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화 〉 2. 달의 꽃과 뱀파이어(3)
* * *
“뭐야, 혼자야?”
“다른 놈들도 더 올지 모르니까 방심하지 마.”
“아, 악마….”
애쉬가 인기척이 느껴지는 곳으로 향했을 때는 이미 갱들이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각자 제 무기를 빼어든 놈들. 그리고 놈들 사이 피에 젖은 채 벌벌 떨고 있는 녀석이 보인다.
아래층에서 놓친 하나가 상황을 알린 모양이었다.
그들의 앞에 선 애쉬는 여유롭게 공간을 둘러보며 말했다.
“밑에서도 박살났는데, 너희 친구들은 더 안 불러도 되냐?”
지금 이곳에 모여 있는 놈들의 숫자는 1층 로비에 있던 숫자의 반도 안 되는 열 몇 정도.
1층에 비해 공간이 좁고 엄폐물이 없는 만큼 전투 자체는 까다로워지겠지만, 일단 파고들면 놈들도 아군을 의식하여 함부로 사격을 남발하지 못할 것이다.
“이 새끼가….”
애쉬의 농담처럼 들리는 도발에 한 놈이 반응했다. 하지만 뒤이어 나온 다른 놈의 목소리가 녀석을 말렸다.
“잠깐, 저 녀석 인상 어디서 들어본 적 있는 것 같은데…?”
“은발에 파란 눈?”
“설마….”
놈들 사이에서 오가는 의심에 도망친 남자가 쇄기를 박았다.
“애, 애쉬 론모어! 놈은 악마야!!”
“…애쉬 론모어라고?”
도망친 남자의 입에서 나온 이름에 갱들의 표정이 굳었다.
1층에서 도망쳐온 남자의 반응. 그리고 그 뒤를 따라 모습을 드러낸 은발, 청안의 남자.
마지막으로 도망쳐온 남자의 입에서 나온 이름까지.
그 모든 것이 저 남자가 그 전설적인 해결사, ‘애쉬 론모어’라는 것을 가리켰다.
2층에 있던 이들의 반응은 1층에 있던 무리와 사뭇 달랐다. 1층에 있던 놈들처럼 자신들의 숫자를 믿고 방심하지 않는다.
갱들이라고 완전히 바보는 아니었다. 이들도 1층에 있었다면 방심하고 혼자 나타난 애쉬를 비웃었을지 모르지만, 이미 그들 숫자의 세 배는 되는 1층의 방비를 뚫고 온 남자를, 그것도 웨인 시의 슬럼 전역에 이름이 알려진 해결사를 무시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그들의 사이에서 도망친 남자 외에도 유난히 공포에 떠는 이가 있었다.
그는 애쉬를 처음 본 순간부터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 아무도 모르게 뒤로 한 발짝씩 물러나고 있었다.
“응? 이봐, 진짜 친구들 부르러 가려고?”
때마침 새하얗게 질린 얼굴의 남자를 애쉬가 발견하지 못했다면 그는 무사히 이 자리를 빠져나가 도망갈 수 있었을지도 몰랐지만, 세상 무심하게도 애쉬의 목소리는 도망치려던 남자의 발길을 붙잡았다.
그런 애쉬의 시선과 목소리에 다른 갱들의 눈길이 모여들었지만, 그는 그런 시선이 느껴지지도 않는 듯 애쉬를 보며 빌었다.
“사, 살려주십시오! 저는 이 길로 나가서 일반인으로 살겠습니다!”
“뭐, 뭐?”
“이 새끼는 뭐라는 거야! 미쳤냐!”
동료 갱들의 당황과 분노가 그에게 쏟아졌지만, 그는 오로지 애쉬의 입만을 바라보며 긍정의 대답이 나오길 소원했다.
그런 남자의 반응에 애쉬가 씩 웃었다.
“너, 나랑 본 적 있지?”
“흐으, 예! 제발 살려만 주십시오!!”
긍정을 표하곤 애원하다시피 비는 남자. 애쉬는 그런 남자를 몰랐지만, 남자의 반응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남자는 분명 과거의 애쉬와 만난 적이 있다.
그리고 그런 애쉬의 예상대로 남자는 과거, 애쉬 론모어와 만난 적이 있었다. 그것도 그에게 무너진 ‘오마르의 망치’의 일원으로서.
