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사이버펑크 게임 속 칼잡이가 되었다-2화 (2/230)

〈 2화 〉 1. 애쉬 론모어(1)

* * *

인간 이진현은 그냥 일반인이었다. 남들처럼 평범한 가정에서 평범하게 학교를 다니며 성장했고, 평범하게 일을 하며 먹고 살던 사회의 톱니바퀴 중 하나.

그는 앞으로도 자신의 평생이 그토록 평범하게 흘러갈 줄만 알았다.

……자신이 만든 캐릭터가 되어 게임 속 세상에 떨어지기 전까지는 말이다.

누가 그랬던가.

‘인생은 드라마보다도 드라마틱하고, 소설보다도 비현실적일 때가 있다’라고.

언젠가 이진현, 이제는 애쉬 론모어라 불리는 그가 인상 깊게 읽었던 문구다.

하지만 그것을 기억하고 있던 이진현도 그 문구가 이런 현실을 가리키는 것이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현실의 인간이 게임 속 캐릭터가 되어 살아간다니. 그런 건 비현실적 수준이 아니라 허구적인, 말 그대로 소설에나 있을 법한 일이 아닌가.

다음 회차의 캐릭터 설정을 마치고 게임 속 세상, 그것도 하필이면 빈민가에 떨어진 당시의 이진현은 한동안 혼란에 빠져 살았다.

가족, 친구, 재산, 심지어는 자기 자신의 몸까지 잃었다.

그런 와중에 강도들은 하루가 멀다 하고 달려들지, 슬럼의 주민들은 깔끔한 외모와 번듯한 기본 복장만 보고 적대감을 표하지.

그쯤 되면 혼란에 빠지지 않는 게 이상할 수준이다.

하지만 잠시간의 방황 끝에 그는 결국 현실의 이진현을 버리고, ‘애쉬 론모어’로서 게임 속 세상에 적응했다.

캐릭터 시트를 작성할 때 설정한 ‘혼돈 – 중립’ 성향 덕분인지, 아니면 이진현이라는 인간 자체가 그런 사람이었던 것인지 모르겠으나, 한번 마음먹으니 ‘애쉬 론모어’로서 적응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애쉬 론모어’가 지닌 힘이 그것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최고 수준의 기술력을 지닌 기업에서 전력을 다해 제작한 사이보그와 강화인간조차 한참은 초월한 신체능력.

8레벨만 돼도 세계 최고를 논하는 세상에서 한계치인 10레벨을 초과해 12레벨에 다다른 도검류 숙련도.

그가 2회차를 위해 설정한 캐릭터는 말 그대로 초인이라 해도 무방할 정도였고, 약육강식의 정글이나 다름없는 슬럼에서 살아남는 것을 넘어, 그 정점에 설 수 있었다.

그야말로 다행인 일이었다. 만약 그가 생성한 캐릭터가 모든 능력치와 숙련도가 1~2에 달하는 초기 캐릭터였다면 어땠을까.

아니면 반대로, 칼잡이 컨셉을 잡은 캐릭터가 아니라 천재 해커 컨셉의 캐릭터였다면?

십중팔구는 그냥 죽거나, 갱단에 잡혀 들어가 지금까지도 노예처럼 부려지고 있었을 것이다.

지금이야 오로지 개인의 무력만으로 슬럼의 유력자 중 하나가 된 애쉬였지만, 현실에서 조금만 잘못된 선택을 내렸다면 그 끝이 결코 좋지는 않았을 것이라 생각하니 정말 인생이 선택 한 번에 갈릴 수 있다는 걸 다시 느끼게 된다.

아무튼 그렇게 초인적인 힘으로 슬럼에서 군림하는 그였지만, 그에게도 큰 문제가 하나 있었다.

그것은 바로 신분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설정 후 게임 속 세상으로 들어오며 무슨 문제가 생긴 탓인지, 게임 1회차에서는 존재했던 신분과 초기 동료가 애쉬에겐 존재하지 않았다.

사이버펑크 속 세상에서 신분의 유무는 어쩌면 힘의 유무보다도 중요한 요인이었다.

그가 있는 게임 속 도시, 웨인 시를 비롯한 연방의 다섯 도시 중심가의 치안은 21세기 현대 사회의 지구와도 비교할 수 없다.

AI가 조종하는 치안용 드론이 무리지어 하늘을 날아다니고, 안면 인식 기능을 지녀 시 정부의 데이터베이스를 열람할 수 있는 CCTV가 빼곡히 깔려있다.

대단한 실력을 지닌 해커가 돕지 않는 이상 아무런 신분도 없이 도시를 거니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래서 무력과 재력을 갖고도 3년이 지난 지금까지 깨끗한 도심이 아니라 지저분한 외곽의 슬럼가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그가 이렇게 게임 속 세상에 들어오게 될 줄 알았다면 한 쪽에 완전히 치중한 기형적 캐릭터는 만들지 않았을 텐데.

2회차의 캐릭터를 설정할 당시에는 게임의 재미를 해치지 않기 위해 지나친 사기 캐릭터는 만들지 않았으나 지금은 그것이 아쉬웠다.

