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화 〉 1. 애쉬 론모어(8)
* * *
“그럼 이쪽은 이만 가볼게. 얘기해준 건 다시 한번 고마워.”
정보를 받은 것으로 이곳에 온 용무는 모두 끝났다. 레이라는 건방지게도 다리를 꼬고 앉은 채 자신을 바라보는 남자와 눈을 한번 맞춘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런 태도에도 이상하게 화가 나지 않는 이유는 뭘까. 상대방이 내어준 정보 덕분에? 아니면 ‘애쉬 론모어’라는 이름값 때문일까?
“운 좋은 줄 알아. 조금만 못생겼어도 걸어서 못 돌아갔을 테니까.”
“푸훗, 그래. 고맙네, 그것도.”
몸을 돌려 나가려던 레이라가 자신의 등 뒤로 던져진 애쉬의 말에 웃음을 터뜨렸다.
노골적으로 미인이라 봐줬다는 말투. 이쪽에 추파를 던지는 건지, 아니면 진심으로 얘기하는 건지 모를 태도가 더 재밌다.
좀 더 진지한 만남을 예상하고 왔는데, 생각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또각, 또각.
조용해진 사무실 안에 레이라의 힐 소리와 빌레이의 무거운 구두 소리가 울리길 잠시, 갑자기 소리가 뚝 끊겼다.
발걸음을 옮기던 레이라가 문 앞에서 멈춰선 것이다.
금방이라도 나갈 듯, 문고리를 잡고 선 레이라가 물었다.
“여기, 갱이라고 의뢰 안 받는 건 아니지?”
“…마음에 드는 의뢰면 갱이든 사형수든 받으니까, 생각 있으면 한 번 찔러나 보던가.”
“후후, 그래.”
그녀의 물음에 불퉁한 대답이 돌아온다. 말투는 저러면서도 은근히 호의를 보이는 것도 그렇고, 레이라는 어쩐지 저 악명 높은 해결사가 귀엽게 느껴지는 것 같아 작은 웃음을 흘렸다.
그렇게 뱀파이어의 보스, 레이라 플로리스와 그녀의 측근, 빌레이 포튼이 론모어 해결사 사무소를 떠났다.
*
“어떠셨습니까.”
“응, 소문이랑은 다르게 재밌는 사람 같네.”
“저는 두 번째 만남인데도 놈이 어떤 놈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겨우 몇 번 봤다고 타인을 다 알 수는 없는 법이니까.”
“…그렇긴 합니다만.”
“됐어. 당장은 여유가 생겼으니 저 해결사에 대해서는 나중에 생각하고, 지금은 ‘베이론’ 놈들한테나 집중하자.”
“예.”
* * *
애쉬와 ‘뱀파이어’ 주종의 만남 이후 며칠이 지났다.
드디어 찾아온 의뢰 수행 당일. 애쉬는 ‘달의 꽃’으로 향하고 있었다. 다만 며칠 전과 달리 속이 완전히 뒤집힌 상태로.
마담, 한세연으로부터 의뢰를 받은 뒤, 실행 날짜가 되어 그것을 준비하던 애쉬는 몇 시간 전 63구역 경찰청으로부터 연락을 하나 받았다.
상대방은 전화를 하기 전부터 전화의 주인이 애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신분이 존재하지 않는 애쉬였기에 휴대폰이 차명으로 만들어진 것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애쉬는 경찰청 특수 진압대의 책임자라는 남자로부터 말 그대로 어이가 없어지는 얘기를 들었는데, 오늘 있을 작전에 협조를 잘 부탁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번 그의 의뢰에 공권력이 수저를 얹겠다는 뜻이었다.
그 얘기를 들은 애쉬는 분노에 찬 상태로 곧장 ‘달의 꽃’으로 향했다.
받기로 한 의뢰금이 줄어든 것도, 그렇다고 경찰들이 그를 적대하는 것도 아니었지만 자신과 아무런 상의도 없이 이딴 것을 결정하는 일은 그를 무시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아무리 그와 오랫동안 보아온 마담이라고 해도 이것은 명백히 선을 넘은 행위였다.
챠르륵.
