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화 〉 2. 달의 꽃과 뱀파이어(7)
* * *
“‘베이론’?”
애쉬가 뜬금없이 튀어나온 이름에 의문을 표했다.
그도 ‘베이론’의 이름은 알았다. 이 슬럼에서도 아주 외곽 쪽에 있어 직접 만나보진 못했지만, 일단 유명한 거대 갱단의 이름이었으니까.
슬럼의 뒷세계에서 일하는 이들 중 몇 안 되는 거대 갱단들의 이름을 모르는 자는 없었고, 그것은 나름 오랫동안 슬럼에서 살아온 애쉬도 마찬가지였다.
“그 놈들이 왜?”
“당신과 같이 일한 경찰들과 ‘베이론’ 사이에 일종의 유착 관계가 있는 것 같아서.”
“그래?”
그래서? 혹은 그게 뭐 어때서?
레이라의 말에 돌아온 애쉬의 물음에는 그런 느낌이 담겨 있었다.
애쉬의 태도는 그랬다.
그들이 범죄 조직과 유착 관계에 있든, 아니든 상관없다. 이미 일은 끝났고 경찰들은 자신을 깍듯이 대했으며 피해를 본 것도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번 의뢰에 있어 ‘베이론’의 흔적은 눈 씻고 봐도 찾을 수 없었다.
그렇기에 이런 애매한 반응이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미리 이런 반응이 돌아올 것이라 예상했던 레이라는 애쉬의 미온적인 반응에도 아랑곳 않고 얘기를 계속했다.
“당신이 정리했다는 갱단들이 있던 곳을 몇 곳 돌아봤는데, 깔끔하더라.”
“그거야 경찰들이 뒤처리를 했으니까.”
평소에도 그들이 하는 것이라곤 그런 것밖에 없는데, 그거라도 잘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 애쉬의 대답에 레이라가 작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당신도 돌아보면 알 거야. 그건 그냥 뒤처리를 한 수준이 아니라는 걸.”
레이라는 다시 한번 잔을 입가로 가져가 목을 축이곤 천천히 자신이 보았던 것들을 설명했다.
“당신도 알다시피 일반적으로 경찰들이 현장 정리를 할 때는 핏자국과 시체를 치우는 정도가 전부야. 하지만 이번엔 아니었지.”
반쯤 폐허가 된 건물과 부서진 채 바닥을 나뒹구는 가구들.
전투의 흔적이 남은 갱단들의 아지트에 남아있던 것이라곤 그것뿐이었다. 그 외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사라진 것이다.
현장 보존이라는 말은 개나 줘버린 듯한 일처리.
아무리 경찰들의 특수 작전으로 취급한다고 해도 그 뒤처리를 이런 식으로는 하지 않는다.
“간단한 서류부터 시작해서 컴퓨터를 비롯한 전자기기, 그리고 심지어는 그 흔한 책 하나도 남기지 않았어. 그래서 내가 당신에게 이상한 점을 느끼지 못했냐고 물었던 거야.”
“이상하긴 한데….”
순간 말하던 애쉬의 머릿속에 어떤 기억이 떠올랐다. 자신이 일부러 살려 보냈던 놈이 끝까지 저항하여 사살했다던 진압대원의 말.
별 것 아니었기에 그냥 넘어간 일이었지만, 불과 며칠 전의 일이었기에 아직까지 기억하고 있었다.
그때 위화감 비슷한 걸 느끼긴 했었지.
잠시 애쉬의 뒷말이 흐려지자 레이라가 자신의 추론을 늘어놓았다.
“경찰들은 뭔가를 숨기고 싶었던 거야. 그게 63구역의 갱단들과 관계가 있었던 거고, 그래서 당신의 의뢰에 참여한 거지.”
“흐음, 그럴 듯하네.”
애쉬가 레이라의 자신감어린 목소리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추론에 딱히 틀렸다고 생각되는 점은 없다.
