160시간. 이쯤 되면 질릴 만도 한데 그런 기색이라곤 전혀 보이지 않는다.
“아, 어쩌지.”
이진현은 고개를 돌려 시간을 봤다. 시계의 짧은 바늘이 1이라는 숫자를 가리키고 있다.
퇴근하고 씻은 게 일곱 시 즈음이니 오늘도 6시간 정도를 붙잡고 있었던 것이다. 내일도 출근하려면 7시 30분에는 일어나야 하니 지금 당장 잠든다고 해도 여섯 시간 반이 끝이다.
하지만 엔딩의 여운에 잠겨서 이른바 뽕이 차오른 이진현은 당장 잔다는 선택지를 고르지 못했다.
“자야하긴 하는데…. 그래도 2회차 설정만 하고 자자.”
게임의 크레딧 이후 나오는 쿠키 영상을 모조리 봐주고 메인 화면으로 돌아간다. 자신의 선택에 따른 뒷이야기의 결과에 다시 한번 감탄하던 진현은 곧 그럴 때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빠르게 마우스를 움직였다.
“어디보자.”
새로운 이야기를 시작하려면 새 게임과 새 게임+가 있는데, 진현은 두 가지 선택지를 앞에 두고 고민했다.
새 게임은 말 그대로 새 게임, 새로운 캐릭터를 생성해 게임을 진행하는 것이고, 새 게임+는 기존에 사용했던 캐릭터를 계승해 새로운 게임을 진행하는 것이다.
새 게임과 새 게임+에 마우스를 오르락내리락 하던 진현은 곧 새 게임+가 아닌, 새 게임을 클릭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지.”
1회차를 정상적으로 끝냈으니, 이번 2회차에는 컨셉을 잡고 전혀 다른 스타일로 진행해볼까 한다.
이번에는 좀 더 시원시원하고 호쾌한 스타일로.
잠시 컨셉을 고민하던 이진현은 머릿속에서 자신이 플레이할 캐릭터의 설정을 대충 잡았다.
1회차에는 사이보그였으니, 이번에는 강화 인간?
아니, 1회차에는 총잡이 플레이를 했으니 이번엔 칼잡이를 할 건데, 강화인간은 뭔가 간지가 없잖아.
칼잡이의 로망이 있지, 사이보그나 강화 인간 칼잡이? 그런 건 순수 인간 칼잡이에 비해 너무 폼이 안 났다.
순수 인간 주인공에 대한 동료들의 상호작용 대사도 좀 듣고 싶었고.
“그럼 내츄럴로 결정인데….”
내츄럴, 그러니까 순수 인간에는 한 가지 단점이 있다.
그것은 바로 신체 능력을 일정치 이상 올리지 못한다는 것. ‘더 사이버펑크’ 내에서 캐릭터의 신체능력 최대치는 LV10이었는데, 강화나 개조를 거치지 않은 순수 인간은 무슨 수를 써도 LV5를 넘기지 못했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인간의 신체 능력이 단련으로 성장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고, 인간을 초월하게 해주는 강화 시술이나 몸 자체를 기계로 대체하는 개조 수술에 비해 그 한계가 터무니없이 짧았으니.
하지만 이번 회차는 좀 더 시원하게 즐기고 싶었던 이진현에게도 방법이 있었다.
“이번엔 컨셉 제대로 잡고 가자고.”
바로 ‘치트Cheat’와 ‘트레이너Trainer’. 프로그램을 통해서 게임 내의 수치를 조작,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바꾸는 것이다.
‘더 사이버펑크’는 출시된 지 3년이 지난 게임이었고, 그런 만큼 치트나 트레이너 따위는 쉽게 구할 수 있었다.
지난 회차는 밑바닥에서부터 시작해 엔딩을 봤으니 이번 한 번 쯤은 이런 것도 괜찮지 않겠는가.
이진현은 치트와 트레이너를 통해 캐릭터 초기 능력치와 숙련도를 대폭 수정했다. 그리고 기존에 구매해뒀던 커스터마이징 데이터를 불러오는 것으로 캐릭터 설정은 끝.
잿빛 은발과 진청색 눈동자. 사납게 미소 짓고 있는 미남자가 삐딱하게 선 채 게임의 시작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을 본 이진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 봐도 잘빠졌다니까.”