지금으로부터 약 2년 6개월 전.
가진 바 재주는 없지만 눈치 하나로 ‘오마르의 망치’의 중간 관리직에 속해 있었던 남자는, 풍족하진 않지만 거대한 무력 집단에 소속되었다는 안정감과 그 이름을 등에 업은 자신감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오마르의 망치’는 이곳 슬럼에서도 비할 곳 없는 거대 갱단이었으며, 그와 비슷한 급이라 불리는 다른 거대 갱단들조차 한 수 접어줄 정도로 그 위세가 대단했다.
……‘애쉬 론모어’라는 괴물 하나에게 무너지기 전까지는 말이다.
‘오마르의 망치’와 애쉬 론모어라는 개인 간의 전쟁 당시, 그가 보았던 애쉬 론모어는 그야말로 피에 미친 괴물이었다.
구시대의 유물. 전투에서 압도적으로 불리한 칼 한 자루를 들고 수백은 되는 인원들 사이로 뛰어들어 미친 듯이 날뛴다.
그가 발걸음을 옮기는 곳에는 언제나 살점의 폭풍이 몰아쳤으며, 그의 검이 향하는 곳에는 피의 비가 쏟아져 내렸다.
남자는 당시 애쉬 론모어와 자신의 동료들이 싸우는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고 직감했다.
저것은 결코 적대해선 안 되는 괴물이다.
지금 당장 자리를 벗어나야 한다.
당시에도 유난히 좋았던 남자의 눈치는 그의 목숨을 살렸고, 그는 마지막까지 살아남아 폭군 오마르, 그리고 그의 간부진들과 애쉬 론모어의 전투까지 지켜볼 수 있었다.
확실히 폭군 오마르와 그의 간부들은 일반적인 갱들과 차원이 달랐다.
그로서는 제대로 알아볼 수도 없을 정도로 빠르게 움직이는 몸놀림.
거대한 해머를 휘둘러 도로를 부숴버리는 압도적인 완력….
하지만 그조차도 애쉬 론모어의 앞에서는 빛을 바랬다. 스물셋이나 되던 오마르의 망치 측 간부들은 끝내 애쉬 론모어의 칼에 목이 날아갔으며, 그것을 끝까지 지켜본 남자는 애쉬 론모어가 써내려간 전설의 산 증인이 되었다.
그것을 자랑스럽게 여겨 불과 며칠 전에도 술자리에서 애쉬 론모어와 오마르의 싸움을 안주삼아 떠들어대곤 했는데, 오늘 이렇게 만나게 된 것이다.
그것도 방관자가 아닌 적으로서.
‘오마르의 망치’와 애쉬 론모어의 싸움을 직접 지켜봤던 남자는 자신들의 전력으로는 절대 이길 수 없는 상대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았고,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살려 달라 비는 것밖에 없었다.
“뭐 하는 짓거리야!”
“싸, 싸우면 다 죽을 거야. 너희도 그냥……!”
“이 새끼가!”
뻐억!
동료였던 갱에게 멱살이 잡힌 남자의 뺨에 주먹이 꽂혀 들어갔다. 하지만 남자는 여전히 애쉬를 바라보며 눈으로 빌고 있었다.
제발 살려달라고. 여기서 죽고 싶지는 않다고.
애쉬는 그 간절한 눈빛에 흥미가 도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남자에게 폭력을 가하고 있는 갱들을 한 발짝 나서며 제지했다.
“잠깐. 그쪽에 흥미가 좀 생겼는데, 멈추지 그래.”
“우, 우리 일에 끼어들지 마!”
“외부인 주제에…!”
애쉬가 나서자 주춤한 갱들이었지만, 애쉬에게 빌던 남자처럼 자존심을 버리지는 못했는지 하던 짓을 계속했고, 몇몇 갱들은 애쉬를 향해 총구를 들이밀고 그를 경계했다.
그에 애쉬가 고개를 저었다. 자신을 경계하기에 그래도 좀 머리가 있는 놈들인가 싶었는데, 결국 크게 다를 건 없는 놈들이었다.
