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사이버펑크 게임 속 칼잡이가 되었다-7화 (7/230)

〈 7화 〉 1. 애쉬 론모어(6)

* * *

흑단목으로 만들어진 고풍스런 가구들과 문살에 종이를 바른 장지문.

사무용 책상마저 원목으로 만들어진 방 안. 비녀를 꽂아 머리를 정리한 여인이 서류를 들여다보고 있다.

여태껏 살아온 세월을 알리듯 희끗희끗한 머리칼과 달리 주름의 흔적 하나 없이 완벽하게 관리된 피부.

희끗한 머리칼을 제외하고, 단순히 얼굴만 본다면 불과 서른 초중반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는 그녀가 바로 ‘달의 꽃’의 주인이 되는 마담, ‘한세연’이었다.

자리에 앉아 천천히 각종 지출과 매출표를 정리하던 그녀는 바깥에서 들려오는 노크 소리에 손을 멈췄다.

­ 똑똑. 마담, 애쉬 론모어 님께서 오셨습니다.

“안으로 모시세요.”

­ 예, 실례하겠습니다.

스르륵. 장지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낸다. 눈에 띄는 잿빛 은발과 진청색 눈동자. 장난스런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건네 오는 남자, ‘애쉬 론모어’였다.

“안녕하신가, 마담.”

“애쉬 님이 이렇게 들러주신 덕에 오늘은 안녕할 것 같군요.”

애쉬의 인사에 그녀도 작게 미소 지으며 답했다. 진심어린 말이었지만, 만약 진심이 아니었더라도 반응은 같았을 것이다.

애쉬 론모어, 그는 63구역 유흥가 최대의 영업장인 ‘달의 꽃’에서도 손에 꼽는 큰손이었으며, 슬럼과 붙어있는 이곳 유흥가에서는 다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최고의 연줄이기도 했다.

불과 2년 남짓한 시간. 그가 이곳에서 사용한 돈만 얼마던가. 그 금액만 무려 수백만 크레딧에 이를 것이며, 매주 한 번씩은 들르는 그의 존재로 인해 가끔 있던 외부의 간섭조차 사라졌다.

그러니 어찌 반기지 않을 수 있을까.

게다가 그는 슬럼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귀공자같이 잘생긴 외모와 신사적인 태도로 직원들에게까지 무척이나 인기가 좋았다. 오죽하면 돈을 받지 않아도 되니 그의 지명을 받고 싶다는 직원들까지 있을 정도로.

귀한 손님을 맞을 때 자리에 앉은 채로 맞는 것은 무척이나 실례되는 일이다. 애쉬를 반기며 자리에서 일어선 한세연은 곧장 탕비류가 준비된 곳으로 향해 물을 올렸다.

“애쉬 님은 여전히 커피로 괜찮으신지.”

“응.”

한 차례의 문답이 오간 후 곧 방 안에 향긋한 커피향이 돌았다. 다도를 완벽히 지키며 커피와 차 한 잔을 내린 한세연이 돌아왔다.

앉으라는 말도 하지 않았는데, 이미 애쉬는 자연스럽게 테이블 자리에 앉아 그녀를 기다리고 있다.

한세연은 그런 그의 앞에 커피를 내려놓았다.

“음. 역시 커피는 마담이 최고라니까.”

“그거 참 감사한 말씀이군요.”

커피를 한모금 삼키며 향과 맛을 음미한 애쉬의 칭찬에 한세연이 감사를 표했다. 둘은 앉은 자리에서 잠시 동안 아무런 말도 않고 각자 앞에 놓인 차 한 잔의 여유를 즐겼다.

굳이 애쉬가 찾아온 이유와 앞으로 나눌 얘기의 주제에 대해 떠들 필요는 없었다. 오랫동안 봐온 둘은 서로를 제법 잘 알고 있었다.

그렇게 몇 분 정도의 시간이 지나고. 잔이 바닥을 드러낼 즈음 대화의 물꼬를 튼 것은 애쉬였다. 일단 입을 연 애쉬는 잡다한 얘기 대신 본론부터 꺼내들었다.

“요새 이쪽 분위기가 영 안 좋다며.”

“아무래도 그런 편이지요.”

“‘달의 꽃’은 좀 괜찮나?”

“…아직까지는 괜찮습니다.”

애쉬의 물음에 한세연이 대답했다. 아직까지는 괜찮다. 그것은 곧 시간이 지나면 괜찮지 않아질 수도 있다는 뜻이다.

