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사이버펑크 게임 속 칼잡이가 되었다-15화 (15/230)

〈 15화 〉 2. 달의 꽃과 뱀파이어(6)

* * *

“깨끗하네.”

“예. 경찰 측에서 정리를 했다곤 들었는데, 생각보다 더 깔끔합니다.”

구멍이 숭숭 뚫린 테이블. 건물에 멀쩡한 유리창이라곤 없고, 바닥에는 군데군데 깨끗하게 잘려나간 가구들이 굴러다닌다.

아마 저건 그 남자의 솜씨겠지.

레이라는 테이블에 희미하게 남은 핏자국을 스윽 쓸었다.

“일단 좀 더 샅샅이 찾아봐. 뭔가 보이면 곧장 가져오고.”

“예.”

부하가 다시 현장을 뒤지러 나가고, 그녀는 방 안을 둘러보았다.

지금이야 이런 꼴이지만 약 3일 전까지만 해도 이곳은 어느 중소규모 갱단의 아지트, 그 중에서도 보스가 있었던 방이었다.

한 남자가 찾아와 풍비박산을 내버리기 전까지만 해도 말이다.

‘애쉬 론모어’.

그의 이름에 따라다니는 온갖 소문들은 결코 거짓만은 아니었다.

의뢰라던 이번 일의 행보를 보고 받았음에도 ‘오마르의 망치’를 혼자 깨부쉈다는 말은 믿기지 않았지만, 적어도 이 정도 규모의 갱단을 박살낼 정도는 충분히 되는 것 같다.

아마 이곳에서 벌어진 싸움은 일방적인 학살이었겠지.

남은 전투의 흔적들이 그 모든 것을 알려주었다.

잠시 방안을 둘러보며 이곳에서 있었을 싸움을 돌아본 레이라였지만, 그녀는 곧 다른 곳에 집중했다.

그 흔한 책 하나 없이 텅텅 빈 책장들과 컴퓨터 전선까지도 모조리 수거한 듯 이제는 피와 먼지의 흔적밖에 남지 않은 바닥.

아마 이 모든 것을 처리한 이들은 애쉬 론모어를 따라다니던 경찰들일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지금도 한시바삐 그의 뒤처리를 하고 있겠지.

이 건물에서 경찰들이 진작 철수했다는 것을 알았기에 직접 들어와 확인할 수 있었지만, 참고할만한 자료는 단 하나도 남아있지 않았다.

경찰들에 의해 모든 것이 정리된 이곳에서 특별한 무언가를 발견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녀가 이곳에서 이상함을 느끼기엔 충분했다.

병적으로 깔끔히 수거한 책과 서류, 그리고 전자기기 전반.

데이터나 정보 등을 기록할 수 있는 모든 것이 사라졌다. 하다못해 경비실의 CCTV 관제기까지도.

안 그래도 뒤처리할 곳이 많아 바쁠 텐데도 이렇게까지 필사적으로 모든 것을 수거했다.

만약 레이라가 이것을 보고 아무것도 느끼지 못할 수준의 인간이었다면, 그녀는 진작 ‘뱀파이어’의 내전에서 패배해 반역자들의 노리개가 되거나, 길거리에서 몸을 굴리는 창녀가 되어 있었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경찰들이 현장을 정리할 때 이런 식으로 처리하지는 않는다.

아무리 그들 사이에서는 기밀 작전으로 취급되고 있다고 해도 이것은 명백히 이상한 일이었다.

그냥 전자기기 따위를 회수하는 정도였다면 이해했을지도 모른다. 그 정도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책 단 한 권도, 서류 단 한 장도 남기지 않고 병적으로 수거해간 것은 결코 그렇게 넘어갈 수 없다.

경찰들에겐 무언가 숨겨야만 하는 것이 있었고, 그를 위해 건물 내에 존재하는 모든 기록매체를 수거했다.

그런 추론으로 가는 것이 옳았다.

만약 이곳 말고도 수십 개는 될 건물들이 있을 텐데 그 모든 곳이 이곳과 같은 상태다?

그렇다면 그 추론은 확신이 되는 것이다.

그녀는 자신이 다른 건물로 보낸 부하들이 보고하길 기다렸고, 얼마 뒤.

타 갱단의 아지트였던 여러 건물에 도착해 확인한 부하들의 연락이 전해졌다.

­ 이쪽도 마찬가지입니다.

