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화 〉 2. 달의 꽃과 뱀파이어(4)
* * *
“쿨럭! 짭새, 들이 왜….”
“그건 또 무슨 멍청한 소리야?”
애쉬가 피를 흘리며 창에 몸을 기댄 채 바깥을 내려다보는 갱단 보스를 어이없다는 듯 쳐다봤다.
경찰이 왜 자신들의 토벌에 나섰냐고? 경찰에 뇌물이라도 먹인 모양인데, 그런다고 이미 확정된 일에서 경찰이 발을 뺄 리가 없다.
바꿀 수 없는 일이라면 당연히 발이라도 걸쳐서 한 몫 챙겨야 하지 않겠는가.
아무리 뇌물이 좋다고 해도 일단은 경찰인데, 그런 놈들이 자신들의 목숨을 걸고 갱을 지켜줄 리가 없다.
보스라는 놈이 저딴 얼빠진 소리나 지껄이고 있으니 갱단 전체가 양아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는 거다.
“분명…….”
“쯧. 헛소리 그만하고 가라.”
혀를 찬 애쉬는 덜떨어진 갱단 보스의 목을 잘라 편히 쉬게 해주었다.
이 세상에 오고 영화 속에서나 보던 갱, 마피아 따위의 범죄 조직에 대한 이미지가 완전히 깨져버렸다.
“아, 오늘도 밤놀이나 즐겨야겠구만.”
한 차례, 굴러 떨어진 갱단 보스의 목을 본 애쉬는 그대로 몸을 돌려 방을 나섰다.
*
“수고하셨습니다!”
“어.”
건물 바깥으로 나온 애쉬는 자신과 함께 차를 타고 왔던 어린 대원의 인사를 대충 받으며 주변을 살폈다. 그런데 찾는 게 보이지 않는다.
잠시 건물에서 빠져나왔을 녀석을 찾던 애쉬가 진압대원에게 물었다.
“여기 아까 한 놈 나오지 않았나?”
“…네? 그게…….”
“아, 그 혹시 일부러 보내셨던 겁니까?”
“그런데.”
끼어든 다른 대원에게 대답했다. 분명 멀쩡하게 보내줬었는데, 보이지 않는 걸 보면 진압대원들이 호송한 것 같다. 말하는 걸 들어보면 실제로 나오기도 한 모양이고.
그런 애쉬의 예상대로 진압대원들은 그 행방을 알고 있었다. 다만 지옥에 있을 것이라고까진 예상치 못했지만.
“죄송합니다, 일부러 보내신 줄 알았으면 최대한 제압을 하는 방향으로 갔을 텐데.”
“응? 그 놈이 뭐라도 했나?”
“예. 바깥으로 나오며 무장을 해제하라는 명령에 불응하더군요. 끝까지 총을 버리지 않고 저항하기에 사살했습니다.”
“…그럴 놈은 아닌 것 같던데.”
애쉬가 남자를 생각했다. 자신을 알아보자마자 앞으로는 일반인으로 살아갈 테니 살려달라며 간절히 빌던 녀석.
그건 진심으로 보였는데 진압대의 명령에 불응했다고?
“아시다시피 갱이랍시고 날뛰는 놈들 중에 제대로 된 인간은 없지 않습니까. 놈도 그런 인간이었던 거죠.”
“흐음…. 뭐, 그래.”
애쉬는 대원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슬럼의 경찰들도 정상은 아니었지만 갱이라는 놈들은 더 그렇다. 충분히 있을 법한 일이었다.
놈과 얘기하려던 것도 그렇게 중요한 사항은 아니라 깊이 신경 쓸 문제도 아니었고.
다만 아주 약간의 미심쩍은 기분이 남았을 뿐이다.
“아무튼 오늘도 수고하셨습니다. 댁까지 모셔드려도 되겠습니까?”
자신을 바라보는 애쉬에게 대원은 태연한 얼굴로 권했다. 그에 애쉬는 권유를 받아들였다.
“아니, 그냥 유흥가로 가지.”
“예.”
“아, 그럼 가는 길에 안에서 있던 일들 얘기 좀 해주시면 안 될까요?”
애쉬가 둘과 함께 차를 타고 유흥가로 향하고, 자리에 남은 진압대원들은 건물로 진입해 뒤처리를 시작했다.
* * *
“…골치 아프네.”
“잠시 쉬면서 머리 좀 식히시죠, 보스.”
“…그래.”
‘뱀파이어’의 아지트, 그 꼭대기 층에 위치한 레이라 플로리스의 집무실.
어두운 금발과 보석처럼 반짝이는 녹색 눈동자. 다소 피로한 기색이 보임에도 그 매력만큼은 도저히 가려지지 않는다.