물론, 그렇다고 후회하는 것까진 아니다.

처음에야 슬럼이 지긋지긋하고 싫었지만, 힘이 있다면 슬럼은 오히려 도심보다도 천국 같은 곳이 될 수 있다.

이곳에선 오로지 힘이 전부였기 때문이다.

처절한 약육강식의 세계라는 것은 반대로 강하다면 얼마든지 약자들을 잡아먹을 수 있는 세계라는 것.

애쉬 론모어라는 초인은 그 약육강식의 세계의 왕이나 다름없었다.

지금도 보라. 지난 3년 간 슬럼에서 명성을 떨친 결과 이렇게, 지구에서는 꿈도 못 꿨을 값비싼 술과 아름다운 여자를 대접받고 있지 않은가.

“그래서?”

“그쪽 녀석들이 자꾸만 넘어오려고 하는 기색이 보입니다, 해결사 님께서 한 번 손을 써주시면 놈들도 이쪽을 넘보지 못할 텐데….”

깔끔한 정장을 차려입은 남자가 금발의 고급 접대부에게 눈짓했다. 그녀는 나긋나긋한 손길로 술을 따르고 애쉬 론모어의 어깨를 쓰다듬었다.

이곳은 그, 애쉬가 머무는 71구역 슬럼가 가까이에 위치한 63구역의 유흥가.

그의 영향력이 제법 강하게 미치는 곳 중 하나였다.

애쉬는 자연스럽게 고급 접대부의 손길을 즐기며 물었다.

“대가는?”

“30만 크레딧 정도를 준비했습니다. 당장 저희가 낼 수 있는 여유금의 한계치입니다.”

“30만 크레딧이라….”

남자, 의뢰인의 대답에 애쉬가 금액을 중얼거렸다.

30만 크레딧. 과거 그가 살던 지구, 한국의 원화로 따지면 약 6억 원에 달하는 거금이다. 그가 해결사 일을 하면서 받았던 의뢰 중에서도 상당히 위쪽에 위치한 큰 의뢰라고 할 수 있었다.

이곳 유흥가 외곽에 위치한 사업장 하나에서는 한 순간에 나올 수 없는 금액. 남자는 아마도 유흥가 내에 제법 세력을 갖춘 자산가일 것이다.

슬럼보다는 덜하지만 유흥가 또한 약육강식의 세계라고 할 수 있었다. 어느 정도 세력을 갖춘 남자가 굳이 자신을 초청해 도움을 구한다는 것은 상대방이 그 이상이라는 뜻.

“상대방 소속은 어디지?”

애쉬가 묻자 남자는 불안한 듯 잠시 뜸들이더니 대답했다.

“그게…, ‘뱀파이어’ 녀석들이라는 얘기가 있습니다.”

“뱀파이어?”

“예….”

확실히. 애쉬가 고개를 주억였다.

‘뱀파이어’는 슬럼에서도 손에 꼽는 대규모 갱단 중 하나로, 슬럼의 72구역과 73구역을 지배하는 거인이었다. 갱단 두목이 어느 로맨스 영화를 인상 깊게 봐서 이름을 뱀파이어로 지었다던가.

갱단 두목이 여자라는 소문도 있다.

‘뱀파이어’라는 이름을 들으니 자신을 부른 것도 이해가 됐다.

나름 자본과 세력을 갖춘 유흥가의 자산가라고는 해도 무려 두 개의 구역을 지배하는 거대 갱단과 홀로 대적할 수는 없는 것이 당연했다.

아마 애쉬에게 찾아오기 전에도 알아볼 만큼 알아봤을 것이다. 같은 구역에 있는 유력자들에게 손을 빌려본다던가 비슷한 위치에 있는 자들에게 연합을 제의한다던가.

하지만 모두 거절당했겠지. 언젠가 자신도 표적이 될 수 있다는 미래의 위험보다는 당장 그 거대 갱단과 대적하는 것이 두려웠을 테니까.

갱단놈들은 그 세력도 세력이지만 일단 한 번 시작하면 어느 한쪽이 끝을 보기 전에는 멈추지 않는다는 게 더 무서운 녀석들이다.

슬럼가를 지배하는 거대 갱단들이 모이면 이 거대도시, 웨인 시의 군 세력이 직접 나서는 게 아닌 이상 몰아내는 것이 거의 불가능할 정도로 강력한 힘을 갖고 있었으니 그들의 위협이 중소규모 자산가에게 얼마나 크게 다가왔을지는 알만했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옆 구역의 어중이떠중이 녀석들인 것처럼 넘어가려 했던 건 그냥 못 지나간다. 아마 이쪽에서 물어보지 않았다면 어영부영 넘어갔겠지.

“이봐, 나보고 꼴랑 30만 받고 그 녀석들을 상대하라고?”

“아, 아뇨! 당연히 그런 푼돈으로 때울 생각은 없었습니다! 제가 운영하는 영업장들에서 5년 동안 무료로….”

“아니, 그딴 건 됐고.”

애쉬가 다급히 대답하는 남자의 말을 끊었다.

“간단하게 300만으로 가지.”