………

­ 예, 이쪽도 그렇습니다.

………

­ 확인 결과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습니다.

………

­ 그쪽과 같습니다. 아무것도 없네요.

“…그래. 수고했어. 적당히 돌아가서 쉬어.”

­ 예, 감사합니다.

뚝. 레이라는 해당 부하의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연락을 끊었다.

전화를 끊은 그녀의 입에서 한 마디가 흘러나왔다.

“역시.”

다른 십여 개의 장소에 부하들을 보내봤는데, 그 모든 곳에 남은 거라곤 부서진 가구들과 총탄 구멍밖에 없단다.

그녀도 급히 온 것이라 인원이 부족했기에 모든 곳을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굳이 다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녀가 확인하지 못한 다른 곳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라는 걸.

그녀는 확신했다. 경찰들은 무언가를 숨기기 위해 ‘애쉬 론모어’의 의뢰에 동참했다.

아니, 어쩌면 그 해결사가 받은 의뢰 자체가 그들의 계획의 일부일 수도 있겠지.

‘뱀파이어’가 63구역에 발을 들이자마자 쏟아졌던 ‘베이론’의 공세.

‘애쉬 론모어’의 갱단 토벌 의뢰와 경찰의 합세.

그리고 그 경찰들이 벌인 현장의 정보 말소까지.

현재의 모든 정황이, 그리고 그녀의 감이 하나의 사실을 가리켰다.

63구역의 공권력, 74구역의 ‘베이론’, 그리고 애쉬 론모어에게 의뢰한 정체모를 의뢰인.

그 모든 것이 한데 얽혀 무언가를 은폐하고 있다.

“…재밌네.”

거기까지 추리가 끝나자 흥미가 돋은 그녀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그려졌다.

그들이 숨기고 있는 게 무엇인진 모르겠지만,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의 규모를 봐선 결코 작은 것은 아니다.

우연히 꼬리를 잡게 된 이것을 잘 캐내면 ‘뱀파이어’가 한 발짝 더 도약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지 않을까?

물론, 그것을 캐내는 일은 아무리 거대 갱단의 보스인 레이라라도 위험할지 몰랐다.

당장 이 사건에 얽혀있는 집단 중 그녀가 짐작하고 있는 것만 셋.

‘베이론’, 63구역의 공권력, 그리고 정체 모를 ‘애쉬 론모어’의 의뢰자.

그 어느 쪽도 함부로 무시할 수 없는 곳들이었고, 심지어 그녀가 모르는 곳이 더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언제나 이런 위험과 기회는 공존한다.

그들이 숨기고자 하는 것이 어떤 물건이든, 정보든 간에 상당한 가치를 갖고 있을 게 확실한 이상 단순한 위험이 아니라 기회가 될 수도 있었다.

“위험을 감수하지 않으면 나아갈 수 없다.”

그녀가 항상 가슴에 품고 있는 한 문장.

일개 개인, 그것도 여성에 불과했던 ‘레이라 플로리스’가 거대 갱단의 보스가 될 수 있게 만들어준 그 문장이 다시 한번 그녀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 예, 보스. 전화 받았습니다.

“지금 그는 어디 있지?”

현재 경찰이 모는 차량을 타고 63구역 유흥가의 중심부를 향하고 있습니다.

“알겠어.”

­ 예, 일단 저는 계속…….

뚝. 부하의 대답을 들은 그녀가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앉아 있던 자리에서 일어나 발걸음을 옮겼다.

그녀는 올라갈 것이다. 무엇이든 끝없이 짓밟고 올라가, 슬럼뿐 아니라 이 도시 전체의 뒷세계를 발밑에 둔 절대자가 되리라.

* * *

“두 번째.”

“…?”

“두 번째라고. 그쪽이 내 즐거운 시간을 방해한 게.”

쪼르르륵. 호박빛 액체를 잔에 따른 애쉬가 상대방의 의문어린 표정에 대답했다.

유흥가의 두 가게를 두고 고민하던 애쉬는 현재 어느 살롱의 룸 하나에 들어와 있었다. 아쉬운 눈으로 그를 붙잡던 여성들에게 작은 돈만을 쥐어준 채.

상대방은 그런 애쉬의 말에 이전과 같이 선선히 사과했다.

“으응, 어쩌다 보니 또 타이밍이 이렇게 됐네. 미안해.”

“…전엔 별 것도 아닌 일이었지만 넘어갔는데, 이번엔 제대로 납득시켜야 할 거야. 만약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면…….”