발을 내딛어 순식간에 그들의 사이로 들어간 애쉬는 갑자기 나타난 그의 존재를 갱들이 깨달음과 동시에 검을 휘둘러 네댓 명의 목을 떨어뜨렸다.
“……!”
“컥…!”
애쉬의 칼날에 목이 걸린 넷은 운 좋게도 고통 없이 즉사했지만, 하나는 애매하게 반쯤 잘려나간 목을 부여잡고 컥컥거렸다.
아주 잠깐. 길어봐야 1, 2 초 정도 되는 적막 이후에야 갱들은 자신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깨달았다.
“이…!!”
“어억!”
애쉬는 그들이 자신에게 총을 겨눔과 동시에 자신을 알아본 남자가 휘말리지 않게 발길질로 날려 보냈고, 갱들은 자신들의 틈에 있는 애쉬를 향해 총을 갈겼다.
“멍청이들.”
애쉬는 자신에게 날아오는 총탄을 피해 몸을 움직였다. 굳이 이런 구도에서 탄환을 베거나 튕겨낼 필요는 없다.
이렇게 몸을 피하기만 하면….
“으아악!”
“아악!”
“내 팔, 내 팔이!!”
퍽, 퍼벅 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서로의 몸에 총알이 박혀 들어간다. 갱들은 서로를 향해 총을 발사한 꼴이 되었다.
아무리 네댓 명의 목이 날아간 다급한 상황이었다지만, 조금만 생각을 했으면 저런 꼴이 되지는 않았을 텐데.
애쉬는 서로의 몸에 바람구멍을 뚫고 바닥을 구르는 갱들을 보며 혀를 찼다.
“쯧. 이딴 수준으로 갱은.”
제대로 된 훈련도 받지 않은 놈들은 그냥 양아치나 다를 게 없다. 순식간에 열 몇 명의 갱 중 넷만이 멀쩡히 서있게 됐다.
애쉬는 압도되어 자신을 향해 총구를 겨누고는 있지만 방아쇠를 당기지 못하는 넷을 슬쩍 보곤 자신이 미리 날려 보낸 갱을 향해 다가갔다.
제법 힘을 조절했음에도 남자는 차인 복부를 부여잡고 입가에 타액과 신물을 흘리고 있었다.
“이런, 많이 아픈가보네. 그래도 죽는 것보단 낫지?”
“크흡…, 예.”
쭈그려 앉아 묻는 애쉬에게 남자는 고통에 신음하면서도 억지로 대답했다.
애쉬가 차 날려주지 않았다면 그는 분명 저 사이에서 벌집이 되어 죽었다. 그에 비하면 큰 부상도 없는 고통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잠깐 어디 숨어있거나 해. 이따 얘기나 하자고.”
“…예!”
애쉬가 그를 툭 치며 말하자 남자는 기듯이 바깥으로 도망쳤다. 아주 도망치지 말라는 말은 굳이 하지 않았다.
어차피 애쉬가 건물에 진입한 이후 이곳의 모든 출입구와 탈출 가능성이 있는 통로는 경찰 소속의 진압대원들이 막아서고 있을 테니.
일을 마치고 돌아간 뒤에도 늦지 않다.
남자를 바깥으로 보낸 애쉬가 다시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자신을 바라보는 갱들에게 말했다.
“자, 그럼 우리는 하던 거나 마저 해볼까?”
자신들의 앞에 선 해결사를 보는 그들의 눈에 절망이 깃들었다.
* * *
“거기 더 이상 진입하시면 안 됩니다. 현재 경찰 측에서 특수 작전을 수행 중이니 물러서 주십쇼.”
진압대원들은 애쉬가 들어간 건물의 주변을 지켰다. 혹시 모를 민간인의 피해를 방지하며 빠져나가는 범죄자가 없도록.
투다다다!!
쨍! 유리창이 깨지고 사나운 총소리가 마구 울렸다. 애쉬와 함께 차를 타고 왔던 어린 대원이 우왁, 하고 호들갑을 떨며 자리를 피했다.
곧 그 자리에 유리 파편 따위가 떨어졌다.
“으, 잘못하면 머리에 피날 뻔 했네요.”
“…현장인데 헬멧 안 쓰냐? 그러다 진짜 대가리에 빵꾸난다.”