애쉬가 느꼈던 위화감. 그것도 그녀의 추론에 설득력을 더했다.
여기까지 듣고도 경찰들의 정보 은폐를 의심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대단한 멍청이일 것이다.
하지만.
“그런데 그게 ‘베이론’이랑은 무슨 상관이지?”
그게 애쉬가 받은 이번 의뢰에 ‘베이론’이 엮여 있다는 것에 대한 증거는 되지 못했다.
정보 은폐에 대한 것은 애쉬 자신이 경찰들에게 직접 물어보면 될 일이었다. 뭐, 대답을 피한다면 깽판이라도 치면 되겠지.
그러나 레이라의 얘기 어디에도 ‘베이론’이 이번 의뢰에 엮여 있다는 흔적은 없었다.
애쉬의 물음에 레이라가 작게 미소 짓고 말했다.
“아마 당신도 알 거야. ‘베이론’이 어떤 놈들인지는.”
‘베이론’은 결코 자신들의 영역 바깥으로 나오는 놈들이 아니다. 놈들은 폐쇄된 자신들의 구역에서만 움직이는 걸 좋아했고, 아주 가끔 물자를 구매하러 올 때나 얼굴을 비쳤지, 도시 내부와의 교류는 사실상 없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베이론’이 결성된 지난 십여 년 간 그래왔고 앞으로고 그럴 것만 같았다.
이번에 그녀의 ‘뱀파이어’가 63구역에 손을 뻗기 전까진 말이다.
“기억하지? 우리도 63구역 땅따먹기에 끼어들었었다는 걸.”
“어.”
그녀가 63구역을 ‘뱀파이어’에게 넘겨달라며 찾아온 것은 얼마 지나지도 않은 일인데 벌써 잊었을 리가 없다.
애쉬의 대답을 들은 레이라가 당시 ‘뱀파이어’와 ‘베이론’ 사이에 있었던 일들을 얘기했다.
“그때 ‘뱀파이어’는 ‘베이론’에게 공격받고 있었어.”
“…그 놈들이 바깥으로 나왔다고?”
“응. 나도 처음엔 당신이랑 같은 반응이었지.”
‘뱀파이어’는 63구역을 집어삼키기 위해 움직이던 중, 갑작스런 ‘베이론’의 공격을 받았다.
정말 그 누구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십여 년 동안 한 번도 바깥으로 나온 적이 없는 ‘베이론’이 움직인 것이다.
계획에 전혀 없던 변수는 그녀의 마음을 조급하게 만들었고, 결국 레이라가 애쉬를 직접 찾아가도록 만들었다.
총력전을 펼쳐 63구역을 최대한 빨리 정리하고 최소한의 관리 인원만을 남겨둔 뒤 후방의 ‘베이론’에게 집중하기 위해.
하지만 때마침 애쉬에게는 63구역의 갱단들을 정리해달라는 의뢰가 있었고, ‘뱀파이어’는 레이라의 결정 덕분에 그와의 충돌을 피하게 된 것이다.
만약 레이라가 애쉬와의 만남을 선택하지 않고 계속 일을 벌였다면 63구역에 있던 ‘뱀파이어’의 갱들은 경찰과 애쉬에게 복구할 수 없을 정도로 커다란 피해를 입었을지 모른다.
그럼 63구역에서 인원들이 복귀하자 멈춘 ‘베이론’의 공격이 끊이지 않았을지도 모르고.
잘못하면 ‘뱀파이어’의 존망을 걸어야 했을 수도 있던 것을 그녀의 결정 한번으로 회피한 것이다.
거기에 있어 레이라는 아직도 애쉬에게 고마운 마음을 갖고 있었다.
만약 그가 의뢰의 존재에 대해 가르쳐주지 않았더라면 정말로 위험할 수도 있었으니까.
“우연찮게도 우리가 63구역으로 인원을 빼자마자 녀석들이 싸움을 걸어왔어.”