“…예?”

300만 크레딧. 무려 지구의 원화로 60억에 달하는 엄청난 금액이었다. 한 번에 의뢰금의 열 배를 부르자 남자가 말을 잇지 못하고 애쉬만 쳐다봤다. 애쉬의 옆에 앉은 접대부도 마찬가지였다. 아마 남자조차 현금으로는 쥐어본 적이 없을 정도로 큰 거금에 놀랐을 것이다.

“일단 30만 받고, 나머진 3년 동안 분납해.”

“하, 하지만 아직 뱀파이어 녀석들이라는 확신은……!”

“맞으면 어쩔 건데? 내가 지금 그냥 가버리면?”

“그건…….”

남자는 애쉬의 협박 비슷한 말에 무어라 대답하지 못했다. 사실 그도 반쯤은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애초에 이곳 63구역의 유흥가에 손을 뻗을 정도로 간이 큰 녀석들은 거대 갱단이거나 정신이 나간 놈들 밖에 없었으니.

만약 지금 애쉬의 제안조차 거절한다면 그가 부른 300만 크레딧이 우스울 정도로 큰 손해를 보게 될 것이 분명했다.

그가 지닌 900만 크레딧은 될 일곱 채의 건물들의 소유권을 사실상 잃을 것이며 목숨이라는, 무엇보다도 소중한 것조차 잃을지 모른다.

300만 크레딧.

남자에게도 크나큰 돈이다. 굳이 이 해결사를 고용하지 않아도 자력으로 어떻게든 해낼 수 있지 않을까?

고민하던 남자의 머릿속에 잠시 그런 생각도 들었지만, 이런 일에서 운에 기대는 것은 정말 멍청한 짓이었다.

남자는 떨리는 눈으로 애쉬를 바라봤다. 애쉬는 그의 애타는 시선을 무시하고 자신의 옆에 앉은 고급 접대부의 허벅지나 지분거렸다.

“300만…, 지불 하겠습니다…. 다만 분납 기간은 5년으로 늘려주시면 안되겠습니까?”

“그렇게 해.”

애쉬는 남자가 그렇게 말할 줄 알았다는 듯 선뜻 대답했다. 300만 크레딧이라는 거금은 자신에게 상세한 내용을 숨겨서 어떻게든 싸게 부려 먹어보려 했던 남자에 대한 벌이었다.

자세한 걸 말하지 않고 숨기지만 않았더라면 백오십만 안쪽으로 불렀을 텐데.

아마 분납을 하는 5년 동안 의뢰인의 돈벌이는 거의 바닥을 칠 것이다.

하지만 그마저도 모든 것을 잃는 것보다는 나았다.

“그럼 이만 가봐.”

“…예. 잘 대접해드리세요.”

“네, 사장님.”

힘 빠진 걸음으로 룸을 나가는 남자의 뒤로 애쉬 론모어의 목소리와 고급 접대부의 꺄르르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룸을 나간 남자가 문을 닫자 그조차도 사라졌다.

남자가 나오자 룸 바깥에서 기다리고 있던 남자의 측근이 다가왔다.

“사, 사장님, 어떻게 됐습니까? 의뢰를 받아준답니까?”

“…그래, 일단은 받아준다고 한다.”

“다, 다행이네요….”

애쉬 론모어, 그 악명 높은 해결사를 부를 것을 권한 남자의 측근이 가슴을 쓸어내렸다. 아마 300만 크레딧이라는 대가에 대해 들으면 발라당 뒤집어질 지도 모른다.

남자는 갑작스럽게 생긴 빚더미에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그래도 가슴 한 편으로는 안심하고 있는 그가 있었다.

애쉬 론모어.

일명 ‘미친 칼잡이’라고 불리는 슬럼 최고이자 최악의 해결사.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지기라도 한 듯 나타난 그는 지난 3년 동안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자신을 증명해냈다.

그 중에서도 가장 경악스러운 것은 그가 이름을 떨치기 시작한 계기.

단신으로 71구역과 63구역의 유흥가를 지배하던 거대 갱단, ‘오마르의 망치’를 분해시킨 것.

한 달하고도 보름 동안의 그 전쟁은 이미 슬럼가의 전설 그 자체였다. 그가 머무는 71구역과 ‘오마르의 망치’의 소유였던 63구역이 다른 갱단들의 손길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웠던 이유기도 했고.

‘오마르의 망치’라는 과거의 공룡이 사라진 지 약 2년 반. 슬슬 여러 갱단들이 주인 없는 두 개 구역에 손을 뻗고 있으나 아마 그가 나선다면 별다른 일이 없이 해결 될 것이다.

“한 동안은 허리띠 꽉 졸라매고 살아야겠다….”

“예?”

“그런 게 있다.”

“아…, 네.”

남자는 무엇을 얘기하는지 몰라 어리둥절 하는 측근을 뒤로하고 영업장을 나왔다.

애쉬 론모어, 그가 나서기로 한 이상 문제는 해결된 셈이니 집에서 고급 브랜디나 한 잔 하며 쓰린 속을 달래야겠다.

모든 게 남자의 자업자득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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