레이라는 미간을 꾹꾹 누르며 은근히 느껴지는 두통까지도 함께 구겨 넣었다.
최근 그녀는 ‘뱀파이어’가 63구역으로 손을 뻗자마자 이때다 싶어 달려든 ‘베이론’놈들 때문에 고민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녀가 대기 중인 여성 수행원에게 말했다.
“커피나 한 잔 줘.”
“네.”
수행인이 커피를 내리는 동안 그녀는 올라온 보고서들을 다시 들여다봤다.
그녀가 보고 있는 보고서들의 내용은 대체로 비슷했다.
‘베이론’의 공격과 그로 인한 사망자 목록.
‘베이론’에 의해 발생한 피해 금액 추산.
“그 미치광이들이 제대로 붙어보자는 건 아닌 것 같은데.”
보고서에 주르륵 나열된 숫자를 보던 그녀가 중얼거렸다.
‘베이론’.
‘베이론’은 도시의 말단인 74구역부터 75, 76구역까지 세 개의 슬럼 구역을 지배하는 거대 갱단이었다.
단순히 손에 넣은 구역의 숫자만 보자면 슬럼과 유흥가에 걸친 어느 갱단보다도 크지만, 실제 세력은 오히려 ‘뱀파이어’의 밑이었다.
그들이 지배하는 곳이 너무도 척박했기 때문이다.
안 그래도 최외곽에 위치한 빈민가. 그 중에서도 베이론이 위치한 구역은 특별했다.
그것도 나쁜 쪽으로.
‘뱀파이어’가 자리 잡은 73구역까지와는 달리 ‘베이론’이 자리한 74구역과 75구역, 76구역은 반쯤 황무지나 다름없었다.
애초에 그들이 위치한 곳은 처음에는 도시 내부가 아닌 외부로 규정되어 있었고, 이십여 년 전에야 그곳에도 머무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발견해 뒤늦게 편입됐기 때문이다.
당연히 도시 차원에서 관리도 되지 않았고, 공무원도, 경찰도 거의 없다시피 해 매일 같이 범죄가 쏟아지고 그에 비례해 인구수도 계속해서 적어진다.
그곳은 그야말로 무법지라는 말이 어울리는 곳이었고, 그 무법지를 지배하는 ‘베이론’이야말로 그런 곳을 즐기는 진짜 미치광이들의 모임이었다.
그런 미친놈들이 본격적으로 나섰다면 겨우 이 정도 피해에 그쳤을 리가 없었다.
“커피입니다.”
“아, 고마워.”
수행원이 넘긴 커피의 향을 한번 즐긴 뒤 한 모금 마신다. 그런 와중에도 그녀의 머릿속은 핑핑 돌아갔다.
지난 몇 년 동안 73구역을 비롯한 도시 내부에는 얼씬도 않고 지내던 ‘베이론’놈들이 갑자기 ‘뱀파이어’의 구역에 침범했다. 다만 전면전 수준까진 아니고, 그냥 찔러보는 정도의 느낌.
대체 녀석들이 왜 움직였을까. 또 움직인 놈들의 목적은 무엇인가.
‘뱀파이어’가 63구역에 힘을 쏟는 사이 영역을 빼앗는 게 목적일까?
아니, 그건 아니다.
그쪽으로 생각해봤지만 이제 와서? 라는 생각에 고개를 젓는다.
‘베이론’이 ‘뱀파이어’를 공격할 타이밍은 지금처럼 애매하게 인원이 빠진 상태가 아니더라도 몇 번이나 있었다.
그녀가, 레이라 플로리스가 조직을 계승하고 ‘뱀파이어’라는 이름을 지을 때 일어났던 내전만 몇 번인가.
여자 보스를 인정할 수 없다며 반역을 일으켰던 놈들과 싸울 때 덮쳐들었다면 사분오열된 ‘뱀파이어’는 외부의 힘에 맞서지 못하고 끝내 무너졌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베이론’은 그때도 공격하지 않았다. 그들이 ‘뱀파이어’의 영역을 노리는 건 아니라는 뜻이다.
물론, 생각이 바뀌었을 수도 있지만 그렇게까지 적극적이지 않을 것을 보면 확신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어째서지?
조금만 더 생각해보자. 레이라는 한층 더 깊이 생각에 잠겼다.
‘베이론’은 ‘뱀파이어’가 63구역에 손을 뻗어 힘이 나뉘자 마치 이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달려들었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조금만 생각을 바꿔본다.
뱀파이어의 힘의 일부가 63구역으로 빠졌기 때문이 아니라, 반대로 63구역을 건드렸기 때문이라면?
63구역에 ‘베이론’과 관련된 무언가가 있나?