“아, 어서 오세….”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카운터의 여성이 애쉬에게 인사하다 말을 멈췄다. 애쉬의 기색이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다.
평소 놀러 올 때와 달리 허리춤에는 칼이 하나 걸려 있었고, 무엇보다도 날카로운 기세를 줄기줄기 뿜어내고 있었으니, 그녀가 당황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애쉬도 아는 얼굴이었으나, 지금의 애쉬에게 평소와 같은 장난기는 없었다.
“마담 어딨어.”
“네, 네? 아, 마담이라면 8층에서 업무를…….”
애쉬는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발걸음을 움직였다. 엘리베이터를 통하지도 않고 계단으로 올라갔는데, 중간 중간 만나는 낯익은 여성들이 인사했지만 그는 모두 무시하고 발걸음만 옮겼다.
워낙에 발이 빠른 애쉬였기에 8층까지 오르는 것은 얼마 걸리지 않았다.
“애쉬 님, 어서 오십시오. 오늘은 일찍부터…….”
자격이 없는 사람이 올라오는 것을 막기 위해 배치된 가드가 반갑게 인사하는 것을 지나치고, 8층 가장 깊숙한 곳에 위치한 방으로 향한다.
마찬가지로 마담이 위치한 방을 지키는 가드가 있었으나, 애쉬는 그를 무시하고 단숨에 문을 열어 재꼈다.
드르륵, 쿵!
“갑자기 왜 그러십니까…!”
가드의 당황한 목소리와 함께 안쪽의 광경이 드러났다.
언제나 그렇듯 동양풍의 전통복을 입고 사무용 책상에 앉아 업무를 보고 있는 마담, 한세연.
그녀는 애쉬가 이렇게 찾아올 것을 알고 있었다는 듯 거칠게 열린 문과 갑작스런 방문에도 당황하는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문이 열리자 서류에서 눈을 뗀 그녀가 애쉬를 제지하려던 가드를 향해 부드럽게 일렀다.
“괜찮으니 원래 자리로 가셔도 됩니다.”
“하지만….”
“괜찮대도요.”
한세연의 말에 진짜 나가봐도 될지 고민하던 가드였으나, 결국 그는 고용인에 불과했고, 고용주의 말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스르륵. 문이 닫히고 방 안에는 애쉬와 한세연 둘만이 남았다.
둘만 남은 방안에는 시린 한기가 감도는 것 같았다.
금방이라도 베일 듯 날카로운 칼날 위에 선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는 한기가.
서로 간에 아무런 말도 없이 바라보길 잠시. 애쉬의 목소리가 조용한 방 안에서 낮게 울렸다.
“내가 왜 왔는지는 알고 있겠지, 마담.”
“예, 미리 말씀드리지 못한 점. 죄송합니다.”
“죄송하다? 그게 끝인가?”
한세연을 향해 최소한의 존중은 보이던 애쉬였지만, 오늘은 아니다.
애쉬를 알 만큼 아는 한세연이었다. 애쉬의 불같은 성정이 저런 사과 한 번에 가라앉을 리가 없다는 것도 알고 있을 터.
한세연은 애쉬가 진정하도록 차근차근 자신의 사정을 얘기했다.
“저희도 원치 않는 간섭이었습니다.”
한세연은 애쉬에게 의뢰를 맡긴 하루 뒤, 경찰청의 연락을 받았다. 그녀에게서 차명계좌일 것이 분명한 누군가의 계좌로까지 거금이 흘러들어간 것을 그들이 알아챈 것이다.
이 세상에서 몇몇 주의인물들의 계좌가 시 정부에 감시당하는 일은 흔한 일이었다.
그것을 피하려면 아예 본인이 아닌 타인의 차명계좌를 이용할 수밖에 없었는데, 세금 한 푼도 피하지 않고 깨끗이 처리하던 한세연의 계좌는 쉽게 발각될 수밖에 없었고, 곧 찾아온 경찰청 고위 인물에게 그녀는 애쉬의 의뢰를 밝힐 수밖에 없었다.
그 의뢰 내용을 들은 경찰청의 고위 인물은 공적에 눈이 돌아가 그녀를 협박했고, 끝내 허용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한세연의 얘기를 들은 애쉬가 헛웃음쳤다.