사실 있을 수 있기야 한 일이었다. 정보를 어떻게 얻었든 간에 타 세력의 병력이 빠진 순간, 적이 가장 약한 순간을 노리는 것은 병법의 기본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녀가 ‘베이론’과 63구역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의 연결을 느낀 부분은 따로 있었다.
“그런데 당신한테 의뢰 얘기를 듣고 인원을 빼니까 곧장 공격을 멈추더라고.”
“…….”
“신기하지 않아? 기존에는 계획도 없던 철수인데, 그걸 바로 알아채고 빠졌다는 게.”
자신들은 한데 모여 이동했기에 '뱀파이어' 내부 인원의 소행은 아니다. 그럴 시간 자체가 없었을 테니까.
그녀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것이었다. '베이론'에 '뱀파이어'의 철수 소식을 알린 것은 63구역에 있는 누군가라는 것.
말하며 작게 웃은 레이라가 애쉬를 향해 잔을 들었다. 그에 맞춰 애쉬도 짠, 하고 자신의 잔을 부딪쳐 주었다.
그리고 잔을 입가로 가져가며 생각했다.
만약 저 모든 말이 사실이라면 그녀가 ‘베이론’과 경찰들의 움직임에 대한 의심을 갖는 것도 이상치 않았다.
‘뱀파이어’가 63구역으로 움직이자마자 공격해 들어온 ‘베이론’.
그리고 그들은 ‘뱀파이어’가 갑작스레 철수했음에도 그것을 바로 알았다는 듯 자신들도 공세를 멈추고 빠져나갔다.
그 상황을 봤을 때 63구역에 있는 누군가가 ‘베이론’을 고의적으로 움직였다고밖에 말할 수 없었다.
모든 것이 우연이라기에는 너무도 딱딱 맞아 떨어졌으니까.
“그런 ‘베이론’의 움직임과 경찰들의 수상할 정도로 철저한 정보 은폐. 이쯤 되면 의심하는 게 당연한 일 아닐까?”
“…….”
애쉬도 이번에는 여타 의심의 말을 꺼내지 않았다. 그녀의 얘기를 모두 들어본 결과 그녀가 가진 의심과 추론은 무척이나 타당한 것이었다.
애쉬도 그것을 인정했다.
“그래, 그쪽 말대로 의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네.”
그리고 곧장 물었다.
“그래서, 나한테 바라는 게 뭐지?”
레이라 플로리스. ‘뱀파이어’의 보스인 그녀가 자신을 직접 찾아와 이렇게 모든 상황을 알려주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분명 그에게 바라는 것이 있었기에 이렇게 찾아온 것일 테다.
그녀만한 거물이 특별한 이유 없이 그저 정보만을 넘겨주기 위해 직접 발걸음 했을 리가 없으니까.
애쉬의 물음에 레이라는 그녀가 애쉬를 찾아온 진짜 이유를 밝혔다.
“저번에 그랬지, 의뢰하고 싶은 게 있으면 찔러나 보라고.”
"그래."
그래, 지난 번 만남의 마지막. 그는 그런 말을 했었다. 애쉬도 그것을 기억했다.
"당신에게 의뢰하고 싶은 게 있어서 찾아왔어."
“그건 당연히 이번 일에 관한 의뢰겠지?”
“응.”
레이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말을 계속했다.
그녀가 의뢰하고 싶은 건 이번 일에 얽혀 있을 것이라 확신하고 있는 곳 중 하나.
“‘베이론’의 수뇌부와 63구역에서 벌어진 일들의 연결 관계를 알아봐 줬으면 해.”
‘베이론’. 그 중에서도 수뇌부에 대한 조사 의뢰였다.
그런 그녀의 의뢰 내용을 들은 애쉬는 잠시 고민했다.
“흐음….”
애쉬의 사무소에서 취급하는 의뢰는 대체로 무력을 사용한 일이었으나, 가끔 조사나 특정 물건을 회수하는 의뢰도 있었다.
그리고 그런 그의 의뢰 완수율은 무려 100%.