애쉬는 역시 자신의 생각보다 사태가 한참은 더 커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달의 꽃’은 63구역 유흥가 최대의 영업장이다. 시 정부로부터 공식적으로 인정을 받은 사업이며, 매년 시 정부에 내고 있는 세금도 어마어마했다.

게으르기 짝이 없는 유흥가와 슬럼의 경찰들도 ‘달의 꽃’ 정도 되는 곳의 신고가 들어가면 늑장을 부릴 수가 없다.

그들이 내고 있는 세금도 세금이지만, 그곳을 이용하는 고객들의 신분 또한 무시할 것이 못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달의 꽃’조차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말은 사실상 이곳 유흥가에 안전한 곳은 없다는 얘기였다. 만일 진짜 ‘달의 꽃’조차 위험을 느끼게 되는 순간이 온다면 이미 이곳 유흥가는 잘 관리된 관광지가 아니라 슬럼이나 다름없는 상황일 것이다.

“안 그래도 애쉬 님과 대화를 나눠볼 생각이었는데, 이렇게 직접 찾아주셨군요.”

“흐음…. 난 비싼 몸인데, 감당 되겠어?”

“후후, 저희 ‘달의 꽃’이 감당하지 못하는 금액이라면 이 도시 전체를 둘러봐도 감당할 수 있는 곳은 얼마 없을 겁니다.”

“하긴, 그것도 그래.”

‘달의 꽃’의 매출은 말 그대로 상상을 초월한다. 이 근방의 영업장 수십 개를 합쳐도 ‘달의 꽃’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하리라. 애쉬도 이곳 최상층의 고객으로서 돈을 써왔기에 그것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한세연은 아직 따뜻한 차 한 모금을 마시곤 말했다.

“제가 부탁드리고 싶은 건 인근 갱단의 완전 박멸입니다.”

“응? 그렇게까지?”

한세연의 말을 들은 애쉬가 의문을 표했다. 한세연은 어디까지나 ‘달의 꽃’의 오너일 뿐이다. 자신의 영업장만 지키면 되지, 굳이 이곳 유흥가의 중심 전체를 유지하려 하는가.

당연하지만 일의 규모가 커지면 커질수록 그에 들어가는 금액도 커진다.

애쉬만한 실력자를 부려 인근을 싹 정리하려면 그 금액도 어마어마하게 들어갈 것이었다. 그리고 다른 것은 몰라도 애쉬는 자신의 몸값에서 타협을 할 생각은 없었다.

“시장이 안정돼야 손님도 안심하는 법이지요.”

“뭐, 주변에서 따로 돈은 안 걷나?”

아무리 그래도 ‘달의 꽃’ 혼자 감당할 이유는 없지 않은가. 애쉬의 그런 물음에 한세연은 고개를 저어보였다.

“개미들에겐 개미들의 일이 있고, 저희에겐 저희의 일이 있는 법입니다. 게다가….”

한세연은 애쉬를 바라보며 장난스럽게 덧붙였다.

“어차피 저희의 주머니로 다시 돌아올 돈이 아니겠습니까.”

“…뭐, 그렇다면 딱히 더 할 말은 없는데.”

확실히 얼마를 받던 그 상당수는 다시 이곳 ‘달의 꽃’의 주머니로 돌아올 것이다. 그래도 애쉬는 단호히 말했다.

“알지? 아무리 마담이라고 해도 못 깎아주는 거.”

“그야 물론이지요. 애쉬 님 정도 되는 분께 의뢰금이란 단순한 돈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좋아, 그럼 한 번 조율해 보자고.”

애쉬와 한세연은 의뢰의 조율에 들어갔다.

*

다음 날 아침.

­ 띠리리릭!

“으음….”

따뜻한 체온. 부드럽게 감겨오는 여체의 감각. 그리고 그 가운데 찌르고 들어오는 휴대폰 벨소리. 애쉬는 몽롱한 얼굴로 눈을 떴다. 날카로운 눈매가 둥글어지고 사람의 분위기 자체가 바뀐 느낌.

잠자리를 같이 한 여자들이 평상시 모습과의 갭 때문에 열광하곤 하는 모습이었지만, 애쉬는 속으로 불평할 뿐이다.

이놈의 아침은 초인이 되어도 익숙해지질 않는다.

“…누구야, 아침부터.”