“하, 그걸 나보고 믿으라고?”
한세연은 63구역이 ‘오마르의 망치’ 산하에 묶여 있을 때도 영업장을 완벽히 유지하던 수완가다. 그런 그녀가 직접적으로 생명을 위협할 수도 없는 공권력에게 고개를 숙였다고?
그건 물고기가 물에 빠져 죽었다는 헛소리나 마찬가지였다.
“믿기 힘드시겠지만, 그게 전부입니다.”
한세연이 그런 애쉬의 불신을 이해한다는 듯, 하지만 그게 진실이라는 듯 대답했다. 분노에 찬 애쉬의 시선이 자신에게 와 닿음에도 그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뻔한 거짓말. 정말 너무 뻔한 거짓말이야.”
자신이 거짓말을 싫어한다는 걸 알 텐데도 저런 거짓말을 한다.
하지만 그 철저한 한세연이 한 거짓말이라기엔 너무도 뻔해서 오히려 진실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어쩌면 그걸 노린 것일 수도 있겠지.
귀화처럼 타오르는 그의 청안과 한세연의 눈이 마주쳤다.
지적하려면 지적할 수 있는 부분은 많다. 하지만 굳이 거기까지 얘기를 더 꺼내진 않는다. 한번 저렇게 나온 이상 끝까지 같은 대답만을 내놓을 테니.
애쉬는 소모적인 말싸움 대신 유감을 전했다.
“실망이야.”
“…죄송합니다.”
그의 말에 한세연이 다시 한번 고개 숙여 사죄했다. 그녀가 지금 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그것뿐이었다.
고개 숙인 그녀를 뒤로하고 애쉬가 몸을 돌렸다.
“의뢰금은 이미 받았으니 처리는 한다.”
하지만.
돌아선 그가 경고했다. 어느 때보다도 무거운 분위기가 방 전체에 깔려 한세연을 압박했다.
“그 변명이 진짜든, 아니든. 그냥 넘어가주는 건 이번이 마지막이야.”
드르륵. 쿵!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발걸음이 멀어져간다.
사죄를 위해 고개를 숙이고 있던 한세연은 완전히 그의 발걸음 소리가 들리지 않을 쯤이 돼서야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태연한 척 했지만 애쉬의 분노와 직면한 그녀의 등골은 식은땀에 젖어있었고, 대화하는 도중에도 몸이 덜덜 떨리려는 것을 억지로 참았다.
금방이라도 눈앞에 있는 모든 것을 찢어발길 것 같은 느낌. 저런 게 어떻게 한 인간이 뿜어내는 기운이란 말인가…….
그 폭군 ‘오마르’를 앞에 두고도 이런 감정을 느껴본 적이 없는 그녀였는데, 자주 얼굴을 봐왔던 애쉬가 태도를 바꾼 것만으로 이렇게 되어버렸다.
그녀는 잠시 애쉬가 열어 놓고 나간 문 바깥의 복도를 바라봤다. 애쉬의 뒷모습은 이미 보이지 않는다.
“괜찮으십니까?”
뒤늦게 그녀에게 문제가 생긴 것은 아닌지 살피며 가드가 들어왔다. 가드의 걱정과 달리 그녀도, 방 안도 모두 멀쩡했다.
“…괜찮아요.”
“다, 다행입니다. 그나저나 애쉬 님이 저렇게 화를 내시는 건 처음 보는데 대체…….”
“그쪽이 신경 쓰실 일은 아닙니다. 본인 업무에 집중해주시지요.”
“아, 예.”
주제 넘는 호기심을 드러내는 가드의 질문을 일축한다. 가드는 이상이 없다는 걸 확인한 뒤 문을 닫고 나갔다.
“후우…”
정작 자신이 해야 할 일은 제대로 하지 못한 주제에 질문이나 던지고 있다니.
그 한심한 꼴에 한숨을 내쉬었지만, 사실 누가 있었어도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조만간 보안팀을 한 번 갈아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아직까지도 두근거리는 심장을 조금 가라앉힌 그녀가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예, 다소 관계가 어긋나긴 했지만 별 문제는 없을 겁니다. 그쪽에서 일만 잘 처리해주신다면 말이지요.”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