“에이, 그 분이 얼마나 철저하게 처리하시는데요. 여태껏 한 명도 못 빠져나왔잖아요.”
“그렇게 방심하다 한방에 가는 거야, 임마. 빨리 뒤집어 써.”
“에휴…. 진짜 우리 엄마도 아니고.”
답답함에 전술 헬멧을 벗고 있던 어린 대원이 다시 헬멧을 썼다.
어제와 오늘, 경찰 특수 진압대원들의 근무 환경은 그냥 이랬다.
애쉬 론모어, 협업을 하는 해결사가 워낙에 철저해서 생존자라곤 단 한명도 남기지 않았기에 사실상 전투는 없고, 민간인들을 통제하는 게 전부.
총소리가 나면 일단 피하고 보는 게 민간인들이었기 때문에 사실상 그냥 자리만 지키고 있었다.
“흐아암….”
따분함에 하품을 하는 어린 대원과, 티는 내지 않고 있지만 마찬가지로 지루한 상태로 대기하던 대원.
오늘도 그냥 이렇게 끝나는구나, 하고 입구 쪽을 지키고 있던 둘의 눈에 무언가가 들어왔다.
“어? 뭐야. 누가 나오는데요?”
“…벌써 끝났나? 그럴 리가.”
어린 대원의 말에 다른 대원이 말했다. 아무리 애쉬 론모어, 그 괴물 같은 인간이라고 해도 이렇게 빨리 끝났을 리는 없다.
하지만 어린 대원의 말대로, 누군가 나오고는 있었다.
대원은 대충 등에 매달고 있던 총을 제대로 들고 매뉴얼대로 행동했다.
“정지! 정지! 더 이상 접근하면 발포한다!”
“살려주십시오!”
그 명령에 건물에서 나온 남자가 제자리에 멈춰 섰다. 진압대원은 남자를 살폈다.
허리춤에 권총 한 자루. 그 외에 대단한 무장은 없고, 부상이 있는지 복부를 감싸 안고 있다.
척 보니 갱단의 일원인 것 같았는데, 어제오늘 이틀 동안 애쉬 론모어가 바깥으로 살려 보낸 유일한 생존자였다.
진짜 괴물인 줄 알았는데, 그 양반도 인간이긴 한가보네. 그런 잡스런 생각을 떠올린 대원은 갱에게 겨눈 총을 거두지 않고 계속해서 명령했다.
“무장 해제하고 머리 위로 손 올려! 허튼 짓을 하려는 낌새가 보이면 곧장 사살한다!”
“예, 예! 알겠습니다! 제발…!”
갱은 순순히 권총 벨트를 풀어놓고 머리 위에 두 손을 올렸다. 대원은 자신의 파트너인 어린 대원에게 눈짓했다. 그러자 어린 대원이 쏜살같이 튀어나가 남자를 제압했다.
“악! 잠깐!”
“엄살 부리지 마세요!”
몸을 바닥에 억누른 뒤 손을 뒤로 넘겨 수갑을 채우고, 몸을 뒤져 다른 무장은 없는지 확인한다.
이상이 없다는 걸 확인한 어린 대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다른 대원에게 외쳤다.
“이상 없어요~! 어떻게 할까요?”
“어떻게 하긴! 예정대로 수감 차량에 데려가!”
“옛썰!”
어린 대원이 그 말에 갱을 이송했다. ‘예정대로’ 수감 차량에 데려간다. 그들이 미리 정해놓은 암호였다.
어린 대원은 갱과 함께 수감 차량에 탔다. 갱은 수감 차량에 탔음에도 분노하거나 당황하지 않고 오히려 안심했다. 죽는 것보다야 교도소에 가는 게 수십, 수백 배는 나을 것이다.
“흐윽, 사, 살았다.”
하지만 그런 갱에겐 안타깝게도, 그가 바라는 것과 다른 결말이 기다리고 있었다.
“…으음. 일은 일이니까.”
어린 대원은 안도하며 기뻐하는 갱에게서 인간스러운 느낌을 받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쓰레기 처리장에서 흘러나오는 모든 쓰레기는 ‘예정대로’ 처리한다.
“예? 자, 잠깐, 왜, 안 돼, 안 돼…!”
어린 대원의 손에서 무광 처리된 검은 칼날이 그 독니를 빼어들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