있다면 그게 뭐지?
어째서 ‘오마르의 망치’가 있던 때는 그들에게 이를 드러내지 않았던 걸까.
수많은 의문들이 그녀의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그 어느 것도 명확한 답을 알 수 없는 의문들.
‘베이론’ 놈들이 워낙에 미친놈들이다 보니 그 사고방식도 감을 잡을 수가 없다.
잠시 그런 의문들을 떠올리던 그녀는 문득 떠오르는 한 가지 생각에 사로잡혔다. 이전에 떠올렸던 의문들의 문제가 아니다. 그보다도…….
“대체 우리가 바깥에 손을 뻗는다는 소식을 어떻게 안 거지?”
“예?”
갑작스런 그녀의 목소리에 수행원이 물었지만 레이라는 대답도 않고 계속해서 생각에 잠겼다.
생각해보면 이상했다.
‘베이론’이 활동하는 74구역부터 76구역까지의 말단 구역은 통신망 같은 기본적인 인프라도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아 외부의 소식을 얻으려면 과거 원시시대처럼 직접 발로 뛰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베이론’은 철저히 그 고립된 구역에서만 활동했다.
과거부터 지금까지 그녀가 받았던 보고서에 ‘베이론’놈들의 외부 이동은 없었고, 만약 있었다고 하면 그녀가 놓쳤을 리가 없다.
74구역을 비롯한 75, 76구역. ‘베이론’이 지배하는 그 세 개 구역과 ‘뱀파이어’가 지배하는 두 개 구역간의 유동인구는 셀 수 있을 정도로 적었고, 그 사이에서 눈에 띄는 ‘베이론’의 미치광이들을 발견하지 못했을 가능성은 없었으니까.
결론적으로 그들은 결코 도시 안쪽을 향해 진입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들은 어떻게 알아낸 걸까.
소거법을 통해 불가능한 것들을 지워간다면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도시 내부에서 알려준 거구나.”
알려준 자가 ‘뱀파이어’ 소속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누군가가 ‘베이론’에게 정보를 넘기며 ‘뱀파이어’의 뒤를 치도록 유도했다.
어떤 이유로, 어떤 방법으로 ‘베이론’을 움직였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렇게 생각하면 모든 게 딱딱 맞아 떨어졌다.
톡, 톡, 톡.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그녀의 손끝이 사무용 책상을 두드렸다. 모호한 것의 꼬리를 잡았을 때 좀 더 집중하기 위한 그녀의 버릇이었다.
“누군가 ‘뱀파이어’가 움직인다는 걸 베이론에게 알렸고, 베이론은 그 누군가의 말을 듣고 움직였다.”
그 이유는? 아마도 ‘뱀파이어’가 63구역에 들어서지 못하게 하기 위해.
어째서? 누군가가 숨기고자 하는 것을 ‘뱀파이어’가 발견할 수도 있기 때문에.
‘뱀파이어’는 슬럼에서 활동하는 거대 갱단치고 무척이나 온건한 편이다. 민간인은 거의 건들지 않고, 같은 갱, 쓰레기들에게만 엄격한 집단.
그렇다면 그들이 숨기고자 하는 것도 범죄와 관련이 있던 게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자 때마침 그녀의 머릿속에 한 얼굴이 떠올랐다.
잿빛 은발과 짙은 청안을 가진 미남자. 그리고 지금 63구역을 정리하고 있는 해결사.
‘애쉬 론모어’.
조사차 몇몇 인원을 63구역으로 보낸 레이라는 그 해결사에 대한 보고를 꾸준히 받고 있었다.
63구역의 경찰들은 건물 바깥을 지키고 혼자 갱단 아지트로 진입해 전부 깨부수고 있다던가.
그 속도로 계속 간다면 곧 63구역의 정리가 끝날 것이라고 하던데, 대단한 남자긴 했다.
며칠 뒤, 그녀는 곧 그 남자가 깨끗하게 정리한 구역에 재빨리 발을 들이기만 하면 됐다. 그럼 자연스럽게 알 수 있겠지.
‘베이론’을 움직인 누군가가 숨기고자 한 것이 무엇인지, 혹은 그저 그녀가 잘못 짐작한 것일 뿐인지.
레이라는 그 누군가가 ‘애쉬 론모어’의 갑작스런 움직임까지 예측했으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 그림판으로 대충 그려본 베이론과 뱀파이어의 접촉 구도입니다.
보시다시피 도시와 이어진 부분은 뱀파이어와 맞닿는 부분밖에 없으며, 그 외 도시의 국경선은 장벽과 ai가 관리하는 감시 카메라가 배치되어 있으므로 무단 진입이 거의 불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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