잠에서 깬 애쉬는 벨소리를 잠재우고자 휴대폰을 들었다. 전화를 건 상대의 이름이 떠올라 있다.

‘꼬맹이’.

그의 사무소에서 일하는 샤인의 전화다. 애쉬가 아침에 시끄러운 걸 싫어하는 걸 아는 샤인이었기에 이른 시각에 전화하는 일은 거의 없었는데, 오늘은 웬일일까.

애쉬는 통화 버튼을 눌러 전화가 끊기기 전에 받았다.

­ 여보세요.아침부터 연락드려서 죄송해요, 사장님!

“어… 그래. 근데 무슨 일이야.”

­ 지금 사무소에 ‘뱀파이어’ 보스라는 분이 오셨는데요….

“응?”

­ 직접 찾아뵌다고 얘기 하셨다는데, 혹시 사장님이 저번에 그냥 넘어가셨던…….

저번에 그게 진짜 찾아왔나? 갑작스런 일에 잠이 조금 깬 애쉬의 머릿속에 든 생각이었다.

전에 받았던 목소리 좋은 여자의 전화. 자기가 뱀파이어의 보스라느니 뭐라니 하더니 찾아오긴 한 모양이었다.

이름이 뭐였더라, 레이, 레이라 플뭐시기.

잘 기억이 나질 않는다. 애쉬가 전화를 통해 물었다.

“그쪽 이름이 뭐래?”

­네, 한번 여쭤볼게요.

샤인의 목소리가 조금 멀어지고 곧 웅얼거리는 듯한 소리가 들린다. 소리의 크고 작은 문제가 아닌, 음질 자체의 문제라 애쉬의 귀로도 제대로 들을 수 없었다.

곧 샤인의 목소리가 돌아왔다.

­ 레이라 플로리스 님이라고 하시네요.

“아, 맞네.”

애쉬는 샤인에게서 듣자마자 곧바로 기억해냈다. 장난전화를 걸었던 여자의 이름, 레이라 플로리스. 분명 그런 이름이었다.

­ 그리고 지난번에 뵀다는 분도 계시는데, 그분은 성함이 빌레이 포튼이라고….

“…뭔.”

뒤이어 나온 이름을 듣기 전까지만 해도 무슨 배짱으로 장난전화를 걸어놓고 직접 찾아온 거지, 하던 애쉬의 표정이 변했다.

전화를 걸었던 여자의 이름은 가물가물했지만 저 이름은 기억했다. 흉터투성이의 흉악한 얼굴, 지 부하 머리통을 날려버린 놈.

일적으로 엮인 관계라 아직은 기억하고 있다.

“그거 장난전화 아니었어?”

­ 네에.진짜 찾아오셨네요.

“아, 진짜. 알겠어, 바로 갈게.”

일단 대역이든 진짜든 뱀파이어 쪽에 속한 여자라는 건 알겠다.

하지만 왜 하필이면 이 아침이란 말인가. 원래 밤에 즐기고, 아침에 일어나서 다시 한번 즐기는 게 진짜인데.

애쉬가 전화를 끊었다. 하지만 아침부터 울리는 그의 목소리 탓인지 그의 품에 안겨 잠들었던 여자가 깨어났다.

“흐응…. 무슨 일이에요?”

애정이 잔뜩 담긴 목소리가 물어온다. 애쉬는 자신의 가슴께를 쓰다듬는 기분 좋은 손길을 느꼈지만, 사무소로 찾아온 놈들이 진짜 뱀파이어 쪽의 갱이라면 꼬맹이 샤인과 오랫동안 두는 것은 결코 좋은 일이 아니었다.

아쉬움을 삼키고, 그 손을 부드럽게 밀어냈다.

“일이 생겨서 가봐야 할 것 같은데.”

“벌써요?”

“나도 아쉽지만 중요한 일이라.”

“으응, 그럼 어쩔 수 없죠.”

쪽. 애쉬의 품에 안겨있던 여성이 작게 입맞추곤 자리에서 일어섰다.

덮고 있던 이불이 늘씬한 몸매를 타고 흘러내렸다. 뒤이어 하얀 나신에 옷가지가 걸쳐지는 모습은 매혹적이기까지 했지만, 이제 더 시간을 쓸 수는 없다.

애쉬는 아침부터 찾아온 놈들에게 짜증을 느끼며 자신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별 일 아니기만 해봐.”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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