……그러지 못하면 어떡하지?

뭔가 할 말을 떠올리지 못한 애쉬가 뒷말을 흐렸다.

만약 그렇게 되면 상대방을 처벌해야 했지만, 겨우 이 정도의 일로 상대방을 흠씬 두드려 패주거나 하는 그림이 도저히 그려지질 않았다.

원래도 어두운 느낌이었으나, 조명이 적어 다소 어두운 룸 안에서도 은근히 빛나는 것 같은 금발과 조금은 느슨하게 풀려 있는 비취빛 눈동자.

새하얗고 가느다란 손가락이 잔을 들어 붉은 입술로 가져가는 모습이 그렇게 치명적으로 보일 수가 없다.

여성을 더욱 매력적으로 보이게 만드는 살롱의 조명 덕일까.

일전에도 봤던 그 미모는 미인에게 익숙한 애쉬의 가슴조차 무심코 두근거리게 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털복숭이 사내새끼도 아니고, 저만한 미인에게 이런 사소한 일로 손을 댄다고? 그건 그의 사전에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처음도 아니고 두 번째인 이상 뭔가 있어야 하긴 할 텐데….

잠시 어찌해야 할지 고뇌에 빠진 그였지만 다행히도 상대방, ‘레이라 플로리스’가 그런 애쉬를 고뇌 속에서 건져냈다.

“이번엔 그쪽도 관련된 일 같아서 찾아왔어.”

“내가 관련된 일?”

“정확히는 당신의 의뢰에 관한 얘기.”

“그건 이번 의뢰 얘기인가?”

“응.”

레이라가 그의 물음에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애쉬는 그녀의 말을 들어도 떠오르는 게 없었다.

그녀에게 미리 의뢰의 존재를 알려줬기에 이번 토벌에서도 ‘뱀파이어’와 부딪히지 않았는데, 의뢰와 관련된 일이라니.

이번 의뢰와 ‘뱀파이어’가 얽힐 만한 게 있었던가?

“잘 모르겠는데. 뭔가 있나?”

애쉬가 감을 잡지 못하고 물었다. 기억을 되돌아봐도 생각나는 게 없다.

그에 레이라가 물었다.

“이번 의뢰에서 뭔가 이상한 점. 없었어?”

“이상한 점? 뭐, 딱히 없었던 것 같은데.”

애쉬는 갱들을 정리하고, 경찰들은 그런 그를 뒤따라 다니며 현장을 치웠다. 시체나 피 따위가 썩어가게 내버려둘 수는 없으니 말이다.

애쉬는 돈을 챙기고, 경찰들은 공적을 챙긴다. 그냥 그걸로 끝난 의뢰 아니던가.

“그렇단 말이지.”

“어.”

순수하게 모르겠다는 애쉬의 반응에 레이라의 눈이 가늘어졌다.

살짝 찔러봤는데,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진 않다.

그럼 애쉬 론모어는 이번 일과 직접적인 관계없이 그저 이용당하고 끝난 건가.

저 반응으로 완전히 안심할 수는 없었지만, 그런 느낌이 들었다.

그렇다면 자신도 그를 다른 쪽으로 쓸 수 있을 터였다.

“내 의뢰에 뭐라도 있는 건가?”

애쉬가 잠시 말도 않고 자신을 바라보는 레이라에게 물었다. 그에 레이라는 한 발짝 물러서며 그의 궁금증을 돋웠다.

“들은 게 있긴 한데, 이상한 점이 없다니 아닌 것 같네.”

“일단 말이나 좀 해보지그래.”

“으음….”

레이라가 뜸을 들이며 생각을 정리했다.

애쉬 론모어는 예리한 칼이었다. 잘 휘둘러서 일단 맞추기만 하면 누구에게라도 제법 큰 상처를 입힐 수 있는.

하지만 이번의 경우 사용처는 한정되어 있었다. 당장 증거가 없는 이상 그와 의뢰를 함께 했던 경찰 측, 그리고 그의 의뢰인에게는 날을 향하지 않겠지.

그렇다면 남은 선택지는 하나였다.

애쉬 론모어를 휘둘러 분명 이번 일과 관계가 있을 ‘베이론’을 찔러본다.

그게 가장 옳은 선택이었다.

생각을 정리한 레이라가 입을 열었다.

“‘베이론’이라는 이름은 알지?”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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