일단 받아들인 의뢰는 단 하나도 놓치지 않고 모조리 완벽하게 해결했다. 괜히 그의 이름이 유명한 게 아닌 것이다.
하지만 이 의뢰는 그런 일반적인 의뢰들과는 결이 달랐다.
‘베이론’은 애쉬도 얘기를 들어봤을 정도로 미친놈들이 가득한 무법자들의 조직이다.
그 수뇌부에 대한 조사라면 분명 그들과의 충돌을 피할 수는 없겠지.
‘베이론’만한 거대 갱단을 상대로 하는 의뢰를 받는 것은 그도 처음이었고, 그에 따른 곤란함이 있을 수밖에 없다.
물론, ‘베이론’과의 충돌 따위가 두려운 건 아니었다. 그가 고민하는 것은 의뢰에 따른 의뢰금이었다.
여태껏 그가 받아본 적 없는 초대규모의 의뢰. 자칫 잘못하면 그와 ‘베이론’의 전면전이 될 수도 있을 만큼 의뢰금 또한 커지는 게 당연했는데, 어느 정도로 받는 것이 적당할 것인가.
이 의뢰는 겨우 100만 단위의 크레딧으로는 수지가 맞지 않는 의뢰였다.
거대 갱단, 심지어 레이라의 예상이 맞다면 63구역의 공권력까지 적대 상태도 돌아설 수 있는 일.
의뢰금을 받는다면 아무리 못해도 1,000만 크레딧 이상. 과거 그가 있었던 지구의 원화로 따지면 무려 200억이 넘는 금액을 잡아야 하는 것이다.
그도 레이라의 얘기를 들으며 생각난 것이 있었기에 의뢰를 받을 의향은 있었으나, 상대방이 그만한 의뢰금을 받아들일지가 문제였다.
그렇다고 애매하고 깎는 것은 또 돈 이전에 프로의 자존심이 문제였고.
그래서 고민하던 애쉬는 그녀에게 금액을 제시하기 전 먼저 물었다. 그리고 돌아온 대답에 잠시 말을 잃었다.
“의뢰 대가는?”
“글쎄. 내 몸?”
“…뭐?”
레이라가 미소 지으며 테이블에 턱을 괴고는 은근한 눈길로 그를 바라봤다.
술기운이 올라서 그런지, 뺨이 발갛게 상기된 그녀의 얼굴이 자신을 바라보자 애쉬는 괜히 그녀의 붉은 입술이 강하게 의식되는 것을 느꼈다.
흔치 않게 당황한 애쉬에게 레이라가 물었다.
“내 몸 정도면 대단한 값어치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어때?”
“…….”
매혹적으로 다가오는 목소리. 애쉬는 잠시 홀릴 뻔 했으나 이내 그것을 떨쳐냈다.
그녀는 분명 미인이었다. 그것도 애쉬가 직접 본 이들 중에는 비교 상대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대단한 미녀.
처음 그녀를 봤을 때, 그도 잠시 그 미모에 빠져있지 않았던가.
그녀가 만약 직업여성이었다면 그녀를 안기 위해 몇 십만 크레딧 정도는 지불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마저도. ‘뱀파이어’라는 거대 갱단의 보스인 그녀의 사회적 위치를 생각하더라도 대가로는 부족했다.
애쉬는 잠시 흔들리던 마음에 애써 냉정을 지키며 말했다.
“1,000만 크레딧. 네 몸에 그 이상의 가치가 있나?”
“흐응…. 비싸네. 확실히 나라도 그 정도는 무리야.”
레이라가 애쉬의 말에 솔직히 답했다. 1,000만 크레딧이라는 돈은 아무리 자기애가 넘쳐나는 그녀라지만 함부로 논하기 힘든 거금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뒤이어 말했다.
“확실히 1,000만까지는 무리일지 모르겠지만,평생 타인의 손이 타지 않은 순결한 몸인데 못해도 몇 백만 정도는 충분하지 않겠어?”
* * *