무려 5만원이라는 거금을 주고 커스터마이징 캐릭터를 산 보람이 있다. 게임에서마저 평범한 외모에 평범한 몸으로 살 필요는 없지 않은가.
“그럼 마지막으로 시작하기 전에….”
‘애쉬 론모어’. 이름을 설정하고, 자신이 제대로 캐릭터 설정을 마쳤는지 되돌아본다.
*
캐릭터 이름 : 애쉬 론모어
성별 : ◀ 남성Male ▶
*외모 설정*
(펼치기▼/접기▲)
성향 : 혼돈 – 중립
(펼치기▼/접기▲)
능력치 (현재/최대)
육체능력 – ◀ 12/10 ▶
정신력 – ◀ 10/10 ▶
잔여 능력치 포인트 0
숙련도(현재/최대)
도검류 – ◀ 12/10 ▶
총기류 – ◀ 0/10 ▶
사이버 네트워킹 – ◀ 0/10 ▶
탑승 – ◀ 0/10 ▶
제조 – ◀ 0/10 ▶
잔여 숙련도 포인트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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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케이, 이상 없음. 이대로 시작해볼까.”
캐릭터 시트를 확인 후 별다른 이상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이진현이 ‘캐릭터 설정 완료’를 누른 뒤, 지역 설정으로 넘어갔다.
그러자 중앙 연방 정부를 중심으로 모여 있는 다섯 개의 거대 도시가 떠올랐다.
존 시
웨인 시
코너 시
사이버 시
펑크 시
이진현은 떠오른 도시의 이름들을 보고 픽 웃었다.
“이건 뭐, 다시 보니 어이가 없네.”
‘더 사이버펑크’의 제작진에 대해 아는 사람이라면 도시의 이름들이 어딘가 낯익을 것이다. 1회차를 시작할 때는 아무것도 몰랐기에 그냥 넘어갔던 이진현이었지만, 어느 정도 게임과 제작사에 대해 알게 된 지금은 달랐다.
존 웨인 코너John Wayne Couner.
사이버펑크Cyberpunk.
도시들의 이름은 그냥 제작사 사장의 이름을 풀어놓은 것과, 게임의 배경이 되는 세계관을 뚝 잘라놓은 것이다.
웃기지도 않는 장난질이었지만 게임만큼은 그 누구도 인정할 수밖에 없도록 잘 만들어 누구도 그에 대해 뭐라 하지 못했다. 가끔 커뮤니티에서 놀림거리가 되긴 했지만.
아무튼, 도시 이름들을 다시 한번 보며 이전과 다른 감상을 내뱉은 이진현은 다섯 개의 도시 중 하나를 선택했다.
웨인 시로 결정하시겠습니까?
Y/N
웨인 시로 결정한 이유는 별 것 없었다. 존 시는 1회차에 클리어 했으니 넘기고, 나머지는 아는 것이 없으니 그냥 다음 순서인 웨인 시를 선택한 것이다.
진현은 나온 물음에 Y를 클릭했다. 그러자 모니터가 검게 변하며 화면이 전환됐다.
화면이 밝아지며 오프닝 영상이 나오려 했지만 그리고 거기서 게임 종료.
시작할 때 나오는 영상도 다른 것 같은데, 지금은 아껴두고 다음 날 퇴근한 뒤 맛볼 예정이다.
캐릭터 설정을 마치고 바탕화면으로 돌아온 이진현은 작업창의 시계에 시선을 뒀다.
[오전 2:02]
어느새 시간은 새벽 2시다. 시간을 본 이진현이 한숨을 내쉬었다.
“아…. 내일 또 피곤하겠네.”
원래 12시에는 컴퓨터를 끄고 자는 편이었는데, 오늘은 엔딩이다 2회차 설정이다 해서 시간을 넘겨버렸다.
이진현은 휴대폰의 알람을 오전 7시 30분에 알람을 맞추고 억지로 침대에 누워 눈을 붙였다.
‘내일도 칼퇴근하고 2회차 바로 들어가야지.’
라는 기대를 가슴에 안고.
그러나 다음날, 이진현이 눈을 뜬 곳은 더 이상 지구가 아니었다.
“…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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